[2003년] 아동문학가 윤석중(尹石重) 사망
1911.5.25 ~ 2003.12.9
호는 석동(石童)이다. 1911년 5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나 양정고보를 거쳐 1941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을 졸업하였다. 13세 때인 1924년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동요 〈봄〉을 발표하면서 아동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1932년 첫 동시집 《윤석중 동요집》을 출간한 뒤, 같은 해 방정환(方定煥)의 뒤를 이어 잡지 《어린이》 주간을 맡았다. 이후 《소년중앙》(1934), 《소년》(1936), 《주간 소학생》 주간(1945)을 거쳐 1956년 어린이들을 위한 모임인 새싹회를 창립하였다.
이듬해 소파상, 1961년 장한 어머니상, 1973년 새싹문학상을 제정하였고,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 분과위원장(1967), 《새싹문학》 주간(1977),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78),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1979) 등을 지냈다.
생활 주변의 친숙한 대상을 소재로 리듬과 운율을 살려 아름답게 표현한 우리말 동시 〈어린이날 노래〉 〈퐁당 퐁당〉 〈고추 먹고 맴맴〉 〈낮에 나온 반달〉 〈기찻길 옆〉 〈날아라 새들아〉 〈빛나는 졸업장〉 등 총 1,200여 편의 동시를 발표하였고, 이 가운데 800여 편이 동요로 만들어졌다.
주요 동시집으로는 《잃어버린 댕기》(1933), 《윤석중 동요선》(1939), 《어깨동무》(1940), 《굴렁쇠》(1946), 《아침까지》(1956), 《날아라 새들아》(1983) 등이 있다. 그 밖에 동화집 《바람과 연》(1966), 《작은 일꾼》(1967), 《열 손가락 이야기》(1977) 등을 출간하였다.
3·1문화상(1961), 문화훈장 국민장(1966), 외솔상(1973), 막사이사이상(1978), 대한민국문학상(1982), 세종문화상(1983), 대한민국예술원상(1989), 인촌상(1992)을 받았고, 2003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naver
[1994년] 김영삼 대통령, 폴란드 바웬사 대통령과 정상회담
폴란드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한국과는 외교관계 없이 약간의 무역거래만 하다가 1989년 4월에 주(駐)바르샤바 무역관과 5월에 주(駐)서울 무역사무소가 교환·개설되었고, 11월 1일 정식으로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1989년 투자보장협정·무역협정, 1991년 이중과세방지협정·항공협정, 1993년 문화협정·과학기술협력협정, 사증면제협정, 1997년 외무부간 협력의정서, 1998년 표준화 협력 양해각서·운전면허 상호인정 및 교환협정, 1999년 세관협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1994년 12월 폴란드 대통령 레흐 바웬사, 1999년 총리 예지 부제크가 방한하였다. 한국에서는 1996년 국무총리 이수성, 1998년 국무총리 김종필 등이 폴란드를 방문하였다. /naver
[1992년] 찰스· 다이애나 별거 발표
← 고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
1992년 오늘, 영국의 메이저 총리는 영국 하원에서 찰스 왕세자(Charles of Wales, Prince)와 다이애나(Diana, Spencer) 왕세자비가 별거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한다.
1981년 7월 29일,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지 11년 만에 별거를 하게 된 찰스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별거를 시작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별거 뒤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와 애정 없이 결혼했다고 고백했고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TV 인터뷰에서 승마교사와의 혼외 관계를 시인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결국 1996년 8월에 이혼했고 다이애나는 일년 뒤 프랑스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YTN
[1992년] 미군 해병대, 유엔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소말리아에 첫 상륙
기아에 허덕이는 소말리아에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투입됐다. 1991년 1월 바레 독재정권이 무너진 후 시작된 내전 속에서 지금까지 35만명이 기아와 질병, 전쟁으로 죽어갔고 2백만명이 아사직전에 놓여있었다. 유엔 안보리가 12월초 소말리아에 대한 병력파견을 만장일치로 결의한 데 이어 12월 9일 미해병대가 수도 모가디슈에 상륙하면서 `희망회복` 작전이 시작됐다.
다국적군의 주임무는 구호물자의 안전한 수송, 구호반원 및 민간인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로, 인도적 차원에서의 군사개입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군사개입과 구별됐다. /조선
[1991년] 한국, 국제노동기구(ILO)에 151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는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 및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설치한 국제연합의 전문기구이다. 1919년 베르사유조약 제13편(노동편)을 근거로 창설되었다. 1948년부터 제29차 총회에서 채택된 국제노동헌장에 입각하여 운영되고 있다. 이에 따라 UN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처음으로 국제연합의 전문기구로 시작하였다. 1969년 그 동안의 폭넓은 활동이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다른 국제기구는 대부분 정부가 회원국의 대표로 있지만 사용자·노동자·정부 대표가 이사회에 속해 있다.
2004년 현재 177개 국이 가입하였으며, 한국은 1991년 12월 152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1996년부터 3년 임기의 이사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naver
[1991년] 서울방송(SBS) TV 개국
← 서울방송(SBS) TV 개국 기념식
새민방 서울방송(SBS)이 1991년 12월 9일 오전10시 첫 전파를 발사, 11년만에 TV 3국시대가 열렸다. 채널 6,50㎾의 출력으로 서울 경기와 충청, 강원 일부지역을 시청권으로 하는 SBS TV는 개국특집 첫 프로그램으로 `탄생 SBS TV` 라는 10시간짜리 기획물을 방송했다.
개국에 앞서 SBS는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서울방송 사옥 1층 로비에서 최창윤 공보처장관, 송언종 체신부장관, 이민섭 국회문공위원장, 고병익 방송위원장, 서기원 KBS 사장, 최창봉 MBC 사장, 존 아고글리아 미국 NBC 제작담당사장, 사사키요시오 일본 NTV 사장 등 국내외 방송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국테이프 커팅행사를 가졌다. 윤세영 SBS사장은 오전10시 TV전파 발사버튼을 누른 후 개국인사에서 "서울방송의 등장으로 공영방송 체제는 종언을 고하고, 경쟁을 통한 방송발전시대가 열렸다"며 "시청자의 채널선택권을 존중, 맞대응을 지양하고 건강한 방송을 추구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서울방송은 1990년 7월 민방도입 방송법 통과, 10월 민방지배주주선정, 11월 서울방송 창립주총, 1991년 3월 라디오개국. 그리고 이날 TV 개국순(順)으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서울방송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짧은 기간인 1년 1개월만에 첫 전파를 발사했다./조선
[1990년]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당선
1980년 7월 자유노조를 이끌어온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레흐 바웬사(Wałesa, Lech, 1943~ )는 1990년 4월 10일 보이체흐 야루젤스키 현 대통령을 사임하게 하고 자신이 대통령직을 맡을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폴란드 관영 통신 PAP통신이 전했다.
정치상황의 급변과 경제 시장의 악화 등을 이유로 구세대인 보이체흐 야루젤스키대통령을 조기 퇴진시키는 한편, 바웬사와 마찬가지로 솔리다르노시지(연대노조) 출신으로 수상에 취임하여 먼저 정치 일선에 나선 마조비에츠키에 대하여 대통령 경선에 참여하지 말라는 압력을 행사해 왔으며 (11월 25일의) 1차투표에서 그는 탈락하고 말았다. 1990년 12월9일 실시된 폴란드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도전자 니슬라프 티민스키의 약점과 한계를 적절하게 공략하여 압승을 거두고 레흐 바웬사는 대통령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로서 1980년 7월의 육류공급 파동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민주화 투쟁은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과거에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국들의 내정간섭과 침략을 우려하고 자국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권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찾게 된 것이다.
폴란드의 민주국가로의 전환을 방해하고 압력을 행사하던 소련이 이제는 그것을 받아드리고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Google
[1981년] 소련 사하로프 박사 18일 만에 단식 중단
← 사하로프
소련 반체제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Sakharov, Andrei Dimitrievich, 1921~1989) 박사가 1981년 12월9일 유배지 고리키에서 벌이던 18일간의 단식투쟁을 중단했다. 사하로프는 소련 정부가 며느리의 미국행을 허가하지 않자, 자신의 인권활동 때문이라며 11월22일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했었다.
197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소련 내 인권투쟁의 상징적 인물이던 사하로프의 단식은 세계적 핫뉴스였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최연소(32세) 정회원, 최고 영웅들에게만 수여하는 스탈린상·레닌상 수상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그가 ‘반(反)체제’로 돌아선 것은 핵무기의 윤리성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미소 긴장완화와 협력을 촉구하면서도 소련의 민주화를 선행요건으로 주장한 그를 크렘린은 ‘반체제학자’ ‘인민의 적’으로 비난했다.
소련 인권위원회 발족(1970년), 사형제 철폐와 정치범 사면 요구(1971년), 소련 민주화를 배제한 동서데탕트의 무용론(1973년) 등 인권을 위한 그의 발언이 계속될 때마다 크렘린은 강제추방으로 대응했고, 사하로프는 5번의 단식으로 항거했다. 2001년 러시아의 여론조사에서 사하로프는 ‘20세기 러시아인’ 가운데 레닌·스탈린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조선
[1968년] 이승복군 무장공비에 의해 피살
← 이승복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승복어린이의 시신 사진
1968년 12월 9일, 울진 삼척지구에 투입된 무장공비에 의해 9살난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어요” 를 외치다 입이 찢겨진 채 무참히 살해됐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이튿날 10일, 이를 특종 보도함으로써 이슈화됐다.
그 내용인 즉, 9일 오후 6시경 식량 조달 차 무장공비가 이군의 집에 들이닥쳤고 그중 한 무장공비가 “야, 너는 북한이 좋니? 남한이 좋니?” 하고 묻자 이군이 서슴없이 “우리는 북한이 싫어요. 공산당은 싫어요”라고 대답, 이에 공비가 이군의 입속으로 칼을 들이대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후, 일명 ‘이승복 사건’ 은 그의 용기있는 죽음을 기리며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렸고 그의 고향인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에는 이승복기념관이 건립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진위를 둘러싸고 30여년에 걸쳐 안티조선 세력과 조선일보사간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2002년 9월 3일, 이 끝없는 논쟁에 종지부가 찍혔다. 무장공비에 의한 이승복군의 용기 있는 죽음이 역사적 사실이며, 이를 특종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는 소설이나 작문이 아니라 ‘사실 보도’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온 것이다. 조선일보사 내 자료실에서 발견된 당시 현장 사진 15컷과 승복군의 형 학관씨와 주민들의 증언이 큰 증거가 됐다.
법원은 조선일보의 당시 보도에 대해 1998년 ‘오보(誤報)전시회’와 ‘미디어오늘’ 등 일부 언론을 통해 “기자가 현장에도 가지 않고 작성한 소설”이라는 허위 사실을 유포, 조선일보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관련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조선
[1948년] 제3차 유엔총회에서 제노사이드협약 채택
제노사이드조약(Genoside Treaty)이란 집단살해범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조약을 말한다.
제노사이드란 특정의 민족이나 집단의 절멸을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살해하거나 생활조건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며, 집단살해 또는 단체적 살해로 번역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나치스 독일과 일본에 의한 전쟁범죄인 ‘인도에 관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에 대한 비판으로서 국제연합이 1948년 12월 제3차 총회에서 채택, 51년 발효시킨 조약이다.
이 조약은 국민·인종·민족·종교 등의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를 국제범죄로 규정하였다. 또한 이 조약에 의하면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① 집단의 구성원을 살해하는 일, ② 육체적·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일, ③ 육체적 파괴를 가져올 생활조건을 과하는 일, ④ 출생을 방해하는 조치를 취하는 일, ⑤ 어린이를 다른 집단으로 강제이송하는 일 등의 집단살해를 행한 자는 전시·평시를 불문하고, 또 통치자·공무원·사인(私人)의 구별없이 처벌된다. 그리고 이를 위한 공동모의에 참가한 자·교사자·공범자도 함께 처벌된다. 심리(審理)·처벌은 각국이 자국의 법원을 통하여 실시한다. /naver
[1941년] 임시정부, 태평양전쟁 발발 하루 만에 대일 선전포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개전 하루 만에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1951년 9월, 48개국 연합국과 일본간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이 선전포고를 근거로 “우리도 연합국 일원으로 조인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만큼 임시정부 26년사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인 참여는 일본의 반대로 무산됐다.
선전포고는 광복군이라는 무장병력을 갖췄기에 가능했다. 1940년 9월 17일 창설된 광복군은 출범 당시 부대원이 30여명에 불과했지만, 조선의용대 일부 세력과 중국 국민당의 군사원조를 받아 체계를 갖춰갔다. 1943년 8월 13일에는 인도·버마 전선에서 9명의 광복군 공작대가 연합군 일원으로 활약했고, 전쟁 막바지인 1945년 5월부터는 미국 전략정보기구(OSS)와 합작해 유격전 특수훈련을 받으며 한반도 침투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광복군이 조국해방전선에 뛰어들 기회를 날려버렸다. 김구 주석은 그 실망감을 백범일지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현재 대만정부가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진 대일선전포고 원본에는 포고 일자가 12월 10일이어서 지금까지 9일과 10일 양론이 분분하지만, 광복군동지회는 해마다 12월 9일을 기념하고 있다. 오늘이 그 날이다. /조선
[1917년] 시인 조향(趙鄕) 출생
1917. 12. 9 경남 사천~1985. 7. 12 서울.
외래어를 대담하게 사용했고 설명적 요소를 없앤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를 썼다.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는 그의 동생이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를 중퇴했다.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했다.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했고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4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첫날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했다.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이다.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했다. 저서로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냈다.
[1916년]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평론가 오영진(吳泳鎭) 출생
1916. 12. 9 평양~1974. 10. 29.
전통적인 소재로 해학과 풍자를 드러낸 희곡을 썼다. 호는 우천(又川).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 윤선(胤善)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8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당시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민중계몽을 위해서는 영화가 좋겠다는 생각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東京] 발성영화제작소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1942년 귀국하여 숭인상업학교에 근무했으며, 안창호·조만식 등 민족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조선인 학도지원병제를 반대했다가 검거되기도 했다. 1945년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에 관계하여 우익민족주의 정치운동을 벌이다가 월남했다. 1950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사무국 차장, 1952년 중앙문화사 사장 및 〈문학예술〉 주간 등을 역임했다. 195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연극·영화·방송계 등을 시찰했으며, 이어 국제 펜클럽 회원, 한국영화문화협회 이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국제연극인협회(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e) 한국본부 부위원장, 시네마펜클럽 회장, 시나리오 작가협회 고문 등과 국제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37년 〈조선일보〉에 평론 〈영화예술론〉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뒤, 1942년 시나리오 〈배뱅이굿〉과 1943년 희곡 〈맹진사댁 경사〉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맹진사댁 경사〉는 시나리오 〈배뱅이굿〉·〈한네의 승천〉과 함께 내용상 3부작을 이루며, 봉건적 결혼제도의 모순과 양반의 허욕과 우매함을 풍자하고 있다. 1949년에 발표한 희곡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사회극이며, 〈정직한 사기한〉 역시 해방 전후의 혼란을 비판한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에서 보이듯 그는 악이 선을 짓밟고 아첨과 시류에 편승하는 양식없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고발했으며, 〈해녀 뭍에 오르다〉(1967)에도 나타나 있다. 그외에 〈종이 울리는 새벽〉·〈하늘은 나의 지붕〉·〈심청〉 등의 시나리오와 〈허생전〉·〈무희〉 등의 희곡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들의 소재는 전통적 민속과 고전 소설에서 찾았으며 현실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꾸짖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말년에는 반일·반공사상을 내용으로 한 희곡 〈아빠빠를 입었어요〉·〈모자이크 게임〉·〈동천홍〉 등과, 평론 〈영화와 문학에 관한 프라그멘트〉(조선일보, 1939. 3. 2~11)·〈영화와 문학〉(현대문학, 1965. 6) 등이 있다.
[1911년] 임학자·육종학자 현신규(玄信圭) 출생
1911. 12. 9 평남 안주~1986.
휘문고등보통학교·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1936년 일본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임학과를 졸업, 1949년 동 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6년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기수(技手), 1945년 수원농업전문학교 조교수를 지냈으며, 미군정 기간에는 미군정청 임업시험장을 관할했다.1946~8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 교수 및 부설 농과대학 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51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삼림유전학을 연구했다. 학회 및 사회 활동으로는 1954~82년 학술원 회원(조림학), 1963년 농업진흥청장, 1972년 농업과학협회 및 한국육종학회 회장, 1985년 학술원 원로회원을 지냈다. 문화훈장, 학술원공로상, 5·16민족상, 3·1문화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당과학상 등을 받았다. 규수제국대학 농학부 보고서 제17호에 참나무속 및 밤나무속 식물의 유연관계에 대한 논문 외 50여 편의 연구논문을 남겼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 폐쇄
← 우정총국
조선정부는 처음으로 일본 ·영국 ·홍콩 등 외국과 우편물교환협정을 체결하고, 1884년 11월 17일 역사적인 근대적 우편제도의 사무를 개시하였다. 이때 서울의 우정총국과 인천의 분국(분국장 李商在)이 제1차로 개국하였다.
그러나 12월 4일 우정총국 청사의 개업축하연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12월 9일 폐쇄되었으며, 1895년 우체사(郵遞司)가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은 다시 구제(舊制)인 역참에 의한 통신방법이 계속되었다. /naver
[1869년] 독립운동가·목사 이필주(李弼柱) 출생
1869. 12. 9 경기 고양 ~ 1942. 4. 21. 경기 남양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윤영(允永)이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20세에 군대에 들어가 8년간 장교로 근무했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이어 기독교청년회에 들어가 체육교사로 미신 타파, 계급차별 배격, 자립정신 고취 등 신생활 운동을 전개했다. 그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왕십리교회·정동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정동교회의 주임목사로 있을 때인 1919년 2월 26일 해주교회의 목사 최성모(崔聖模)로부터 독립운동을 하자는 권유를 받고, 다음날 이승훈(李昇薰)·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오화영(吳華英) 등의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독립선언서 발표와 청원서 발송에 대한 말을 듣고 찬성했다. 2월 28일 밤 손병희(孫秉熙)의 집에 가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미아리·청파동·용두동·신촌 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교회 부설로 유치원·소학교·부녀자야학 등을 설치해 운영했다. 노년에는 수원 남양교회를 맡아보면서 신사참배 강요를 거절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868년] 독일의 물리화학자 하버(Haber, Fritz) 출생
1868. 12. 9 프로이센 슐레지엔 브레슬라우 ~ 1934. 1. 29 스위스 바젤.
부유한 화학약품상의 아들로 태어나 김나지움의 고전적인 교육을 받고 베를린·하이델베르크·취리히에서 공부한 후 아버지 사업체에 들어갔지만, 끈기 부족으로 곧 그만두었다. 그는 처음에는 예나대학교에서 유기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전통적인 방법은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25세 때 우연히 카를스루에 고등기술학교에서 저학년을 가르치는 일을 얻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물리화학(본래 그가 독학으로 배운 과목)을 가르쳤으며 연구에 전념했다. 전기화학과 열역학 분야를 집약적으로 연구해 1898년에 물리화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때맞춰 나온 그의 저서 〈공업적인 전기화학의 이론적 기초 Grundriss der technischen Elektrochemie auf theoretischer Grundlage〉(1898)와, 특히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 연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선구적 저서인 〈공업적 기체반응의 열역학 Thermodynamik technischer Gasreaktionen〉(1905)에 의해 더욱 높아졌다. 1900~10년에 급속하게 증가한 질소비료의 수요는 공급을 크게 앞질렀으나, 질소비료의 공급원은 여전히 칠레초석이었다. 이로 인해 질소공급원으로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하는 문제가 전세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질소와 수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1909년까지 암모니아를 대규모로 합성하기 위한 조건을 확립했다. 이 제법은 공업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바덴아닐린-소다회사의 카를 보슈에게 넘겨져 하버-보슈 암모니아법으로 발전했다. 이 공로로 하버는 1918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867년] 메이지 유신
← 메이지, G. Molinari가 그린 초상화(1897)
1867년 12월 9일 일본에서는 왕정복고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바쿠후 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의 친정체제를 수립한 정치·사회적 변혁이 일어났는데, 이를 메이지 유신이라 한다. 바쿠후는 12~19세기에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한 세습적 군사독재자인 쇼군[將軍]의 정부를 말한다. 법적으로 쇼군의 지위는 천황의 통제하에 놓여 있었으나 점차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고 쇼군이 실질적 통치권자로 부상했다. 3번째 바쿠후가 통치했던 도쿠가와 시대의 마지막 30년은 농민 봉기와 사무라이들의 소요, 그리고 미국의 강압에 의한 개항 등 내우외환으로 얼룩졌다. 마침내 1867년 12월 9일 이와쿠라 도모미 등 왕정복고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도쿠가와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천황의 권력을 회복시켰다.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한 일본은 근대 산업국가 수립을 위한 기초를 차곡차곡 다져나갔다./브리태니커
[1864년] 판소리 명창 전도성(全道成) 출생
1864. 12. 9 전북 임실~1940.
근대 5명창에 넣기도 한다. 전라북도 임실군 태인면에서 줄곧 살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인 전명준에게 소리공부를 했으며, 21세 때 진안 산중에 들어가 2년간 독공했고 28세 때 송우룡 문하에서 1년간 연마하여 비로소 판소리의 방향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박만순·김세종·이날치에게 공부했는데, 특히 박만순에게는 3년간이나 시중들며 배웠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소리는 전명준에게 배운 집안의 전통적인 소리를 바탕으로 하여, 박만순의 소리가 접목됨으로써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목은 양성으로 성량은 좀 부족했으나 기교는 매우 뛰어났다. 판소리의 역사와 이론에 매우 밝았는데, 〈조선창극사〉에 그의 구술이 전한다. 어전 명창으로 고종으로부터 참봉 벼슬을 받았으며, 판소리 세속화를 반대하여, 협률사 활동이나 음반취입을 전혀 하지 않았다. 〈흥부가〉·〈심청가〉를 잘 불렀으며, 실전 7가도 대부분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더늠은 〈심청가〉 중 ‘소상팔경가’(‘범피중류’를 잘불렀다고도 함)이다. 신영채·김원술 두 사람의 제자를 두었으나 신영채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김원술은 소리를 중단한 지 오래되어 전도성의 소리는 사실상 전승이 끊어졌다.
[1636년] 병자호란 발발
←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도
1636년(인조 14) 12월∼37년 1월에 청(淸)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 ·청나라의 싸움이다.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 ·백금 1만 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 ·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즉,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또한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한편,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 ·대신 ·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즉, 청 태종은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태종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이때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인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신하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태종은 귀국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는데,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국서에 접한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청태종은 그해 11월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결국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청태종은 명나라가 해로(海路)로 조선을 지원을 못하게 하기 위해 별군(別軍)으로 랴오허[遼河] 방면을 지키게 하고, 12월 2일에 만주족·몽골족·한인(漢人)으로 이루어진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때 청은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問罪)하는 것이 침략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선봉인 마부태(馬夫太)는 이 길을 피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선양[瀋陽]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조선 조정은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하여 청군이 침입해서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서둘렀다. 14일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묘사(廟社)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로 향하게 하고,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안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副使)로 정하여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을 배호하여 강화로 향하게 했다. 또한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강화를 방비하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정했다. 그날 밤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良鐵坪:마포대안으로 추정)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최명길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다시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밤늦게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산성을 떠나서 강화로 향했으나 산길이 얼어 미끄러웠으므로 산성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어영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에게 성 안의 군병 1만 3,000여 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도원수·부원수 및 각 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이때 성 안에는 군량이 도합 2만 3,800여 석이 있었는데, 이 분량은 군병과 백관을 합하여 1만 4,000여 명이 있었으므로 약 50일분에 해당하는 양식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성 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 안의 상태가 비참해져감에 따라, 각지에서 오고 있는 원병이 산성의 포위망을 배후로부터 끊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도원수·부원수, 감사(監使)·병사(兵使)의 군사는 대개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흩어졌다. 그중에서 전라병사 김준룡의 군사가 용인에서 적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역습을 당하여 후퇴했다. 민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거의 무력하거나 진군 도중이었다. 조선이 기대했던 명나라의 원병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적은 수를 보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10여 만 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되자, 성 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청태종은 이듬해 정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서 12만 명의 청군을 결집하고 있었다. 2일에 인조는 청군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여 청의 진영에 보냈는데, 청은 조선이 청과 개전할 준비를 하는 등 맹약을 깨뜨렸으므로 출정한 것이라는 등의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냈다. 그뒤 20일에 청나라는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의 주모자 2~3명을 가두어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이틀 후에는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난해 있었고 안찰사 김경징과 유수 장신 등이 방비를 맡고 있었는데, 결국 패전하여 빈궁과 대군 이하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 ·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 ·책인(刪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 ·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 ·정조(正朝) ·동지(冬至) ·천추(千秋:중국 황후 ·황태자의 생일) ·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 ·빈궁(嬪宮)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3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돕게 하여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 ·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 ·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사회 ·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한편, 병자호란의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 조선은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지만,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이것은 소현세자의 거취문제 때문이었다. 즉, 9년간 선양에 머무르는 동안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양국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했다. 1644년 9월에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J. 아담 샬(일명 湯若望)에게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워,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 등을 가지고 왔다. 1645년 2월 18일 서울로 돌아왔으나, 조정은 서인들이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세자의 태도에 부정적이었고, 인조도 세자의 선양에서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또한 세자빈과 관계가 좋지 않던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이 여러 가지로 세자를 모함했다. 세자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急死)하자 세자빈과 여러 대신들이 사인을 규명하고자 했으나,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서둘러 입관을 마쳤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뒤 세자빈은 역모를 꾸몄다 하여 그의 가족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08년] 밀턴(John Milton) 출생
← 밀턴, W. Faithome이 제작한 동판화(1670)
1608년 12월 9일 태어남 / 1674년 11월 8일 죽음
"정열을 가지고 연애를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반쪽을 모른다."
- 존 밀턴
<실락원 Paradise Lost>으로 널리 알려진 밀턴은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영국의 대시인이다. 사상가·정치평론가로도 크게 명성을 떨쳤다.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서도 청교도혁명에 대한 귀중한 해석으로 근대 정치와 종교의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실락원>은 서사시라는 고전문학 형식에 원죄와 구원이라는 종교적 내용을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43세에 실명을 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는데 <실락원>은 그 이후에 씌어진 작품이다. 1649년에는 영국내란으로 스튜어트 왕가를 전복시킨 크롬웰 정부의 외국어 담당 비서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권력을 남용하는 폭군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사회의 권리가 곧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감독제에 반대하는 이유>·<이혼론> 등을 통해 자유와 청교도적 이상을 주장함으로써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에 충실한 <교육론>을 발표하기도 했다./브리태니커
그 밖에
2002년 서울지하철 1시간 연장운행. 국철구간은 제외
2000년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 사임
2000년 나와즈 샤리프 전 파키스탄 총리, 사면으로 풀려나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
1997년 4자회담 1차 본회담 제네바서 개최
1996년 북한을 탈출해 홍콩을 경유 우리나라에 망명을 신청한 김경호씨 일가족 17명이 김포공항 도착
1983년 버마, 두 아웅산테러범에 사형 선고
1982년 소련 두 우주인. 211일간의 우주 체공 기록을 세우고 귀환
1981년 나토 국방상회의, 최초로 공동성명 없이 폐막
1981년 북한군, 중부전선 아군초소에 총격
1981년 미국, 폴란드사태로 전군에 비상경계령
1976년 정부, 미국의 청와대 도청 비난
1975년 대법원, 염재만의 소설 ‘반노’에 무죄판결
1974년 유엔총회, 남북대화 촉진 결의
1971년 파월(派越) 국군 첫 철수부대 부산항에 도착
1964년 한국 최초의 TV일일연속극인 `눈이 나리는데` 매일 저녁 7시 40분에 20분씩 방영.
1963년 UN정치위원회, 한국단독초청안 가결
1961년 콜롬비아, 쿠바와 단교
1961년 탄자니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0년 라오스 퓨마 수상 망명
1957년 서울대 문리대학보 논문 필화 사건
1954년 자유당 12의원 탈당
1954년 공군 첫 제트기 조종훈련 시작
1952년 영남지방 50년 만에 대폭설
1946년 국립대학설립안 반대, 동맹휴학 시작
1945년 아놀드 군정장관 해임. 후임에 러치 소장
1937년 스웨덴의 발명가 달렌 사망. 솔벤틸 발명으로 191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1930년 조선총독부, 국세조사결과 발표. 10월1일 현재 한국인구 2105만 7969명
1905년 프랑스 정교(政敎)분리법 제정
1868년 일본 천황제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