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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풍성한 교제(요일1:1-10)-2021.2.7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교제의 폭이 어느 수준인가가 문제입니다. 엔드류 머레이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그리스도를 통해 무엇을 얻을까에 집중합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말이지요. 내 영이 소생하고 강건하여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장9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구원받을 때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신령한 교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마르틴 부버라는 사람은 자기가 쓴 ‘나와 너’ 책에서 3가지 유형의 인간관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부버는 그 책에서 첫째, ‘그것과 그것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 관계는 인간관계를 물건처럼 서로 이용하다가 가치가 떨어지면 미련없이 버려버리는 관계라고 합니다. 마치 물물 교환의 형태처럼 말입니다. 쌍방간의 인격은 존재하지 않는 거지요.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에요. 그리고 두 번째 유형은 ‘나와 그것과의 관계’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대해도 나는 끝까지 인격적으로 상대방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정상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나 혼자만 잘한다고 인간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다음으로 세 번째 유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너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상호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부버는 아무리 내가 상대를 믿어주고 상대방이 나를 믿어줘도 항상 이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반드시 촉매자가 필요 하는 데 바로 ‘영원자인 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버는 ‘영원자인 너’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인간만 하나님과의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지요.
아무리 거룩한 천사라도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천사는 영은 있으나 육이 없어 하나님이 부리시는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동물은 육은 있으나 영이 없으므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불가능하지요. 교제는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거예요. 인격과 인격이 만나야 교제가 가능해요. 고양이와 강아지가 아무리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교제는 안됩니다. 동물은 인격이 없어요. 몇 마디 훈련된 것으로 움직여줄 뿐입니다. 이른바 동물적인 감각으로 말입니다. 또한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우상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복된 존재입니까?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만 교제하십니다. 교제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사정을 들어주시고 우리의 음성을 들어주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소통이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서로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가능하며 인격적인 교류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수많은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부모자식관계, 형제관계, 부부관계, 친구관계, 사제관계, 노사관계, 교우관계, 여야관계 등 수없이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요. 그러나 모든 관계가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관계만 보더라도 한번 스쳐가는 우연한 관계도 있고, 서로의 필요를 따라 어쩔 수 없이 만나야하는 관계도 있으며, 반드시 필요해서 만나야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관계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의무적인 관계가 있고, 사귀는 관계가 있다는 말이지요.
의무적인 관계는 피차 피곤하고 보이지 않는 벽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귀는 관계는 서로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과 관심을 갖는 관계입니다. 마음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며 인격이 통합니다. 그래서 피곤하지 않고 거리감도 없습니다.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안보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관계라 할지라도 사귐의 관계가 아니라 의무적인 관계로 변질되면 피곤해지고 벽이 생깁니다. 그것은 영적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귐이 없이 종교적인 의무감으로 관계를 맺다보면 신앙생활이 피곤하고 답답하고 큰 장벽에 부딪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1) 교제의 대상(6절)
사람은 교제하는 대상이 정말 중요합니다. 아무나 사귈 수는 없거든요. 그리고 누구와 사귀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지요.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악인들은 악한 자들과의 연합을 꾀하고(욥34:8), 불의한 자들은 불의한 자들과 사귑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사귐을 갖느냐에 따라 인생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좋은 사람과 교제하면 좋은 영향을 받고, 좋지 않는 사람과 교제하면 당연히 좋지 않는 영향을 받습니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과 환경은 중요하다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주변 사람이나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친구를 만나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말씀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거든요. 때문에 성경도 무턱대고 사귀는 것을 경고합니다. 잠언서13장 20절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잠언20장19절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경고하고, 잠언22장24절은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잠언24장21절은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자들은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고린도전서5장10절에서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만일 그런 자들과 사귀려면 아예 세상 밖으로 나가라고 경고하지요. 한마디로 사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말씀이에요. 사귀려면 가려서 사귀라는 말씀이지요. 세상은 반드시 변합니다. 당연히 사람도 변하지요. 끝까지 변치 않으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와 사귀자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자고 부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와 사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황공합니까? 요한계시록3장20절을 보십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하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데이트신청을 하신 거예요. 솔직히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우리 인간에게 먼저 요청하시겠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신 것을 아십니까? 요한복음3장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짝 사랑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거절합니다. 어떤 이는 ‘바쁘다’, ‘피곤하다’, 혹은 ‘지금 자기는 다른 신과 사귀고 있다’, 아니면 ‘자기는 죄가 너무 많다’, ‘지금은 사귈만한 때가 아닌 것 같다’, ‘다음에 사귀자’, ‘자식들 시집장가 보내놓고 나서 사귀자’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사귀는 주도권을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갑질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감히 인간이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아주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거절을 해요. 참 기가 막힌 일이지요. 사귀는 것은 서로에게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반문하시지요(창18:17). 모세를 대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과 같이 모세를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출33:11). 또한, 예루살렘을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아5:16).
주님께서도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셨고, 죽은 나사로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5장15절을 보면,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보통 관계가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니지만 모두가 다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라고 해서 모두다 하나님과 사귐의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저 하나님을 아는 수준에 머무르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갖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귐에 따라 영적인 수준은 천양지차입니다.
(2) 교제의 방법(3절)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귈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귐은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본문1절을 보십시다. 그분에 대해 듣고, 보고, 만져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듣고 보고 만졌다고 교제가 아닙니다. 내가 잘못 볼 수도 있고, 잘못 들을 수도 있으며, 잘못 만져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확실한 교제는 하나님이 내안에 들어오셔서 나타내신 바가 되어야 합니다(2절).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을까요? 절대 안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가까이 하면 어떤 인간도 살수 없어요. 그것은 빛과 어둠이 사귈 수 없는 원리에요. 고린도후서6장14절에서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한마디로 빛과 어두움은 사귈 수 없다는 말씀이에요. 빛과 어둠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빛이 투사되면 어둠은 자동 소멸되거든요. 이유는 묻지 마시고 직접 한번 실험해 보세요. 아주 단순한 원리니까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죄인된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습니다. 의와 불의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한일서4장12절에 보면 ‘하나님을 본 자가 없고’, 디모데전서6장16절을 보면 ‘하나님을 볼 자가 없으며’, 출애굽기33장20절을 보면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잖아요. 그러면 방법은 없는 것인가요?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방법이 딱 한 가지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누구보다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독생자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보고, 믿게 하신 것이지요. 한마디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요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아버지께로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유일하게 아버지를 보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요한복음6장46절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이지요(요1:18). 한마디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우리 가운데 보내신 분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대 사도시요, 대 제사장이시며(히3:1), 새 언약을 이루시는 중보자이십니다(히9:15).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과 교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요한일서5장12절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아들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를 말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생명이신 주님이 내안에서 나타내신 바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이른바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한 바가 된 것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그것을 증거 하시는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로마서8장15절과 16절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입니다. 내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신다는 말이지요.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케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수님과 교제케 하신분이 계시는데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오셔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할 수 없습니다(고전12:3). 또한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믿음의 원리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질서요 역할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질 수 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귄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교제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연륜이나 경륜, 혹은 교회의 직분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성경공부를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3) 교제의 열매(4-10절)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보다 풍성한 교제를 누려야 합니다. 다만 교제의 풍성함은 다른 문제입니다. 보다 풍성하게 교제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거든요. 그러나 교제의 풍성함은 각자의 믿음의 분량만큼 일어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생명 안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의 생명 안에 들어와 있는 자는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만큼 누리는 것입니다. 교제도 마찬가지예요.
보다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만큼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주어진 믿음의 분량을 확대시키고 확장시키는 능력은 각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귀되 깊이 사귀어야 합니다. 그 사귐은 진실한 부부의 사귐같이, 혹은 생명을 나눈 친구의 사귐같이 말입니다. 그 사귐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귐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의 신부이지요. 신부는 오직 자기 신랑과만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만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거예요. 말로나 머리로만 하지 말고 온몸과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그분과만 사귀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귀게 되면 자동적으로 성도끼리 교제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것은 세상적인 교제가 아니에요. 신령한 교제예요. 때문에 지구촌 어디를 가도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와 풍습이 달라도 예수를 믿으면 통하고 가까워집니다. 매우 친밀감이 느껴집니다. 신령한 교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앞자리에 앉은 여자 성도가 테가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 뒤에 있는 분이 보이지를 않더랍니다. 그래서 남자 성도님이 용기를 내어 ‘성도님, 죄송합니다만 강대상에 목사님이 안보여서 그러니 모자 좀 벗어주시면 안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불쾌하게 생각할 줄 알았던 여자 성도가 ‘아닙니다, 사실 저는 이 교회에 온지 6개월이 되었는데 저에게 말을 건 사람은 당신이 최초랍니다’라고 모자를 벗더랍니다. 그만큼 교회 안에서 신령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혹시 우리 교회의 모습 혹은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면 반드시 성도들끼리도 신령한 교제가 나타나야 합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보세요.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행2:44-46). 이것이 바로 진짜 신령한 교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는 신령한 교제요, 신비한 교제입니다. 신령한 교제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나누는 교제입니다. 그런 교제는 간사함이 없고 탐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교제하면 얼마가지 못합니다. 금전으로 사귀면 진실함이 없고 금방 깨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면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천국에 가면 스데반을 죽인 일등공신 바울이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신령한 교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어두움과 거짓말입니다. 어두움과 거짓은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 안에 어두움과 거짓 때문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마음에는 어두움과 거짓이 가득합니다. 마음이 어둡고 생각이 어두우며, 행동이 어둡습니다. 거짓말, 거짓된 생각, 거짓된 행동들이 가득합니다.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솝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사기 항아리와 놋쇠 항아리가 홍수로 인해 냇물로 떠내려갑니다. 그러자 놋쇠 항아리가 사기 항아리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냅니다. “길동무로서 자기 곁에만 붙어 있다면 자기가 지켜주겠노라고”. 그러나 사기 항아리는 놋쇠 항아리에게 “바로 내가 염려하는 것이 그것이라네, 자네가 떨어져 주기만 하면 나는 무사히 하류로 흘러 갈 수 있지만 우리 서로 맞부딪히면 결국 나만 깨지고 말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성도는 죄와 결탁하면 결국 성도가 손해를 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두움에 거하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 결국 우리의 영성은 깨어지고 믿음은 파선하고 큰 손상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 세상에서 우리만 손해를 보게 됩니다. 우리만 상처를 입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면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죄와 사귀면 죄의 열매를 맺듯이 의로우신 하나님과 사귀면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을 닮기 원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살아도 닮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과 교제하면 내안에 계신 예수님을 닮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의와 거룩과 경건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인하여 맺는 열매는 어떤 것일까요? 먼저 빛의 열매입니다.
한마디로 그분의 성품으로 우리 안에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빛은 될 수 없으나 빛의 반사체는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건에 이르게 됩니다. 이른바 경건의 열매입니다. 이른바 거짓을 버리고 정직해집니다(6절). 또한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7절).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면 거룩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의 열매입니다. 또한 회개의 열매입니다(9절).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 되신 주님이 어둠을 몰아내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빛이 비추어도 반응은 다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빛이 비추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요1:5). 한마디로 버림받은 영혼이지요. 정말 불쌍한 영혼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로 작정된 자는 빛이 비추면 자기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자기의 더러운 죄를 시인하게 됩니다. 이른바 통회하고 회개한다는 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 주안에서 그분과 교제하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로 채우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우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가 소멸되면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해집니다(4절). 한마디로 내안에 천국이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열매가 맺혀진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롬14:17). 그러므로 천국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희락이 있게 됩니다. 신령한 기쁨이지요. 곤고한 내 심령에 평화가 찾아오고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평화, 평강, 이것이 바로 주님과 교제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공통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과 사귀게 되면 이런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잠간의 기쁨은 있을 수 있겠지요. 왜냐면 죄도 일시적인 육체적인 짜릿함을 주거든요. 죄도 일시적인 기쁨을 준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교제하면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세상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당신은 누구와 교제하십니까? 아니 무엇과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까? 하나님이십니까? 혹은 세상입니까? 잠간의 즐거움을 위해 영원한 즐거움을 포기하시렵니까? 잠간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기쁨을 포기하시렵니까? 구원받은 성도는 오직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이 땅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영원한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마다 내안에 계시는 주님을 보다 깊이 인식하고, 그분과 보다 더 풍성하게 사귀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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