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윌리엄 윌버포스 – 고유한 교리, 영적인 기쁨, 노예제의 정치학
하원의원이었던 그는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노예제 자체가 대영제국에서 모두 불법이 될 때까지 그들의 폐지를 위해 거의 46년(1787-1833년)을 싸웠다. 21-74세에 이르기까지 의회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지만 노예무역 폐지 운동은 1807년에 법이 통과될 때까지 무려 11번이나 좌절된다.
[1] 그의 생애
① 1759년 8월 24일. 잉글랜드의 헐(Hull)에서 태어남. 그의 부친은 9살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나고 그는 삼촌과 이모인 윌리엄과 해나의 가정에 보내져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② 1780년. 21살. 재미 삼아 고향인 헐에서 하원의원으로 출마. 돈과 연설의 재능으로 당선. 그 이후 평생에 걸쳐 단 한 번도 낙선하지 않는다. 늦은 밤의 파티를 좋아하는 상류 사회의 불신자로 정치를 시작한다.
③ 1784년. 25살. 겨울에 그는 그를 가르친 선생이었던 아이작 밀러의 집을 방문. 그 집에서 필립 도드리지의 『영혼 속에서의 신앙의 발생과 진보』라는 책을 보게 되고, 밀러의 제안에 따라 그 책을 가져다 읽고 “인간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경적 관점에 대한 지적 동의”에 이른다. 그의 신앙은 지적인 것이었다. 1785년 여름 밀러와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고 그때 헬라어 신약성경에 대해 몇 시간 토론을 하게 되고 그의 지적 동의는 “깊은 확신이 되어갔다.”
④ 1785년 12월 7일. 모험을 무릎 쓰고 자신이 흠모하고 존경한 존 뉴턴을 찾아가 보기로 결심.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방문이다. 뉴턴은 윌버포스의 믿음을 격려하였고 공직 생활을 그만 두지 말라고 충고도 한다. 결국 그에게 확고한 마음의 평안이 찾아온다. 그는 하루에 거의 9-10시간 정도 공부로 보내곤 했다. 성경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책이 되었고 그는 많은 구절을 암송했다.
⑤ 1787년 10월 28일. 그의 일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앞에 노예무역의 금지와 풍속(윤리. 예, 결투 같은 것)의 개혁이라는 두 가지 큰 목표를 주셨다. 그는 하나님의 명백한 소명을 깨달았다.
⑥ 1787년 성탄절 직후, 다음 회기 초에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동의안 제출하겠다고 하원에 통보하고 그 뒤로 20년이 흘러서야(20년 동안 거센 반대에 부딪침) 비로소 하원과 상원을 움직여 노예무역 폐지를 법으로 규정한다. 생명의 위협도 받고 친구도 떠나고, 거대한 정치적 압력도 받았다.
⑦ 1797년(37살) 4월 15일 바바라를 만나고 사랑에 빠져 8일 만에 청혼하고 6주 정도 지나 5월 30일에 결혼. 4아들과 2딸을 낳는다.
⑧ 1807년 2월 24일. 의원들의 표결에서 노예무역 폐지에 찬성하게 되고, 3월 25일에 국왕의 재가가 선포된다. 그때로부터 26년 뒤인 1833년에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 싸운다.
⑨ 1833년 7월 26일 노예제 폐지가 결정된다. 그가 눈을 감기 사흘 전이다.
[2] 노예무역과 노예제 자체의 폐지를 위한 싸움에서 극복해야 했던 온갖 어려움
① 노예를 옹호한 적대자들의 비난
② 가족들로 인한 고통
그의 아내로 인한 고통이 있었다. 그는 쾌활했지만 그의 아내 바바라는 종종 우울했고 염세적이었다. 장남 윌리엄은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다닐 때 기독교 신앙에서 멀어져 그를 슬프게 하였다. 그는 비국교도였으나 그의 세 아들은 고교회적인 국교도가 된다. 딸 바바라가 1821년 가울 32살 때 폐결핵으로 죽는다.
③ 건강으로 인한 고통
1822년 통풍으로 고생한다. 1788년, 눈이 너무 나빠져 거의 글씨를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눈이 너무 나빠 거울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옷은 때때로 비뚤어지게 입었다. 궤양성 대장염으로 인한 중증 장애가 있었는데 아편 처방을 하여 눈이 나빠졌다. 폐질환이 있었다. 등뼈가 휘어지는 증상이 심해졌다.
[3] 그의 인내의 뿌리
① 기독교의 “고유한 교리”라고 부른 것에 대한 심오한 성경적 헌신이다. 고유한 교리는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심판,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 이신칭의, 성령에 의한 거듭남, 선행에 힘쓰는 삶 등. 개혁은 교리에서 나왔다. 그의 행동은 교리에 바탕을 둔다.
② 그는 동료들과 함께 했다. 클래펌(Clapham)이 교구 목사 존 벤의 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그와 함께 했다. 그는 “비록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힘을 합치면 자신의 시대를 바꿀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③ 천진난만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이다. 그 기쁨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솟아나오는 것이었고,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에게는 유머 감각이 있었고 쾌활함이 있어서 아이들도 좋아했다. 그는 구슬치기와 술래잡기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놓았다. “그는 찬송가나 시편의 곡조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④ 그는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히는 대신 세상의 모든 선한 것들을 볼 줄 아는 유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고 모두에게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⑤ 그는 굳건한 즐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는 울적한 기분도, 부도덕한 행위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가 말한 것은 무엇이나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것이 되었다. 그는 그의 기쁨으로 모든 것을 지탱했고 다른 사람을 움직였다. 그에게 기쁨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순종과 예배의 행위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정치적 정의를 꾸준히 추구하는데 매우 핵심적인 것이었기에 끊임없이 깨어 있는 자세로 그 기쁨을 얻기 위해 싸웠다. 그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이신칭의의 교리에 의지해 있었다.
⑥ 그의 삶과 교리의 연결 고리는 기도였다. 그는 늘 아침의 첫 시간을 확보해 두고 묵상과 성경 읽기와 기도를 끝내기 전까지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아침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이 누구며 얼마나 유명한 사람들이건 관계없이 그는 그들 모두를 가정 예배에 한 가족으로 참여하도록 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