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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날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중국에서 사상 처음 열린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은 8월 8일이었다. 여덟 팔(八)자와 돈을 많이 번다는 뜻으로 쓰이는 발(發)자가 중국어 발음(바와 파로 발음)이 비슷하다 해서 길일(吉日)이었다.
그런데 중국이 제16회 광저우(廣州) 아시안게임을 왜 11월 12일 개막하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8월 8일처럼 발음이 비슷한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관습으로 볼 때 반드시 이 날짜도 특별한 의미가 있을 터였다. 그 해답은 광저우의 바로 남쪽에 있는 도시 중산(中山)에 가 보니 알 수 있었다.
아시안게임 개막 직전 중산시 구진진(古鎭鎭) 청사에선 아시안게임 설명회가 열렸다. 주최측은 아시아 19개국에서 온 50여명의 외국 기자들에게 "중국 민주화의 선구자인 쑨원(孫文)의 탄생일이 바로 11월 12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아시안게임을 한 달 앞둔 지난 9일 베이징 만리장성 아래에서 채화한 성화를 비행기에 싣고 중산시에서 릴레이를 시작했다. 이에 대해 주최측은 중산이 바로 쑨원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이 신해혁명으로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쑨원이 제창한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정신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삼민주의란 바로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주최측도 기자회견에서 개막식 날짜와 첫 성화 봉송을 통해 중국 민주화를 이끈 쑨원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중국이 민주화 운동을 한 류샤오보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내정간섭'이라며 대대적인 보복을 하고 있다. 노벨평화상위원회가 있는 노르웨이에 각종 보복조치를 취하고, 류샤오보의 수상식 참가를 막는 것은 물론이고, 외교관례인 다른 나라 각국 대사의 수상식 참석까지 막고 있다.
그 위협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나라들은 중국에 동조해 수상식 참석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마치 중국이 민주주의에 대항해 반(反)민주 캠페인을 벌이는 것 같은 모습이다. 중국이 강력한 언론 통제를 실시해,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을 중국인 75%, 약 10억명은 알지도 못하고 있다. 중국은 원로 지식인 23명이 언론출판의 자유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자 상당수를 가택연금하거나 구금했다.
과연 중국이 진정으로 쑨원을 추앙해 아시안게임 개막식 날짜를 맞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중국의 지금 행동은 쑨원 삼민주의의 정반대다. 중산시에서 한 기자가 "중국 민주화에 기여한 류샤오보 박사가 올해의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중산시 대표는 "작은 도시의 공무원이라 그런 문제는 모른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 옆에 있는 인구 13억명의 대국, 세계 2위 경제규모의 대국의 한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