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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 / 이사야 55장 6-11절
찬송 / 446장 · 오 놀라운 구세주
성서 / 시편 139편 1-12절, 요한복음 21장 15-19절
말씀 /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복음 21장 17절)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시편 139편 5절)
눈먼 사람들이 모처럼 동물원에 봄나들이를 갔습니다. 동물원에 있는 많은 동물 중에서도 가장 크다는 코끼리가 정말 궁금했지요. 친절한 사육사는 눈먼 사람들이 코끼리를 한 번씩 직접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세상에 코끼리를 만져보다니, 얼마나 가슴 뛰는 일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본 코끼리는 어땠을까요? 첫 번째 사람이 코끼리는 아주 기다란 뱀 같이 생겼다고 했지요. 두 번째 사람은 그게 아니라며 코끼리는 탄탄한 기둥처럼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사람이 무슨 소리냐며 코끼리는 거대한 벽처럼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눈먼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직접 만져보았다고, 자기가 본 게 맞는다고 우기며 큰 싸움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만큼만, 딱 그만큼만 압니다. 만져본 사람은 만져본 게 다인 줄 알고, 본 사람은 본 게 다인 줄 알고, 들은 사람은 들은 게 다인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 본 것, 그것이 정말 다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흐린 눈과 어두운 귀와 둔한 손으로 경험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지식일 뿐입니다. 예전에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정신이 좀 흐려지셨지요. 그때 원주 집에서 앞산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들은 뭘 하러 예까지 몰려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산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산자락에 바위들이 널려 있는데, 그게 아침 햇살을 받으면 사람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 바위라고 친절하게 잘 설명해드렸지요. 아들 얘기를 듣고 어머니는 아 그렇구나 하고 아셨을까요? 아닙니다. 어머니는 아침이면 앞산으로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칼같이 퇴근하는 수상한 사람들을 매일매일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셨습니다.
우리의 지식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가 해봐서 다 안다고 나대는 것만큼 허망한 어리석음도 없습니다. 가장 큰 지식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지요. 지식은 ‘들음’에서 온다고 했지요. 성서는 ‘듣는 마음’ 그 자체가 지혜라 했습니다. 진정한 지식은 겸손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신앙은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은 나를 믿는 게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이야말로 겸손 그 자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절 다섯째 주일 말씀으로 요한복음 21장 15-19절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소명을 주시는 말씀이지요. 마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는 소명 이야기를 복음서 초반에 두었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부르시는 소명 이야기를 복음서의 맨 마지막에 두었습니다. 요한은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소명 이야기’를 복음서의 맨 마지막에 두었을까요?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새삼스럽게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것일까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깊이 성찰하려 합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때는 어렵고 힘겨운 시기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쫓겨나고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는 고난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 박해와 고난의 때에 어떤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지, 그것이 중요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공관복음서를 통해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경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고, 예수님께서 그물을 던지던 베드로를 찾아가 부르셨고,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좀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고 말합니다.(1:37)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지요.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가 형인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느닷없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른 게 아니라, 요한의 제자였던 동생 안드레에게 이끌려서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왜 형을 예수님께 데려갔을까요? 베드로는 왜 안드레가 무슨 말을 했기에 동생을 따라 예수님께 찾아갔던 걸까요? 그냥, 궁금해서? 아닙니다.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후 베드로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1:41)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안드레를 따라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는 그냥 아무 생각도 아무 고민도 없이 그물을 던지던 그냥 아무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동생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지요. 광야로 나가서 저 예루살렘 성전에 도끼 심판을 선언한 예언자의 제자입니다. 그저 로마 제국이 흘려주는 썩은 고기나 처먹으며 주술과 주색에 빠져 나라를 팔아먹는 헤롯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혁명가의 제자입니다. 베드로는 그 동생이 메시아를 보았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청년이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베드로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는지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이라고 불리던 그를 ‘게바’(아람어) ‘베드로’(그리스어)라고 불러주셨지요. 그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자가 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병자를 고쳐주고 이적을 일으키는 모습을 맨 앞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을 때 얼마나 흥분했을까요?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실 때는 또 얼마나 시원했을까요? 풍랑을 잔잔하게 잠재울 때는 또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겠습니까? 처음에는 안드레의 말을 듣고 진짜 메시아가 나타났을지 모른다고 기대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직접 보고 겪으면서 점점 더 메시아라고 진짜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을 때,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메시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신에 차서 앞장서서 고백할 수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수난당한다고 하실 때도, 뭐 좀 께름칙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장담했지요.(13:37) 이렇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다 안다고, 메시아로 믿는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아는 것, 베드로가 믿는 것은 처음부터 좀, 아니 아주 많이 불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애초부터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처음 보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1:42)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그를 보고 처음 하신 말씀입니다. 시몬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하나며, 아주 흔한 이름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게바’ ‘베드로’ 즉 바위라고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바위처럼 든든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지요. 시몬은 그리 든든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첫 사람입니다. 이 고백은 교회의 고백이 되었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아 그리스도시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았습니다.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지식, 베드로의 믿음은 어땠습니까?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인자가, 그리스도가 마땅히 고난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로막고 바짝 잡아당기며/윽박지르며 항의했습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승리하고 성공해야지 고난받고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아야지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메시아가, 내가 믿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난을 받는다면, 그건을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생각이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나라’ 하셨지요. 베드로의 생각, 그의 믿음은 사탄의 생각이며 악마의 맹신이다, 그 말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은 그랬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이 너는 나를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런 생각으로는, 그런 믿음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니라고 자기는 예수님을 목숨 바쳐 따르겠다고 장담했지만, 정작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생각, 확신과 믿음은 그렇게 새벽닭 울음소리와 함께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5,16,17) 부활하신 예수님께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시자, 실망한 베드로와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 호수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그 갈릴리 호수는 이전의 갈릴리가 아니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갈릴리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우스 바다라고 불리었지요. 갈릴리의 빼앗긴 이름처럼 그들의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티베리우스 바다에서 다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나마 물고기를 잡는 삶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건져 올리지 못했습니다. 참 허망하고 쓸쓸한 아침이었지요.
그런데 그 티베리우스 바다에 다시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예수님은 밤새 허탕을 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말씀대로 따르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본 데자뷔 같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 그때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예수님과 함께 빵과 물고기로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바꾸어 말하면, ‘네가 나를 아느냐’는 물음입니다. 특히 요한 계의 문서에서 ‘아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진짜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네가 나를 아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이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확실히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했지요. 이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그 누구보다 가장 사랑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이란 한낱 계집종 앞에서도 꼬리를 내려야 하는 허망한 믿음이라는 걸 알았지요. 더구나 자신의 그 확신이 예수님을 가로막고 훼방하는 독선이요 집착이었다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당연히 이 사람들보다 더,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꽁한 마음으로 따지시는 건 아닐 텐데, 예수님은 굳이 세 번이나 똑같이 물으셨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계속 물어오시는데, 세 번째 마지막 대답은 좀 한번 시원하게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크게 고백했으면 어땠을까요? 베드로는 마지막까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참 주저주저하는 듯 볼품없는 대답입니다. 정말 믿음이 약하기 짝이 없는 대답 아닙니까? 그러나, 그러나 겸손한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의 양 떼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나를 따르라’고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엊그제 하늘궁 허경영을 고발하는 TV 프로그램을 좀 보았습니다. 자신이 神人이라는 이 황당무계한 자가 수많은 부녀자를 성추행하고 폭행한 혐의로 고발당했지요. 무슨 병도 다 고쳐준다면서 추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자들이 허경영을 고발한 한 신도의 집에 찾아갔더니, 집안에 온통 병 우유로 가득했습니다. 그 우유병마다 빨간 글씨로 허경영이라고 적혀 있었지요. 그 사람들 얘기가 허경영은 거짓 사기꾼에 성추행 폭행범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유는 진짜라네요. 그 우유는 만병통치약이 되고 있어서, 한마디로 엄청난 값을 지닌 보물이 되고 있어서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유병에 아무나 허경영이라고 쓰면 약이 되는 게 아니라, 허경영에게 2백만 원을 내고 축도를 받아서 쓴 것이기 때문에 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그렇게 확실히 믿는다네요. 이게 뭘까요? 이 어처구니없는 믿음, 이건 믿음이 아니지요. 아귀 같은 집착이지요. 맹목의 맹신입니다. 뭘 그렇게 버리지 못하고 집요하게 붙잡고 매달리는 걸까요? 자기 생각, 자기 욕심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욕심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그저 자신감도 없고 확신도 부족한 애매한 주저하는 사람의 고백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고백도 아닙니다. 이 고백은, 이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뼈저리게 아는, 가장 성숙한 신앙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내 신념을 시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내가 안다고 나대는 오만한 인간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아시기에 하나님을 따르려는 겸손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찍이 시편 시인은 자신이 깨달아 알게 된 신비하고 놀라운 지식을 노래했습니다. 무엇일까요? 시인이 마침내 깨달아 알게 된 놀랍고 신비로운 지식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시인은 무엇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 무슨 해괴한 무당처럼 하늘과 우주의 신비를 해독해 냈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시인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셔서 나를 환히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께서, 내 오장육부와 뼛속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감싸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놀랍고 더 두려운 지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가 이 지식을 측량할 수나 있겠습니까? 내가 어디에 있든지, 심지어 지옥 나락에 떨어져 깜깜한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이 지식보다 더 신비롭고 은혜로운 지식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이 놀라운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나댈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볼품없는 사랑이지만,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요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알면 하나님을 어마나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오장육부에서 우리의 뼈마디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이 놀랍고 신비로운 깨달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놀랍고 신비로운 지식이 우리의 고백이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루 감싸주시고 우리에게 손을 얹어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우리의 찬미입니다. 우리가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 찬미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쳐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