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문(孫文)과 장개석(蔣介石)을 사위로 둔 송가수(宋嘉樹) 가문
남 상 기
최근 경주 최부자집 후손이 경영하는 ‘요석궁 식당’에서 지인들과 식사를 몇차례 하다보니 문득 명문가문 생각이 떠올라 생각나는 되로 써본다. 역사를 읽어보면 세계에 이름을 떨친 명문가문들을 많이 접하게된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문은 300년동안 부와 명성을 유지하면서 르네상스시대를 주도했다.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철강재벌 카네기, 자동차재벌 핸리포드가문등은 대를이어 자선사업을 하고 있고 MS의 빌게이츠, 워런버핏 가문등은 자선재단을 설립하여 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는 명문가문들이다, 루스벨트, 부시, 케네디 가문등은 유명대통령들과 고위정치인들을 배출한 명문 정치가문들이다. 구한말 우리나라도 명문가문들이 있었다. 호남의 김성수가문은 호남의 갑부인 부친 김경중의 후광으로 김성수는 와세다유학을 하고 돌아와 정치적 혼란기에 보성전문, 고려대학, 경성방직, 동아일보를 세우고 부통령도 역임했다. 독립자금에도 헌금했다. 동생 김인수는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후 형님을 도왔다. 친일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일제하에서 기업을 일으키고 교육사업과 언론사업을 할려면 마지못해 친일도 했을것으로 본다. 공(功)이 과(過)보다 크면 공의 편에 손을 들고 싶다. 경상도의 경주 최부자가문은 12대걸쳐 300년간 만석군을 유지하면서 ‘6훈(六訓)’이란 엄한가훈을 지키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독립자금을 대고 육영사업도 했다. 세종의 형 양녕대군 16대손인 건국대통령 이승만가문, 4대 대통령을 지낸 해위 윤보선가문과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가문도 이름난 명문가문들이다.
중국 근대사에서는 증국번(曾國蕃.1811-1872)가문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문 가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딸들을 훌륭한인물로 키워 손문과 장개석을 사위로 둔 송가수(宋嘉樹)가문은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명문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송애령(宋靄齡.1889-1973), 송경령(宋慶齡.1893-1981), 송미령(宋美齡.1897-2003) 등 이른바 세 자매와 아들 삼형제를 배출한 송가수(宋嘉樹.1861-1918,57세사망) 가문은 중국 근대사에서 최고 명문 가로 꼽힌다. 그의 본명은 한교손(韓喬孫)이 었는데, 미국에 살고 있던 그의 외종숙인 송씨(宋氏)의 양자로 들어가 송가수(宋嘉樹)로 개명했다. 미국에서의 그의 영문이름은 ‘찰리 송’으로 불리었다. 미국에서 공부한 제1세대 중국 유학생인 송가수는 6남매(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장녀 송애령은 중국은행 총재를 지내고 국민당정부 재무부장관을 지낸 거부(巨富) 공상희(孔祥熙)와 결혼했다.
둘째딸 송경령은 신해혁명의 주역이며 중국건국의 아버지이며 삼민주의(민권, 민주, 민생) 주창자인 손문(孫文)과 1914년 일본에서 망명중 결혼했다 당시 송경령은 손문의 비서였으며 손문은 3자매의 아버지였고 나이도 26세연상이 었다. 송경령의 아버지 송가수와 손문은 친구사이로 송가수의 강력한 결혼반대를 무릎쓰고 송경령은 결혼을 강행했다. 송경령의 개방적이고 미래지향적 안목과 용기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셋째딸 송미령은 국민당 주석 장개석(蔣介石)과 결혼했다. 당시 장개석은 두아들 (전처 장남 장경국은 후에 대만총통 역임, 둘째아들은 대만공군사령관 역임)이 있었고 나이는 10년 연상이 었다. 송미령은 자식이 없었다. 송미령은 1943년 카이로 회담때 장개석의 통역으로 참가했으며 미국의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대만정부 대표로 연설한 경력도 가지고 있는 여걸이었다. 세 자매는 각각 돈, 나라(중국), 권력을 상징한다.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장남 송자문(宋子文.1894-1971. 송미령의 바로 위 오빠)은 31세때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부장과 외교부장을 지냈다. 차남 송자량(宋子良.송미령 동생)은 뉴욕에서 사업가로 활동했고 삼남 송자안(宋子安)은 홍콩 관동은행 은행장을 역임했다. 송가수가 명문가를 이룬데는 6남매를 미국에서의 대학교육, 기독교 수용, 차별없는 혁명을 꿈꾼 손문과의 만남, 이 세가지가 전기(轉機)로 작용했다. 송가수는 결혼도 대학졸업후 상해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다가 했다. 부부 모두 독실한 감리교도 였는데 아무리 바빠도 밥상머리 자식교육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중국인에게 꼭 필요한 선진적인 자질, 즉 시간 엄수와 솔직한 대화 태도, 효울적인 일 처리, 인맥이나 사회적 지위보다 능력과 개성을 중시하는 자세를 키워주려 했다고 한다. 또 바깥 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따라 큰딸 애령을 1904년(러.일 전쟁이 일어난 해)중국 여성으로 처음 미국 유학을 보내 웨슬리언여대에 입학시켰다. 1908년에는 열다섯살의 둘째딸 경령이가 열한살짜리 동생 미령을 데리고 도미유학을 하도록 했다. 지성과 미모, 부를 겸비한 세 자매는 유학 후 귀국해 중국을 쥐락펴락하는 존재가 돼 “송가왕조(宋家王朝)”라는 말이 만인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이 목표를 이루려면 ‘전략적 결정“을 잘 내려 이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관건이다. 송가수(宋嘉樹)는 자녀들을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인재로 키우기 위해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미국유학을 선택했다. 중국의 이 가문은 좋은 가풍(家風)을 꿈꾸는 젊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아 부모와 자녀 또는 최소한 부부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이 ’합심‘ 해 내린 ’전략적 결정”이 명문가의 이루는 요체임을 보여준다. 3자매중 둘째 송경령은 남편 손문(孫文.1866-1925)이 59세 간암으로사망 후 모택동 공산정권하에서 중국역사상 여성으로서 최고직인 부주석을 역임했다. 동생 송미령은 장개석 중국 국민당 주석, 1949년대만철수이후 이후1975년 장개석이총통이 89세로 사망할때까지 25년간 자유대만 총통의 영부인(퍼스트레이디)였으니 자매간의 기구한 정치적 운명이기도 했다. 이 두 자매는 1949년 장개석(蔣介石)이 모택동(毛澤東)에게 쫒겨 대만을 떠난이후 생을 다할때까지 한번도 서로 만나보지 못했다. 송애령은 1973년 84세로 사망했고 송경영은 1981년 88세로 생을 마감했으며 송미령은 남편 장개석사망 몇년후 뉴욕으로 이주 2003년 그곳에서 107세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근대사에 한 획을 그었던 자매 여걸들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