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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소개하는 산악사고사례입니다.
본 글은 인터넷에 떠도는 글과 아시아산악연맹 이인정 회장님께서 월간산에 기고한 사진, 그리고 월간 사람과산 2017년 6월호에 실린 '설악산 10동지의 가슴 아픈 기억 : 김근원의 사진증언' 을 함께 편집 및 스크랩했습니다.
1969년 2월 14일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해외원정등반을 위한 훈련을 하고 있던 한국산악회(韓國山岳會, 회장 이은상) 대원 10명이 계곡을 덮은 거대한 눈사태로 사고를 당한, 우리나라 등반사상 최대의 조난사고가 발생했다.
한국산악회는 1970년도에 본격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원정등반을 하기로 계획하고, 2월 6일부터 설악산에서 훈련을 실시하던 중이었다. 2월 6일 신흥사 보제루에서 대원 18명은 한국산악회장 이은상, 설악산악회장 이기섭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결단식을 갖고, 1조 3명씩 A. B. C. D조로 나누고 나머지 6명은 본부조(E조)로 편성하여 훈련에 임하였다.
비선대를 거쳐 천불동계곡으로 들어간 훈련대는 12일에 A조(한덕정, 정현식, 이인정), D조(구인모, 오동석, 강신영), E조(전담, 이재인) 8명과 그 외 촬영차 동행한 국립영화제작소 박태규 등 9명은 주봉인 대청봉 정상에 캠프를 설치하였고, B조(박은명, 변명수, 박명수), C조(오준보, 이만수, 김종찬), E조(대장 이희성, 부대장 김동기, 부대장 남궁기, 임경식) 10명은 죽음의 계곡에 8인용 본부천막과 3인용 천막 2개를 쳐서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였다.
죽음의 계곡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B조, C조, E조는 13일 빙폭 훈련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14일 새벽 계곡을 덮은 거대한 눈사태에 묻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이들의 훈련 광경을 촬영하기 위해 일행과 같이 산에 올랐던 국립영화제작소 박태규가 A, D조가 있던 대청봉에서 하산하면서 13일 오전 10시 이곳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B, C조 대원들은 빙폭 등반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4일 정상에 있던 A, D조 대원들이 훈련교대와 식량보급을 받기 위해 베이스캠프가 있는 죽음의 계곡에 도착했을 때, 거기 있어야 할 대원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높이 약 20m 가량의 눈이 계곡을 덮고 있었다. 베이스캠프도 눈사태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폭포엔 얼어붙은 로프와 붉은 자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청봉에서 내려온 A, D조 대원들은 B, C조 대원들이 혹시 양폭산장에 대피 중이 아닌가 생각하고 내려가 보았으나 이곳에서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식량 보급을 받을 길이 없어진 대원들은 비상식량을 꺼내 먹으면서 15, 16일 양일 동안 일대를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허사였고 계속 내리는 폭설로 천불동계곡마저 눈사태로 묻혀 죽음의 계곡 베이스캠프에는 갈 길마저 막혀 버렸다.
할 수 없이 8명의 대원들은 구조를 요청하고자 17일 오전 8시 양폭산장을 출발하여 오후 3시10분 신흥사에 도착하여 설악산악회장 이기섭에게 사태를 알렸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김준수 속초경찰서장 지휘하에 경찰 구조대를 편성하여 밤에 설악동에 도착했다. 18일에는 한국산악회 구조대(대장 변완철)와 육군 1619부대 구조대(대장 마숙도 중위)가 도착했다. 구조대는 19일 와선대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20일 귀면암까지 전진했으나, 계속된 폭설로 구조를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22일 다시 구조 활동을 재개하고, 23일에는 미군 헬리콥터로 대청봉과 중청봉 중간 지점에 착륙하여 죽음의 계곡으로 접근하려고 했으나 눈사태의 위험으로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계속되는 폭설과 강풍으로 구조 활동은 계속 지연되었다.
25일에는 천종근 강원도 경찰국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군·경·민 합동 지휘본부가 새로 설치되어 본격적인 수색 작업이 재개되었다. 26일에는 드디어 죽음의 계곡 현장에 도착하였고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27일에는 그들의 유품이 발견되기 시작하였고 3월 1일 시체가 발견되기 시작하여 3월 3일까지 10구의 시체가 모두 발굴되었다.
시체는 대원들이 결단식을 했던 신흥사 보제루로 옮겨져 3월 5일 합동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설악산 입구 노루목 묘지에 안장 되었다. 대장 이회성은 현역 군인인 관계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부대장 김동기 교수도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러므로 노루목 묘지 2개의 봉분에는 시신없이 유품만 매장되어 있다.
19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일어난 눈사태 사고 이후 구조작업을 펼치는 모습. 사진 이인정 제공
대한뉴스에 소개된 1969 설악산 죽음의 계곡 조난 10동지 사고
설악산 10동지의 가슴 아픈 기억 : 김근원의 사진증언
충격의 한해를 보내야만했던 69년
해마다 6월이 되면 늘 가슴이 무거웠다. 바로 6.25의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내가 산을 오르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바로 6.25의 상처를 달래기 위함이었지만 막상 6월이 가까이 오면 그 마음의 상처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그러나 세월만이 약이었는지 그런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어져 가고 있을 즈음, 나는 산에 대한 열정이 솟구쳐 오름과 동시에 산악사진에 대한 시야도 점차 넓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면서 단체행동으로는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산악사진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겠다고 판단되어 단독산행을 통해 사진적 열망을 불태우고자 각오도 새롭게 다짐할 때였다.
바로 그때 너무나도 큰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다름아닌 설악산에서 겪은 10동지 조난사고였다. 나는 당시 겪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결국은 건강마저 악화되었고 나의 사진적 꿈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산행을 포기해야 되는 시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만큼 나는 그해 한 해 동안에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이다.
60년대 말의 나의 개인적 기억
당시 상황을 좀 더 더듬어 보면 68년 1월에 이대등산부 동계등반으로 한라산을 갔다. 그때 조난이라는 오보가 서울에 알려지면서 급기야 산행을 중단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나름 한라산의 설경을 제대로 찍어보겠다고 준비도 많이 했는데 학생들을 인솔해야하는 책임감 때문에 촬영을 포기하면서, 그때 보였던 한라산의 설경을 나의 눈 앞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내심 이제부터 촬영에만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그런 일로 등산부의 산악지도를 그만두면 오히려 역효과로 나에게 돌아올 것 같아 1년 더 지도를 하면서 적당한 기회를 찾을 참이었다.
그런데 그해 연말쯤 이희성이 나를 좀 보자고 하더니 내년 한국산악회가 시행하는 히말라야 등반을 대비한 훈련에 자신이 대장으로 선발되었다고 하면서 함께 가자는 제의였다. 나도 오랜만에 겨울 설악산을 촬영하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이대등산부와의 관계가 정리도 덜된 상태여서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만 남겼다. 그 후에 한번 더 그런 말이 오고갔지만 묘하게 산행계획과 가정사(家政事)까지 겹쳐 결국 함께하지 못했다.
설악산에 사고가 있기 며칠 전 당시 북한산에도 유례없는 폭설이 내렸다. 무릎 이상으로 쌓인 적설을 헤치며 올라가는 에코클럽 회원들. (1969년 2월 북한산 능선에서)
때마침 에코클럽에서는 1월에 토왕성폭포의 빙벽등반을 시도한다고 해서 그들과 잠깐 합류하였다가 촬영을 마치고 나는 서울로 곧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설악산에 그렇게 눈이 많지를 않았다. 춥기만 추워서 폭포가 완전히 결빙된 모습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았고 눈사태라는 것은 전혀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처음 설악산을 찾았던 것은 58년 1월. 전담이 주축이 되어 시도한 천불동 스키등반이었다. 당시에는 정말 눈이 많았다. 오죽하면 용대리에서 길이 막혀 며칠을 기다렸다가 겨우 진부령을 넘어 설악동을 들어갔으니 내 생전에 그런 눈도 처음 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사고 없이 천불동을 거쳐 대청봉까지 무난하게 등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김정태 선생과 또 설악산을 갔는데 김 선생은 마등령에서 비선대로 내려오는 곳곳에 눈사태의 위험성을 예고하며 무려 50여 군데가 눈사태 예상지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겨울 설악산은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을 할 때 내 속으로 ‘참 이 양반 걱정도 팔자구나’하며 아무리 선배지만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내가 지난겨울에 바로 설악산을 등반하면서도 눈사태를 만나지 않았고, 당시 한국 산에서는 눈사태가 없는 것으로 이미 알려져 있는데 여기가 알프스도 아니고 히말라야도 아닌데 무슨 쓸데없는 걱정인가’하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다시 69년으로 돌아가면 1월 하순에 이대등산부 동계등반으로 치악산을 다녀왔지만 그때도 눈이 없어 별로 좋은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런데 2월 들어 날씨가 이상하더니 서울에도 폭설이 내렸다. 그래서 에코클럽 회원들과 북한산을 가서 눈 덮인 모습을 찍으며 설악산에도 눈이 많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설날 저녁에 전해진 비보(悲報)
서울은 곧 다가올 설 준비를 한다고 모두가 분주한 시간을 보낼 쯤이었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심상치 않은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거의 1미터 가까운 적설을 서울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시는 이중과세(二重過歲) 폐지라는 정부시책으로 설도 조용히 보내던 때, 그날 저녁에 갑자기 윤두선씨의 전화가 왔다. 소식들었냐고 하면서 지금 설악산에 폭설이 내려 눈사태로 등반대와 연락이 끊어졌다는 말이었다. 순간 ‘아! 결국 터지고 말았구나’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급히 라디오를 틀었더니 매시간 반복되는 속보가 부정적인 뉴스뿐이었다.
서울에 있을 수가 없어 설악산을 간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가족들이 난리를 쳤다. 이 난리판에 무슨 산이냐고 하면서 극구 말렸다. 할 수 없이 며칠을 더 지켜본 후 결국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막상 설악산에 왔지만 내가 할 일이 없었다. 구조대 이외에는 입산이 통제된 상황이어서 구조본부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난자들의 가족을 진정시키는 정도였고, 홍종인 회장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를 어쩌면 좋냐고 망연자실해 있어 오히려 그런 분들을 위로해야했다.
구조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윤두선은 부산의 신업재 회장과 함께 사고현장으로 올라갔다. 천불동계곡 곳곳에 보여지는 협곡의 눈처마는 막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눈사태의 위험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1969년 2월 설악산 오련폭 부근에서)
겨울이면 설경을 찍어야한다고 그렇게 기다리던 눈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눈도 눈도 무슨 눈이 그렇게 하염없이 오는지…. 들리는 소식은 비선대에서 더 이상 전진을 못한다는 말만 들렸다. 며칠 동안 눈이 내리더니 드디어 개이기 시작했다. 윤두선과 나는 부산의 신업재 회장을 모시고 사고현장으로 들어갔다. 양폭산장에 도착하니까 모두들 침통한 분위기였다. 얼마나 눈이 왔으면 양폭산장은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현장에 이르러 주변을 살펴보면서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조난의 발굴현장은 바로 내가 58년도 동계등반 때 지나쳤던 곳이었다. 그때는 이미 눈사태가 몇 번이나 발생을 했고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다. 여름이었으면 아마도 십여 미터 아래를 지났을 텐데 그때만 해도 겨울에는 으레 그러려니 했지 눈사태라는 것을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그만큼 눈사태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음이다.
사고현장에 막 도착했을 때의 상황. 며칠 동안 악천후가 계속되다가 겨우 날씨가 좋아지면서 본격적으로 구조작업을 할 당시, 모두들 지치고 허탈함 속에서 구조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1969년 3월 설악산 죽음의 계곡 현장에서)
도착하자마자 조난자들의 유류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발굴현장으로 갔다. 현장은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곳곳이 눈구덩이로 파헤쳐졌고 좁은 계곡에 몰려있는 구조대와 보도진 모두의 눈에는 핏발이 솟은 듯 했다. 주변은 너무 고요했는데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시신이 발견되었다면서 열을 올리며 아우성이 터지는 소리였다. 제일 먼저 김종철이 발굴되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니 어째 이럴 수가 있는가?” 설악산으로 출발하기 전, 우리 집에 와서는 하루 밤을 꼭 나와 함께 자고 싶다며 에코 회원들 몇몇과 어울려 차가운 방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설악산으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이렇게 차가운 눈구덩이에서 나올 수 있는가 말이다.
김정태 선생과 설악산을 찾았을 때 소청봉 주변에 널브러진 유골들을 수습해 한곳에 모으고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뜻으로 세운 십자가. (1958년 10월 설악산 천불동계곡에서)
내가 58년도 가을에 김정태 선생과 대청봉을 올랐을 때, 소청봉 주변에 전쟁으로 죽은 병사들의 유골이 널브러졌길래 너무나 마음이 아려서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와 윤두선, 양천종과 함께 그 유골들을 수습해 한곳에 모으고는 흙 한줌도 못 덮고 주변의 돌을 주워다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나뭇가지를 엮어 십자가를 만들어 꽂아주면서 다시는 이 아름다운 산에서 죽음을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평화로운 때에 왜 젊은 산악인들이 주검으로 변하여 내 눈 앞에 나타나는가 말이다.
좌> 신흥사 부근을 지나고 있는 운구 행렬. 많은 산악인들이 갖은 고생과 함께 울음을 삼키며 적막의 설악산을 하산하고 있다. (1969년 3월 설악산 신흥사 부근에서)
우> 조난자의 시신이 발굴되자 비통함 속에서 한국산악회 회기로 덮고 운구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1969년 3월 설악산 현장에서)
시신을 운구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어깨에 메고 오다가 썰매를 만들어 그 위에 얹어 끌고 내려오기도 하면서 많은 산악인들이 함께 눈물을 삼켰다. 노루목에 안치를 하고 장례식까지 거치면서 가슴이 터지는 비탄함을 느꼈다. 10명의 산악동지들은 하나같이 나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다.
아쉬움과 슬픔 속에 치러진 장례식에서 하관을 마치고 유가족들의 취토(取土)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만수의 모친은 가톨릭 의식인 성수를 아들의 관에 뿌리며 영원한 안식을 염원하고 있었다. 사진 아래쪽에 당시 대원으로 참여했던 이인정(전 대산련 회장)이 보인다. (1969년 3월 설악산 노루목 10동지 묘소에서)
묘비 제막식과 추모산행
좌> 설악산 계곡의 곳곳은 철책 난간들이 떨어져 나가며 지난겨울에 있었던 설화의 참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1969년 5월 설악산 천불동계곡에서)
우> 지난겨울에 내린 눈이 얼마나 많았으면 계곡에는 아직도 잔설로 덮여있었고 두텁게 얼었던 얼음은 일부가 녹아내리며 마치 빙하지대를 연출하듯이 당시의 악몽을 재현하고 있었다. (1969년 5월 설악산 천불동계곡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그해 5월에 백일제 겸 묘비 제막식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다시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노루목으로 갔다. 늘 함께 어울렸던 이희성도 보고 싶고 이만수, 김종철이 보고 싶었다. 산악사진을 하겠다며 그렇게도 나를 따르던 임경식도 보고 싶어 그곳에 가지 않고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적막과 오열 속에 추도행사를 마치고는 추모산행을 했다. 비선대를 거쳐 양폭을 올라가는데 천불동의 깊은 계곡은 아직도 눈과 얼음으로 당시의 참상을 떠올리게 했다. 곳곳의 철사다리들이 눈사태로 무너져 내렸고 겨우내 얼었던 두터운 얼음들이 악어입처럼 쩍쩍 벌어져 있었다. 마치 빙하지대를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좌> 조난현장 부근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묵념과 함께 고인들을 추모하는 산악회 회원들. (1969년 5월 설악산 죽음의계곡 현장에서)
우> 묘비 제막식에서 눈물겨운 조사를 하며 유가족과 산악인들을 위로하고 있는 홍종인 회장. (1969년 5월 설악산 노루목 10동지 묘소에서)
조난현장을 유가족과 함께 둘러보고 일부는 내려가고 나는 몇몇 산악인들과 함께 대청봉을 올랐다. 중청봉에서 대청봉으로 가는 중간에 고사목 몇 개가 아직도 남아있었는데 그들도 슬픔을 아는지 앙상한 가지만을 남겨둔 채 이미 숨을 거두고 있었다. 얼마나 나무가 단단했으면 죽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그 가지는 갈라진 채로 버티고 있었다.
좌> 백일제를 마치고 추모산행을 하는 유가족과 한국산악회 회원들. (1969년 5월 설악산 비선대에서)
우> 대청봉 주변은 아직도 이른 봄이었고 중청봉 주변에 남아있던 고사목도 슬픔을 아는지 뼈만 앙상하게 남아 마지막 잔해를 드러내고 있었다. (1969년 5월 설악산 중청봉에서)
그 이후로 나는 여러 가지 아픔에 시달려야했다. 우선 가족들이 산행을 극구 말리기 시작했고, 이상하게 형님의 사업이 기울더니 결국 나 역시도 쓰러져 병석에 누운 채로 한해를 보내야만 했다.
* 이 글은 평소 김근원 선생이 했던 말을 기억으로 되담아 아들의 글로 남기는 것입니다.
사진 김근원
글 사진 정리 김상훈(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