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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다운 한 주였습니다. 코로나19와 추위, 그래서 대충 집에서 지냈습니다. 갈 곳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고, 움직이면 돈 들고, 그러니 집콕이 답이지요. 그래도 시간은 잘만 갑니다. 나이 먹자고 서둘 일도 없는데 그게 내 일이냐 싶듯 저 혼자서 날래 뛰어갑니다. 집에 있어서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도무지 재미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시간 쫓아가기 바쁩니다. 거참!! 뭔 일이래요? 아 - 기본 속력이 70이랍니다. 내비둬도 그렇게 간다 그겁니다. 이제는 충전하지 않아도 제 힘으로 가는가 봅니다. 세월의 힘이지요. 그만큼 살았으니 빨리 가라는 말인지, 별 쓸모도 없으니 어서 무대 뒤로 사라지라는 말인지, 하기야 아직 할 말은 있습니다. 누구는 백세에 시집도 냈다는데 뭔 말이냐 이거죠. 주제 파악하라고요?
한해가 가물가물합니다. 코로나19가 이렇게 장기전으로 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2020년이 이렇게 되리라고 누군들 생각이라도 해보았겠습니까. 아무튼 버티고 버텨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백신이 여기저기 등장하니 새해에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나에게까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얘기지요.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오고,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오고, 세상이 그런 겁니다. 시간이 만드는 공간의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 나의 인생도 껴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해를 그려볼 수 있다니 놀랍고 감사하지요.
그러나 건강해야 기대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막판 뒤집기라도 당하면 끝장이지요. 감기도 걸리지 말고 코로나19는 더더욱 사양하고 지내기를 바랍니다. 쓸데없이 싸다니지 말고 집콕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건강, 행복 - 별 것도 아니었는데 새삼스럽네요. ^&^
2020년 12월 19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0-12-13주일설교(오늘날 우리에게 응한다면)
<파티마의 기적>
왜 너냐? 왜 하필 여기냐? 그러면 누구이기를 원하십니까? 어디에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십니까? 하기야 그것이 진심일 수 있습니다. 괜히 생각과 마음만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나타난다면 어쩌지요? 자기도 안 믿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에게는 나타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나타나겠습니까? 본다 한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럴만한 사람에게 보여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믿음이란 때로 목숨까지도 걸어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순교자가 생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이해의 끝에서 시작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해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도 그런 일은 많습니다. 합리적 사고방식이나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믿으려 한다면 불가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기 싫으면 안 읽으면 그만입니다. 바다가 갈라져서 좌우에 벽이 되었다고?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된다고 믿으면 안 읽으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어린아이들이나 읽는 신화집이라고 치부하면 됩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산다고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관이니 어쩌겠습니까? 자기 주관대로 살게 두어야지요. 신앙을 가지고 살 것인가, 무신앙으로 살 것인가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입니다. 공권력으로 막으려 해도 도리가 없습니다. 가난과 전쟁 그리고 질병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은 막다른 길에 서 있습니다. 속된 말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이거라도 기대보자는 것입니다. 이미 기적을 겪은 사람도 있으니 나도 그런 혜택을 받아보자는데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백성을 미혹한다고 생각하는 행정관과 관리들도 길을 막자고 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먼발치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봅니다. 무슨 해괴한 일이 발생할까 경계하면서 말입니다. 질서 유지를 위해 왔다지만 그들도 속으로는 어느 정도 호기심이 작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기다립니다. 거참, 이 사람들 확실히 미친 거 아냐? 하는 생각도 들겠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구름이 걷히며 햇빛이 비춥니다. 그리고 세 아이들은 그분을 만납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태도를 보고 그 상황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기대에 가득 차 기다립니다. 가장 어린 ‘히야친타’가 그분이 해주는 말을 전달합니다. 이미 아이들은 여러 번 만났습니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루치아’는 미소를 머금고 그 분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들이 요구합니다. 개인적 요구가 많습니다. 성경에도 많이 나오지만 질병에서 낫고자 하는 바람이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그러다 사람들이 요청합니다. 무엇인가 기적을 보여달라고 말이지요. 그것을 응하겠다는 답신을 전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태양이 땅으로 내리 꽂히는 듯한 장면이 생깁니다. 놀라서들 흩어집니다.
전혀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미혹된 백성들을 쫓아내려는 행정관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합니다. 보기는 했지만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떻게든 이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평생 머리만 갸우뚱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과 부자의 대화지요. 지옥에 간 부자가 이승에 남아있는 자기 형제들은 이런 지옥에 오지 않도록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이승으로 보내 경고해주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미 성경(모세와 선지자)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부자는 간곡히 부탁합니다. 죽은 자가 돌아가서 말한다면 믿을 거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성경을 믿지 않으면 죽은 자가 돌아간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누가복음 16장)
기적을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적은 없다고 믿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기 소관대로 사는 겁니다. 사실 세상에는 종교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수가 무신앙으로 사는 사람보다 많습니다.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는 신을 부인하며 살 것을 강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승에서의 삶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 사는 것이지요. 슈바이처 박사가 한 말이던가요?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기적은 없다고 믿고 사는 사람과 매일을 기적으로 믿고 사는 사람이다.’ 어느 쪽이 살맛나는 인생을 살지 생각해봄직 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천주교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조금은 언짢은 부분도 있겠지만 섬기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분파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영화 ‘파티마의 기적’(Fatima)을 보았습니다.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그 때도 예수님에게 질문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 너냐?’
<엔젤 오브 마인>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중 ‘본능’ ‘직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어의 뜻은 알고 있으나 그 말대로 현실 삶 속에서 나타나는지 사실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로 그것에 의존합니다. 다른 대책이 없을 때는 도리가 없습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크게 괘념하지도 않습니다. 맞으면 다행이고 틀리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흔히 남녀의 기질이나 성품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 남성은 비교적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 하고 여성은 보다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라고 말합니다. 남자의 합리적 판단보다 때로는 여성의 직관적 판단이 유효할 수도 있습니다.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삶의 현장에서 그런 경우를 경험합니다.
처음에는 어떤 판단의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느낀 것입니다. 아무래도 내 아이라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단지 직관적으로 느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 후에는 그에 따른 행동이 나타납니다. 찾아다니며 확인해보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아이를 보려고 자꾸 기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주변을 맴돌게 됩니다. 아이와 접해보려고 이 모양 저 모양 시도합니다. 그만한 접촉점도 있습니다. 같은 학교 학부모이고 양쪽의 아들들이 한 학교 다니며 가까운 사이입니다. 서로의 집이 좀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리 멀지는 않은 듯합니다. 아이들 등하교 바라다 주는 과정에서나 아이들 행사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롤라’도 그런 과정에서 마주친 것입니다.
7년 세월이 흘렀지만 ‘리지’의 마음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떠난 적이 없습니다. 주변에서 병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물론 정신적 치료도 받았습니다. 정기적 심리치료도 진행하며 약도 복용합니다. 크게 효험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충격이 강했다는 반증입니다. 또한 스스로 이기려는 의지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느낌이랄까?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날들 속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에 속된 말로 그 아이에게 눈이 꽂힌 것이지요. 그 후로는 그 아이 생각에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고 따라다니게 됩니다. 오죽하면 직장까지 포기할 처지에 이릅니다. 가족이 더 이상 참고 견딜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엄마로써 공통의 관심을 가진 학부모이며 이웃입니다. 더구나 팔려고 내놓은 집을 구경삼아 둘러본 고객이기도 합니다. 양쪽 아들들이 서로 가까이 지내니 쉽게 오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딸인 롤라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클레어’도 눈치 채게 됩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게 됩니다. 남편에게 이야기했지만 남편이 과한 반응이라고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리지의 남편이 과한 집착이라고 리지를 몰아붙이는 것과 비슷하지요. 남편들은 모르는 가운데 두 여인의 보이지 않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솔로몬 왕 앞에서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양쪽 남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슨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리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곧 이사를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클레어네 가족이 이사 가기 전에 확실하게 끝내야 합니다. 때문에 롤라의 DNA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롤라의 머리빗을 훔치려 무단으로 가택침입을 시도합니다. 이미 전에 집 구경 하면서 롤라의 방은 알고 있습니다. 집안의 이상한 소리에 클레어가 집안을 조사하며 리지를 발견합니다. 심리적 갈등이 아닌 실제 육탄전이 벌어집니다. 증거를 찾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 간의 전쟁입니다. 사실 어느 쪽이 유리하겠습니까? 한쪽은 이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긴가, 아닌가, 검사하고 나서 만약 아니라면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극구 막는 것이지요?
결국 클레어가 항복합니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아이들과 외출했다 돌아온 남편이 그 이야기를 문간에서 다 듣습니다. 얼마나 충격일까요? 7년이나 애지중지 사랑했는데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여태 아내를, 딸을 정신병자로 여기며 치료해주려고 애썼던 리지의 가족들도 놀랍니다. 문제는 사실 규명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제부터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시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른들이야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수습해나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감정을 사실에 비교적 빨리 적응시켜 나갑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다르지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갑자기 부모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이해되겠습니까?
양가 부모와 가족의 양해가 이루어집니다. 어른들 속에는 평화가 깃듭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요? 여태 내 동생이었는데 아니라고요? 다른 한편에서는 없던 동생이 갑자기 생겨났습니다. 물론 얼굴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집을 옮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의 문제는 대부분 당사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모두가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 ‘엔젤 오브 마인’(Angel of Mine)을 보았습니다. 2019년 작품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4 : 16 - 21 2020년 12월 13일
설교 : 오늘날 우리에게 응한다면 김종우 목사
지난 세기 말과 새로운 세기를 맞으며 종말을 주제로 하는 영화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비슷한 영화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억하는 것은 연도가 확실하게 표현된 영화가 있습니다. 2012년에 지구의 종말이 온답니다. 그 종말을 그려내는데 정말 실감납니다. 화면 가득히 펼쳐지는 재앙이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현장감이 넘칩니다. 우리 스스로 이마만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재앙이라도 주인공은 살아남는다, 그 원칙 때문에 마음 편하게 앉아서 끝까지 즐길 수 있습니다. 그 재앙의 현장에 만약 나 자신이 있다면 즐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다른 것들이 허술하여도 그 엄청난 장면들만 보는 것만도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허황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괜스레 종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싶습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한 호기심일까요? 아니면 히스테리적 발작일까요?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이놈의 세상 확 뒤집어지면 좋겠다는 심보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쉽게 무너질까요?
성경에도 종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실인가 하는 것은 따져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냥 영화니까 즐길 수는 있어도 사실 여부는 잘 분별해야 하지요. 성경에는 말세, 마지막 때, 세상 끝 그리고 종말 등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주님이 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세상 끝 종말에는 무시무시한 재앙이 일어나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요. 성경을 그렇게 읽었기 때문입니다. 몇 군데만 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부터 보지요. 마 24 : 6 - 8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난리가 나고 전쟁이 나고 지진과 기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재난의 시작이랍니다. 겨우 시작일 뿐이면 어떻게 진행이 된다는 말일까요? 무엇이 얼마나 더 무섭게 일어난다는 말이지요?
또 보겠습니다. 마 24 : 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하늘에 심상치 않은 징조가 생깁니다. 별들이 떨어지면 어디로 떨어진다는 말일까요? 그 속도 또한 비행기 정도가 아닐 텐데 행여 그 가운데 하나라도 이 지구에 떨어져서 충돌이라도 일으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지요. 영화에서나 본 대폭발이 일어날 것입니다. 폭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말씀이 있기는 합니다. 벧후 3 :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온통 불바다가 될 것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키지요. 확실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에는 더 삼삼한 말씀이 있습니다. 계 8 : 7 - 10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세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온통 불나고 타고 깨지고 죽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지구를 초토화시키고 나서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인데 그 황량해진 땅에 오셔서 뭘 하실까요? 사람은 얼마나 남아 있을 것이며 하나님 백성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재앙들을 피하고 모두 살아남는 것일까요? 내가, 우리가 살아남으리라 자신합니까? 아무튼 살아남은 그들을 데리고 다시 새 세상을 만드신다는 말인가요? 마치 노아의 세대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심판하신다고 하셨는데 이미 다 끝장을 낸 세상에 무엇을, 누구를 심판하신다는 말인가요? 아무래도 앞뒤가 잘 맞지를 않는 듯합니다. 아무튼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모든 성경을 교훈을 받듯이 그런 식으로만 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교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예언이 들어있다는 사실이지요. 예언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실 이 예언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느 누가 장래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것은 교훈이 아니라 예언의 경우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예언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성경에서는 당신 백성과의 언약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약속을 압니다. 약속된 구세주 예수님이 어떻게 약속 즉 예언되어 있고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이루셨는가 하는 것을 듣고 읽고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그것은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당시의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들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우리가 다시 오신다는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조금이라도 짐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처음 아담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 아담을 당신의 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그 후손을 위하여 귀중한 약속을 해두신 것입니다. 창 3 :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아멘! 잘 아는 대로 여기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오실 메시야, 곧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4천 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물론 그 사이사이 하나님은 또 다른 예언들을 해주십니다.
오시기 약 7백 년 전에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 7 :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당시 처녀가 자식을 낳는다면 어떻게 되지요? 결혼하기 전의 음행이라 하여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예언을 하셨을까요? 맞아 죽으라고요? 당신이 주신 율법에 따른다면 이 예언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당신의 의를 어기고 당신의 약속한 목자, 메시야가 세상에 온다니 이 무슨 변고입니까?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았을까요?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넘어갔을까요? 아무튼 그들은 회당에서 이사야를 읽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7백 년 긴 세월 세대를 건너가며 이 성경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과연 심각하게 생각을 하였을까 생각해봅니다. 그저 하나님 말씀이니 누구 하나 이의를 내놓는 사람은 없었겠지요. 더구나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냥 주신 대로 읽고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도대체 이 말씀의 심각성을 얼마나 마음에 품고 생각하였을까 상상해봅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나님이 당신의 율법까지 어기면서 무슨 일을 하시려는가?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것이며 세상은 새로워질 것이다. 율법을 어기고 세상에 태어난 그 아이가 우리의 죄 짐을 진다는 말인가? 사 53 : 6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과연 이 예언, 이 약속을 믿어야 하는가? 그래도 하나님 말씀이니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하겠지. 그 희망이 이어져 내려왔을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이 나라 저 나라의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도 그 희망을 붙들고 끈질기게 버텨왔습니다.
어느 날 30대 초반의 청년이 회당에 나타났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조금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지요. 눅 4 : 16 - 19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아멘! 예수님 읽으신 이사야의 글은 사 61 : 1 - 2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전에도 많이 들었던 말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희망의 메시지니까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해준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랜 세월 나라를 잃고 사는 백성들에게 이야말로 희망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어서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도 이 이사야의 예언을 봉독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선생들과는 전혀 다른 강론을 하셨습니다. 눅 4 :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여기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그리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무시무시하게 큰 파장을 일으킬 폭탄선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바로 여기 예언된 그 메시야입니다. 이사야의 다른 글에서(7 : 14) 예언된 처녀는 바로 제 어머니 마리아이고 그 처녀가 낳은 아들이 바로 저 예수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성령이 임하셨으니 제가 바로 임마누엘이지요.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이럴 때의 우리 표현, 아주 적당한 우리들의 표현이 있습니다. ‘황당’함이지요. 야, 이게 무슨 말이야?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야? 자기가 뭐라고? 자기가 메시야래.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래. 자기가 임마누엘이래. 우하하하하!
그래서 다음 이야기가 연결됩니다. 22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저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거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인데 뭐? 메시야라고? 웃기고 있네. 아니 차라리 하나님이라고 하지 왜?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6 :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24절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은 때를 기준으로 그 전과 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실례가 있습니다. 유명한 주먹대장 소위 조폭으로 활동하다 잡혀서 옥살이를 치릅니다. 바로 그 감옥에서 소위 은혜를 받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출소하여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목회자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남은 평생을 헌신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소위 자기 버릇 개 못준다고 옛날 생활로 돌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변해버린 삶을 이전에 알던 사람들이 쉽게 믿고 인정하느냐?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오죽하면 중간에 포기하고 다시 옛날의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과연 하나님의 종이 되었구나, 인정받기까지는 모진 고난과 시험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가 이전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알기 때문에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를 볼 때마다 그의 과거 생활이 현재를 막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라신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자랐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크게 타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메시야라고 말한다면 믿어집니까?
그냥 웃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라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이게 믿을 수 있는 일입니까? 믿어지는 일입니까? 웬 허술한 젊은이가 나타나더니 말은 제법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가 옛날 선지자가 예언한 그 메시야라는 겁니다. 아니 그의 출생을 다 아는데 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 이겁니다. 그의 식구들도 다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라는 겁니까? 믿어져야 믿죠. 사실이 뻔한 것을 어떻게 믿으라는 겁니까? 시간이 좀 지나니 그럼에도 그를 쫓아다니는 제자들이 생겼다는 겁니다. 이 무슨 기막힌 일입니까? 아니 미치면 하나만 미치지 왜 또 여러 사람이 같이 미치냐 이겁니다. 저 녀석들은 또 뭐야? 도대체 자기 일도 다 팽개치고 뭐가 좋다고 미친 자를 따라다니는 거야? 세상이 어쩌자고 이런 일이 생기는지 원! 그러면서 무리를 지어 다니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답니다. 그런데 그걸 또 듣자고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야, 이거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 되겠다 싶지요.
유대인들을 더욱 열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작자가 나타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제멋대로 어기고 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를 않나,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면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내버려두지를 않나,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셔야 산다지를 않나,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나중에는 당시 종교지도자,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을 험담합니다. 마 23장에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잘 아는 대로 ‘7화’가 나옵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마 23 : 33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한 마디로 백성들의 지도자들, 그들은 뱀들이고 독사의 새끼들이랍니다. 이런 말을 듣고 소위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이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유대의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러잖아도 남의 나라의 식민지 생활을 하며 어려운 지경에 간신히 종교의 자유만이라도 누리고 있는 것이 다행인데 웬 사이비가 나타나서 휘젓고 다니고 있으니 걱정이지요. 이러다가 그나마 종교의식마저도 혼란에 빠진다면 민족의 정체성마저 위태롭게 되지 않겠습니까? 가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나중에 유대 지도자들이 평한 말이 있습니다. 행 24 :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나사렛 이단’이라는 말입니다.그러니 반드시 처단을 해야 합니다. 백성이 미혹되어 사회만 어지럽히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빨리 처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모입니다. 마 26 : 3 - 4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그렇게 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 예수를 죽여야만 했습니다. 감옥에 가둔다든지 멀리 쫓아내는 것으로는 결코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아주 제거를 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재판장이었던 빌라도는 예수에게 이렇다 할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의 결집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 27 : 22 - 23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그렇게 하여 결국 그들의 소원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성경대로, 하나님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야 지나고 나니 그런가보다 하지요. 하지만 당시 유대인의 입장이라면 우리인들 어느 쪽에 섰을 것인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감히 대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2천 년 전의 사건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앞에 똑같은 일이 예견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약속, 예언하셨기 때문이지요. 다시 오실 때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혹시 어디에 오시리라 기대합니까? 또 다시 저 중동에 있는 유대 땅 지금 이스라엘 지역에 오시기를 기대합니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신앙하고 있어도 매우 막연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막연히 천국, 막연히 재림, 막연히 부활 등등 도무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신앙하고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알고 신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하나님이 당신 백성이 무식하다고 모른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안다는 말입니까, 모른다는 말입니까? 오늘의 말씀으로 바꾼다면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하나님과 예수님부터 제대로 알고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 처음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른 육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주님은 당신이 만드신 영적 이스라엘 백성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실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 때 유대인들처럼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러나 오신다 한들 알아볼까요? 처음에 유대인들은 어땠습니까? 요 1 : 10 - 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 자기 백성 곧 하나님 백성이 주님을 알지도 못하였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그 덕에 그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을 아주 쉽게 비판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재림 때 그들의 한 짓과 똑같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나간 일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지금 여기 하나님의 약속 곧 예언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믿는 것이 참으로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목자가 여기 우리 앞에 계실 때 그 분을 믿는 것이 믿음이란 말입니다. 요 14 :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아멘! 우리가 모르고 인정하지 않을 뿐 혹 그 분이 이미 와 계신지도 모릅니다. 성경으로 맞춰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 11 :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예언(바라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난 것, 보지 못하는 것(약속)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먼저 들었기에 보았기에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쉽습니까? 말씀을 알고 찾아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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