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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진과 대도시 체험 건축사진의 목적은 대체로 세 가지다. 우선 아카이브를 위한 목적이다. 그것이 이미 완성된 건축물이든 진행 중인 건축물이든 건축사진은 그 건축물의 현 상태를 혹은 그 건축물이 태어나는 과정을 아카이브에 저장하기 위해서 필름 안에 수록한다. 다음은 심미적 목적을 추구하는 건축사진이 있다. 이 경우 건축물은 단순히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독창적 사진 이미지의 대상이 된다. 다시말해 하나의 건축물은 그것 자체로 정확하게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진공간이라는 무대 위로 옮겨져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이미지로 다시 태어난다 (예컨대 베허 부부 학파의 제자들이 보여주는 건축사진들은 기록의 관점이 아니라 작가 개개인의 주관적 미학을 보여주는 사진 이미지로 읽혀야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건축물을 심리공간화하려는 건축사진이 있다(`Psychographie der Raeume`, G. Breuer). 이 경우 건축물은 기록의 대상이나 심미적 대상이 아니라 관람자의 내면의식이 투영될 수 있는 공간심리학적 장소이며 건축사진은 건축물 공간의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 개인적 혹은 집단적 무의식을 추체험 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송재영은 건축물들을 사진 안에 담는다. 하지만 그가 프레임 안으로 옮겨놓는 오브제들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 리모델링 과정에 있는 건축물들이다. 그의 사진들 속에서 건축물들은 세세한 디테일들이 살아있는 모습이 아니라 반투명 혹은 불투명의 안전막 뒤에 숨겨져 존재한다. 이 특별한 오브제의 선택 때문에 송재영의 건축사진들을 읽어내는 독서에는 몇 가지 제한이 따른다. 무엇보다 송재영의 사진들을 아카이브를 위한 사진으로 읽어내는 일에는 무리가 따른다. 건축물의 리모델링-사실이 기록되어야 한다면 모르지만 건축물 자체에 대한 기록은 그 건축물의 세세한 디테일들을 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사진들을 주관적 사진 이미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작가 자신의 특별한 시선을 드러낼 수 있는 디테일들의 재현이 처음부터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주관적이며 심미적인 시선을 강조하기에는 송재영의 사진들이 대단히 평면적이고 객관적인 프레임 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공간심리학적 관점으로 그의 사진들을 읽는 일은 어느정도 가능해도 그 또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 물론 안전막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오브제의 숨김과 드러냄은 관람자의 시각적 경험을 의도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외부로 향하는 시선을 안으로 되돌리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우리가 C. 회퍼의 실내공간 사진들에서 경험하듯 관람자의 무의식을 환기 시키자면 시각적 이미지와 더불어 그 이미지들을 둘러싼 모종의 분위기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송재영의 건축사진들이 그러한 특별한 심리적 분위기를 애써 창출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건축사진이면서도 건축물을 뒤에 숨기는 송재영의 리모델링 건축사진들은 어떤 독서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송재영의 건축사진들은 우선 대도시 공간을 새롭게 발견하고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한 대도시 공간에의 특별한 주목은 건축물들 위에 안전막의 옷을 입혀 시선을 차단시키는 낯설게 하기의 방법론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건축물의 디테일과 장식성을 의도적으로 배제 시키는 그 낯설기 하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축물들의 획일적인 직사각형 조형성과 그러한 건축물들로 범람하는 무미건조하고 삭막한 메트로폴리스의 공간을 새삼스러운 풍경으로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송재영의 건축사진들이 그러한 건축물들과 대도시 공간에 대한 시각적 경험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진들이 건축물들의 획일성과 대도시 공간의 삭막함을 통해서 보다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경험은 우리들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대도시 환경에 대한 소외체험이다. 주변에 밀집한 차갑고 거대한 건축물들의 위용과 그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는 도시 거주민들의 상대적 왜소함에 대한 자연스러운 비교의식에서 비롯하는 이 소외체험은 안전막 뒤에 은폐된 건축물들의 내부에 대한 은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늘 친숙한 일상의 환경이 되고 있지만 그만한 지위나 그만한 능력이 없으면 결코 우리를 통과 시키지 않고 반겨하지도 않는 그 범속하면서도 특별한 건축물들의 냉엄함을 통해서 우리는 나의 삶과 그 삶이 뿌리내린 도시 공간 사이의 배타적 거리감을 어쩔 수 없이 체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송재영의 리모델링 건축사진들이 경험케 하는 건 대도시의 시간성이다. 획일적 건축물에 대한 시각적 경험과 그 경험이 불러들이는 심리적 경험의 끝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사진의 오브제로 선택된 리모델링 건축물의 시간적 의미이다. 송재영의 사진 프레임 안에서 안전막을 쓰고 묵묵히 존재하는 리모델링 건축물은 단순히 기존의 건축물이 새로운 건축물로 개조되는 공간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이 확대 재생산의 길을 달려가는 자본의 논리,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라는 현대의 운명 위로 질주하는 대도시적 가속도의 은유가 된다. P. 비릴리오가 ‘광란하는 정적 (rasenser Stillstand)’이라고 부르는 이 무서운 메트로폴리스 가속도의 진정한 희생자는 그러나 대도시의 생명 없는 건축물들이 아니다. 변화를 위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없이 무정형화 되고 해체되는 것은 다름아닌 대도시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건축사진이면서 애써 건축물들을 뒤에 숨기는 송재영의 사진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사실상의 오브제 또한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대도시의 가속도 속에서 끊임없이 리모델링을 당하는 우리들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글 / 김 진영 (예술비평) |
첫댓글 일하면서대학원다니느라수고많으셨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