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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김인선
01-06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이상과 현실
반 고흐 연보(1853~1890)
1853 빈센트 빌렘 반 고흐가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작은 마을, 그루트 준데르트에서 출생. 부친은 칼빈교의 목사이고, 고흐는 장남인데 3명의 백부가 모두 화상이었다. 개혁 교회 목사인 테오도루스 반 고흐(1822~1885)와 헤이그 출신 제본업자의 딸인 안나 코르넬리아(1819~1907)의 6남매 가운데 장남. 그의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1년 전, 같은 날에 태어났다가 죽은 형의 이름을 붙인 것임.
1857 동생 테오 도루스가 5월 1일에 출생. 테오는 고흐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로 일생을 지냄.
1859 들라쿠르아, 코로, 쿠르베, 밀레 등에 의한 근대 회화전이 파리에서 열림.
1861∼1864 쥔데르트의 공립학교에 입학. 고흐의 소년기의 생활과 모습은 누이동생이 쓴 「회상의 고호」속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1863 살롱 낙선전 열림. 들라크로아 사망, 시냑 출생
1865 프로빌의 기숙 학교에 입학, 69년까지 다님. 마네, <올랭피아>를 살롱에 출품, 물의를 일으킴. 이때부터 마네를 중심으로 카페 게르보아에 바질, 드가, 세잔 등이 모임
1866∼1868 털부르흐 기숙학교 등록.
1867 카페 게르보아의 모임 최성기. 보나르, 바라든 출생. 앵그르, 테오토르 루소 사망.
1869 7월 30일, 헤이그에 있는 구필 상회에 취직, 얼마 후 프류셀의 구필 지점으로 전임. 테르스테흐의 감독 아래 미술품을 팔고, 폭넓은 독서와 미술관 방문 체험을 쌓음.
1871 아버지가 브라반트의 헤르보이트 교구목사로 임명되어 가족이 함께 이주.
1872 부모 곁에서 휴가를 보내고 동생을 만나기 위해 헤이그 방문. 동생 테오와의 서신 왕래가 시작됨.
1873 1월, 구필 화랑 브뤼셀 지점으로 옮김. 5월, 구필 상회 런던 지점으로 전임. 동생 테오, 고흐의 전 근무처 구필 상회 브류셀 지점에 취직. 파리를 여행하고 깊은 인상을 받음. 루브르 박물관 방문. 6월, 하숙집 딸 우르슬라에게 반해 구혼했다가 거절당하자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음. 11월, 동생 테오가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근무.
1874 여름, 부모 곁에서 휴가를 보내며 자신이 의기소침하게 된 이유를 털어놓음. 7월 중순, 여동생 안나와 런던으로 돌아감, 혼자 외롭게 지내면서 작품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종교 서적을 중심으로 많은 독서를 함. 10∼12월, 환경을 변화시켜 고흐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했던 삼촌 덕분에 구필 화랑 본점이 있는 파리로 옮겨감.
1875 5월, 화길한 파리 거주 시작, 작품 활동에 점점 소홀해지고 동료와 고객들을 경멸, 매일 성서를 읽고 미술관을 자주 방문. 코로와 17세기 네덜란드 화파의 거장들에게 열광. 10월, 아버지가 에텐으로 옮겨감. 12월, 미리 휴가를 내지도 않고 고향의 부모를 찾아가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냄.
1876 4월, 구필 하랑에서 해고되자 런던 근처의 램스게이트로 가서 먹고 자는 것만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임시 교사로 일함. 7∼12월, 런던 변두리으 노동자들이 사는 아일워스에서 임시 교사로 일함. 후에는 감리교 목사 밑에서 전도를 하면서 보조 교사로도 일함. 11월에 처음 설교를 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 전파에 헌신하리라고 맹세, 그림에 대한 관심도 지속적이어서 햄프턴 궁의 미술관에 다님, 크리스마스에는 에텐에 있는 부모를 방문했는데, 크리스마스에는 에텐에 있는 부모를 방문했는데, 아들의 상태를 걱정한 부모는 그가 런던으로 돌아가는 것에 반대함.
1877 1월~4월, 삼촌 추천으로 도르드레흐트 서점의 직원으로 근무, 대단히 고독한 생활 속에서 자주 교회를 찾아가고 성서를 여러 나라 말로 변역, 데생을 계속해나감. 5월, 자신의 종교적 소명에 대해 아버지를 설득,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감. 시 조선소 책임자인 삼촌과 함께 생활.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을 배움, 폭넓은 독서, 미술관 방문, 데생 연습을 계속, 신학교 입학을 위한 공부가 너무 어려워 포기함.
1878 7월, 암스테르담 대학 신학교 입학시험에 실패하자 실의에 찬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후 아버지와 브뤼셀로 감. 거기서 전도사가 되기 위해 3개월 고정의 공부를 하려고 함. 8월에 개강하는 수업이라 에텐으로 되돌아감. 8∼10월, 브뤼셀 근처 라에켄에 있는 복음주의 학교를 다님, 그러나 전도사가 되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겨 다시 에텐으로 돌아감 12월, 자신의 소명을 따르기 위해 프랑스 국경부근의 탄광촌인 보리나주로 감.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고 광부들에게 성서를 읽어줌.
1879 1∼7월, 보리나주의 와스메스에서 6개월동안 계속 전도사로 일하기로 계약을 함, 광부들의 열악한 생존 조건을 보고 몹시 충격을 받아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도우려고 함. 가건물에 살면서 짚단 위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함. 상관들응 이런 태도에 화나서 그가 설교에 재능이 없다는 핑곌 계약 연장을 거절. 8월, 교구목사 피에테슨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브뤼셀까지 걸어감. 그에게 보리나주의 광부들을 스케치한 것을 보여줌. 탄광 지역인 쿠에스메로 돌아가 소명에 따라 살아가기로 함. 그곳에서 1880년 7월까지 머무는 동안 자신도 극빈자 생활을 하면서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줌. 디킨스, 셰익스피어, 위고 등을 읽고, 드로잉 연습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됨. 이후 그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될 만큼 개인적 위기를 겪은 시기였음. 그의 적업적 소명에 공감하지 않던 동생 테오와 잠시 소식을 끊음.
1880 1월, 정처없이 길을 걷다가, 문득 화가 브르통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그만 둔다. 7월, 경제적인 도움을 준 테오에게 다시 소식을 전하기 시작, 테오는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근부하고 있었음, 고흐는 동생에게 자신의 괴롭고 불안한 생활을 고백. 8∼9월, 테오의 격려를 받아 광부들의 삶을 열심히 스케치함, 밀레 작품 모방. 10월, 브뤼셀 미술 아케데미에서 해부학과 원근법을 공부. 밀레와 도미에의 작품에 감탄. 11월, 네덜란드 화가 라파르트와 친교. 1881년 4월까지 브뤼셀에 머물게 됨.
1881 봄, 에텐어서 테오를 만나 자신의 미래를 의논. 브뤼셀로 돌아가지 않음. 풍경화를 그리고, 그를 찾아온 라파르트와 보도 여행을 함. 여름, 아이를 하나 둔 과부였던 사촌 케이트가 에텐을 방문했고 고흐는 그녀를 사랑하게 됨.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계획보다 빨리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감. 고흐는 대단히 존경하고 있던 종형 화가 모우베를 만나기 위해 헤이그를 방문. 화가가 되기위한 따뜻한 조언을 받으며 제작에 착수. 가을, 케이트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갔지만, 그녀는 그를 거부함. rgm는 자신의 결심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의 부모가 지켜보는 앞에서 촛불에 손을 대기도 했음. 11∼12월, 헤이그에서 모두베를 방문하고 처음으로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 그가 케이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고 종교에 대해 너무 과격한 관점을 보이자 부모와 사이가 나빠짐. 크리스마스에 아버지와 다투고 아버지가 주는 돈을 거절하고 에텐을 떠남
1882 1월, 헤이그로 가서 모우베와 가까운 곳에서 지냄. 모우베는 그에게 회화 기법을 가르쳐주고 돈을 빌려주기도 했음. 테오는 매달 100에서 200플로림을 보내줌. 빈센트가 석고상을 가지고 작업하기르 거부하면서 모우베와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 시앵이라 부르던 창녀를 알게 되었는데, 임신을 한 알코올중독자였음. 고흐는 그녀를 돌봐주었고, 그녀는 그의 모델 노릇을 했음. 3월, 모우베와 관계를 끊었지만 그에 대한 존경심은 여전함. 다른 화가들과의 관계도 힘들어짐. 웨이센뷔흐가 그의 작품을 인정해줌. 그는 주로 자연을 그렸고, 시행 이외에도 가난한 이웃들이 모델이 되어주었음. 삼촌인 코르넬 리가 도시를 그린 펜화 20점을 주문했고, 이것이 유일한 수입이 되었음. 6월 임질에 걸려 헤이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아버지와 테르스테흐가 방문. 가족과 친구들이 반대했지만 시앵과 결혼하기를 원함. 그녀를 라이덴으로 데려갔고 거기에서 아이을 출산. 그의 새로운 가족이 살아갈 집을 구함. 여름, 테오가 그림 재료를 살 돈을 주어서 유화를 그리기 위한 다양한 색채 실험을 했고, 주로 풍경화를 그렸음, 아버지가 뇌넨의 교구 목사가 되어 가족과 함께 이주. 가을, 이 무렵부터 1883년 여름까지 헤이그에서 지냄. 풍경화와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림. 겨울에는 초상화를 그렸음. 모델은 주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양로원의 노인들, 시앵과 새로 태어난 아기 등을 그렸음. 화가 윌레를 알게 되어 그와 함께 이듬해 봄까지 종종 모래언덕에 가서 그림을 그림. 석판화 기법에 관심을 기울임. 『하퍼스 위클리』나『더 그래픽』같은 잡지도 읽을 정도로 다독
1883 9∼10월, 테오와 의논 끝에 1년간 같이 살아온 시앵과 헤어지기로 결정. 북부 지방인 드렌테로 혼자 떠남. 배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거기서부터 걸어서 감. 그보다 먼저 그 지역을 다녀간 리베르만, 모우베, 라파르트, 윌레 같은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흐도 토탄산지의 어두운 풍경에 매혹당함. 그 지역 농부들이 고된 일을 하는 모습을 그림, 리베르만이 오래 살았던 젤로를 방문. 12월, 부모가 살고 있는 뇌넨으로 이주, 거기에서 1885년 11월까지 머무름. 2년 동안 어두운 흙빛을 지닌 작품을 약 200점 가량 완성, 졸라의 소설과 들라크루아와 프로망탱의 색에 간한 글을 읽고 색과 음악(바그너)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확신을 갖게 되어 노래와 피아노 교습을 받음. 부모는 기이한 차림새를 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들을 도우려고 함. 목사관 부속 건물 하나에 그를 위하 화실을 내어줌.
1884 1월, 다리가 부러진 어머니가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는데 고흐가 헌신적으로 보살핌. 5월, 화실을 성당관리인의 집으로 옮김. 파라르트가 주기적으로 방문. 8월, 이웃에 살던 마르고트와 짧은 연애를 했는데, 양쪽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고 마르고트가 자살 기도. 8∼9월, 아인트호벤의 금세공인 허만의 식당을 장식할 그림을 여섯 점 그림. 10월, 라파르트가 뇌넨을 방문. 10∼11월, 아인트호벤의 아마추어 화가들에게 그림지도를 함. 라파르트와 함께 산보를 하고 미술관을 방문. 12월, 겨울에는 인물들의 스케치에 몰두했는데, 이전에는 농부와 직조공, 풍경을 주로 그렸음.
1885 3월 26일,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 빈센트는 몹시 괴로워함. 여동생 안나와 다툰 후 성당관리인의 집에 있는 화실에서 거주. 4∼5월, 네덜란드 시절의 대표작인<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림. 글 작품의 모티브를 그린 석판화를 라파르트에게 보냈는데 그가 이것을 심하게 비판하는 바람에 둘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감. 9월, 카톨릭 사제가 마을 사람들에게 고흐를 위해 모델이 되는 일을 금지함(모델을 섰던 여인이 그 직후 임신을 한 것이 이유). 잠자나 새의 둥지 같은 정물을 그림. 10월, 친구와 함께 아인트호텔에서 암스테르담까지 여행하고 국립 미술관을 방문. 렘브란트와 할스의 작품에 감동을 받음. 11월, 하순에 안트웨르펜으로 떠나 1886년 2월까지 체류. 다른 화가들과 사귀고 그림을 팔게 되기를 희망. 미술관을 방문하고 무엇보다 루벤스의 작품에 감동. 도시를 다니면서 일본 판화들을 발견하고 구입.
1886 1월, 에콜 데 보자르에 등록. 회화와 데생 수업을 받음. 이곳의 아카데미식 수업 방식을 거부해서 갈등이 생김. 그래도 상급반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을 치름. 2월, 영양실조, 과로, 지나친 흡연으로 한 달 동안 아팠음, 코르몽의 지도를 받기 위해 하순에 파리를 방문. 3월, 파리에 도착해서 루브르 박물관에서 테오를 만남. 몽마르트르 거리에서 구필 호랑에 속한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었던 테오가 형을 자기 집으로 데려감. 그 사이 안트웨르펜의 아카데미에서는 그가 제출한 시작품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초급과정으로 강등시킴. 4∼5월, 코르몽의 화실에서 지도를 받으면서 베르나르, 러셀, 로트레크를 만남 테오 덕분에 모네, 시슬레 피사로, 드가, 시냐크, 쇠라 등을 알게 됨. 이 화가들을 알게 되면서 고흐의 채색이 많이 밝아졌는데, 그런 경향은 특히 정물화와 꽃의 그림에서 두드러짐. 5월, 어머니가 뇌넨을 떠남. 한 중고물품 상인이 집에 남아 있던 고흐 작품을 모두 팔았는데, 그림 한 점에 10상팀을 받았고 끝내 팔리지 않은 것들은 모두 불태웠음. 6월, 몽마르트르의 르픽 거리에 있는 테오의 집으로 이사를 하고 거기에 화실을 냄. 점묘주의 기법을 이용해 파리 경관을 그림. 겨울, 퐁타방에서 파리로 온 고갱과 사귐, 빈센트의 복잡한 셩격 때문에 테오와 같이 지내는 일이 힘들어졌음. 점점 더 신경이 예민해진 빈센트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둘이 같이 생활하는 것을 ‘거의 못 견딜’정도에 이르렀다고 씀.
1887 봄, 탕기 영감의 가게에서 베르나르를 만남. 둘은 함께 센 강변의 아스니에르에서 그림을 그림. 베르나르와 고갱과 더불어 토론을 하면서 고흐는 인상주의를 회화 발전의 마지막 단계로 보는 견해에 반대를 표시. 갤러기 뱅에서 일본 목판화를 사들임. 클리시 거리에 있는 탕부랭 카페에 자주 드나들었음. 코로와 드가의 모델이었던 카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와 짧은 연애를 했음. 그 카페에서 베르나르와 고갱, 로트레크와 함께전시를 했고 일본 목판화를 가지고 벽을 장식함. 이 화가들을 테오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했던 ‘큰 거리의 화가들’(모네,시슬레, 드가. 쇠라)에 빗대 ‘작은 거리의 화가들’이라고 함. 여름, 점묘주의 기법을 이용해 몇 개의 그림을 완성.
1888 2월, 2년 동안 머물면서 200점 이상의 작품을 완성한 파리를 떠나 아를로 내려감. 남프랑스의 밝은 빛과 따뜻한 느낌을 주는 색에 매혹됨. 툴루즈 로트레크가 이런 결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임. 3월, 물질적 어려움을 극복할 화가 공동체를 소망. 피어나는 꽃들과 나무, 일본 풍경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많이 그림, 모우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추억하며 그림을 헌정. 파리 ‘앵데팡당’전에 그림을 세 점 전시. 5월, 한 달에 15프랑을 내고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 방 네 개 딸리 ‘노란 집’의 오른쪽 부분을 빌림. 여기에서 화가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함. 집에 가구가 갖춰지기를 기다리면서 카페 ‘알카자르’에서 잠을 잤고 식사는 가차 역에 있는 마담 지누의 레스토랑에서 해결. 유명한 작품 《양산을 쓴 여인이 있는 도개교》를 그림 6월, 생트마드라메르에 다녀와서 배를 그림. 주아브병 소위였던 밀리에를 알게 되어 그림을 가르쳐주고 같이 산책함. 7월, 아를 주위를 다니면서 많은 풍경화를 그림. 로티의 소설『마담 크리상템』에서 영감을 받아 《의자에 앉아 있는 일본 소녀》를 그림. 8월,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을 사귀고 그의 초상을 그림. 주아브병 밀리에를 통해 테오에게 35점의 그림을 보냄. 해바라기 연작. 9월, 밤에 야외에서 그림을 자주 그림. 밤에 그림을 그릴 때 모자 테두리와 이젤에 촛불을 켜둠. 벨기에의 시인이자 화가인 보흐를 알게 되어 사귐. 노란 집으로 완전히 이사. 10월, 빈센트의 거듭된 요구 끝에 고갱이 아를로 내려옴. 둘이 함께 살면서 그림을 그림. 12월, 고갱과 함께 미술관을 방문하고 쿠르베의 작품 《안녕하세요, 쿠르베씨》를 보았는데 고갱이 여기서 받은 영감을 나중에 그림으로 그려냄. 그러나 둘 사이에 다툼이 생겼고 빈센트는 나중에 이를 두고 ‘지나친 긴장’때문이었다고 설명. 2개월을 함께 살고 난 뒤 둘 사이가 악화됨. 고갱의 기록에 따르면 12월 23일 고흐가 면도칼을 가지고 그를 위협했다고 함. 고갱은 서둘러 집을 빠져나와 여관에서 밤을 보냈음. 같은 날 밤 고흐는 정신착란 상태에서 발작을 하고 왼쪽 귀 아래 부분을 잘라냄. 그는 그것을 신문에 싸서 창녀 라셸에게 선물함. 다음날 아침 경찰이 와서 상처 입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는 고흐를 병원으로 데겨감. 고갱이 떠나면서 테오에게 형의 상태에 대해 알림. 테오가 즉시 아를로 내려옴. 고흐의 병은 간질, 알코올중독 정신분열증이 겹친 것임.
1889 1월, 병원에서 테오게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상태가 좋아졌다고 말하고 고갱에 대해서도 애정을 담은 말을 덧붙임. 7일에는 노란 집으로 옮겨감. 불면증으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어머니와 여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한 편지를 보냄. 붕대로 귀를 감은 모습의 자화상을 두 개 그림 《귀를 자른 자화상》《양파가 있는 정물》《자장가》등 제작. 2월, 환각 증상을 일으켜 주민들의 고발로 3월 말까지 병원에 감금됨. 3월, 시냑의 방문을 받고, 4월 17일 동생 테오가 친구 여동생 요안나 보그너와 결혼. 그동안 고흐는 2백 점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 두 상자 분량의 작품을 보냄. 5월 9일, 상태가 좋아졌는데도 생레미 근처의 생폴드모졸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 발작은 없었으며, 레이 박사의 진료를 받으며 자유롭게 입원 생활. 테오가 그를 위해 두 개의 입원실 비용을 대고, 그 중 정원이 보이는 방 하나를 화실로 쓸 수 있게 함. 수행원 풀레의 감독 하에 밖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음. 주로 풍경을 그림. 6월, 사이프러스 나무를 그림. 7월, 아를을 방문한 후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심한 발작을 일으킴. 한참 동안 의식을 잃었고 기억도 손상됨. 8∼11월, 이따름 중단되기도 했지만 그림을 계속 그림. 밀레와 들라크루아를 자유롭게 모사.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시 북부 지방으로 가소 싶다는 소망을 드러냄. 브뤼셀에서 열린 뱅의 전시에 작품 여섯점을 보냄. 12월 테오에게 그림 꾸러미 세 개를 보냄. 발작 중에 물감을 삼키려고 함.
1890 1월, 브뤼셀에서 전시를 함. 툴루즈 로트레크가 고흐의 품을 비판한 화가에게 결투를 신청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처음으로 열광적인 기사가 실림.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 다시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함. 31일에는 그의 조카이자 대자로 빈센트 빌렘이라는 이름을 지닌 테오의 아들이 태어남. 2월,《꽃이 핀 나무》를 조카에게 헌정. 브뤼셀에서 안나 보흐가 고흐의 그림 《붉은 포도밭》을 400프랑에 샀다고 테오가 알림. 그 직후 다시 심각한 발작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한 달 이상이나 그림을 그리지 못함. 파리에서 열린 앵데팡당전에 그림 열 점을 전시. 5월, 마지막 발작 직후 파리에 있는 테오와 그의 가족을 방문 이후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우아즈에 거주, 처음에는 생토뱅 여관에서 지내다 라부부부 소유의 여관에서 거주. 테오가 오베르를 고른 이유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인상주의 화가들의 친구인 가셰 박사가 살고 있었고, 그가 빈센트을 돌봐주겠다고 동의해서임. 가셰는 빈센트의 그림에서 몹시 감탄했고 둘은 친구가 됨. 고흐는 오페르에서 80점 이상의 그림을 완성. 6월, 테오의 가족과 더불어 일주일 동안 가셰 박사의 집에서 지냄. 《오베르 교회》를 그림. 7월, 테오를 보기 위해 파리를 방문. 테오의 직장 생활은 힘들고 아이가 몹시 아팠음. 빈센트는 돋 오베르로 돌아와 폭풍우 몰아치는 하늘 아래 있는 밀밭 그림을 그림. 23일에 마지막 편지를 씀. 27일 오후에 나갔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와 방에 틀어박힘. 라부 부부는 그가 몹시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림. 빈센트가 심장을 겨누어 스스로 권총을 쏜 사실을 고백함. 가셰가 와서 상처를 치료하고 테오에게 소식을 전함. 29일에는 하루 종일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침대에 앉아 있었음. 그날 밤 고흐는 죽었고 다음날 오베르의 공동묘지에 묻힘. 테오와 가셰 이외에 베르나르와 탕기 염감을 비롯, 파리에서 온 몇몇 친구들이 장례식에 참석.
1891 빈센트가 죽자 테오는 심각한 슬픔에 빠짐. 테오도 1월 25일에 위트레흐트에서 사망. 1914년, 테오의 유해가 오베르에 있는 빈센트의 무덤 옆으로 옮겨 매장됨.
1962 빈센트 반 고흐 재단이 창설되었다.
1973 6월 2일 율리아나 여왕에 의해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빈센트의 동생 테오(1888~1890년 무렵)
1872년 경의 빈센트
슬픔 1882년 4월 런던, 가면 라이언 컬렉션. 빈센트의 영인인 클라시나 마리아 호니크가 데생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풍차가 있는 몽마르트르 언덕 1886년 가을 / 오테를로, 국립 크뢸러뮐러 미술관
자화상(고갱에게 헌정) 1888년 9월 / 하버드대 포그 미술관
생레미 병원 감독관 트라뷔의 초상 1889년 9월 졸로투른 시립 미술관
자화상 1889년 8월 뉴욕, 존 헤이 휘트니 컬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