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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어디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제 중요한 문제는 구약 어디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셨는데 ‘전체 구약’이라는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낯선 동행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구속할자’라고 믿었다고 했다(눅 24:21). 그런데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들의 소망은 소멸되었다. 그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책망하셨다(25). 사실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은 선지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에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
여기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사역에 속한 핵심적인 요소 하나를 언급하셨다. 즉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하여 그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높아지심의 상태에 바로 이르지 못하고 먼저 낮아지심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전체 구약에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사야 53장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선지서에서도 또 모세오경에서도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두 제자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도 전체 구약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45). 여기서 그리스도는 성경 곧 구약성경의 세부분을 언급하셨는데 모세의 율법이란 모세오경을 의미하고, 선지자란 여호수아부터 소선지까지를 의미하여, 시편이란 구약의 나머지 책들을 의미하다. 예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 결과 신약은 구약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야 하는가를 종종 보여주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가 구약의 율법에서 어떻게 예표되었는가를 연구할 수 있다. 신약은 이에대해 여러 가지 요소를 언급한다. 세례요한은 이미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다(요 1:29, 참고 36). 또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하여 사도 요한은 유월절 규례 중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인용했다(요 19:36). 또 특히 히브리서는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폭넓게 설명하고 있다(히 4:14이하).
우리는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도 연구 할 수 있다. 이 경우 그리스도를 직접 언급하는 많은 본문을 논의할 수 있는데 그 예로 마 5:1(참고 마 2:5이하, 요 7:42)과 사 53:12(눅 22:37)을 언급할 수 있다. 그 외에 선지서의 또 다른 본문도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설명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 6:19은 이사야 당시의 상황에 해당되는 본문이지만 그리스도의 설교에대한 반응을 설명할 때도 사용될 수 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 다른 예는 마 2:15에 인용된 호 11:1이다, 구약의 선지서와 관련하여 벧전 1:11은 ‘자기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한 구약의 시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도 연구할 수 있다. 신약은 그러한 적용이 가능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시 110:1을 가지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메시야가 구약의 가장 위대한 왕보다 뛰어난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려고 노력하신다(마22;41-46),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시 22:2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셨다. 제자들은 성전청결사건을(요 2:24이하) 시 69:9에따라 이해했다. 또 베드로는 시 16:8-11의 인용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적용시키면서 그 인용을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라고 소개한다(행 2:25).
이렇게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 및 시편으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하여 연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약의 역사는 어떠한가? 구약 성경에는 역사가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부분은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가? 지금부터 그 문제를 특별히 다루겠다. 먼저 필자가 읽거나 들은 몇가지 보기를 제시하겠다.
1. 몇 가지 보기
교회는 처음부터 구약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1세기 말과 2세기 속사들이 이미 그렇게 했다. 예를 들어 로마의 클레멘스는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정탐군들이 라합에게 붉은 것을 드리우라고 말한 것을 언급했다. “그것은 그것으로써 주님을 믿고 소망하는 모든 자에게 주님의 피로서 구원이 있음을 밝혔다”(I Clemens, 12). 그 붉은 색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게 한 것 같다. 다른 속사도인 바나바는 모세가 두 손으로 지팡이를 들어올린 사건을 언급했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고난의 십자가에 대한 예표이다(Barnabas, 12). 여기서는 아마도 나무로 된 지팡이가 나무로된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것 같다.
보다 최근의 보기도 많이 언급할 수 있다. 옷니엘이라는 사사의 이름은(삿 3:5이하) ‘하나님의 사자(獅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유다 지파에서 나올 사자(창 49:9)곧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 옷니엘은 유다지파였다. 이런 이유로 옷니엘은 그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가 된다. 또 예수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인데 그 뜻은 ‘여호수아는 구원이시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유명한 여호수아가 두 사람 나오는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이고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이다. 첫 번째 여호수아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지만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참고 히 4:8), 참된 여호수아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완전한 안식을 주시는 분이다. 이 두 보기에서는 구약의 사건과 그리스도에 이름에 근거하여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존재에 있어서도 평행이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에게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라’라고 했다.(삼하 5:1). 물론 그들이 우선적으로는 다윗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골육이시며 참으로 인간이시다. 또 다윗은 아브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렸다(삼하 3:22).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나사로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고 당신의 인간적 감정을 보여 주셨다.
구약이 그리스도와 갖는 또다른 관계는 그리스도와 생애와 사역이 구약의 사건에서 예표되었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백성들이 물을 요청했을 때 모세는 반석을 쳐야 했다(출 17:6).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표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고전 10:4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을 얻은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반석이 지팡이로 맞았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매를 맺으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뒤에 다시 물을 요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에게 말하라고 하셨다(민 20:8).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 번만 고난을 당하실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다시 반석을 쳤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예표를 없애버린 것이고 그것은 모세가 심한 벌을 받게 된 이유였다.
또다른 예는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한 사실에서 시작되는데(민 12:1이하) 그 당시 모세의 결혼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신부로 만드시는 행동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 여자가 흑인이었던 것처럼 교회는 죄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유로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론과 미리암처럼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적용이다.
마지막 이적용은 구약의 인물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론에서 나왔다. 구약 역사와 신약의 그리스도를 이런식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체계화한 사람은 크라프 S.G.de Graaf이다. 그의 책에는 이런 예들이 항상 나오는데 다음의 것들도 거기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그의 신앙적 행동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다(I.p.98, 한글 p157). 얍복에서의 야곱의 싸움은 겟세마네 및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싸움에 대한 약한 그림자이다.(I. p.153, 한글 p.235). 야곱이 후손을 보호하는 것)에 있어서 요셉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보호에 대한 모형이다(I. p171, 한글 p,260). 크라프는 모형 대신 반대모형을 사용하기도 했다. 즉 구약 사람들이 하지 못한 것을 그리스도는 행하셨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남아 있는 두 아들은 갑자기 생긴 죽음의 슬픔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그와 반대였는데 그분이 백성의 슬픔에 완전히 참여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완전히 거룩한 자가 될 수 있다(I p.236, 한글 p.348).
2. 이 보기들에 대한 평가
위의 보기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우선 그들의 목표는 옳다고 강조해야 한다. 구약 역사를 읽을 때 우리의 임무는 참으로 모든 역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있는가를 찾는 일이다. 이전의 신자들이 이 문제에 많은 애를 썼다는 사실은 우리 역시 도덕적 교훈에만 만족하지 않도록 자극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의도에 동의한다고 해서 그 결과까지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한 보기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라합의 붉은줄(수 2:18)은 이스라엘 백성이 라합을 공격하지 않도록 주어진 표시지만 예수님의 피는 단순한 표시가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의 수단이다. 따라서 그 줄은 예수님의 피와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지 못하며 그 둘 사이의 유사점은 표면적인데 불과하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사용한 지팡이는 십자가의 예표가 될 수 있는가? 모세는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에서 기적을 행했고 그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바다를 갈라지게 했으며(출 147:16), 그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했다(출 17:5,6). 다라서 지팡이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이다. 그것은 우리 구원의 십자가와 다른것이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셨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다. 따라서 지팡이와 십자가 사이의 유사점 역시 표면적인 것이다.
옷니엘의 역사에서 그 이름은 조금도 중요한 것으로 암시되지 않는다. 그 역사는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역사의 기독론적 의미는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여호수아와 예수란 이름상의 유사점도 기독론적 해석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 예수란 이름은 다른 방향을 의도하고 있다. 예수님은 사실 의도적으로 그 이름을 받으셨는데 그때 그 설명도 나온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유일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이룰 수 없는 근본의 구원사역을 지적하는 것이지 구약의 여호수아와 유사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골육에 대한 구약의 표현도 삼하 5:1에는 물론 그 표현이 다윗에 대해 사용되었지만 그 표현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킬 근거는 없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 나오는 표현은 인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 인간임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친척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그 말은 그와 싸우지 않고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는데 대한 표현이다. 또 다윗이 아브넬의 무덤에서 흘린 눈물도 그(와 그리스도)의 인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의 눈물에 대해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지 않았으며 그 눈물은 사실 다윗이 아브넬의 피살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표시였다.
광야에서 모세가 반석을 친 일과 예수께서 당하신 매맞음 사이의 관계는 고전 10:4에 근거된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고전 10:4은 이 관계를 증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관련된 반석은 광야에서 백성에게 물을 준 반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일도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과 아무 관계가 없다. 모세의 이 결혼은 성경에서 모형으로 제시된 사건이 아니라 단지 미리암이 모세의 지도력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계기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민 12장의 해석은 그 결혼이 아닌 모세의 지도력을 메시지에 집중적으로 적용시켜야 한다.
크라프가 제시한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 및 반대모형은 본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크라프가 본문에다 첨가시킨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본문은 그리스도와 비슷하거나 반대되는 일을 묘사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고 원하시는가를 계시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기독론적 적용은 이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크라프에 의하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은 그 신앙의 행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앙에 대한 예표라고 한다. 하지만 크라프가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그 행동을 완전히 다르게 평가하는데 즉 그의 행동은 우리 신자에 대한 모범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히 11:17)
크라프가 지적한 다른 모형도 약한 것이다. 예를들어 얍복에서 야곱의 씨름이 겟세마네 및 골고다에서 있을 그리스도의 씨름을 예표한다고 할 때 표면상의 유사점을 가지고 이 둘을 관련시킨 것이지만 사실 이 두 사건은 비슷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얍복강에서 야곱에게 우선적으로 에서가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사건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가올 하나님의 벌을 두려워하시는 것이다. 야곱의 경우엔 하나님께서 대적으로 나타나셨지만 그리스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용상의 유사점이 없다. 골고다와의 비교도 맞지 않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는 대적으로 나타나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신 일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계신다.
위의 보기들은 비판해 본다면 기독론적 해석에 대한 보기로 제시된 것들은 거의 언제나 본문의 한 요소가 본문의 문맥과 분리되고 또 종종 본문의 의도와 상치된 채 그리스도와 관련지어진 경우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기독론적 해석은 본문 전체와 관련되어야 하며 그 본문의 의도에서 나와야 한다.
<고재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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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