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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일간 항해 끝 한국에 닿자마자 부산 병원-강원도 최전방 ‘이별’
편지로 생사 확인 중 데스타 씨가 적 3명 생포…포상휴가로 재회
처절한 전장 광경 60여 년 지나도 생생히…외상후 스트레스 시달려
6·25전쟁에 참전해 전장에서 사랑을 키운 베르크네슈 케베데(왼쪽) 씨와 데스타 게메다 옹 부부가 참전 기념 메달과 훈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에티오피아 황제근위대를 주축으로한 3차 파병부대인 강뉴부대 일원으로 부인은 간호사로, 남편은 초급 지휘관으로 참전해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
“우리 부부는 6·25전쟁이 맺어준 커플이에요. 60여 년 전 치열한 격전장에서 사랑을
키웠고 결혼에 골인했죠.” 우리 국민에게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에티오피아 참전 간호사인 베르크네슈 케베데(Berknesh
Kebede)와 참전용사인 데스타 게메다(Desta Gemeda) 옹 부부에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이 이들 부부의 연을 맺게 해준
나라이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라프타에 살고 있는 베르크네슈 씨는 간호사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꽃다운
18세였던 그는 현재 슬하에 4명의 자녀와 손자·손녀 5명을 둔 80대 중반의 할머니다. 정부가 운영하는 간호학교에 다니고 있던 그녀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에 의해 선발된 두 명의 간호사(베르크네슈 케베데, 아스테르 아야나) 중 한 명이었다. 1952년 3차 강뉴부대와 함께 대한민국으로
파견됐다. 파견되기 전 6개월간 야전간호 및 전술교육을 받았고, 1년4개월 동안 한국과 일본에 머무르며 부상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과 유엔군을
간호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파병 전에는 무척 긴장했다는 그녀는 전장에서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만났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터에서 사랑을 싹틔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52년 어느 화요일, 베르크네슈 씨의 파병이 결정됐고, 이날 운명적인 만남도 이뤄졌다.
당시 케부르 제베그나 본부로 호출된 그는 물루게타 불리(Mulugeta Buli) 장군을 만나 파병 명령서를 받았고, 그 자리에서 데스타 게메다
씨를 처음 보았다.
“첫눈에 호감을 느꼈지만, 파병 전에는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지부티항에서 한국으로 이동하는
망망대해 태평양의 군함 안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고,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1953년 베르크네슈 케베데-데스타 게메다 부부의 결혼식 모습. |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남편과의 ‘진중 러브스토리’는 파란만장했다.
“에티오피아에서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 부산으로 향하는 48일간의 항해가 우리 인연을 이어주는 계기가 됐어요. 높은 파도로
심하게 흔들리는 군함에서 힘든 항해였지만 서로 의지하며 이겨낼 수 있었죠. 부산항에 도착한 후 각자 다른 곳으로 배치됐고, 우린 그렇게 헤어지는
줄 알았어요.”
‘나이팅게일’의 후예 베르크네슈 씨는 부산과 일본 아넥스 병원에서 근무했고, 용감한 데스타 씨는 강원도 최전방
전쟁터로 배치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을 연결해주는 메신저는 다름 아닌 적군이었다. 당시 전선에서 적을 포획하면 특별휴가를 보내주는
제도가 있었다. 데스타 씨가 지휘하는 부대는 언제 적의 총탄에 맞을지 모르는 전선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빗발치는 총탄 앞에서도 베르크네슈를
잊지 않았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데스타 씨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기회가 찾아왔다.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적 3명을 생포해
받은 포상휴가로 베르크네슈를 만나는 짜릿한 기쁨도 맛봤다. 둘은 전장에서 편지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며 사랑을 키웠다.
6·25전쟁 참전 당시의 베르크네슈 케베데(왼쪽) 옹과 데스타 게메다 옹. |
당시 베르크네슈 씨는 부산 야전병원 생활을 이렇게 회상했다.
“매일 오후
6시 전장에서 전투가 끝나면 의무 텐트로 부상병들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죠. 부상한 군인을 치료하는 일이
남자친구인 데스타를 치료하는 것처럼 심적으로 부담이 컸어요. 또 한편으로는 더 열심히 치료하고 간호해야겠다는 의지도 생겼어요. 당시 부산의
파괴된 건물들, 폐허로 변했던 상황이 가끔 꿈에 나타나 깜짝 놀랄 때도 있어요.”
60여 년 전 눈앞에 펼쳐졌던 처절한 광경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베르크네슈 씨는 지금도 당시 충격적인 장면이 떠오르는 외상후 스트레스를 앓고 있다.
베르크네슈 씨의 남편인
참전용사 데스타 옹은 두 번(1차·3차 강뉴부대)이나 6·25전쟁에 참전했을 정도로 용맹한 군인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뛰어난 신체적 조건과
용맹스러움 때문에 정부로부터 특별 교육을 받았다. 이후 3년 동안 전술과 전략을 배우고, 100여 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초급간부였다.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스타 옹이었지만 전쟁터에서는 1분, 1초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베르크네슈의 마음은
항상 불안했다. 자나 깨나 가슴 졸이며 데스타의 안녕을 기원했던 베르크네슈의 마음이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둘은 건강하게 에티오피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 통에 핀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으로 귀국 후 곧바로 양가의 결혼 승낙을 받았고 1953년 웨딩마치를 울렸다. 이후 슬하에 딸
하나와 아들 셋까지 얻어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행히 전쟁에서 큰 부상을 당하지 않은 두 사람은
모두 건강하게 살고 있다. 베르크네슈 씨와 데스타 옹은 현재 에티오피아 정부에서 주는 연금과 친척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돈으로는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에티오피아 물가가 몇 년 사이 엄청나게 폭등했어요. 특히, 장기화된 가뭄으로 주식인 테프 가격이 치솟아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심각해요. 그나마 한국 국민의 사랑으로 참전용사들과 가족의 생계가 나아졌고, 후손 교육에도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죠. 또
국방일보와 월드투게더의 지원과 더불어 에티오피아 현지 한국병원에서 양질의 의료서비스도 받고 있어요.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모두를 대신해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의 보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