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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1. 우리들이 봉헌하는 미사가 되기 위해서(여정 소개)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우리를 은총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기회이므로, 성찬례가 근본적인 성사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찬례, 곧 미사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미사 안에서 형식적인 부분들에만 몰두한 나머지 참된 의미를 되새기지 못한다면, 거룩한 잔치의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이 될 뿐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가 미사 시간 안에서 쉽게 분심에 빠지거나, 미사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게 되고, 나아가 우리를 이 미사 안에 방관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물론 미사 안에 지켜야 할 형식적인 요소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성찬례에 참여한 이들이 미사의 의미와 이에 합당한 능동적인 자세를 갖추려는 내적 준비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응답하는 이 거룩한 행위와 마음에 눈을 떠야 한다고 거듭 촉구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목현장에서 신자분들과 만나면서 주로 미사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곤 합니다. 실제로 지난 우리교구 시노드를 통해서 “전례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건의가 많이 나왔다는 점은 그만큼 많은 신자분께서 전례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물론 “전례”가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보편교회가 제시하는 정확한 전례의 모습이 있습니다만, 때로는 보편교회에서 제시하지 않는 문제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역과 문화, 각 교구만이 가진 전례의 문제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명확한 근거를 토대로 답을 제시한다는 것이 분명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전례적인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러한 질문들을 토대로 “우리는 미사에 어떠한 마음으로 참여할 것이냐?”라는 답을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는 우리에게 미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미사를 어떠한 마음으로 봉헌해야 하고, 미사가 지니고 있는 각 부분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 나눌 것입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는 최후의 만찬 이후 교회의 가장 소중한 보화이며, 가톨릭 신자들의 삶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거룩함에로 나아가기 위해서 미사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습관적으로 봉헌하는 미사가 아닌 그 의미와 지향에 따라 우리가 능동적으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여정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3월 2일 ‘재의 수요일’ 의미는
머리에 재 얹는 예식, 하느님께 돌아가고자 하는 참회의 고백
다가오는 3월 2일은 재의 수요일이다. 초기 한국교회는 재의 수요일을 ‘성회례’(聖灰禮)라고 했다. 거룩한 재의 의식이라는 의미다. 「천주성교공과」에서도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재’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재의 수요일을 맞으며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살펴본다.
요나서 3장에서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가 무너진다고 하자 임금은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는다.(요나 3,6)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을 꾸짖으시며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라고 하신다.
이는 구약 시대에서부터 ‘재’가 참회, 속죄와 관련돼 있음을 알려준다. 테르툴리아노, 치프리아노, 암브로시오 등 많은 교부들과 교회 저술가들도 참회와 관련해 재를 언급했다.
재는 예로부터 정화와 속죄의 목적(민수 19,9.17; 히브 9,13)으로 활용됐고 유다인들에게는 참회의 표시였다.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였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거친 천으로 만든 참회복을 입고 자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며 참회하던 관습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또 재는 인간의 나약성과 죽음에 관한 표징이기도 하다. 티끌, 흙과 같은 맥락이다. “그분께서는 저 높은 하늘의 군대를 통솔하시지만 모든 인간은 먼지와 재일 뿐이다”(집회 17,32), “모두 한곳으로 가는 것. 모두 흙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흙으로 되돌아간다”(코헬 3,20)에서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재와 같이 미미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클레멘스) 신부는 유딧이 배툴리아를 구하기 전에 성전에 들어가 머리에 재를 뿌리고 기도했던 것(유딧 9,1)을 예로 들며 “재는 구원을 간청드리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애원하는 기도의 표현”이라고도 설명했다.
이처럼 재는 인간의 나약함과 죽음, 슬픔과 속죄의 표현이다.
머리에 재를 얹는다는 것은 죄악으로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이 그분께 다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교회는 5~6세기에 공적 참회 제도를 만들면서 중죄를 지은 사람들이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재와 자루옷을 입게 했다. 7세기 로마에서는 참회자들이 지정된 사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참회복을 입고 재를 뒤집어썼다.
복자 우르바노 2세 교황은 재를 뿌리는 예식을 모든 교회가 거행하도록 권장했다. 교황은 베네벤토 시노드(1091)를 통해 “재의 수요일에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 모두 재를 받을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기억할 것은 재의 수요일에 우리가 받는 ‘재’의 의미가 무엇보다 새 생명, 부활을 향한다는 점이다. 가톨릭대학교 교수 윤종식(티모테오) 신부는 “이 재는 단순한 재가 아닌 회개이며,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기 위한 죽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유래와 의미
교회의 반석… 양떼 돌보고 순교 신심 드높이다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도들 가운데 으뜸으로 뽑아 교회를 위해 봉사할 권한을 주면서 하느님 백성인 교회 공동체의 토대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마태 16,13-19)에서 이 축일의 유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질문했을 때,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라고 답한다. 이 대답은 ‘어떤 이들’의 대답과는 달리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알려 주셨다.
이로써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로 불리게 됐고 저승의 세력도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기반이 된다. 아울러 베드로는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라는 예수님 말씀에 의해 온 세상 교회와 지상에서 예수님의 대리자가 된다.
베드로가 사도들 중 으뜸(사도좌)이 된 사실은 예수님께서 부활한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중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고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대답을 역시 세 번 들으며 “내 양들을 돌보아라”고 명령한 데서 재확인된다.(요한 21,14-17) 양들을 돌보는 권한, 즉 사목권이 베드로에게 부여된 것이다.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 된다는 의미에는 양들을 돌보는 권한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따른다는 순교의 결단까지 포함돼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말한 그 장소에서 “나를 따라라”(요한 21,19)라고도 명령한다.
베드로에게서 시작된 사도좌는 ‘사도적 계승’과 ‘수위권’(首位權)을 본질로 한다.
교회법 제331조는 “주께로부터 사도들 중 첫째인 베드로에게 독특하게 수여되고 그의 후계자들에게 전달될 임무가 영속되는 로마 교회의 주교는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이 세상 보편 교회의 목자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임무에 의하여 교회에서 최고의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직권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라고 사도적 계승과 수위권을 규정하고 있다.
교회법 제333조 1항도 “교황은 자기 임무에 의하여 보편교회에 대한 권력을 가질 뿐 아니라 모든 개별 교회들과 그 연합들에 대하여도 직권의 수위권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 2월 22일이 된 것은, 본래 고대 로마에서 이날 가족 가운데 죽은 이를 기억했던 전통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도인들이 4세기 무렵부터 2월 22일에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면서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 시작됐다. 그러다 6월 29일이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기념하는 날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례와 미사의 영성 (3) 전례 시간의 의미 : 오늘
살아있는 모든 것은 오늘을 살아갑니다. 무언가 오늘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받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인의 ‘오늘’도 단지 측정 가능한 시간적 의미의 하루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의 살아있음은 항상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그들의 오늘은 언제나 하느님과 연관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모든 오늘은 늘 하느님께 자신을 일치시켜 나가는 과정이 됩니다.
이러한 오늘 하루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축이 있다면, 아침과 저녁입니다. 아침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이시고, “높은 곳에서”(루카 1,78) 솟아오르는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아침은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우리 자신을 그 신비에 내어 맡기는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모든 오늘의 시작을 부활의 신비 속에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은 하루가 끝나고 하느님께 자신이 받은 은총에 대해 감사드리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특별히 최후의 만찬과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게 됩니다.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신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며 그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작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또한 동시에 미래의 부활을 상징하는 새로운 아침을 기다립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바치는 기도는 그리스도 사랑의 신비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모습이 됩니다. 해돋이에서부터 해넘이까지 스며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의 신비에 나의 오늘을 맞춰가는 과정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느님 뜻에 맞추는 과정이 바로 우리의 모든 ‘오늘’ 안에서 바치는 기도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시간이 성화됩니다. 우리의 유한한 오늘이 하느님의 영원한 오늘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오늘은 은혜로워지고, 거룩해집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오늘’을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 안에서 새롭게 살아갑니다.
전례와 미사의 영성 (2) 전례의 의미
“우리 신부님은 미사를 정성스럽게 봉헌하셔서 정말 미사가 은혜로워.”
“우리 신부님은 강론 말씀이 너무 좋아.”
서로 다른 본당 신자분들이 만날 때 가끔씩 이런 말씀을 나누시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숨겨진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사가 사제를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정말 미사로 대표되는 전례는 사제들을 중심으로만 이뤄지는 것일까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머리와 지체들이 완전한 공적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전례 헌장 7항 참조) 이 가르침에 따르면 전례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모두가 그분의 사제직을 수행하며 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백성 전체의 공적 예배이기에, 단지 미사나 전례를 주례하는 사제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행위가 됩니다. 그렇다면 전례가 우리 모두의 행위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 전례 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이다.”(전례 헌장 10항 참조) 즉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자, 모든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라는 것은 전례가 지향하는 모습이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는 것과 연관됩니다. 이는 우리 삶의 목적과 방향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라는 것은 전례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느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삶을 이루는 근원과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이런 측면에서 전례를 통해 모든 신자들은 ‘파스카 신비에 바탕한 하느님 사랑’에서 은총과 힘을 얻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일치’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인 우리 모두는 성령으로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할 때까지”(전례 헌장 2항 참조) 전례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파스카 신비를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거행하는 것입니다.
[응답하라 ‘전례’] 성경에서의 예배는?
우리는 정월 초하룻날인 ‘설날’을 제대로 된 새해라고 생각하여, 가족들이 모여 어른에게 세배를 드리고 함께 떡국을 먹는 명절로 지냅니다. ‘설날’의 유래에 대한 가설 중에서 ‘낯설다’에서 왔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낯선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미이겠지요.
예비자교리를 하다 보면 개신교에서 개종한 분들을 만납니다. 그분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천주교의 낯선 용어들입니다. 하느님의 호칭들인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여호와’를 ‘야훼’로 불러야 하고 교회와 관련해서는 ‘기독교 예배’를 ‘천주교 전례’로, ‘예배당’을 ‘성당’으로 용어 정리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기독교 예배’와 ‘천주교 전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배와 전례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배(禮拜, 라틴어: cultus, 어원 colere=경배하다)는 종교적 언어 영역에서 아주 일반적인 낱말이며,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초월적 존재를 섬기는 모든 종교가 행하는 의식(儀式)을 말합니다.
반면에 ‘전례(典禮, 라틴어: liturgia)’는 한자를 그대로 풀어보면 ‘규정된 예절’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주님께서 설립한 교회의 예식을 의미하여, 규정의 기준인 주님과 규정을 역사적으로 정해온 교회가 중심입니다.
보통 개신교에서 ‘기독교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교 예배’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基督敎)’는 ‘그리스도교’의 중국어 음역(音譯)이기 때문에, 본래의 음을 그대로 발음할 수 있는 현대인은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넓은 의미의 그리스도교 예배에 천주교의 고유하고 공식적인 예배인 ‘전례’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에서 천주교 전례를 하느님께 드리는 충만한 예배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화해의 완전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하느님께 충만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5항).
그리스도교에서 예배는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근원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종교적인 힘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실현하는 내적이고 외적인 행위들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예배의 기본 요소들은 복종, 경배, 신심, 헌신, 기도의 직무, 그리고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신비나 거룩함에 대한 정서적 반응 등입니다.
구약 성경에서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에 도달하는 성서적 계시의 전망에서 그리스도교 예배의 독창성은 예배의 형태가 아니라 예배의 내용에 있습니다. 특히 일반 종교에서 계시된 예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구약성경의 예배는 이스라엘의 특징적 예배이며, 유일신 하느님 경배에 집중된 이 예배의 출발점은 일명 ‘출애굽’이라 표현되는 이집트 탈출 사건입니다. 사실 이 예배는 모세에게 주어진 계시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집트 탈출을 가능하게 한 종교적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전한 하느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탈출 5,1). 곧 이집트 탈출의 동기가 광야에서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광야로 간다는 것은 주님과 만나고자 이방신들로부터 멀리 벗어나야 할 필요성 때문입니다. 약속된 땅에 정착한 다음, 우상 숭배의 금지와 특정한 희생 제물의 금기라는 특징을 갖는 예배의 형성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으로 만든 성전 건축으로 이어집니다.
스페인 전례학자인 홀리안 로페스 마르틴 주교는 구약 성경의 예배의 특징을 공동체적 차원, 내적 차원, 종말론적 차원으로 정리합니다.
첫째, 예배의 공동체적 차원은 먼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공생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백성은 주님께 속해 있기에 계약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탈출 19,5-6; 신명 6,4-9; 시편33,12 참조). 모든 예배 행위는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현존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백성의 의지를 드러내도록 방향을 잡고 있었습니다.
둘째, 예배의 내적 차원은 봉헌이나 희생 제사 같은 예배의 외적 요소들을 제외하지 않으면서, 내적 정결의 필요성과 계약에 대한 충실성을 말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사회 정의 그리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과 이루는 연대성과 연결됩니다.
셋째, 예배의 종말론적 차원은 기념적 차원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과거의 모든 사건은 주님께서 언제나 당신 약속을 지키실 것임을 증명하고, 축제와 예절에서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계속적으로 실현된 성취에 대한 보증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변화된 예배!
구약의 예배의 차원들은 신약의 예배에서도 이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 규정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에 의해서 신약의 예배가 결정됩니다(마태 5,17 참조). 그분에 의해 탄생한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령 강림이라는 기초 위에 이스라엘의 예배를 완성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한동안 성전에 자주 모여 기도하였고 유다의 종교규정을 지켰습니다(사도 2,46;3,1 등 참조). 그러나 유다인의 독립전쟁(66년-73년) 중에 로마군단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독립된 예배형태로 발전합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교 예배의 토대는 참된 예배의 ‘성전’이 되신 예수님의 현존 자체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21). 또한 하느님의 은총은 신앙과 마음의 회개와 연결되어, 하느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삶을 이끌어 갑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 은총들은 성화할 능력이 전혀 없는 옛 제사들을 대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희생 제사의 열매입니다(히브 9,13 참조).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세례성사과 성체성사 그리고 다른 성사들은 이 희생제사의 구원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 예배는 계속해서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령 안에서 한 형제로 모이게 합니다(사도 2,41-45; 4,32-35 등 참조). 예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3) 드리는 예배가 드려질 때가 올 것이라고 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이 머무는 성전(요한 2,21-22; 묵시 21,22 참조)이라고 밝히셨고, 참된 예배를 세우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신앙인 각자의 삶을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영적 예배가 되도록 신앙과 사랑 속에서 변화시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천주교 예배는 크게 전례행위와 신심행위가 있으며, ‘성음악과 전례에 관한 훈령’(1958.9.3.)은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밝혀줍니다. “전례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나 그분의 이름으로 교회가 제정한 거룩한 행위로, 하느님과 성인들과 복자들에게 합당한 예배를 드리고자, 사도좌가 승인한 전례서에 따라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도록 적법하게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 수행하는 것이다. 그 밖의 거룩한 행위들은, 성당 안에서 수행하든 밖에서 수행하든, 그러한 행위에 함께하고 주관하는 사제가 있든 없든, 언제나 신심행위라고 부른다.”
전례와 미사의 영성 (1) 전례의 목적
“신부님,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요?”
“예전에 다른 신부님은 이렇게 하시던데 신부님은 왜 이렇게 하시나요?”
우리가 흔히 전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모습을 보면, 대부분 ‘맞냐, 틀리냐’ 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전례 봉사를 하시는 분들은 더욱더 이 문제에 대해 예민해지기 쉽습니다. 맞습니다. 바른 순서와 바른 자세에 따라서 바른 전례 예식이 거행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일치와 정성스러움이 드러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마치 전례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그 모두는 전례의 목적에 따른 감사와 찬미 그리고 청원의 표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그 이유와 목적이 뭘까요? 이에 대해 전례 헌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례에서, 특히 성찬례에서, 마치 샘에서처럼,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고, 또한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이 그 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가장 커다란 효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전례 헌장 10항)
여기서 우리는 전례가 지녀야 할 중요한 두 가지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입니다. 그렇습니다. 받은 은총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전례의 상승적 측면우리는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그 은총을 통해 성화됩니다(전례의 하강적 측면). 그리고 이미 ). 모든 전례 안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이 두 가지 목적을 항상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무언가 맞냐 틀리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의 모습이 진정 하느님 은총으로 성화되는 순간인지, 그리고 참된 하느님 찬미의 모습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볼 수 있음이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 중요한 목적을 먼저 살아갈 수 있을 때 전례 때 행하는 우리의 모든 몸짓과 기도들이 진정 주님 앞에 향기로운 분향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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