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영민 목사
서론
올해 우리교회의 표어를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우리교회에 다시 새롭게 임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순절의 감격을 회복하는 교회”로 잡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날 성령의 큰 은혜를 체험하고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해서 큰 기적을 일으키고 그 사람이 큰 기적을 경험하고 일어나서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역사를 체험 하고 나서 사도행전 3장19절에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오순절의 감격을 회복한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이 다시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도 유쾌해 지고 사회도 유쾌해 지고 가정도 유쾌해 지는 이런 날이 오게 되는 비결을 사도 베드로는 한 마디로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회개가 먼저 선행 돼야 합니다.
이사야서를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옛날 유다 시대에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왕에 이르기 까지 활약을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사야는 예언 활동을 하였고, 므낫세라고 하는 악한 왕이 이 이사야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이 분이 예언을 하던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둘로 갈라져서 북왕국 이스라엘도 죄악으로 말미암아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고, 남왕국 유다도 이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라고 하는 강력한 나라가 일어나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압박 했고,
왕국 유다도 핍박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사야가 예언한지 65년 만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주전 721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깨끗하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남왕국 예루살렘에서 예언을 한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아 앗수르를 믿지 말고 애굽도 믿지 말고 오직 여호와만을 신뢰하라 여호와를 신뢰하면 너희가 견고히 설 것이라. 너희의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우상숭배 때문이요 죄악 때문이므로 죄악을 회개하고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렇게 하면 너희가 살 것이라.”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 아하스는 어리석게도 국가의 위기를 앗수르의 도움을 받아서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경계해야만 하는 원수의 나라를 본국에다가 끌어들여, 앗수르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유다에 침공해 결국은 유다를 지배하고 점령하고 압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으셔서 앗수르를 물리쳐 주시기는 하셨습니다마는 그 이후에 유다는 점점 약화되어 결국은 바벨론에 의해 주전 586년에 완전히 멸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가 멸망당하기 전에 1장 18절에서 20절까지 이 말씀을 예언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은 그것입니다.
“회개하면 평안할 것이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칼로 망할 것이라!” 이것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원리입니다. 어느 국가든지 사회든지 아니면 교회나 가정이든지 평안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합니다.
회개하면 “죄가 주홍 같아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 같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회개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지만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에 삼키울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칼은 전쟁을 상징하고 분쟁을 비유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든 사람이 살고 있는 국가든 간에 전쟁 분쟁이 계속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 사회가 회개할 죄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사회의 평안은 신자의 회개에 달려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명백한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이 사회가 평안하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신자 된 우리들의 언행심사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회개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 지금 대단히 불안해 보입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것 같고 사회적으로도 계층 간에 반목이 심화되고, 교육도 무너지는 것 같고 여러 가지로 우리는 위기감과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누가 잘못했다. 누가 잘못했다.” 정치가에게 책임을 돌리고, 경제가에게 책임으로 돌립니다마는,
오늘 우리가 명백히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사회가 불안하고 분쟁이 일어나고 우리 사회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궁극적인 책임이 불신자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책임은 먼저 신자 된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명백히 깨달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나서는 이 진리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에 가서 니느웨의 죄악을 회개하라고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지만, 요나가 그것이 싫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그 배가 풍랑 만나 파선 직전에 처해졌습니다. 그것이 그 선장의 잘못입니까? 선원의 잘못입니까? 배에 탄 불신자들의 잘못입니까? 아닙니다. 그 배에 탄 신자 요나! 이 요나의 불순종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요나 한 사람이 그 배에서 떠나니까 풍랑은 잠잠해지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원죄와 자범죄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윤리가 부패했다느니 그들의 삶에 죄악이 많다느니 그런 비난은 우리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인의 직업은 죄 짓는 것이고 죄인이라 죄 짓고 구원받지 못해서 죄 짓는데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흑인보고 너는 왜 얼굴이 검습니까? 그러면 흑인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흑인이라 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죄인보고 왜 죄 짓습니까? 죄인이라 죄 짓습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 윤리가 부패했다, 죄악이 관영하다, 불신자들이 잘못한다, 하는 얘기는 우리 신자들이 할 말이 아닙니다. 불신자들도 죄악 가운데 살면서도 어떻게 하면 이 사회를 발전시킬까 해서 정치학도 연구하고 경제학도 연구하고 미시경제, 거시경제, 화폐금융, 별별 것을 다 공부하고 유학하고 와서 이 사회를 경제적으로 어떻게 하면 발전시켜 볼까 과학을 어떻게 하면 발전시켜서 과학 진흥을 이뤄볼까 다 노력을 합니다.
최첨단의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들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한 국가나 한 사회나 기업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냐 아니면 칼에 삼키울 것이냐 하는 문제는 불신자들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회개해서 죄를 씻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회복하면 하나님의 긍휼과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교회도 부흥하고 불신자들도 그 혜택을 입고 나라가 부강해지고 평안해 지고 분쟁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께 미워한바 되고 진노의 대상이 되면 하나님이 교회로 인해서 그 땅을 저주하시고 국가 사회에 진노를 부으시기 때문에 결국 나라는 쇠약해 가다가 나중에는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느냐 잘못되느냐에 따라서 세속 국가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이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도 이 진리를 거듭 선포하지 않습니까?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께서 이 땅이 흉년이 들어도 고치시고 기근이 들어도 고치시고 재앙이 나도 고치시고 홍수가 나도 고치시고 분쟁과 전쟁이 일어나도 이 땅을 고쳐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면 땅을 고쳐주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 나라 이 국가 내 가정의 행불행이 결정 되는구나!’ 하는 이 사회적인 책임감을 처절하게 느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불신자들의 행불행은 신들인 교회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고 신자들의 행불행은 하나님께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쇄적으로 다 연관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모든 것을 거꾸로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마귀는 불신자들에게 사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망해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합니다. 또 집안에서도 우리 집안이 잘 되기 위해서는 내 아내 교회 나가는 것 막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이에요! 한 집안에 그래도 기도하는 사람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그 가정이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아이고 내 아내 교회에 안가야 우리 가정이 잘 되겠다 이거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에요!
불신자들은 아하 이 사회에 교회가 없어져야 하겠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해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사회가 잘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회는 곧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망하게 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고 우리가 바로 살아야 그래야 불신자들에게도 축복이 가는데 그 축복은 순전히 신자들로 인한 복입니다. 이 사회에 악령이 역사하면 기독교를 핍박하고 반교회정책을 쓰고 반기독교 정책을 쓰게 되지만 그래도 교회는 안 망합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고 진동하지 아니하는 나라입니다. 핍박한 자만 망합니다.
옛날 로마제국의 황제들도 사회에 어려움만 오면 그것을 기독교에다가 죄를 돌렸습
니다. 유명한 네로 황제가 한 번은 시상이 안 떠오른다 하면서 앞집에다가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불이 그만 너무 커져 버려가지고 로마 전체에 대화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비난을 하니까 이 네로가 저 불은 기독교인 짓이다. 기독교는 불로 망한다고 했다. 기독교인이 불 질렀다 해서 기독교인을 방화범으로 몰아버리고 또 때로는 주의 만찬을 할 때에 피와 살을 먹는다고 하여 식인종이라고 몰아버리고 형제자매와 입맞추라 하니까 근친상간자라 몰아버리는 등 온갖 구실로 기독교를 핍박하였습니다.
로마의 유명한 열명의 황제 네로, 디오클레시안, 도미시안, 발레리안, 갈레리우스 등 모두가 다 핍박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후 4세기 아프리카 교부였던 락탄티우스라는 사람이 가만히 역사를 되돌아보니까 기독교를 핍박하지 않은 황제는 그래도 제 명까지 살았는데 기독교를 핍박한 황제는 이상하게도 미쳐죽었거나 집안 망해 죽었거나 모두 비참하게 죽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락탄티우스가 ‘기독교 핍박자들의 죽음에 관하여’ 라는 유명한 책을 써서 기독교를 핍박한 황제의 최후가 결국 아주 비참했다 하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만약 불신자가 보기에 가족중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왜 새벽부터 일어나서 기
도하고 그러느냐? 왜 밤에 밥도 안 해주고 밥상도 안차려주고 기도하러 교회 나가느냐?”, 그러지 마시고 “그래도 당신이라도 기도해야 우리 집안 잘 될 거 아니냐. 나가라 나가라 더 기도해라 더 기도해라.” 이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신자가 잘 할 때에 그 복이 신자를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신자들을 잘 양육하고 격려해 주어야 모든 것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때로 마귀가 역사하면 거꾸로 생각을 합니다. 사회에 분쟁이 일어나고 잘못되면 불신자들이 잘못한 것이다. 우리는 깨끗한데 불신자가 더럽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것이 내 가정과 내 국가와 사회와 교회와 이 대한민국이 안정하고 평안하고 분쟁이 없어지는 것이라는 이것을 바로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2.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뚤어진 것이다.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뚤어진 것입니다. 죄를 나타내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라는 말은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이 똑바로 안가고 삐뚤삐뚤 갔다는 뜻입니다. 오늘 여기 이사야 1장 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그랬습니다. 변론하자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정한 똑바른 기준을 가지고 한 번 너희가 얼마나 비뚤어졌는가 측량해 보자는 말입니다. 한번 얼마나 잘못됐는가 따져보자 그 말씀인 겁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기준을 가지고 계신데 그것이 율법의 말씀입니다. 율법이 도덕법이고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을 잘 지켜서 천국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십계명 말씀은 워낙 똑바른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삶을 살면서 얼마나 삐뚤어졌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앞으로 나란히 할 때에도 앞에 있는 사람이 ‘기준’ 해가지고 그 뒤에 줄서지 않습니까? 기준이 없으면 똑바로 설 수가 없는 것처럼 십계명은 지금 내가 얼마나 삐뚤어져 있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똑바른 기준인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법도 십계명에 맞으면 좋은 법이고 십계명에 어긋나면 그것은 악법입니다.
제 1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 2계명은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라.”
제 3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
제 6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 7계명은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 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 9계명은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 10계명은 “이웃의 집이나 아내나 종을 탐내지 말지니라.”
이 10가지 거룩한 기준에 비추어서 우리는 얼마나 삐뚤어졌는가 하고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기준에서 삐뚤어질수록 인간사회에는 분쟁과 전쟁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의 죄는 주홍빛에서 진홍빛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 삐뚤어진 것을 다시 바로잡는 것입니다. 똑바른 기준에 다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뚤어졌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모두가 하나님의 기준에서 삐뚤어졌으면 불신자가 아무리 좋은 경제정책을 써도 이 사회가 평안할리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신자들이 삐뚤어진 상태를 지속하면 우리의 사회는 결국은 분쟁과 전쟁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 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회개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나 국가나 평안하고 행복하고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으려면 회개해서 죄를 씻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왕들은 국가 위기가 오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모두 불러 국가 안보회의를 하자” 그러지 않았습니다. 회의 보다는 오히려 왕들은 자기 옷부터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에다가 재를 뒤집어쓰고 재 가운데 꿇어앉아서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손들고, “하나님이여 우리가 죄를 범하였으니 재앙을 물리쳐 주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은 벌써 베옷 입는 것만 봐도 마음이 누그러지시고 재를 끼얹는 것만 봐도 벌써 진노 90퍼센트 사라지고 금식하면 99퍼센트 사라지고 기도하면 100퍼센트 진노가 싹 녹아져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혼 좀 내 줄려고 그랬더니 왕이 저렇게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보지 않느냐!” 하나님은 구약의 왕들이 회개할 때 재앙이 변하여 축복되게 하고 위기가 변하여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사회가 부패하고 죄악이 관영하여 위기라 생각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율법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죄의 양과 질에 따라 회개의 양과 질도 달라야 한다.
그리고 죄의 양과 질에 따라서 우리 회개의 양과 질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 율법의 기준에서 보면 조금 삐뚤어진 사람이 있고, 아주 많이 삐뚤어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죄에도 양이 있고 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형법에도 훈방해서 내보낼 죄도 있고 징역 1년 구형할 죄도 있고, 10년 구형할 죄도 있고, 법정 최고형에 처할 죄도 있고, 사형을 시킬 죄도 있습니다. 죄도 양이 있고 질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망한 이유는 예수님을 죽이고 자기 죄를 끝까지 쌓아서 채웠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5절 16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자기의 죄를 항상 채웠다. 영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keep up their sins to the limit”, 그러니까 죄를 아주 극한 한계선까지 쌓아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죄도 한번 두 번 짓는다고 하나님이 바로 노하지는 않으십니다. 지금 죄 가운데 계속 지으면서 “나 별일 없네!”, 이런분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폭풍 전야입니다. 죄의 한계에 올라가면 자동적으로 진노가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노가 오기 전에 돌이켜서 “아이고 하나님 내가 씻기를 원합니다.”라고 회개하며 돌이키시면 하나님의 진노도 그에 따른 분쟁도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요나서 1장 2절을 보면 니느웨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 되었다 그랬습니다. 얼마나 악독이 심한지 하나님께 상달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죄도 양이 있고 질이 있습니다. 죄 중에도 아주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고, 양도 많은 양의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를 해도 많은 양의 죄를 지었으면 많은 양의 회개를 해야 합니다. 아주 큰 죄를 저질렀으면 우리가 회개도 참 끈질긴 큰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도 양과 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가 어느 정도 양과 질의 회개를 하느냐에 따라서 가정 구원 교회 구원 사회구원 국가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기치고 나서 하나님께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끝!” 그런다고 용서 받습니까? 그것이 용서 받는 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회개 입니까? 회개를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고 하나님께 잠깐 잘못했다고 하면 회개한 것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Restitution”, “보상”이 이루어져야 그것이 바른 회개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에 합당한 양의 죄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을 때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남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고 나서 하나님께만 잘못했습니다.
그거 아니죠. 가서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사과해서 그 사람하고 평화하고 화목하게 지내야만 합니다. 충분한 양과 충분한 질의 회개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체적인 생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신다는 진리를 우리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결론
가정이든 교회든 국가든 사회든 분쟁을 그치고 칼에 죽는 것을 그치고 하는 것은 충분한 양의 회개와 충분한 질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을 때 참 평안이 오고 참 축복이 오고 우리도 복 받고 불신자도 복 받고 이 사회도 복 받고 정치 잘 되고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거룩한 율법, 똑바른 율법에 비추어 내가 얼마나 삐뚤어 졌는가 한 번 생각을 해 보시고 많이 삐뚤어졌다고 생각되면 이제 부흥회하기 전에 우리가 회개해서 우선 은혜 받을 그릇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죄가 다른 사람들보다 크다고 생각하시면 금식도 생각하시고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과감히 끊어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에 합당한 회개와 보상을 하시기 바랍니다. 상처 준 사람들과 화해하시고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가 자신의 죄에 합당한 양과 질에 진실된 회개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그 영혼속에 참다운 평강을 허락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시는 거룩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는 가운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평강의 기쁨을 충만히 맛보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