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캔버스가 있다. 작가는 캔버스를 응시해 쳐다보고는 이내 붓에 파란색 물감을 충분히 적신뒤 캔버스 왼쪽 맨 위 끝에서 시작해 오른쪽 가장자리의 끝까지 가로 방향으로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면서 점을 찍어 나아간다. 이때 한 줄을 모두 이룰 때까지 붓에 물감을 다시 묻히지 않는다. 다시 행을 바꾸어 반복해서 캔버스의 맨 밑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점을 찍는다. 이렇게 완성된 그림은 왼쪽에 찍힌 붓자국들은 색이 진하고 선명해서 힘이 느껴지는 반면, 오른쪽으로 갈수록 색의 농도가 옅어져 오른쪽 가장 자리 의 어떤 점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단계적으로 각 점을 따라 재현함으로써 그것이 근본적으로 한 가지 행위이며 움직임의 끝없는 반복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반복은 단조롭게 느껴 지기보다는 색채의 농담이 순환 반복하는 가운데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처럼 보인다. 이우환은 말한다 "점에서 시작하여 점으로 돌아간다. 점의 이합집산이 삼라만상의 양상이고 그 반복이 우주의 문을 가리킨다" 이것이 1973년부터 시작된 이우환의. <점으로부터> 이다.
이우환은 1936년 경남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동양화과를 중퇴하고 195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교 철학부에서 동아시아와 유럽 철학을 공부했다. 일본에서 미술평론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는데 이것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 대까지 일본 미술계에 크게 유행하던 모노하(物派)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일본 메이저 화랑인 도쿄화랑에서 첫 개인전 을 연 이후 일본과 유럽 등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관계항> 연작은 돌과 철판. 유리 같은 이질적인 재료를 결합해 자연의 문명과 관계를 드러낸 조각 작품이다.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회화 연작에서는 시간성과 행위성을 탐구했다. <바람으로부터> 연작을 통해 붓의 움직임이 한껏 자유로워졌으며 <조응> <대화> 연작들에서는 대형 캔버스에 여백이 강조된 절제된 화면을 보여준다. 이들 작업에서 작가, 작품, 공간, 관람자 사이의 열린 대화를 제시한다. 판화, 드로잉 등도 병행해 작업해 오고 있다
이우환 미술관은 일본 나오시마 (2010년) 부산시립미술관 별관 (2015년) 프랑스 아를 (2020년) 등에 지어져 있고 2029년에는 용인 호암미술관 옆에 개관 예정이다. 작가는 자신의 회화에서 표현되는 '동일성과 다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유년 시절의 기억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쌀을 씻으며 혼자 노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어머니께 "항상 똑같은 일을 하면서 어떻게 즐거울 수 있어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어쩌면 똑같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쌀을 씻을 때 마다 다르게 느낀단다. 물이 차가워서 마음이 진정될 때도 있고, 새의 지저귀는 소리에 흥이 날 때도 있지 쌀과 물과 손의 호흡이 꼭 맞을 때도 있고, (ᆢ) 어쨌든 나는 반복해서 쌀을 씻으며 살아야 한단다." (ᆢ) 그것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동일성과 차이성'에 대한 근원적인 체험이었다. -이우환. <여백의 예술>
어머니와 쌀을 씻는 행위와 관련된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참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고 흥미롭다. 한국인에게 쌀은 매일 먹는 주식으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물이다. 나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이 일화에서 개인적인 친밀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작업이 꼭 한국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유럽의 비평가들 중에 그의 작업에 대해 '동양적-오리에탈'이라고 일컫는 것에 대해 작가는 애석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순간에 나의 문제 제기는 없던 것이 되어버리며 이李라는 존재와 함께 몽땅 '동양적' 이라는 바다에 가라앉혀져 버린다." '오리엔탈'(혹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로 묘하게 작품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도 숨어 있겠으나. 그의 작업에서는 정신적인 사유의 힘과 기품이 느껴진다. 이우환은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해 왔고 그의 작업의 주제들은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철학적 사유에서 연원한 물음들이다.
최근 호암미술관이 전통공원 '희원' 내에 이우환의 신작 공간 <실렌티움 (묵시암)> 을 만들어 2025년 말부터 상설 전시를 하고 있다. 라틴어 '실렌티움(Silentium)'은 '침묵'을, 한국어 명칭 '묵시암默視庵'은 '고요함 속에서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야외 조각 1점과 실내 작품 3점으로 구성된 공간에서 작가는 "침묵 속에 머물며 세상 전체가 관계와 만남, 서로의 울림과 호흡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색 작업을 주로 해왔던 작가가 이번 <실렌티움>에서는 적극적으로 색을 사용했고 작품 속 '점'과 '원'을 통해 가장 연한 색에서 진한 색으로 서서히 변화하는 색채는 생명의 변화와 순환을 의미한다.실내의 세 작품은 플로워(Flooe) 페인팅, 월( Wall) 페인팅, 쉐도우(Shadow) 페인팅으로 이루어 져 있다. <실렌티움(묵시암)>은 이우환이 평생을 탐구해 온 관계와 여백의 개념을 공간 전체로 확장한 작업으로, 관람자가 침묵 속에서 존재와 세계의 관계를 스스로 인식하게 하는 현대적 설치 작품이다
미술관 호수 주변 '옛돌 정원' 에는 <관계항(Relatum)> 대형 조각 작품 3 점도 새롭게 선보인다. 이들 설치 작품에서는 철과 돌이라는 문명과 자연의 관계, 물질간 울림을 탐구해 온 작가의 철학이 이어진다. 이우환은 한국 단색화와 일본 모노하를 대표하는 작가로, 아시아와 유럽 미술계에 충격을 주고 두 세계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해왔다. 그가 평생에 걸쳐 사유하고 탐구해 온 질문들은 평론과 논문,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통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하얗게 칠해진 캔버스가 있다. 나는 한참을 텅 빈 캔버스를 뚫어지게 응시해 바라다본다. 거실에다 이젤을 펼쳐놓고, 젯소와 물감을 칠해놓은 하얀 캔버스를 의자에 앉아 쳐다보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던 딸이 "엄마 뭐해?" 하고 묻는다. "으응, 그냥". 딸은 "으응" 하며 지나간다. '으응?' 도대체 딸아인 뭐가 '으응'이지?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알겠다는 뜻일까? 암튼 나는 다시 하얗게 칠해진 캔버스를 바라다보고 있다. 점이라도 찍어볼까? 아님 선이라도 그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얼마 전부터 스케치해 놓은 것들을 뒤적이다가 번뜩 생각이 떠 올라 연필을 들고 캔버스에 스케치를 하기 시작한다.
아침 산책길에 파란 하늘을 쳐다보니 태양 맞은편에 달이 떠 있다 나는 지금 태양과 달 사이를 걷고 있다
ㅡ졸시, <산책>전문
나는 비루하고 치열한 삶과 내 꿈이 향하는 예술 사이에서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정표는 점점 더 뚜렷하고 선명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더 흐릿하게 사라져 가고 있는가?
김연 12yon345678@gmail.com ㅡ점을 찍고 선을 그리고 면을 채우며 여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