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기미를 말하다 / 최순덕
얼굴에 생각하는 추상화가 있다. 거무스레한 추상화가 소리 없이 영역을 넓히고 있어 심각하다. 볼에 그려진 섬 같은 흑점이다. 수묵화를 그리던 붓끝에서 뚝뚝 흘러내린 먹물 자국인가. 언제부터 내 얼굴에 검은 섬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하나의 점으로 시작되었을 기미를 예사롭게 여겼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왔을까.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걷기 시작하면서 땀이 흐른다는 핑계로 모자를 거부하며 노출에 무방비했던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햇살 앞에 너무 당당했던 무모함에 이제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얼굴이라는 가장 내 것에게 어리석게 굴었다.
본디 검은 속셈은 드러나기 마련인 게지. 거금을 들여 손질한 헤어스타일이 모자에 가려지는 게 싫어서였다. 모두 멋있다고 입을 모으는 머리를 향한 칭찬의 달콤함에 젖었다. 단맛에 썩어지는 이빨처럼 그렇게 얼굴의 오만한 미소 뒤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찰랑거리는 풍성한 숱 많은 머리카락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싶은 엉큼한 속내의 그림자인 게다. 차단력 높은 썬크림을 덕지덕지 바르는 사람들을 향해 은근히 비아냥거리기도 한 유비무환의 기본도 모르는 나였다. 비타민D 형성을 위한 명분을 앞세워 콧등이 빨개지도록 햇볕을 쬔 무식의 소치였다.
얼굴 마사지를 하던 전문가의 눈에 걸려든 기미가 충격을 가한다. 피부밑 최전방까지 돌진해 있는 기미를 그냥 뒀다간 금방이라도 초토화될 듯, 즉시 피부과에 가라고 다그친다. 호미로 막을 일을 괭이로도 막지 못할 예견에 아뿔싸! 속이 뜨끔거린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줄 왜 몰랐던가. 꽤 오랫동안 물밑 작업이 진행되었을 터인데. 피부밑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호시탐탐 표출의 기회만 노리고 차곡차곡 축적된 멜라닌 색소들의 기습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피부 껍질을 들치고 얼룩진 추상화를 확 긁어내고 싶은 충동이 수시로 일렁거린다.
볼에 그려진 기미는 섬처럼 버티고 앉았다. 고작 섬 하나에 너무 호들갑인 것 같지만 문제는 외딴섬이 아니라는 것이다. 섬의 뿌리는 결국 뭍과 닿아있으니 내 얼굴의 얼룩무늬는 섬이 아닐 수도 있다. 물 밖으로 고개 내밀지 못한 숱한 섬들이 있을 터이다. 기미 주근깨에 효과가 좋다는 크림 광고에 눈길이 간다. 커버력 강한 화장품으로 콕콕 찍어 덮어보지만 섬을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다. 농도 짙은 먹물로 그려진 추상화 같은 검은 섬은 자꾸만 선명하게 솟아오른다. 그리 쉬 가라앉을 섬이라면 입 앙다물고 솟아올랐으랴. 섬인 듯, 낙서 같은 추상화가 내 얼굴에 자리 잡았을 때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섬은 뭍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파도의 지청구를 온몸으로 받아주는 섬은, 작아도 섬이라서 행복한 자신의 존재를 배척하지 않는다. 나름의 존재 이유를 안고 존재할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주체의 정신이지 그 자체가 아름답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아름다울 리 없는 내 얼굴의 섬 같은 추상화지만 아름답게 봐주면 되지 않을까. 늙어가는 피부를 수용하고 깊어지는 주름 물결을 따라서 춤추듯 일어선 삶의 무늬이니까. 미끈한 얼굴에 일필을 휘갈겨 놓은 대가의 작품도 아니고 낙서는 더욱 아닌 것을.
나는 그것을 나에게 주는 상패라 여긴다. 역발상의 발상으로 섬으로 앉은 검은 그림자를 수용하려 한다. 저승꽃이 활짝 핀 것도 아니고 아직 완전히 점령당한 것 아니니까. 말하자면 아직도 겉모습의 미모에 관심을 보이는 미성숙의 늙음 앞에서 완숙한 늙음의 경지에 들지 못한 나에게 잘 익어가라고 격려하는 상장을 주는 게다. 마음은 언제나 세월을 역행하는 세월 속에서 더 이상 역행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마음과 몸이 삐걱거리는 이인삼각의 달리기를 이제는 멈추라는 신호탄이다. 박자 맞춰 동행할 것을 유도하면서 얼굴에 종지부를 찍어놓은 것이리라. 놓을 것은 놓고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하라고 올바른 노년의 길을 안내하는 표지석이기도 하다.
섬이 되어 살아온 나의 지난날을 되새김질해 본다. 시커멓게 탄 속내를 눈물로 짓누르며 가슴에 섬을 만들었던 세월이 기어이 비집고 올라오는 게 아닌가. 내 얼굴에 그려지는 검은 추상화를 비로소 있는 그대로 가볍게 어루만질 수 있어 다행이다. 실팍하지만 뚜렷한 생의 무늬가 생각이 무르익은 나잇살 끝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달리던 인생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버린 가파른 골짜기일지라도 세상의 모든 삶은 그만큼 치열했노라, 침묵으로 말하는 애정이다.
맑은 바닷물 속에 일렁이는 검푸른 해초처럼 아직은 농도 옅은 수묵담채화다. 해저화산이 분출하듯 불쑥 솟아오른 내 얼굴의 기미다. 햇살 좋은 곳에서 잘 익은 과일처럼 광대뼈를 중심으로 측면 공격해 온다. 정면의 눈길을 살짝 피하여 양옆 볼때기에서 세력을 키우는 반칙적인 공격을 어찌할까. 세월과 타협하며 활동을 멈추고 있던 내 안의 휴화산이 드디어 활화산으로 되살아난 걸까. 가슴에 쌓인 온갖 삶의 고뇌가 어느 날 문득 분출하여 굳어진 화산재인지도 모른다. 어기차게 달려온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얼굴로 분출되는 뜨거운 삶의 흔적을 다독여 주고 보듬어 줘야 할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