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밭 골 외딴 마을에 딱 두 집이 있는데
윗집 단아한 기와집엔 이 선비 내외가 살고 있고
아랫집 초가삼간은 부채 대바구니 죽부인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파는 박씨네 집이다.
얌전한 양반 선비와 우락부락한 상것 박씨는
서로 어울릴 턱이 없지만 부인네 둘은 가까운 사이다.
삼 십대 초반의 박씨 마누라는 이 선비 부인보다 두 살 아래인 데다
서로 가문이 달라 마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한다.
이 선비 부인은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우아하고 덕스러운 자태에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입이 무거워 말을 아낀다.
☆☆☆
얼굴이 제법 곱상한 박씨 마누라는 수다쟁이다.
'마님, 제 얘기 한번 들어 보세요.
글쎄, 쌍놈이 아니랄까 봐 툭하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퍼붓고
이렇게 사람을 개 잡듯 두드려 팹니다.
방물장수한테 대바구니 한 두름 주고
박가분 한통샀다고 그 지랄을 떨지 뭡니까.”
멍든 눈에 달걀을 문지르며
“아이고 내 팔자야. 그 짐승하고는 못 살겠어요”하자,
이 선비 부인은
바느질을 하며 빙긋이 웃기만 한다.
박씨 마누라가 이 선비 부인을 붙잡고
늘어놓는 수다의 8~9할은 제 남편 흉보는 일이다.
박씨 마누라는 이 선비가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걸어가는 걸
먼발치에서 보며 너무나 멋진, 너무나 양반티 나는 모습에 반해
찔끔 가랑이를 조이며 혼잣말을 한다.
“하루를 살더라도 저런 남자와 살아야 하는 건데….”
☆☆☆
어느 날, 박씨가
부채와 죽부인을 가득 지고 외장을 나가며 마누라에게
“서너 군데 장을 돌다 사나흘 후에 돌아올 것이여. 문단속 잘 하고 있어.”
하며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이튿날 점심나절,
윗집의 이 선비 부인이 내려왔다.
“마님, 어쩐 일이세요?”
“친정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전갈을 받고 친정 가는 길일세.
수고스럽지만 자네 남편 저녁상 차려 준 후에 우리 집에 올라가
우리 남편 저녁상도 좀 차려 주게나.”
“마님, 걱정마세요.
마침 우리 신랑은 외장을 나가 사나흘 후에나 옵니다.
선비 어른 세 끼 식사는 제가 차려 드릴 테니
얼른 친정에나 다녀오세요.”
☆☆☆
저녁나절, 박씨 마누라는
자기 집 씨암탉 한 마리를 잡아 이 선비 집으로 갔다.
남편이 돌아와 물으면
족제비가 물어 갔다고 둘러댈 참이다.
이 선비는 푸짐한 저녁상을 받고는 적이 놀랐다.
더 놀란 것은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박씨 마누라가 분 내음을 풍기며 술상을 들고 온 것이다.
마주 앉아 술을 따르는데 과히 싫지는 않았다.
밤은 깊어 가고 소쩍새는 우는데
적막강산 대밭 골엔 단 두 사람뿐.
술상을 치우고 이부자리를 펴 주고 술 취한 이 선비가 쓰러지자
박씨 마누라는 촛불을 끄고 치마끈을 풀었다.
“에게게. 이게 뭐야?”
박씨 마누라는 한숨을 토해냈다.
가느다란 두 다리 사이에
열 살 아이 자지만 한 걸 억지로 세워 놓고
서너 번 ‘깝죽깝죽’대더니
그 질로 나 뒹굴어져 코를 고는 게 아닌가.
☆☆☆
그 잘난 선비라는 사람이
'그나저나 마님한테 큰 죄를 지었네.'라고
중얼거리며 옷을 추슬러 입고
집으로 내려온 박씨 마누라는 그만 남편이 그리워졌다.
“내 신랑이 으뜸이야. 마님이 불쌍하네.
그런 사람을 신랑이라고 데리고 사니. 쯧쯧쯧.”
☆☆☆
그 시간, 박씨는
삼십 리 떨어진 청풍장터의 객줏집 구석진 방에서
술상을 치우고
뒤꼍 우물가에서 멱을 감고 와
벽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었다.
‘똑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들어왔다.
바로 이 선비 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