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4년 10월 19일 금요일 오전10시
장소 : 대구지회 사무실
모인이 : 강미영, 김선희, 김채희, 우귀옥, 우윤희, 이경희, 이지연
앞풀이 : 옛이야기 [부스럼쟁이, 눈곱쟁이, 코흘리개]
공지사항 :
-10월 달모임 - 저녁모임 신설에대한 토론이 있습니다. 되도록 참여 부탁드립니다.
-11월 회원연수 - 년 2회 필참 연수 중 하나입니다. 반드시 참석 바랍니다.
일시 : 11월 30일 토요일 오전 10시 -1시/ 지회사무실
우윤희씨의 [우리동요 100년]
- 2025년 다이어리 가격 11,500원 입금 바랍니다. (신청자만)
-회보글쓰기 마감 10월 30일 까지입니다.
-책읽어주기 정책연수 : 11월 9일 토요일 영천시 장애인 종합 복지관 강당
발제 : 우윤희 [대구 지명의 유래]
-각 지역의 지명유래가 재미있다.
-아이들과 함께 듣기 좋은 이야기이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어 좋았다.
-매일 살아가는 곳이 새롭게 보이고 달라보인다.
-지명의 유래와 역사이야기를 듣고 그 장소에 다시 가보면 달리 보일것 같다.
-중구 일대는 옛 정취를 살려 관광산업에 힘쓰는것 같다.
-서울의 청계천이나 을지로가 힙지로로 불리는 등 변신을 하는것 처럼 대구도 레트로 느낌의 관광명소가 많이 생기는것 같아서 둘러보기 좋다.
-북성로 공구빵이 기억에 남는다.
-대명동 : 대명동(大明洞)이라는 동명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에서 연유된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명나라제독 이여송과 함께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다.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작전계획 수립에 항상 참여했고, 조선군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도 우리 조선군과 전략 전술상 긴밀한 협의를 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장수였으며, 그의 활동과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그에게 대구시내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해 주었다. 그 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그는 자기가 받은 땅을 모두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겨 편안한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누리는 행복이었기에 고향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 생각에 눈물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 었다. 이에 두사충은 최정산(현재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지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성당동 : 성당동의 지명유래는 ‘상댕이’ 또는 ‘성댕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고 불렀는데 그 유래는 다음 두 가지로 전해지고 있다.
1.길지(吉地)로서 인명의 피해가 없는 좋은 땅이란 뜻으로 성당못을 중심으로한 산의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어서 성당으로 불렀다 한다.
2.천주교 성당이 있었다고 하여 성당동이라고 명칭 되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80~90년전 현 대성사 위쪽(두류산 서쪽 중턱)에 천주교 별장이 들어섰다. 천주교는 박해를 받으며 대한제국말까지 이어오다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별장이 대구지역 독립운동 장소로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 폐쇄되었으며 1960년대 두류산 공원 개발로 순환도로가 개설될 때까지 그 터와 사택이었던 집이 있었다. (제보자 : 달서구 성당동2동 710-4, 김헌순, 80세, 남. 채록일자 2008. 7. 21)
-만촌동 : 형제봉
2군사령부 뒤에 있는 형제봉(兄弟峰)은 숫형제봉, 암형제봉으로 나뉘는데 옛날에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선비들이 모여 밤 12시에 제를 지내고 내려오면 비가 내릴 정도로 영험했다고 한다. 형제봉의 전설은 누나랑 남동생이 서로 봉(峰)을 쌓았는데 동생은 옷섶으로 날라 쌓고, 누나는 치마폭에다 날라서 쌓으니 누나봉이 높았다. 그래서 누나봉이 더 높으니 동생이 화가 나서 발로 밟아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누나봉은 동생봉보다 지금도 그 높이가 낮다고 한다. 이 산 아래를 ‘형제봉골’ 또는 ‘양지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보자: 만촌2동, 최성학, 76세, 남, 채록일자 2008.6.30)
다음 모임 : 10월 24일 달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