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05
1월14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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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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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ptB-fPBq_o
(이재형 마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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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약함, 결핍, 무력함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좀 더 자주 드는 느낌이기에, 보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연민(憐憫)입니다. 이웃의 딱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의 슬픔을 함께 공감하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아이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거의 자동으로 연민의 정이 솟구칩니다. 부모가 뒷받침해줘도 살아가기 벅찬 이 세상, 의지 가지 하나 없이 홀로 서려니 얼마나 고생일까? 부모 없다는 이유로 어디선가 혹독한 상처나 차별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서 한 가지 든 생각. 하느님께서도 나를 바라보실 때 그런 마음이시겠지. 오랜 세월 그토록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나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나, 다양한 결핍과 상처로 허덕이는 나, 과감히 털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함을 머리로서는 잘 알고 있지만,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가련한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심정도 연민의 정으로 가득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단어 역시 연민입니다. 중병이 깊어져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만 있는 병자를 향한 친구들의 연민이 그를 치유와 회복의 현장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의 강한 연민의 시선을 중풍 병자를 향했습니다. 즉시 연민의 시선은 구원의 손길을 불러왔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약함, 결핍, 무력함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약함이 이웃과 하느님으로부터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 치유와 회복, 자유와 구원으로 연결되니 말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 진정한 위로와 위안을 받습니까? 감미롭고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예쁜 꽃다발? 고급지고 맛있는 간식? 물론 위로가 될 것이겠지만, 지극히 한시적인 위로입니다.
가장 큰 위로는 극심한 고통의 순간, 누군가가 내 옆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긴 어둠의 터널 속을 지날 때, 옆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무익한 것처럼 여겨 지지만 함께 괴로운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느끼는 바이지만 어려운 순간 동고동락한 사람들, 위기의 순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종종 혈육보다 더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깊고 어두컴컴한 인생의 동굴 속에 갇혀있을 때, 기꺼이 그 동굴 속으로 들어와 줌으로써 굳은 결속 의지를 보여주었기에, 혈연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그러하십니다. 그분은 임마누엘 하느님,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꽃피는 좋은 시절은 물론 폭풍의 계절에도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혼돈과 방황의 시절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십니다.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살이가 힘들면 힘들수록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머릿속에 떠올려야겠습니다. 그분은 어떻게든 우리와 굳게 결속되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기쁨은 물론 슬픔까지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틈만 나면 우리를 보호하고 변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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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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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기적이 줄어들면 고해성사도 줄어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시며 병자를 치유해주십니다. 병자의 치유가 곧 죄의 용서 증거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는 서로 믿음을 보완한다는 뜻입니다.
병을 고치는 기적이 정말 고해성사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께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려고 사람들은 성당이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죄를 용서해주면 더 완전히 용서받는다고 여깁니다. 누구에게 고해성사를 받아도 죄가 용서받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병을 고쳐주는 기적과 죄를 용서해주는 기적이 별개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학교에서 “기적을 하지 않아도 거룩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을 봐라. 그는 기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성인이다”라고 교육받았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어쩌면 기적을 하지 않아도 나의 의로움과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아직 성사 이전의 회개를 외치는 이이기에 그가 기적을 한다면 굳이 예수님께 갈 필요가 없어서 기적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적의 힘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적’을 ‘믿음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복자품에 오르게 하려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기적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하고 성인이 되려면 두 개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이 의인이었는지 알려주는 방식은 곧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고 세상에 파견하실 때 악령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는 능력까지 주시며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미사나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그 이전에 병을 고치는 능력까지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제들은 그것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서 이런 기적이 나올 수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도 당신에게서는 기적이 나올 수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마귀가 심하게 들린 사람이 있다고 고쳐달라고 청했습니다. 신부님은 ‘난 안 되는데!’라며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하였습니다.
구마경을 외우고 하니까 마귀가 신부님을 비웃었습니다. 마귀는 신부님의 죄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기가 죽으면서도 ‘어찌 네가 감히 교회의 사제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자들을 그 마귀들린 사람 둘레로 빙 둘러앉게 하신 다음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비웃던 마귀는 점점 말이 없어지더니 식은땀을 흘리고 괴성을 질러대더니 결국은 그 사람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예수님 당시 병과 죄는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것이고 죄를 용서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사제가 고해성사는 주면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여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만약 이 믿음이 확고하였다면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길어야 3개월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몇 번이고 병자성사를 드리며 치유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의사의 말을 더 믿고 치유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저 자신이 스스로 의인이 아님을 시인한 셈입니다.
정말 기적이 없다면 의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제도 그렇지만 신자들도 그렇습니다. 사제가 기적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안수를 달라고 머리를 들이밀어야 하고 병자성사를 또 달라며 병이 낫지 않으면 한 달에 한 번은 또 병자성사를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물론 병자성사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한 번에 안 되면 곧바로 또 하셨습니다.
벳사이다에서 사람들이 소경을 고쳐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먼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안수를 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라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마르 8,24)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번에는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제야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마르 8,25) 되었습니다. 물론 이 치유는 상징적인 다른 의미도 있지만, 어쨌건 예수님께서 될 때까지 여러 번 노력하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도 사제에게 될 때까지 병자성사를 청해야 합니다.
병자성사의 한 부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의 ‘종부성사’가 되는 것이지 병자성사의 본래 의미는 아픈 이에게 기름을 발라 치유해주는 성사입니다. 제가 수원교구 영성관에 있지만, 작년 죽산성지도 잠깐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미사를 자주 나오시는 어떤 분이 병자성사를 신청하셨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 병자성사는 자신의 본당에서 하시지 왜 나에게?’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성사를 부탁받으면 무조건 해 드려야 한다는 사제의식이 있기에 미사 후에 따로 병자성사를 해 드렸습니다. 갑상선 암을 수술하기 며칠 전이어서 병자성사를 드리는 중에 병이 나아 수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마 뒤 미사를 하고 있는데 한 분이 한없이 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목에 스카프를 한 것을 보니 그분인 것이 확실했습니다. ‘수술하셨구나. 그런대 왜 저렇게 많이 울고 계시지? 잘 못 됐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그분과 남편이 남아계셨는데, “신부님, 기적이에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왜요?”라고 물으니 “조직검사까지 다 끝나서 암이 확실했는데, 의사가 열어보니 암이 아니라 염증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항암도 안 해도 된대요. 염증만 제거했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주님께서 해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자매님이 믿음이 강해서 은총 받으셨네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아,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도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이란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본당에 가게 된다면 한 달에 한 번은 아프신 모든 분에게 병자성사를 주어야겠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없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의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제도 그렇지만 신자도 그렇습니다. 사제가 그런 믿음이 없다면 신자들이 청해야 합니다. 사제를 귀찮게 해야합니다. 예전에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도 있지 않았습니까? 기적이 많아져야 고해성사도 많이 보고 성체성사도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지금보다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지금보다 훨씬 많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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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12 :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어느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2절)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말씀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분 앞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군중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일이 종종 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젖어있으면, 천상 은총의 약으로 새로워지고 싶어 해도 묵은 습관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치유되기가 힘들다. 우리가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세상의 잡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 즉 말씀을 향하여 가야 한다.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셨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7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셨으니,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말씀이심이 분명하다. 그분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그들 신앙의 본질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발언이었다. 이러한 죄는 레위 24,16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분개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하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 밖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이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을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11절) 하시자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요를 가지고 걸어 나갔다.
주님께 대한 신앙이 이처럼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중풍병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기보다 친구들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이웃의 도움을 통하여 갖게 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지붕을 벗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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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은 왜 그랬을까?>
14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곧 ‘사람을 구원하는 권한’인데, 그 권한은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용서하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이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중풍은 하느님만이 고치실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만으로 중풍을 고치신 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일이고,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권한’이라는 것은, 어떤 일을 하는 권한과 그 일을 하지 않을 권한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더 용서하고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이지만, 사람에 따라서 그 용서와 구원을 못 받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용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용서받으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으니까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주시는 용서를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자기가 거부함으로써 용서를 못 받게 됩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마르 2,3-4)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이 군중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어서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병자를 내려보낸 일은, 병자 자신을 포함해서, 그들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이 장면에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얼마나 사람이 많았기에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사람들은 그 병자를 위해서 자기들 사이에 통로를 만들어 줄 수는 없었을까? 뒤의 12절을 보면, 치유된 병자는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들어올 때에는 사람들 때문에 지붕으로 들어왔는데, 나갈 때에는 지붕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나갔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조금만 옆으로 비켜 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통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왜, 처음에는 안 비켜 주었을까? 나중에는 가능했던 일을 처음에는 왜 못했을까? 그것은 분명히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2절)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은 듣고 있었지만, 제대로 듣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는 것을 내버려두셨을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조금만 옆으로 비켜 앉아서 통로를 만들어 주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런 복잡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상황을 내버려두신 것은,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시험’을 주신 것으로, 또 군중에게는 스스로 ‘내적 변화’를 하라고 촉구하시는 ‘무언의 가르침’을 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여기서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은, ‘그들의 믿음과 회개’로 해석됩니다. ‘그들’이라는 말에는 병자 자신도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의 믿음과 회개를 보셨고, 또 그들이 용서 받을 준비가 잘 되어 있음을 보셨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구원’까지 포함된 말입니다. 7절의 율법 학자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이 좀 더 잘 드러나게 하는 배경 같은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증명하시려고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중풍을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그의 죄부터 용서하신 것은, 병자 자신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거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이 더 급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병이 죄 때문에 생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의 치유보다 용서와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9절의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둘 다 어렵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권능을 목격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게 되었다.’가 ‘믿게 되었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율법 학자들의 반응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가 싫어서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자의 치유를 보고 크게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놀라기만 하고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다는 말은 자주 나오는데,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기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치유의 은총과 구원의 은총을 받지만, 구경꾼들은 놀라기만 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어떤 간절함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만나도 구경꾼으로만 남아 있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나라를 구경만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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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누군가 저에게 “당신은 천사를 본 적이 있나요?”라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저는 날개 달린 천사를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 같은 분들은 많이 만났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저에게 “당신은 예수님을 본 적이 있나요?”라로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저는 예수님을 눈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같은 분들은 많이 만났답니다.” 지금은 제가 운전하고 다니지만 1년 동안 플러싱에서 부르클린 한인 성당까지 차량 봉사를 해 주신 형제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제게 천사와 같았습니다. 메모리 카드가 고장 난 노트북을 깨끗하게 고쳐 주고 비용을 받지 않은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형제님 덕분에 저는 작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목마름을 풀어준 그분은 제게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천사와 같은 분, 예수님과 같은 분을 만나셨을 겁니다.
오늘은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카톡으로 보내 준, 천사 같은 분의 글입니다. “폴에게는 이번 회의가 대단히 중요한 기회였다. 그리고 회의는 매우 잘 끝났다. 그는 어서 가서 아내와 상사에게 결과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동료와 함께 브루클린의 사무실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빈 택시가 보였다. 출퇴근 시간에는 드문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그들은 목청을 높여 택시를 부르며 택시를 향해 일제히 뛰었다. 그런데 거리를 서둘러 건너가려다가 그만 과일 노점상의 진열대를 건드리고 말았다. 일행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뛰었지만 폴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택시 문을 붙잡고 일행이 폴을 불렀다. “빨리 타, 비행기 놓치겠어.” “먼저 가,” 폴은 길을 다시 건너 과일이 널브러진 보도 쪽으로 걸어가면서 대답하였다.
폴은 노점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장님이란 사실을 그때서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폴은 무릎을 굽히고 과일과 야채를 집으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길거리는 엄청나게 많은 행인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아무도 걸음을 멈추고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갈 뿐이었다. 과일을 모두 다 진열대에 올려놓은 폴은 깨끗하게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팔 수 없게 된 상품을 옆에 따로 빼놓았다. 그는 여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눈물범벅인 채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폴은 지갑을 꺼내 약간의 돈을 그녀에게 쥐어 주며 말하였다. “이 돈이면 손해 본 걸 보충할 수 있을 겁니다.” 말을 끝낸 폴은 돌아서며 발걸음을 띄었다. “선생님,” 그녀가 폴을 불렀다. 폴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선생님이 예수님이신가요?” “아, 아니요,” 그가 대답하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과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쭤본 겁니다.”
뒤돌아선 폴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흘렀다. 그는 택시를 잡으려고 한참을 뛰어다녔다. 겨우 택시를 잡았지만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퇴근길을 가득 메운 차량 행렬 속에 거의 갇혀 있었다. 결국 그는 비행기를 놓쳤다. 그리고 그날이 금요일 저녁이었기 때문에 다른 비행편도 모두 만원이었다. 폴은 그날 밤 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묵었다. 낮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한 가지 질문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 당신을 예수님으로 여긴 적이 있었는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중풍병자를 도와준 4명의 이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4명의 따뜻한 마음으로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랜 시간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던 중풍병자에게 4명의 이웃은 천사와 같았을 겁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4명의 이웃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일을 포기하고, 이웃을 도와서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우리는 법과 원칙에 따라서 형성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거래로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사회에는 필요한 것들이 있지만, 삶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민 연대, 국경없는 의사회, 아름다운 가게, 무료 법률 상담, 명동 밥집, 청년 문간’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종교인들이 많이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바로 이런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법과 원칙에 따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봉사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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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어제 복음에서 나병 환자에게 ‘정’(淨), 곧 깨끗함을 선물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에게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어떤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옵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자, 그들은 지붕을 벗겨 내고 구멍을 내어 그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그분께서는 어려움을 헤치고 자신에게 다다른 그들의 정성과 행동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는 병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가 더 급하고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율법 학자들에게 ‘하느님 모독’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은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이 가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들것을 들고 걸어 나가는 중풍 병자의 모습은 그의 병이 나았음은 물론,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증명합니다. 이로써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울까요? 이 질문은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가 밀접히 관계되며, 둘 다 오로지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비된 병자를 일으키시는 분,
죄를 용서하시는 분, 곧 참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오늘 중풍 병자의 치유와 용서는 예수님의 ‘권한’과 사람들의 ‘믿음’이 만나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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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죄의 용서는 하느님께 미루어 놓고, 자기들끼리 단죄하기 바빴던 바리사이의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 사회의 갈등을 반성합니다. 우리 나라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 국가들 가운데 사회 통합 지수가 늘 꼴찌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서로 포용하고 화해하고 보듬는 데 너무 인색한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예수님과 중풍 병자라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묵상은 중풍 병자를 들것에 뉘어 데리고 와서 지붕까지 뚫고 예수님과 만나게 한 네 사람에게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이름도 출신도 사상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죄인으로 낙인 찍힌 중풍 병자와 함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이를 치유의 사건으로 명확히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이 땅 위의 반목과 대립, 그리고 단죄와 갈등의 한가운데서 보여 주셨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난 용서 못 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 사람은 안 볼 거야.” 와 같은 말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죄와 그 때문에 생긴 상처에 짓물러 터진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신앙인은 이를 이겨 내는 내적 힘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무작정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허덕이는 우리네 삶에 다른 이의 도움이 함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인내는 형제애 안에서 더욱 견고해집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위대한 영웅의 초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혼자 아픔을 감당하는 것과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용서 안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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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상율 바실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중풍병자 한사람이 옵니다. 예수님께 오는 그 길은 참으로 힘든 길이었습니다. 움직이기 힘든 중풍병자였다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더욱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힘든 길을 이겨내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네 사람이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려 보냅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상반됩니다. 중풍병자를 낫게 해주기 위해서 지붕까지 벗겨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신의 이웃인 중풍병자의 치유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히려 예수님을 불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음을 알려주시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으로 가족들과 이웃들의 죄를 용서 받게 할 수도 있고, 우리들의 잘못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도 있고, 우리들이 생각지도 못한 시기의 말과 험담들이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안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내민 도움의 손길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도 있고, 우리들이 무심코 내민 손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길 수도 있습니다. 주위를 한번 둘러 보십시오. 과연 나를 통해서 가족들과 이웃들 그리고 사람들이 무엇을 얻고 있는지? 기쁨과 평화를 얻고 있는지? 아니면 나를 통해서 상처와 고통을 얻고 있는지?
주님께서 마음의 중풍병자인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일어나 상처와 고통의 마음을 걷어가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거라”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화와 사랑을 주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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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
나병환자에게 외적인 깨끗함뿐 아니라 내적인 깨끗함을 베풀어주신 예수께서는 며칠이 지나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오셨다. 카파르나움의 집이라 함은 시몬 베드로의 집을 말한다.(마르 1,29) 아마도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의 복음선포를 위해 시몬의 집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 다시 오셨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고,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 앞까지 가득 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마침 중풍병자 하나를 네 사람이 들고 왔으나 들어갈 수가 없음을 알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벗겨내고 구멍을 내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병자를 내려 보냈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욱더 기막힌 것은 그렇게 내려 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대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집약하여 보도하는 책으로 착각하면 큰일이다. 기적은 분명 놀라운 일이고 늘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는 기적이 대수가 아니다. 마귀 들린 자, 나병환자, 오늘의 중풍병자 등 어떤 모양의 물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은 예수께 있어서 그리 큰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일들을 계기로 더 큰 일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그것은 믿음과 용서로 나타난다.
기적을 베푸는 자는 예수님이시나 그 기적을 유발시키는 힘은 기적을 베푸는 자에 대한 믿음이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지붕까지 벗기면서 예수께 내려 보낸 네 사람은 적어도 믿음에 있어서는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고, 또 고쳐주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왔으며, 들것에 실려 있는 병자도 같은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뜻밖에도 ‘죄의 용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죄(罪) 때문에 병(病)이 온다는 생각은 이미 구약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사실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생각이다.
오늘날 누가 아프거나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고해소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도덕적인 잘못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의 사람들은 달랐다. 굳이 죄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구약의 율법이 온갖 악성 피부병을 ‘부정(不淨)’하게 본 것은 사실이다.(레위 13-14장) 레위기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죄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정(不淨)함을 죄의 맥락에서 보았던 것이다.
욥기를 보아도 그렇다. 욥이 악마의 시험으로 죽을 피부병에 걸려서 갖은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지 않는가?(욥 9,2.12.20)
예수께서도 38년이나 앓아 누워있었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는 “자, 지금은 네 병이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른다.”(요한 5,14)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죄와 병은 결과론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관념론적으로 한데 묶여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먼저 ‘죄의 사함’을 베푸신 것이다. 예수께는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본 율법학자들의 머릿속에 예수의 발언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땅위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바로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병자의 행동에 의해 증명된다.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은 병이 다 나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10절)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이러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데는 관심이 없고, 중풍이 사라지고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의 말대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12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하고 또 감사해야 할 일은 믿음이 용서를 만났다는 사실이며, 그래서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고, 예수께서 바로 그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오늘날 웰빙(Well-being)시대를 사는 우리들 중에는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바라기보다는 건강한 육체나 어려운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지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건강한 몸을 지녔다거나 경제적으로 잘 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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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이사 43,25;44,22). 그런데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합니다. 아니,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인류를 태워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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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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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2,5)
<나도 천사가 되자!>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들것에 들어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데,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리셨을 예수님의 땀과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네 사람의 정성(믿음)을 묵상해 봅니다.
지난 주님성탄대축일 낮미사 때 두 명의 자매님과 한 명의 형제님께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들 모두는 누군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기도 속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 성당에 오게 되었고, 또한 신자들의 기도 속에서 6개월 간의 예비신자 교리를 잘 받고 기쁘게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 주변을 관심있게 살펴보면 나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천사,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천사가 됩시다! 주님께서는 천사인 나의 믿음을 보시고 너를 살려주십니다.
너의 천사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 모두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땀'이고, 예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실 '우리의 땀'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은 모두의 구원을 애쓰신 예수님의 땀흘림이고, 연중시기는 이 땀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이 묵상과 함께 예수님처럼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흘리는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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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
마르코 2,1-12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일하시듯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깁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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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신이 하는 일을 바라보는 모습에 따라 크게 소명(Calling)과 생업(Job)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은 필요한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세상에 무언가 이바지를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즐거움과 만족감이 훨씬 높았습니다.
이렇게 소명(Calling)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행복도는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명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요? 자기 일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찾아 나갔을까요? 이 모든 것이 자기 일에 대한 믿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바로 믿음은 커다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온 갈릴래아 땅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근처에 왔다는 말만 들으면, 하던 일도 모두 팽개치고 예수님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여들면 겁이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정치인입니다. 군중을 모으고 있는 사람이 자기네 편이면 상관없지만, 자기네 편이 아니면 큰일이기에 신중하게 살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정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제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이 제관들에게 예수님의 발언과 행동을 보고하면서 뜻을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서 들것을 달아 내려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신성모독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얘야”라고 부르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특별히 믿음을 가상히 여길 때 이 사랑스러운 말씀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중풍 병자의 믿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으며 죄의 용서까지 해주셨습니다.
물론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이제부터는 이 세상에서도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치유하지 않으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쳤다는 것은 하느님의 방법으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무조건 믿고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과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만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이 크게 대조가 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나요? 계속 묵상하면서 주님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하며 굳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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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확률이 아닌 진짜 확률>
1,000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자기 자신과 유명 인사들 여럿을 두고 각각 얼마나 천국에 갈만한지를 평가하게 했습니다. 유명 인사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성녀 마더 데레사로 79%의 표를 얻었습니다. 이어 오프라 윈프리가 66%, 마이클 조던 65%, 다이애나비가 60% 순이었습니다. 반면 아내 살해 혐의를 받는 전직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은 19%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몇 %가 “그렇다”라고 응답했을까요? 자그마치 87%였습니다. 성 마더 데레사 보다 천국에 들어갈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마더 데레사 수녀님보다 훌륭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자기 삶은 변화하려 하지 않으면서 막연하게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막연하게’가 아닌 구체적으로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키워야 합니다. ‘막연한’ 확률이 아닌 ‘진짜’ 확률을 높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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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적 중풍 병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 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 병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병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5.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희생적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주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랑은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리고‘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심판관 노릇을 하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마음과 영혼에,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것은 끊임없이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인생 여정을, 앞으로의 미래를 온전히 맡겨야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 병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한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무실 중앙에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라는 글귀를 크게 붙여놓았습니다.
제가 기도에 너무 소홀했다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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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처럼 삽예수님처럼 삽시다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좋고 아름답고 고맙습니다. 날마다 잠깨어 문밖을 나서면 맨먼져 바라보는 것이 언제나 거기 그 자리 밤하늘의 북두칠성과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겨울 날씨가 차니 공기도 맑고 하늘의 별들도 초롱초롱 맑고 밝습니다. 아주 예전 ‘소망所望’이란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차가운 날씨
청정淸淨해서 좋다
맑고 깨끗하다
살짝 덮인
회새 구름 사이에서
쏟아지는 햇빛
온유溫柔해서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청정淸淨과 온유溫柔를
겸할 수 있다면”-1997.12.2.
어제 세상을 떠난 어느 분의 부음을 듣고 저절로 나온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삶의 끈을 놓지 말고 살았어야 하는데. 삶과 죽음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이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지 거의 확인이 안되는 존재감이 아주 약해 보였던 참 안타깝게 생각되는 분입니다. 두문불출하기에 살아 계시는 동안 거의 볼 수 없었던 분입니다.
반면 삶의 귀감이 되는 노익장老益壯의 두 분 삶의 내용도 잊지 못합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한결같이, 모순적이지만 말그대로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청정과 온유를 겸해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구순 조각가, 최종태 “일할 때는 청년이고, 일 안하면 환자예요.” 조각가의 삶을 산 지 67년째, 평생 사람 조각하며 “아름다움” 고민. “하느님과 노는 게 일하는 것”. 요즘도 하루 10시간씩 작업 몰두.’(가톨릭평화신문2021.12.12.15쪽)
참 치열하고 한결같은 삶, 나이를 초월한 영원한 청춘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또 한분의 학자 또한 대동소이입니다. 길다 싶지만 유익하고 사랑이 가득 담긴 미담이기에 인용합니다.
“보스코는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 10시간 이상 끈기있게 의자를 덥힌다.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쓴다. 그의 직업이 번역작가이다 보니 번역하는 이들의 노고도 알고,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니 본문에 충실하며 그 내용을 성실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는 요즘도 80 노인이 책상 앞에서 한 줄 라틴어 문장을 놓고 반나절을 푹푹거리며 이곳저곳 책들을 뒤지면서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서 안다.
동네에 들어서니 리디아 아주마를 비롯하여 동네 아짐들이 약속이나 한 듯 고추대를 지팡이 삼아 마을길을 한 바퀴 돌고 있다. 작년에 상처한 허영감도 모처럼 지팡이를 짚고 산보를 다녀오는 중이다.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구호가 문정 마을에도 들어온 것 같다. 내가 기필코 보스코를 산보길에 떠밀며 걷게 하는 까닭도 이 구호 때문이다. 더구나 여든 나이에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휴천재;전순란)
참 치열한, 한결같은, 진짜 살아 있는 삶입니다. 옛 사막교부들의 유일한 관심사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누어 있기 보다는 앉아 있는 것이, 앉아 있기 보다는 서있는 것이, 서있기 보다는 걷는 것이 더욱 살아 있다 생각됩니다. 삶이 무기력해질 때는 벌떡 일어나 하늘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며 걷기를 권합니다. 우울증과 치매 예방에는 걷기가 제일이라 합니다.
위에 소개한 두 독실한 가톨릭 형제들은 참으로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두고 살아가는 신망애의 노인이 아닌 어른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삽시다-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논쟁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리의 갈등처럼 보입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자신들을 통치할 임금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현실주의적 관점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하느님을 대리한 사무엘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어지는 사무엘의 설득은 왕권주의, 국가주의, 병영 군국주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사람들을 노예화하고 비인간화 하는지 역사를 통해서는 물론 지금도 공감하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성군같은 임금이나 지도자보다는 폭군같은 임금이나 지도자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요.”
이어지는 사무엘의 설득은 구구절절 공감이 가고 부정적 인류 역사가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됩니다. 현실을 택한 결과 산산조각 나는 이상이요 인간의 노예화, 비인간화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난제중의 난제입니다. 힘없는 정의가, 힘없는 평화가, 힘없는 진리가 때로 탐욕의 힘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막무가내 현실주의적 관점을 주장하며 하느님을 대변한 사무엘의 설득에 승복하지 않았고 마침내 이들의 승리로 끝납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백성을 이길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참으로 성군같은 지도자에 깨어 있는 시민의식의 민주주의 국가가 궁극의 답이겠습니다만 참 힘든 숙제입니다. 여기에 거의 근접하고 있는 나라가 아마도 현재의 독일일 것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인 예수님을 공부하고 실천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성숙한 분별력의 지혜와 용기와 사랑, 믿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래야 현실과 이상, 명분과 실리의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 동료들의 지극 정성의 형제애의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지체없이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와 더불어 육신의 치유를 명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대로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통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중풍병자는 물론 동료들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통해 크게 깨닫고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체험한 모든 사람은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이런 예수님같은 성군의 지도자에, 이런 체험의 사람들이라면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예수님을 닮아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참된 성숙한 민주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참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훈련이, 진리의 지혜의 훈련이 참으로 우리를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변모시킬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다음 화답송 시편이 오늘 강론에 답을 줍니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시편89,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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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tLSWJxt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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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느 쪽이 더 쉬우냐?"(마르 2, 9)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낼
정도의
믿음을
보시는
주님이시다.
함께 어우러지는
믿음이다.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는
늘 함께 한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말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신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예수님의 치유는
그 어디에도
갇혀있지 않다.
갇혀있지 않기에
사랑은
역동적이며
치유는
명쾌하다.
지루하고
진부한
방식을
내려놓는
의식의 참된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더 쉬운 것이
더 시급하고
더 본질적인
것이 된다.
더 빠르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과
하나되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로
인간의 소외감을
치유하신다.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원래부터
하느님과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이다.
사랑은 우리의
고립과 소외를
근본적으로
치유한다.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는
곧바로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힘찬 진리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과 행위로
우리를
치유하시는
참된
하느님이시다.
용서와 치유를
동시에
선택하시는
주님이시다.
율법을
뛰어넘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이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
가장 쉬운 것이
된다.
사랑이신
하느님 쪽이
더 쉽다.
용서와 치유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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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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