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눈물이 나지?
나는 요즈음 순간 순간 눈물이 후욱 올라왔다가 가만히 주저앉곤 한다.
분명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닌 것은 안다. 그렇다고 엄청난 감동이 밀려와서도 아니다.
인간에게서 표출되는 순도높은 감성을 만났을 때 내가 잔잔한 감동을 받는 것같다.
가슴의 문이 순간 열렸다 닫히면서 대상과 소통하고 닫히면서 눈물을 밀어낸다.
성당에서 성지순례 기념 사진전을 열었다. 오픈식날 주관자의 가족이 총동원되어 분위기를
훈훈하게 했다. 남편은 손녀를 보아주고 딸은 백일된 아이를 안고 마이크를 들었다. 주관하는
데레사님이 딸에게 축가를 요청하여 불러주기 위해서다. 딸의 발치에는 기저귀 가방이 소품처럼
놓여 있다. 노래가 절정에 이르며 고음으로 이어지다가 끝이 나는데 새근거리며 자던 아기가
마지막 소절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깨어 울지도 않는다. 거침없이 음을 올리는 동안에도 잘 자던 아기가 뜬 눈 위로 내 눈이 오버랩되면서 눈물이 핑 고였다 들어간다. 목소리가 맑고 고와서 듣고 있는 동안 소름이 돋더니 하루 종일 행복으로 이어진다. 드레스를 차려입고 무대에서 노래한 가수보다 더 깊은 감동으로 이어졌다. 제 몸이 악기인 목소리만으로 타인을 감동시킨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은혜가 있을까.
그녀의 어머니 또한 끼로 똘똘 뭉친 여인이다. 건드리는 장르마다 빛을 발하고 그 분야의
인연들과 훈훈함을 만들어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글공부 하기를 권했다. 순순하게 받아들이며
열중하더니 6년이 넘어서면서 등단을 거쳐 첫 작품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첫 작품집을 받아든
그녀는 새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애를 쓴다. 몸은 가볍고 날개를 단듯 행복해 보인다.
가족들의 건강한 호응을 받으며 두려움 없이 끼를 발산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또 한번 눈물이
지나갔다. 나와 관계를 맺은 누군가가 행복해 한다면 나는 몰래 행복하다. 가식없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세상의 감상 중 최고의 감상이다. 그래서 방송3사의 연말 시상식을 즐겨 보는
편이다. 이름이 호명될 때 수상자들이 보여주는 순수한 표정을 보는 재미가 내 취미이다. 벅차고
기뻐하는 기운이 내게로 안기는 것 같아서이다.
박성광이라는 개그맨의 메니저가 견습생 딱지를 떼고 정직원이 되었다고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평소에 공짜를 바라지도 않고 참 소박하고 갓 잡은 일에 충실한 여성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정직원이 되었다는 소식에 내가 그녀의 어머니인듯 안심이 되었다. 박성광이 축하한다고 고기를
사 주겠다고 하자, 절대 안된다고 거절한다. 너무나 비싸서 자신은 먹을 자격이 안된다고 나중에
잘 하면그때 먹겠다고 야무지게 의사표시를 한다. 아무리 달래도 비싸서 먹을 수가 없다더니 무한 리필 고기집을 찾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다. 하는 수 없이 그 곳을 찾아가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 날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아 오늘은 고기를 마음껏 먹겠구나. 많이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곳에 왔으니 이제 구울 고기를
가지러 가야지....'
이렇게 하여 그녀가 고기를 가지러 가는 동안의 몸짓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아직 세상 때를 덜 타서 순수하고 반듯하여 보는 이가 감동한다. 몸은 크지만 엄마 앞에서 잘
걸어보이려는 아이처럼 천진스러움까지 갖추었다. 긴장된 직장인의 모습만 보다가 그 날의
그녀가 걷는 모습은 어리광이 묻은 춤처럼 보였다. 얼굴에는 웃음이 퍼지고 팔에는 긴장이
풀렸다. 보드라운 양손을 털듯이 가볍게 흔들며 잔걸음으로 통통거리며 고기를 향해 간다.
자유롭고 행복해 보여서 또 눈물이 스쳐간다. 그 모습이 또 보고싶어서 인터넷을 뒤져 다시
보았다.
평생 소원이 작가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는 분이 문학교실을 찾았다. 나이 80앞인 그
분은 아직도 공부를 하고 글을 즐겨 쓴다. 전문적으로 배우거나 잘 다듬어 쓰지는 않지만 오래도록
글쓰기를 즐긴 흔적이 보인다. 배우고 익혀가는 동안 글 실력이 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군들
한 두 편 멋지게 쓸 기량은 있게 마련이다. 문학교실에 5년 동안 다니고 등단을 하였다. 흥분되고
감동어린 그녀의 얼굴을 보는 즐거움으로 나는 또한번 행복을 맛보았다. 평생 내가 몇사람에게나 그러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까 싶어서이기도 하다.
'수미네 반찬'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40년 남짓 밥을 지어먹었는데도 맛갈스러운
반찬 만들기의 조언을 들으면 도움이 된다. 나는 그프로그램을 보면서 종종 팔에 소름이 돋고
눈물이 스쳐간다. 교포들이 있는 곳으로 반찬을 가지고 찾아간 곳이 일본이다. 거기서 엄마의
반찬 맛을 보고싶어 줄지어 기다리다가 묵은지찜을 한 입 넣고 기막히다는 듯이 음미하는 모습을
바라보아도 눈물이 고인다. 그리움의 맛, 엄마와 고국이라는 공기가 같이 입안으로 들어가서 일 것이다. 객지에서 병명없이 아플 때, 김치찌게와 된장찌게에 소주 한 잔이면 거뜬히 털고 일어나더라는 어느 수녀님의 증언에서도 익히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지난번 아시아경기대회 때 축구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순간, 나는 선수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금을 졸이며 관전해야 하는 입장인데 저들에게 군대가
면제된다는 대명제 아래 공을 차고 있으니 가족들은 얼마나 애가 타겠는가. 어지간한 애국심이
아니고는 정당하게 군대 문제를 면제받고 싶은 것은 보통 사람의 공통적인 감정이다. 그런데
아들들이 해냈다. 복합적 감격으로 눈물이 그냥 후두두 떨어진다. 나는 안다. 떨어진 눈물의
의미를.
대학교 때 나는 학교대표 탁구 선수였다. 체육대회때 리그전을 치러 우승자가 대표선수가
되는데 두 해 동안 뛰었다. 마지막 시합에서 우승만 하면 전체우승이 되는 시점에 내가 단식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1대1로 비기고 3세트에서 18대 20으로 지고 있었다. 축구장에서 우승을
하고 돌아온 선수들이 탁구전이 진행중인 곳으로 몰려오더니 경기를 중단 시킨다. 그들은 나를
가운데 두고 으쌰으쌰 응원을 펼치더니 누군가가 이제 됐다고 장담을 한다. 하얗게 질려있던 내
얼굴이 붉어지더라는 거다. 그리고 내리 석점을 먹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우리 선수들은 함성을
지르며 경기실을 빠져나갔으나 나는 그 자리에 콩자루 무너지듯 풀썩 주저앉았다. 그날 이후,
나는 경쟁이 붙는 일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평생 선수 생활을 할 것도 아닌데 점수를 내려고
긴장하는 것이 너무나 부담스럽고 재미가 없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경쟁구도를
피했다. 자연스럽게 어떤 경기를 보더라도 지탄을 하지 않는 편이다. 저들은 최선을 다 하는 것이기에 안타까워도 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