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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현대사36 -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군부 강경파 숙청
1968~1969년 한반도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건이 일어났고, 그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해군 첩보선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안에서 나포되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 말에는 울진,삼척에 18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무장부대가 침투했고, 다음해 4월 15일에는 미군 해군정찰기 EC-121기가 북한 상공에서 격추되었다. 한마디로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계속되었다.
1.21 사태는 한반도 위기의 시발점이었다.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로 침투, 세검정 고갯길에서 한국 군경과 교전 도중 무장게릴라 대부분이 사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북에서 내려온 31명의 무장대원 가운데 1명은 생포되었고 4명이 도주했으며 나머지는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달아난 4명 가운데 1명은 사살되고 3명은 북으로 귀환했다. 이 사건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얼어붙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피력했고, 사회 전반에 걸쳐 반공체제와 국민통제장치를 강화했다.
그러면 1.21 습격사건은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도대체 백주대낮에 청와대를 습격하고 대통령을 살해하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그것은 누구의 생각이었던가. 만일 청와대 습격이 성공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다면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한국전쟁에 이어 제2의 6.25를 예상하고 그런 명령을 내렸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1.21 청와대 습격사건은 김일성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김창봉(인민무력부장), 허봉학(대남총정치국장), 김정태(무력부부장 겸 특수작전국장) 등의 군부 강경파들이 작성한 ‘남조선해방과 통일전략계획’이라는 극좌적 군사모험주의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군부 강경파, 특히 이들의 지도자격인 김창봉이 군권을 장악한 데 이어 당권까지 넘보며 김일성 후계를 이으려는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대남사업 업적을 통해 김일성에게 신임을 얻고 당시 사실상 2인자였던 노동당 조직부장 김영주를 끌어내리고 당내에서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군부 강경파는 당 지도부의 국방력 강화노선에 편승해 군벌화 경향을 곳곳에서 보였다.
당이나 정권기관에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고 명령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등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특히 특수부대는 특수훈련이라는 명목으로 공공기관을 마구 습격해 간부들을 납치하거나 민가를 기습하는 등 갖은 횡포를 저질렀다. 또 도처에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부업농장이란 것을 짓고 거기다가 술공장,과자공장을 만들었으며, 경치 좋은 곳에는 특수부대 휴양소라 해서 별장을 짓고 주변의 처녀들을 납치 능욕하는 짓을 자행하기도 했다. 민족보위상 김창봉을 비롯한 군 수뇌들은 평남 온천과 강원도 세포 등 약수터에 별장을 지은 뒤 그곳에서 만든 밀주로 연일 파티를 벌이면서 호색방탕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게다가 조직지도부장 김영주에 대해 “저놈을 저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열어 제거해야 한다.”는 험담을 거침없이 하곤 했을 정도로 당에 대해서도 안하무인격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방자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노동당 지도부가 군부 상층부를 항일빨치산계와 그 심복들로 구성해 놓고 군 문제를 군부에 일임했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사항은 물론 김일성이 지도하는 당 정치위원회나 군사위원회가 관장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군사행정이나 군 인사문제,작전문제 같은 것들은 군부 지도부에 위임햇던 것이다. 결국 국방력 강화를 최우선시하는 노선과 정책, 그리고 김일성의 절대적 신임에 편승한 군부는 ‘군대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 군벌화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1968년 9월경 김영주를 통해 김일성에게 보고되었고, 김일성은 즉각 군에 대한 검열을 지시했다. 김영주는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중앙당 부부장급, 각 도당의 부위원장급 이상의 핵심간부 중에서 2백 명을 뽑아 당 검열 그루빠를 조직하고, 민족보위성에서부터 집단군,군단,사단에 이르기까지 당 검열그루빠가 파견되어 2개월 동안 군을 샅샅이 훑었다. 검열 결과 군 수뇌부가 별장과 농장을 지어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이 드러났고, 특수훈련을 이유로 도당,군 인민위원회 등의 사무소를 습격한 사실,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강등시키거나 고문,구타를 감행한 것 등이 폭로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대남 작전과 관련된 ‘남조선해방과 통일작전계획’은 드러나지 않았다. 2개월에 걸친 검열사업이 끝난 후 이에 기초해 1968년 11~12월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군단장,사단장들을 개별적으로 중앙당으로 소환했다. 이때는 인민군 특수정찰국의 부국장,부장,과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비밀전략계획’이 수립되어 있다는 게 밝혀졌다.
그 계획은 1969년 1월 인민군 당 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전모가 밝혀졌다. 계획에 직접 참여했던 박경수가 사건의 전모를 폭로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그때까지 개별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던 청와대 기습사건, 울진.삼척사건 등 1967~1968년 사이에 일어난 대남작전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총체적인 전략 중 하나였음이 밝혀졌다. 동시에 남한에 파견된 무장부대들이 저지른 민간이 학살행위, 그리고 1.21사건 후 그 책임을 부하직원들에게 뒤집어씌우고 많은 관계자들을 제멋대로 처벌한 군벌주의적 살인행위 등도 밝혀졌다. 또한 이들의 행동은 오히려 남한 주민들의 반공의식만 강화시켜 놓아 대남사업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으로 평가되었고, 김일성의 유일적 영도와 김영주의 당 장악을 반대한 반당행위도 비판되었다. 김일성이 이 사건에 대해 “이들의 죄상을 종합해 보면 김창봉,허봉학,김정태의 죄행과 당에 끼친 해독은 최창익의 8월 종파보다 더 크다.”고 말했을 정도로 심각한 해악을 끼쳤던 것이다.
결국 사건을 주도한 김창봉,허봉학,김정태 등은 1969년 1월 인민군 당 전원회의에서 군벌관료주의자로 낙인찍혀 숙청되었다. 이로써 공명심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1967년의 무장소조 침투, 1968년의 청와대 기습사건과 울진,삼척 침투사건으로 이어지는 군부 강경파의 계획은 일단 중단되었고,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에도 제동이 걸렸다. 동시에 ‘제2의 6.25’라는 참극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그 후 1972년 5월 남북공동성명을 위해 남한의 이후락 정보부장이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그에게 1968년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관련해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때 김일성은 “남북 사이의 오해를 풀고 화해한다는 의미에서 사과의 뜻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달라”면서 그 사건은 자신이 지도하는 노동당 수뇌부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군부 일각의 좌경 모험주의자들의 행동이었다고 설명하고 사과했다고 한다.
그러면 ‘제2의 6.25’를 불러올 뻔한 ‘남조선 해방과 통일전략계획’은 어떻게 작성되었던 것일까?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북한 군부는 통치집단의 중추적 핵심이며 아성이었다. 군부는 민족보위성에서부터 집단군,군단,사단에 이르기까지 빨치산 출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군은 정권의 어느 부분보다도 가장 강력한 김일성 수호집단이었다. 당시 군부의 핵심 가운데에는 민족보위상 김창봉, 대남국장 허봉학, 특수작전국장 김정태, 집단군 사령관 정병관, 김양춘, 유창봉 등의 강경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대남사업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 ‘남조선 해방과 통일전략계획’이란 것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계획의 실질적인 작성주체는 특수작전국장 김정태와 그의 지휘를 받던 지경호, 이재호, 박경수 등이었다. 김정태는 김일성의 둘도 없는 동지였던 김책의 둘째 아들로, 소련 군사아카데미에서 「현대군사학」을 공부한 군부 엘리트였다. 전략계획은 김정태의 지휘 아래 3인이 만든 것을 군 수뇌부가 최종 검토해서 확정한 것이었다. 이 계획을 실행하는 데는 군과 더불어 노동당 대남사업총국이 함께 나섰다. 1967년 5월에 일어난 박금철,이효순 사건으로 대남사업총국장 이효순이 제거되면서 그 후임으로 군부 강경파의 일원이었던 인민군 총정치국장 허봉학이 옮겨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신임을 받고 있던 허봉학은 대남사업총국장으로 가면서 사실상 대남사업의 전권을 부여받았다. 게다가 허봉학은 자리를 옮기면서 자기 추종자들을 여럿 부부장급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해서 군부와 대남공작 부문의 합작으로 계획을 진행했던 것이다.
북한 현대사37 - 남조선해방과 통일전략계획
그러면 ‘남조선 해방과 통일전략계획’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간단히 말하면 남한 민중을 발동시켜 남한에서 혁명이 성공할 수 있도록 북쪽이 정치적,조직적으로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략계획은 전체 7단계로 되어 있었고, 시기적으로는 크게 준비,실행,결속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군부 강경파의 계획에 따르면 1967년부터 1968년 초반까지 약 1년은 준비단계, 그 다음의 실행단계는 1968년부터 1969년 사이의 기간에 해당한다. 실행단계는 여건조성 단계와 실제 실행 단계로 나누어진다. 마지막 결속 단계는 1970년대 초반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먼저 이 계획에는 준비단계인 제1단계에 6가지 과제가 설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① 특수부대 조직 및 훈련, ② 남한 도시,농촌의 지하조직 강화, ③ 무장공작소조 투입을 통한 거점 확보, ④ 산악거점의 무기비축, ⑤ 대사변 그루빠 재교육, ⑥ 임명간부사업 등이었다. 이것을 좀더 살펴보자.
첫째, 특수부대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문제는 전략계획 자체가 정규무력 중심이 아니라 특수부대를 기본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었다. 북한은 이미 1960년대 전반기에 전반적 군사력 강화, 자주국방노선을 제기하면서 특수전을 중시해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대부대 활동이 제약되어 있는 조건에서 기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무장소조 부대를 말하는 것이다. 무장소조부대는 3명,5명,10명 단위로 편성된 전투조로 이뤄져 있었다. 특수부대는 유사시에 남한 전역에서 습격,파괴와 군중동원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군부 강경파의 전략계획에 언급된 ‘특수부대’는 인민군 내에 창설된 특수부대가 아니었다. 일반 특수부대에서 다시 인원을 선발해 ‘남조선 해방과 통일전략계획’을 수행할 새로운 특수부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대표선수격이 124군부대, 283군부대, 567군부대, 198군부대 등이었다. 특수부대는 각 지구(혹은 지대)-방향-전투조로 편성되었다. 여러 전투조가 모여 한 개의 방향(중대)을 구성하고, 여러 방향이 모여 지구 또는 지대가 된다. 그리고 여러 지구,지대가 모여 부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특수부대의 병력은 부대의 임무와 맡은 지역에 따라 달랐으나 대개 8천~1만 명이었다. 따라서 전략계획에 투입될 특수부대의 총 병력은 3만~4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 특수부대는 실제 훈련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남한의 도청을 습격하는 모의훈련을 위해 도 인민위원회를 습격했으며, 청와대 기습이나 그밖에 특정 공장 습격을 훈련하면서 북한 청사, 특정 공장, 기업소를 훈련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특수부대원은 도당 위원장, 군당 위원장을 한밤중에 습격해 포대를 씌워서 감금하는 불법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또 특수부대원들은 하루에 2,3백 리를 뛸 수 있는 강인한 전투능력을 배양하는 혹독한 훈련을 받는 대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무제한의 특권을 누렸다.
둘째는 남한의 도시와 농촌에서 지하조직을 강화하고 이를 군사조직화하는 문제였다. 이를 위해 허봉학이 관장하던 대남사업총국, 특히 대남연락부나 조사부가 남한의 지하당조직을 강화하고 그것을 전투조직으로 조직화하는 문제를 추진했다. 그 대략적인 과제는 이미 포치된 통일혁명당 같은 조직을 확대하고 공작원을 대량 파견해 분산적으로 포치된 지하당을 점차 체계화하는 것, 그리고 이 조직을 확대해 유사시에는 군사화, 무장화할 수 있도록 조직체계를 강화하고 확대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과거 공작원들에게 개별적 지하공작을 맡겼던 것을 무장공작소조와 개별적 지하공작을 병행하도록 전환했다.
셋째, 무장공작소조를 투입해 각 지역별로 공작거점을 확보하는 과제였다. 우선 주요 산악지대에 ‘지탱점’을 삼을 수 있는 거점, 이른바 소규모 해방구를 만드는 데 관심을 돌렸다. 주요 산악지대의 민가나 작은 부락을 통째로 해방시키고 그 마을을 명목상으로는 남한 정부 통치지구이지만 실제로는 해방지구가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또 농촌지대에 조직거점을 만들고 유사시에 무장소조원들이 남파되어 이 거점을 지탱점으로 삼는다는 계획도 잡혀 있었으며, 도시 거점을 위해 주요 도시의 외곽 산악지역에 거점을 만든다는 계획도 들어 있었다. 군부 강경파는 1967년 6월 초부터 20일까지 약 보름 동안 집중적으로 남한에 선전공작대를 파견했다. 이때 전라남북도, 강원도, 충북, 경상남북도 지역에 260~270명이 파견되었는데, 이 가운데 150~160명 정도가 사살되고 불과 1백여 명 남짓만 귀환했다. 좌익모험주의가 낳은 결과였다.
선전공작조에 이어 1967년 7월초부터 8월 20일까지 약 한 달 반 동안 무장한 조직공작조가 전라,경상,충북,강원지역에 집중침투했다. 지하조직을 급속히 확대하고 대도시 인접지역에 지하당 조직을 포치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무장소조를 집중 침투시켰던 것이다. 조직공작조는 6~8명으로 조직되었고, 전체 1백여 개 분조가 침투했다. 모두 전략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이와 함께 1967년 군부 강경파는 동해안,서해안에서 어로작업하는 어선들을 납북해 어민들을 교육시킨 뒤 되돌려보내는 공작사업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북한 지역을 관광시키고 물질적 대우를 한 다음 납북 어민들에게 친북 성향을 고취시킨 뒤 고향으로 다시 내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967년 봄부터 1968년 가을까지 동,서해안에서 납북된 어선만 해도 2백여 척이나 되었고, 납북 어민은 1천 5백여 명에 달했다.
넷째는 유사시에 남한 지하당 조직이 군사화,무장화할 수 있도록 지역단위로 구축된 산악지점에 무기를 비축한다는 것이었다. 지하당 조직이 군사화,무장화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무기를 남한에서 조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북한의 각종 총이나 기관단총, 박격포 등 무기를 동서해안으로 반입해 산악 거점의 요소요소에 은닉,비축했다가 유사시에 조직원들이 무장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다섯째, 이미 조직되어 있던 ‘대사변 그루빠’를 재교육시켜 유사시에 신속히 비합법적으로 남한에 진출할 수 있도록 준비태세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결정적인 계기가 오면 북한에 있는 남한 출신들을 자기 출신지역으로 보내 혁명을 조직,지도할 수 있도록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대사변 그루빠’라고 불린 이들은 군단위,도단위에서 선발되어 유사시를 대비한 조직을 편성되어 있었다. 군부 강경파는 전략계획에 따라 각급 정치학교에 이미 조직돼 있던 ‘대사변 그루빠’들을 재교육한 뒤 남파할 수 있도록 새 교육임무를 시달했다. 군사훈련을 위주로 하되 대상에 따라 간부급은 3개월, 초급간부급은 6개월의 교육과정을 밟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유사시에 이들이 무장소조와 함께 신속하게 자기 지역에 진출할 수 있도록 준비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여섯째, ‘임명간부’의 사업문제였다. 북한은 이전부터 남한 출신 간부들에게 남한 해방을 전제로 면장,군수 등의 임명장을 주었는데, 이들을 ‘임명간부’라고 불렀다. 전략계획에는 당시 진행중이던 임명간부사업을 신속히 매듭짓고 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작하도록 계획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군부 강경파는 이 준비를 실제로 집행하기 위해 조직기구를 개편,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특수부대를 장악,지도운영할 특수정찰국 기구를 신설,확대했으며 노동당의 대남사업기구를 대폭 확대,신설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한에 공작원을 침투,복귀시키는 작전을 유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대남사업총국 안에 작전국을 신설한 것이었다. 작전국으로 하여금 군대,당,정권기관에서 파견하는 공작원들을 실어다주고 데려오는 임무를 전담하도록 했던 것이다. 대남공작은 물론 따로따로 전개하되 공작원의 복귀는 유일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실행단계에 해당되는 전략계획의 제2단계는 ‘여건조성 단계’였다. 시기적으로는 1968~1969년까지의 기간이 이에 해당되며, 그 중요 목표는 먼저 남한에서 극도의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국가통치기구를 마비시키는 것, 다음으로 노동자,농민,청년학생들을 반정부투쟁으로 궐기시키는 한편 이들의 투쟁을 한 단계 높여 폭동화시키는 것이었다. 먼저 전략계획은 사회혼란 조성과 통치기구의 마비를 위해 구체적인 과제를 설정했다. 남한의 주요 통치기구인 청와대,중앙청,국방부,육군본부 등을 습격하거나 각 지역의 도청이나 주요 교통통신시설을 습격,파괴하는 것이 이 단계의 과제였다. 전기시설인 각 변전소와 발전소를 파괴하여 동력을 마비시키는 것도 과제 중 하나였다.
결국 여건조성단계에서는 특수부대를 분산 파견하여 중요기관과 시설을 습격,파괴함으로써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통치기구를 마비시키는 것이 주요 임무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1968년에 일어난 1.21 청와대 습격사건은 이 계획을 실행한 것이었다. 또한 1968년 6~9월 사이에 한국군 동부,서부지역의 전방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최전방에 무장공작조가 침투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대략 1백여 개의 무장기습조가 침투, 4~5백 명이 소위 ‘벌집 쑤시기 작전’을 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방부대에 대한 군수물자 수송을 차단하기 위한 철도파괴공작도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철도파괴공작은 9월 5~15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여건조성단계에서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노동자,농민,청년학생들을 군중투쟁에 동원하고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도록 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지하당 조직에서 노동자,농민의 투쟁을 조직,지도해 비록 부분적인 투쟁이라도 평화적 파업이나 투쟁에 그치지 말고 보다 폭동화시킬 것이 강조되었다. 또한 무장소조원들을 산악거점,농촌거점,도시거점에 보내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쟁을 고무하는 반공개,비공개 정치선동을 조직할 것도 지적되었다.
1968년 10월 말~11월 초에 일어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이 계획의 일환이었다. 10월 30일부터 11월 3일 사이에 울진 해안을 통해 상륙한 180여 명의 무장소조가 태백산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경북,충북 산간지역에 침투했으나, 이들 가운데 110여 명이 사살되고 70여 명은 무사히 복귀하였다. 이 무장소조 침투공작은 군부 강경파가 주도했지만, 공작의 조직사업은 특수부대가 아니라 허봉학이 직접 관할한 대남사업총국에서 맡았다. 군대 내의 성원들을 차출해 무장소조를 편성했지만 정작 공작조를 침투시킨 것은 군대가 아니라 연락부계통이었던 것이다.
이 무장공작대는 25개 지역에서 80회 정도의 공작을 진행했고, 그 대상인원은 3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태백산맥의 산간 지역을 대상으로 군중을 모아놓고 선전선동을 하고 입당청원서,서약서 등을 받았다. 이들은 공작과정에서 말을 잘 듣지 않는 일부 주민들을 약탈,폭행,살해하는 등 불법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강원도 평창의 이승복 어린이 일가가 살해된 것도 이때였다. 당시 북으로 납치된 사람이 7명, 공작과정에서 살해된 주민이 6~7명 가량이나 되었다. 이들의 불법행위는 후에 군부 강경파에 대한 노동당 검열과정에서 폭로되었고, 당사자들은 숙청되었다.
결국 제2단계의 주요 내용은 노동자,농민,청년학생들을 궐기시키는 한편 지하당 조직을 움직이고 무장소조를 파견해 투쟁을 지도하는 선전조직사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군중의 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 군중투쟁을 보다 대중화,조직화하며, 나아가 폭력투쟁화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제3단계는 역량과 여건 성숙에 기초한 실제 실행단계이다. 실제 실행단계에서는 1969년 중반 이후 적당한 계기와 시기를 선택해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지하당 조직과 투입된 무장소조를 배합해 폭동을 일으킨다는 계획이었다. 중요 기관의 습격은 물론이고 청년학생,노동자,농민들을 조직동원하여 대중적인 폭동을 일으키며, 동시에 ‘임시혁명정부’를 선포하기로 되어 있었다. 임시혁명정부를 조직한 다음에는 그 명의로 남한의 민중에게 전국적 혁명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이어 북한에 대해 같은 민족으로서 해방을 위해 싸우는 남한 노동자,농민 형제들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며, 이에 호응하여 북한 전역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남조선해방투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지원군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전략계획에 따르면 남한에서 활동하던 사람과 북한에 가 있던 남한 출신 간부가 연합해 서울을 중심으로 무장폭동 시작→남한 민중에게 궐기 호소→투쟁의 전국적 확산→북한에 지원 요청이라는 노정에 따라 혁명을 완수한다는 것이었다.
제4단계는 미군이나 한국군의 개입으로 무력화,폭동화된 군중 세력이 진압될 위험에 처하면 북한이 공개적으로 남침을 시작,진격하는 단계이다. 지하당 조직과 무장소조 세력에 의해 혁명이 완수되면 좋지만, 혁명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남한의 정규군대가 진압을 시작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군의 개입도 예상되었다. 따라서 작전계획은 한국군 정규부대가 혁명 진압을 위해 투입되어 무장소조 및 지하당 조직과 전투를 벌이면, 혁명지원을 명목으로 북한이 공개적으로 남침을 개시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말하자면 ‘제2의 6.25’계획인 셈이었다.
제5단계는 인민정권이 수립되어 남한 전역에서 혁명이 완수되어 가는 단계이다.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될 때 5단계로 넘어가 지방 인민정권을 망라하여 전 남한적인 임시인민정권을 수립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전국적인 범위에서 정권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정부를 세우고 그 운영체계를 세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제3단계에서 선포된 임시혁명정부를 제5단계에서 조직개편하여 전국적 범위의 임시인민정부로 개편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혁명 보위를 위해 남한 출신과 북에서 나간 사람들로 ‘혁명보위군’을 편성하여 훈련시킨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결국 5단계에서는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중앙정부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인민통치기구를 수립하는 문제, 혁명보위군을 편성해서 자력으로 혁명을 보위하는 문제 등이 중요한 과제로 설정되었다.
제6단계는 토지개혁을 비롯한 내부계획을 수행하는 한편, 주민을 동원해 내부 방위체계를 세우고 북한 군대를 철수시키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정세에 따라 북한에서 내려간 지원군이 일부 또는 전면 철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일시에 철수하는 것은 아니고, 정세에 따라 단계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제7단계는 통일완성단계이다. 통일단계에서는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과 남한의 임시인민정부가 합작,연합해서 연방제를 형성하게 된다. 형편에 따라서는 총선거를 실시해서 ‘임시’를 떼고 인민정부를 수립하는 문제까지도 예견했다. 연방제는 1960년에 김일성이 통일의 첫단계로 주장한 바 있었는데, 통일의 과도적 단계였다. 연방제를 실시하여 전체 한반도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게 하고 인적,물적 측면에서 균형있는 발전을 이루며 사회,교육,문화 등에서 민족적 동질성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연방제를 통해 남북간의 차이가 어느 정도 해소되면 다음 단계에서 남북총선거를 실시해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하고 통일을 완성한다는 계획이었다.
1967~1968년 사이에 북한의 군부 강경파는 이러한 ‘남조선해방과 통일전략계획’에 따라 대대적인 무장게릴라,무장선전,조직공작대 등을 남파했고, 남한의 전방부대에 대한 기습공격,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철도파괴 공작 등을 감행했다. 만일 군부 강경파의 군벌관료주의와 부화방탕, 당 규율 무시 등이 발각되지 않아 남조선 해방과 통일전략계획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한반도는 다시 한 번 전쟁의 참화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북한 현대사38 - 푸에블로 호 사건과 북한 외교의 진면목
1968~1969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한반도의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특히 푸에블로 호 나포사건은 ‘제2의 한국전쟁’까지 일어날 만한 계기로 여겨졌고, 사건이 해결되기까지 한반도는 내내 전쟁의 공포 속에 시달려야 했다. 1.21사건이 일어나 남북관계가 험악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그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푸에블로 호 나포사건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약 10개월간 한반도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긴장상태가 계속되었다.
푸에블로 호는 일본의 모항에 기지를 둔 미국 해군의 초고성능 전파탐지 장비를 장착한 스파이 함정이었다. 푸에블로 호는 주로 북한 해안에 바짝 붙어 항해하면서 북한의 군사용 및 행정용 통신을 도청하여 암호를 해독하고, 소련령 블라디보스토크에 기지를 둔 극동함대의 통신을 해독하여 이동,훈련의 현장에 들어가 감시와 첩보활동을 하는 106톤 크기의 해군 첩보선이었다. 이 초정밀 전자시스템으로 정비된 비밀 전자첩보선이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과 공군기에 의해 나포된 것이다. 배에는 함장을 비롯해서 도청용 전자장치 기술자, 암호해독 전문가들인 군인과 민간인을 합해서 83명이 있었다.
미국 정부와 선전 기관은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을 ‘야만행위’,‘비인도적 만행’,‘국제법을 유린하는 파렴치범’이라고 비난하면서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전개했다. 미국의 주장은 푸에블로 호가 납치된 지점이 동경 127도 54분 3초, 북위 39도 25분으로서, 북한 해안에서 40마일 떨어진 공해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함정 내의 미해군 문서에 기재된, 이미 1966년 2월 28일 북한 해안에서부터 불과 3마일 거리까지 침입했던 기록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여러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영해침범과 국제법 위반행위를 거듭한 까닭에 국제적 해상활동의 규정에 따르는 경고 끝에 나포했음을 밝히고, 나포 지점을 동경 127도 46분, 북위 39도 17분이라고 주장했다.
푸에블로 호 나포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 무력시위를 시작했다. 존슨 대통령은 사건 첫날부터 핵 항공모함 2척과 각종 함정 25척으로 구성된 제77특별기동함대를 편성하여 원산 앞바다에 포진하고 군사적 압력을 가했다. 또한 소련을 비롯한 북한의 동맹국가 정부를 총동원하여 정치,외교적 압력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 당시 중소분쟁으로 중국과 대립하고 있던 소련은 미국과 밀월관계에 있었다. 소련 정부는 미국의 대리역할을 자청하여 각 방면으로 북한 정권에 압력을 가했다. 미국의 청을 받아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과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대통령까지 평양으로 날아왔다. 이들은 미국인을 즉시 석방하지 않으면 북한은 쑥밭이 될 것이라는 미국의 결심을 전달하면서 온갖 설득을 다했다.
전세계가 ‘제2의 한국전쟁’을 걱정하는 여론으로 들끓었다. 남한은 물론 중국,일본,대만 등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전쟁준비 태세를 갖추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일촉즉발’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때의 긴장감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직접적인 무력시위와 협박, 그리고 소련을 동원한 압력과 온갖 외교수단을 통한 설득,종용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결국 푸에블로 호가 나포된지 325일만에 미국 정부를 대신하여 푸에블로 호 함장 푸커 소령이 북한영해 침범사실을 확인하는 사과문서에 서명한 뒤에야 1968년 12월 23일 83명의 미 합중국 군인과 시민(그 중 한명은 사망)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선원들이 석방돼 판문점을 넘는 순간, 푸커 함장의 북한 영해 침범시인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푸에블로 호 사건이 일어나자 북한과 미국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숨가쁜 외교전을 전개했다. 사건 발생에서 석방까지의 11개월 동안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28회에 걸쳐 비밀협상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온갖 협박과 공격 위협, 소련을 비롯한 북한 동맹국을 이용한 외교적 방법과 설득을 동원했지만 북한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이 비밀협상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과 미국이 처음으로 국제무대에서 부딪힌 외교전이었는데, 이 1라운드는 북한의 ‘완승’으로 끝났다. 미국으로서는 처음으로 놀라운 상대를 만났던 것이다. 북한은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당당했다. 푸에블로 호 선원들이 석방되기 전날 존슨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11개월 동안 어떤 노력을 했으며, 어떤 조치들을 취해왔는가를 ‘국민에게 보고’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North Korea seems to be out of the pressure of the U.S.S.R.”
(북한이라는 나라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압력이 먹혀들지 않는 나라인 것 같다.)
푸에블로 호 사건은 1960년대 ‘자주노선’을 걸은 북한이라는 나라의 성격과 특성을 국제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북한은 ‘자주국가의 전형’이 되었으며, 국제적으로도 위신과 자존심을 높일 수 있었다. 북한의 주체적 입장과 자주노선은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은 물론이고, 기타 모든 나라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북한 현대사39 - 김정일의 등장과 정치적 부상
김정일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4년이었다. 그해 봄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은 6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처 참사실 지도원으로 첫 근무를 시작했다. 이어 1965년에는 내각 수상 참사실 지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2년간 당과 정권기관의 사업을 익힌 뒤 1966년 초 24세의 젊은 나이로 당 조직지도부 중앙지도부 중앙지도과 중앙기관담당 책임지도원으로 승진했다. 이것은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는데, 여기에는 김정일을 지도자로 키우기 위한 김일성과 빨치산 그룹의 배려가 뒷받침되어 있었다. 김정일은 1964년 이래 계속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와 내각 수상실 등 당과 행정부의 중심에 있으면서 1964~1966년의 3년 동안 김일성이 현지 지도를 나간 장기출장 15회를 포함해 모두 31회나 김일성과 동행했다. 김정일은 정치활동을 시작한 첫날부터 김일성 바로 옆에서 정치력을 배우며 그로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던 셈이다.
김정일이 북한 정치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67년 5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였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967년 5월의 전원회의는 김일성 유일 사상체계 확립에 소극적이었던 박금철,이효순 등의 갑산계가 제거되고 당 내에 유일사상체계가 세워지는 중요한 회의였다. 당시 당 조직지도부에서 중앙기관담당 책임지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김정일은 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북한에서는 이때 김정일이 갑산계의 ‘부르조아 수정주의 책동을 분쇄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수립하는 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김정일은 회의를 앞두고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고, 그를 근거로 박금철,이효순 등을 비판했다. 이렇게 해서 제15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정일의 주도 아래 “부르조아 및 수정주의 사상 여독을 뿌리뽑기 위한 전당적 투쟁이 전개”되었고, 김일성 유일사상 체계 수립에 비판적이었던 갑산계 세력들이 제거되었던 것이다.
북한 역사에서 1967년 5월의 전원회의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한 가지는 이 회의를 계기로 당 내에서 김일성 유일사상 체계가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회의를 계기로 김정일이 북한 정치무대에서 급부상했다는 점이다. 이 회의에서 갑산계 숙청과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주도한 김정일은 북한 정치에서 중요 인물로 떠올랐고, 그 후 사상,선전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위치를 굳혔던 것이다.
결국 1967년 5월의 전원회의는 김일성 유일사상체계와 김정일 후계체제가 하나로 연결되는 북한 ‘수령체제’의 출발점이었다. 말하자면 김정일이 1967년 전원회의에서 갑산계의 숙청을 주도한고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주도해갔다는 사실은 북한 사회의 변화를 예고하는 하나의 징조였던 셈이다. 그해 9월초 평양예술영화촬영소에서 열린 영화예술 분야에 대한 박금철,김도만의 ‘반당적 해독’을 청산하기 위한 확대정치위원회에서 김정일은 이 문제를 최단 시일 내에 수습하겠다고 자진해 나섰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의 직책을 맡아 당 사상사업의 핵심인 문화예술 부문의 실권자로 등장했다. 김정일은 1969년 초부터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여 선전사업은 사실상 완전히 장악했고, 1970년에 들어서는 조직지도부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당시 조직지도부장이던 삼촌 김영주는 병으로 업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제1부부장이었던 박수동은 김일성종합대학 시절부터 김정일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김정일의 후계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 첫 움직임은 1970년 5차 당 대회에서 김정일의 당 중앙위원 선출문제였다. 이때 김일,최용건,최현 등의 빨치산 원로들은 “중앙위원이 곤란하다면 후보위원으로라도 올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아직 28세밖에 안된 김정일의 나이와 안팎의 비난을 의식해 원로들의 제의를 일단 보류시켰다. 이 당시 후계자 문제가 당 내에서 무성하게 거론되기는 했으나 결정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김정일은 1973년에 이미 당의 실권을 장악했다. 1973년 9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 겸 조직비서, 선전선동부장 겸 사상비서로 선출되었다. 사상과 조직을 양손에 쥐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4명이 맡아야 할 일을 한 명이 맡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셈이었다.
1974년 2월 1~13일까지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드디어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후계자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권력을 승계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중국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후계자로 지명되더라도 상황의 변화에 따라 권력승계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지명된 뒤 권력승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또 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북한 현대사40 - 항일빨치산 세력의 권력 대물림
북한에서 후계문제가 내부적으로 처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67년 5월의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 이전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종파투쟁을 통해 다른 세력들을 제거하고 북한 사회를 장악해온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으로서는 후계자문제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계속 담보할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은 또한 혁명의 계승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북한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을 교훈 삼아 후계자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1972년 3월 당의 이론잡지 <근로자>에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력사적 경험은 그 당을 창시한 수령에 의해 성취된 혁명전통을 지키지 않고 협잡물을 허용할 때에는 그 당은 이미 본래의 당은 아니고 당이 존재 자체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이 ‘협잡물’에 관해서는 『후계자론』이라는 책에 솔직히 다뤄지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후계자론』에서는 “스탈린이 죽은 뒤 공산당의 주요 직책에 오랫동안 숨어 있던 야심가 흐루시초프에 의해 레닌,스탈린의 위업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야심가인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지명한 후계자인 말렌코프를 몰아내고 음모적인 방법으로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하여 레닌의 위업에 충실한 스탈린의 공적을 말살하려고 날뛰었다.”고 했다. 북한 지도부가 스탈린 비판과 그 후 소련에서 일어난 상황에 적지 않은 공포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후계자론』에서는 린뱌오 사건에 대해 “수령의 후계자로 지명된 인물이 스스로 수령을 살해하고 권력을 탈취하려고 한 놀란운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4인방 사건”에 대해서도 “당과 정부의 최고령도권을 탈취하려는 음모 책동에 박차를 가하고 끝내는 당 중앙위원회를 전복시키고 장칭(江靑)을 당 주석으로 장춘차오(張春橋)를 국무원 총리로 앉히려는 반혁명 음모를 단행했다. 물론 4인방의 반혁명 사건은 분쇄되었지만 후계자문제를 둘러싸고 중국이 겪은 진통은 대단히 심각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이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교훈으로부터 최고지도자의 후계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배운다. 후계자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의 혁명전통을 계승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체제의 유지와도 직결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수령이 개척한 위업을 어떻게 계승하는가 하는 것은 결국 수령의 위업을 올바로 계승하는가, 계승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이고, 누가 계승하는가의 문제는 어떤 인물이 계승하는가 하는 인물에 관한 문제”였던 셈이다.
북한의 김일성과 빨치산계는 소련과 중국에서 후계자 육성에 실패해 많은 혼란을 겪는 것을 보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으며, 김일성 사후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특히 김일성에게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이다. 만일 북한에서도 그런 사태가 일어난다면 김일성과 그의 혈연집단, 그리고 항일 빨치산 세력과 그 혈연집단이 부정될 것이며 그들이 유지해온 체제 자체가 와해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에서는 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치맛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김일성이 한 회의에서 김성애의 말은 자신의 말과 같다는 발언을 한 후 김성애는 위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김성애는 여맹위원장 자리에 앉아 당과 국가기관의 활동에 개입하는 한편, 주변에 사람들을 끌어모으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혁명원로들은 이런 사태를 보면서 북한에서도 중국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혁명원로들인 류사오치(劉小奇),덩샤오핑,펑더화이 등이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장칭을 비롯한 4인방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삿대질과 팽개침을 당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후계자문제는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지도부에게 매우 중요한 고민거리였다. 북한 지도부는 처음 후계체제를 ‘김일성-김영주-다음 세대’로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런 구도는 김영주가 건강과 능력 문제로 당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정일이 빠르게 부각하면서 뒤바뀌게 되었다.
그러면 김정일이 후계자로 발탁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정일이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김일성의 후광과 지원이 결정적인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은 죽은 어머니 김정숙의 후광도 적지 않게 입었다. 김정숙은 죽기 전 빨치산 동료들에게 “우리 유라(김정일의 소련식 유아명)가 혁명의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훌륭한 공산주의자로 키워달라”고 유언했으며, 김정숙의 장례식 때 최용건은 추도사를 통해 “동지적 의리와 의무감을 갖고 김유라를 키우겠다”고 했다고 한다. 김정숙의 유언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키워달라는 부탁은 아니었지만 김정숙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빨치산 세력은 ‘혁명동지’의 유훈을 받아 김정일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부터 후계자로 등장할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 속에서 자랐던 셈이다. 따라서 김정일 후계체제를 뒷받침한 가장 큰 힘은 빨치산 원로들이었다. 총리 김일, 부주석 최용건, 인민무력부장 최현, 부총리 박상철, 노동적위대 사령관 오백룡, 임춘추(정치위원), 오진우(인민군 총참모장)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이들 원로들의 배려와 더불어 빨치산 소장층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원로들을 부추겨 김정일 후계체제를 도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문섭(호위사령관), 백학림(사회안전부 부부장), 이을설(부총참모장), 이두익(제1군 사령관), 주도일(집단군 사령관), 조명록(공군사령관) 등이 그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전문섭과 백학림이 가장 적극적이었다고 알려졌다. 이들 소장층들은 대부분 김일성,김정숙의 ‘전령병’ 출신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김정일과 친화력이 있었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또 김일성과 김정숙의 후광은 빨치산 원로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김정숙이 세운 ‘평양혁명유가족학원(만경대혁명학원)’출신들과 김정일간의 끈끈한 인간관계도 김정일의 후계자 부상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평양혁명유가족학원은 과거 항일유격대 시절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의 친척이나 자식들을 데려다가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교육기관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김정숙의 배려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학원생들과 김정일의 관계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욱 가까운 사이’라고 할 정도로 혈연적인 관계였다고 한다. 이들 평양혁명유가족학원 1,2기생들은 1970년대 초 당,정,군의 중간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하자 강력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김환(부총리 역임, 항일 빨치산 김혁의 아들), 김달현, 홍시학, 연형묵, 강창주(군단장,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의 아들), 최용해(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위원장 역임, 최현의 아들), 오극렬(총참모장 역임, 빨치산 부대원 오중흡의 아들) 등을 비롯해 노동당 중앙의 부장, 노동당 책임비서, 사단장급 이상의 군장성의 90%, 정무원 부장의 70%가 만경대학원 출신이었다. 말하자면 평양혁명유가족학원 출신은 북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성골집단’인 셈이다.
이들 외에 빨치산 2세들도 김정일을 부각시키고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를 비롯해 서윤석, 김국태(김책의 장남), 이찬선, 이창선, 최태복, 전금선(오진우의 처), 전병호, 최영림, 한성룡, 김기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언론과 선전출판물, 문화예술과 교육 분야에서 김정일의 부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런 점들에 비춰보면 김정일 후계체제는 김일성의 권력을 아들 김정일이 이어받았다는 의미 외에도 항일빨치산 1세대의 권력을 항일빨치산 2세들이 물려받았다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김정일 후계체제는 북한에서 수령제에 기초한 항일빨치산 세력의 집단적인 권력 대물림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첫댓글 북한현대사[8]에 대하여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