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GFuU-1G13po
시인과 촌장/ 기쁨 보리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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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눈이 내렸나 보다.
성당의 새벽 종소리는 낮게 날아와 꿈 속을 헤매이던 내 귓가를 간지럽힌다 .
세째의 가느다란 다리가 내 몸을 누르고 있다
깨지않게 살며시 내려 놓고 온기의 아쉬움을 밀어내며 부엌으로 향한다 .
설설 끓던 무쇠솥에 한 바가지 물을 떠서
소리 내지 않게 세수를 한다 .
얼굴에서 김이 나고 후 입김을 불면 하얗게 퍼져 나갈 때의 상쾌한 기쁨을 나 혼자 즐긴다
미사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한다 .
몇 해를 입다 이제야 몸에 꼭 맞는 낡은 외투를 걸친다
고무신에도 하얗게 눈이 날려 쌓여 있다.
툭툭 털어 신어 본다
고무신의 찬 기운이 스물거린다
어둠은 하얗게 덮힌 눈으로 그 힘을 잃어 버렸다 .
가로등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샛길은 성당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신작로를 따라가면 환한 가로등 탓에 무서움은 덜 하지만, 연탄 개스가 배어있는 지붕 낮은 골목길, 어린 나의 두팔을 벌려도 닿을듯한 좁은 골목길은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다
몇 해를 거의 매일 다니다보니 나의 친숙한 친구같은 길이 되고 말았다.
친구는 그렇다 .
눈을 감아도 그 마음 알 수 있고 멀리 있어도 가슴이 저려오는 대상이다 .
오래 보아야 한다는 것 .
단점 마저도 사랑스럽게 안아주고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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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지나 비탈진 너른 밭이 나타나다.
지난 여름. 요셉이와 옥수수를 서리했던 곳.
지금은 말라비틀어진 키 높은 옥수수대와 가을 걷이를 하고 난 배추 . 무 들의 버려진 이파리들이 눈으로 덮혀 있다 .
내 삶의 첫 도둑질.
쿵쾅거리던 가슴으로 설익은 옥수수 한 개를 꺽어 들고 얼마나 달렸는지.
그 때를 생각하면 늘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천주경을 외우고 성모경을 중얼거리며 눈 밭을 걸었다
사각 사각 ~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작은 발자국이 콩콩거리며 찍히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 보았다
눈이 그친 새벽하늘은 총총하게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좋아하는 오리온 별자리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
리겔 . 시베리우스. 그리고 삼형제 별 .
삼형제 별 !
오늘 따라 별을 보면서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에 오줌을 누웠다
동생의 이름을 썼다
마저 다 쓰지도 못했다
오늘은 셋째가 부산으로 가는 날이다.
나 처럼 약싹 빠르지 못해서 , 순둥이라고 불리던 셋째.
엄마는 그 동생을 부산에 사는 사촌 형님 댁으로 보낸다 하셨다 .
몇 달전 ㅡ
미국 입양의 해프닝이 지나고 간당간당하던 양친회비 마저 끊겼다했다.
입 하나 덜면 나으려니 하는 생각 보다는, 새끼 하나 더 잘 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인지 모른다 .
좋은 추억이랄 것도 없었는데 가고 나면 보고 싶어질텐데 .....
오늘 미사 때는 천주님에게 꼭 말하고 싶다
헤어져 살지 않게 해 달라고 말이다.
학교에서 주는 옥수수빵을 내가 안 먹고 동생들 한테 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발이 시려워진다 .
성당의 돌탑이 여명 속에서 얼굴을 들어낸다 .
오늘은 다행히 보조복사였다
혹시 눈물이 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몇 해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흐르는 눈물을 오늘 또 흘릴지 몰라 걱정이 들었다.
어떻게 미사가 끝났는지 몰랐다.
빨간 복사 祭衣를 옷장에 걸어두고 신부님께 인사를 하자마자 성당문을 나섰다.
쌓인 눈길을 빠른 걸음으로 달렸다 .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쉬지않고 나왔다
기차도 그렇게 하얀연기를 내뿜고 가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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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도 벌써 일어나 씻고 있었다 .
아침 식탁에 둘러 앉았다 .
이별이란 것을 일찍 알았기에 , 이별이란 것은 볼 수도, 말할 수도, 같이 놀아 줄 수도 없는 것을 안다 .
나의 아버지가 그러셨으니 말이다.
둥그런 밥상 위에는 어제와 다른 반찬이 풍성했다 .
고깃국과 계란찜 . 또 가재미라는 생선이 올라와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맛있는 반찬을 하나도 먹을 수 없었다.
엄마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몇 달전 내가 그랬던 것 처럼 엄마의 마음이 어떨거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못 볼거라는 것. 어쩌면 아주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슬픔이 밀려 올라왔다.
동생의 새로 사 입은 옷이 커 보였다.
허연 얼굴에 멀뚱한 눈빛.
맛있는 반찬을 빼앗길까 봐 경계를 한다
" 그래 임마 , 너 많이 먹어 "
속으로 뜨거운 것이 치솟아 올라왔다.
'바보같은 새끼 '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곧 봄방학이 다가 오는데 ......
담임 선생은 이제 일 년간 빚 독촉을 안해도 되어 그런지 우리들에게 관심도 없어 보였다
' 뱀눈 '
내가 지어 준 별명이다.
그렇지만 나 혼자 부르는 별명이다
며칠만 지나면 안 봐서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았다 .
난로 위에 도시락 통에서 누룽지 냄새가 피어올랐다 .
" 창연이는 잘 갔을까 ?"
" 1 학년 짜리가 다른 학교가서 잘 지낼까 ?"
봄이 오는 운동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수업은 하는둥마는둥 이내 종례시간이 되었다
" 기성회비 밀린 애들 기성회비 꼭 가져 오고
오늘 교실 청소는 너희들이 하고 갈 것 !"
그리고 줄줄이 이름을 불러댔다
내 이름도 빠질리가 없었다
" 뱀눈까리 같은 년 "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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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 왔다.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서울역으로 동생을 바래다 주러 가셨다.
막내까지 데리고 가셨나 보다 .
중학교 다니는 형이 왔지만 역시 말이 없었다 .
그날 밤 . 옆자리가 허전했다.
툭닥거리고 까불다 잠이 들던 동생이었는데 ....
그 짧았던 어린 시절에 몇 안되는 추억들마저 잊혀질까 두려웠다
슬그머니 눈물이 흘렀다.
감정이 북받치면 쿨쩍거리게 마련이다
엄마도 잠을 못이루시셨는지 나를 토닥거려 주셨다 .
그렇게 울다 잠이 들던 1965 년 2 월의 어느 밤이었다 .
여름에 형이 부산엘 다녀 왔다
사진도 찍어 가지고 왔다
당시 개통되었다는 구포다리에서 동생은 웃고 서 있었다 .
" 잘 지내고 있지 ?"
그 사진은 불행하게도 몇 십년 후 형네집의 화재로 다 사라지고 말았다.
꼬박 일년이 지났다 .
겨울 방학에 엄마가 부산으로 가셔서 동생과 함께 올라 왔다
만일 내가 미국엘 갔더라면 올 수 있었을까?
같은 한국이란 땅덩어리가 가능한 일이었다
동생은 일 년 사이 무척 커져 있었다
키가 나 보다 한 눈금 이상은 커 있었다.
그리고 말도 경상도 사투리로 변해 있었다
그것 보다도 녀석이 나를 형으로 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엄마 역시 동생에게만, 동생 위주로 모든 사랑을 쏟으셨다 .
그것이 약간 불편하기도 했지만, 엄마의 심부름이나 부엌데기의 맡은 바 임무에 나는 언제나 충실했었다 .
사형제 집의 식모 살이에 나는 행복했었다 .
성당에서 배급해 주던 밀가루로 수제비를 뜬다든가 하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먹고 나서 설거지 . 연탄불 갈기 . 동네 어귀에서 새끼줄에 꿰인 연탄 두 장을 사오는 일이나 얇은 종이 푸대에 반말짜리 쌀을 들고 오는 것도 나의 일상이었다 .
집안 청소 . 마당 쓸기 . 그리고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막내와 함께 피 튀기는 전투 .겨울밤 시래미 사냥도 이 계절만의 빠지지 않는 신나는 일이었다
솔기 사이로 냅다 탈출하는 녀석들을 발견하면 두 손톱으로 눌러 압사시키는 재미는 가난한 집이 아니면 도저히 즐길 수 없는 놀이였다 .
또한 잡기에도 떨어지지 않는 실력을 발휘해서 딱지나 구슬 . 팽이는 제법이었다.
막내에게 구슬과 바꾼 우표들을 보여 주면 아주 좋아 했다
그런 짓으로나마 형으로서의 존재를 나타내고
감히 덤비지 못하게 하는 권위를 드러냈다
그런데 , 일년 사이에 녀석은 그 카리스마에 도전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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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방학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혼자 성당에를 다녀오니 동생들만 있었다
결국 그날 사고가 나고 말았다
내가 참았으면 그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형이라는 귄위에 금이 가도록 녀석은 나에게 덤볐다.
참고 참다가 결국 도전자에게 매운 맛을 선사하였다
지금처럼 주먹이 난무하는 활극은 아니었으나
딴지를 걸고 한번에 엎어치기를 시전하였다 .
학교에서 가끔 써먹던 딴지걸이가 조금 과하게 사용되었나 보았다.
방바닥에 개구리 떨어지듯 떨어진 아우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변하였다
아프다고 울지도 못할만큼 아펐다 보다
방바닥이 울릴 만큼 나가 떨어졌으니 .....
때마침 엄마가 들어 오셨다
떼굴떼굴 구르는 고통의 원인은 엉뚱하게 체 한것이었다 .
낮에 먹은 고구마가 그만 체하고 만 것이었다 .
손발을 바늘로 따고 활명수를 사다 먹이고 나서야 동생의 낯빛은 생기를 되찾았다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 난 후 나에게는 응징의 시간이 다가왔다 .
털이 다 닳아빠진 방빗자루.
내 생애 처음으로 그런 지독한 매를 맞았다
혹시 독자들 중에 그런 고문같은 매를 맞아 본 사람이 있을까 ?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슬슬 여우가 되어 간다
소위 눈치란 것이다 .
엎드려 잘못했다고 , 다시는 동생들 안 때리겠다고 빌고 빌었다.
우둔한 장남 형은 맞으면 맞는대로 있었다
하지만 소나기는 피해야 한다
이 겨울에는 집을 나갈 수 도 없다는 것쯤 어떤 바보멍청이도 다 어는 사실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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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엄마와 성당에를 다녀 왔다 .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오면서 내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고해성사를 보셨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그 아팠던 기억이 쉽게 가실까 ?
머쓱했다 .
엄마의 사과를 받는 일 .....
그때 왜 나는 엄마에게 괜찮다고 말 하지 못했나 ?
아직 어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아직 그 아픔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른이 되면 , 아니 아버지가 되면
첫째 일찍 죽지 않겠다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내가 겪었던 아픔을 다시 줄 수는 없었다.
겪어야 했던 가슴아펐던 일들은 덮어야 한다
내 인생 처음 원망했던 사람이 아버지였다.
훗날 아내와 연애할 때 가슴에 꽁꽁 숨겨두었던 말을 꺼냈었다 .
아내는 내 손을 꼭 쥐어 주었었다 .
그리고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 않겠다 생각했다.
아내는 먼저 떠나고 , 나는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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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생과는 함께 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철이 들고도 멀리 있었다.
지금은 먼 나라에서 목회의 길을 걷고 있다
벌써 삼십 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
촌티나는 돌성당 ~ 서울 변두리 ㅁ 동
첫댓글 내가 아주 어릴적에~
(초등3학년 정도 까지 )
그 근처에서 살았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어요.
그리고~사진의 ㅁ동 성당은
40년후 쯤~성당내 노인대학 할머니들에게 장구 가르키려 6개월쯤 다녔던 기억이 있고......
그 ㅁ동 성당.
저 건물은 사라진지 오래되었어요.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면 만히 보이는.... ^^*
기회가 되시면 주어진 달란트를 뽐내셔도 좋겠습니다 ~^^☕
@오분전 아. 그럼 이름만 같은 ㅁ동 성당인가봐요.
제가 20년전애 봉사 다닌 곳은 미아역에서 삼양동쪽으로 안으로 쭉 골목길 들어가면 있었어요. 크지는 않은 성당. 마당이 적어서 차도 몇대밖에 주차 못하고. 대신 옥상에 정원을 만들어놨더라고요. 하늘정원이라고.
@리디아 ㅎ ~ 물론 다른 곳이예요
지금은 길음동 성당이라고 해요 .
50~60 년전엔 그냥 " 미아리성당 " ~
@오분전 아. 길음동 성당
글쿤요
저는 미아동 성당인줄 알고. ㅎ성당 모습은 비슷해요. 크진 않더라고요..ㅎ
@오분전
아....ㅁ 성당 뭔지
검색해 보다
못찾고 궁금했어요...
서울에서
버스타고 다닐때
성북구 성북동
큰 극장 돈암동
그쪽이 기름시장?
미아리 안가봤어요
길음동은 ??
수유리 정릉 ㅡ창동
종점....
몰라요...길음동.
가락동 야채 과일시장?
@수샨 돈암동에 있던 극장은 동보극장인던가 ? 그럴 거예요 .
길음 시장은 돈암동에서 미아리고개 넘어오면 큰 다리 지나자마자 왼쪽에 있는 시장 ~
너무 슬프네요....
에효....
목회를 해도
성당에 다녀도
신앙적으로도
이길수 없는
배고품....ㅠㅠ
반듯하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게 사는것이
최고라 하기 엔 멋쩍고
좋치요.
그래도 어머니가
힘들때도
곁에 계신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도 그래서 가신
어머님께 늘 감사해요💝💝
어머니가 매를들면
난 벌써 토끼고
동내 한바퀴~~~@@
ㅎㅎ
돌고 오면
언니는 오기로 맞고
엄마가 도망가라~
요 ㄴ 아....그래도 ㅋㅋ
그래서공부도 잘하고
부자되서 거이
빌리언 에어가 됐다는
ㅎㅎㅎㅎ권사.
인정많고 베풀고
챙겨주고 살아서 축복.
내가 못따라가는..인정...
오기도 있어야
돼나봐요.ㅎ
돈이 왠수유.ㅠㅠ
사실 배고픈 건 몰랐어요.
배가 고픈지
허기가 져서 몸이 지친 건지 ...
다 지나간 일이라
이젠 웃고 말지만 ~
늘 감사합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아 주시니 ~^^
🌹
너무 슬프잔아요.
고구마 먹고 체한 동생 죽었다고 할까봐 읽으면서도 조마조마 했습니다.
오분전님의 매타작이 짠하긴 해도 다행이다 안심 했네요.
그 어린시절의 순간 순간의 감정들을 어찌그리
섬세하게 그려내시는지 ...
배고픔이나 가난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가난과 형제애가 가슴아프고 애틋하고 오분전님의 착한 심성이
이 새벽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아~어머님도 고생 많으셨겠어요.
젊은 청춘에 홀로되셔서 사형제를 키우시잔이 그 고초가 얼마나 크셨을지.
그동생이 어디서 목회를 하시는지요?
신부님?
잘 읽었습니다.
누구네 집에나 흔히 있을법한 이야기지요 ㅎㅎ
이불 한 장에 살 비비며 지냈던 형제들 .... 다 묻고 살아가지요 .
목회하는 나라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점이 있어요 .
다른 종교가 ~^^*
목사직 입니다 ~*☕
@오분전 목사님이시구나. 훌륭하게 성장하신 모양입니다. 어느나라에서든지 받은 사명 잘 감당하실거라 믿습니다.
@리진 어려운 것이지만 꿋꿋하게 .... ^^*
ㅠㅠ 제 어린시절 보는듯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 갑니다 성당 에서 해외 입양 5남매의 3형제을 보내시려다 죽든 살든 같이 하자며 빼들린 동생들 지금은 모두 잘살고 있습니다
차암 어려웠든 시절
꺼내기도 힘든 그런 시절
물질 만능 시절
요즘 젊은이 들은 그시절을 견뎌 낼가요
꼬옥 저의 어릴적 시절을 옮겨 놓은것 같아 댓글 달고 갑니다
건강 챙기시고 건행 하세요ㅠㅠ
에고 ~ 아픈 상처를 쓸었나 봅니다 .
미안합니다
........
할 말은 많지만.....
성탄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빕니다
🌹
이 양반이 안하던 짓을...
늙기는 늙었나 보네
가족이 그립다는걸 보니 ^^
응 . 그런가벼 ~
가족이 그립다기 보다
동그마한 밥상에 둘러 앉았던 어린 형제들이 ....
이만하면 유통기간 다 채우고도 넘었지 !
ㅋㅋㅋ
픽션인줄 했더만 ~
와
갑자기 이런 장문의 글을 올린답니까?
뭔 일이 있는데?
@단풍들것네 집도착 ~
취침준비 ~ㅋㅋ
^^*~
안타까운 마음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삶이
많이 힘든 일이 있었지만
우울하고 슬퍼하지
마시고 요
오분전님의
윗트 있는 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답니다
모든 면에서
평안하시고
건강하기를 빕니다~()
운명이 그런걸 어찌합니까 ~^^
그저 받아드리면서
알게모르게 반항도 하면서
그런게 삶이다 싶었지요 ~
자주 뵙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
글 자주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풍성하게 한해 마무리 하시면서 미리 새해 인사도 드립니다
재미있는 새해가 되시길 빕니다 ~^^🌹
입양 사건과 이어진 이야군요.
일찍 홀로 되신 어머님의 고초가
참 크셨겠습니다.
어렸을 땐 반항도 했지만 나이들면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지요 ~
그나마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알려주셨으니 ~ 감사할 뿐이지요 ~^^
누굴 울리려고 그런 글을...ㅎ
울리려 쓴 글은 아니구요 .
예전에 써 놨던 글.....
이어서 올리지 못했더라구요 ~^^
울 사람도 없지요 ㅋㅋㅋ
@오분전 너무 슬퍼요...
@비온뒤 ㅋㅋㅋ 으째 이러십니까 ?
자알 읽었습니다....... 슬퍼서ㅠㅠ
저도 어린날 저 동네에 살았는데 .....
건강을 기원드려요 ..
감사합니다
참 힘들게
생각하기도 싫은 시절이지만
여기까지 잘 왔습니다
미아리라니 가슴이 시립니다
건강하게
행복한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
@오분전
길음 본당
엄마 장례 미사 하던성당 오래전에 기억이 ...
미사 후에는
송추 울대리 길음 본당
묘지에 영면 하시고
아버지도 같은곳에 ...
우연히 읽은 글에서
아픈 기억들이 떠오르네요ᆢ
남은 삶 아프지 마세요
진심으로 기도 합니다 !!
그리스도 사랑 💕
그때는 왜 그리도
삶이 고달 펐는지 ㅠㅠ
@사랑이야 저는 그때도 그런게 누구나 겪는 삶인 줄 알았어요
울대리 묘지 생긴게 60 년대 말쯤인데 ~
그래요 ~ 살아있는 날의 기쁨으로 살아가야지요 ~
기회가 되면 뵙겠습니다 ~^^
따듯한 하루 되소서 ~
지금 제설작업 하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