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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규회장님의카톡에서]
🤦♂️ 록펠러의 주는 행복(幸福) 🎶
☞ 문학박사 조양래교장께서 보내온 펌글입니다.
○ 어느 청년이 집앞에서 자전거를 열심히 닦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소년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 곁에서 계속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소년은 윤이 번쩍번쩍 나는 자전거가 몹시 부러운 듯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이 자전거 꽤 비싸게 주고 사셨지요?'
그러자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내가 산게 아니고 우리 형이 사주셨어.'
'아~ 그래요?'
소년은 매우 부러운 소리로 대꾸했습니다.
청년은 자전거를 닦으면서,
이 소년은 틀림없이 '나도 자전거를 사주는 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을거라고 믿고 그런 형을 가진 자신이 정말 행복하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소년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너도 이런 자전거 갖고 싶지?'
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뇨, 나도 동생에게 자전거를 사주는 그런 형이 되고 싶어요.
우리 집엔 심장이 약한 동생이 있는데 그 애는 조금만 뛰어도 숨을 헐떡거리 거든요.
나도 내 동생에게 이런 멋진 자전거를 사주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
소년의 생각은 청년의 짐작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받는 소원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반해,
그 소년은 자전거를 <주는 소원>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늘 도움받는 동생이 되고픈 사람이 있고,
도움 주는 형님이 되고픈 사람이 있습니다.
더 많이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고,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안타까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33세에 백만장자가 된 록펠러는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록펠러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55세에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Bible)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 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룩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 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면서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받으려고 하는 생각보다
무엇을 주려고 하는 생각을 먼저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건강하셔요!
☞ 별첨 꽃은 <수줍음>이란 꽃말이 붙은 우리나라 자생종
가시덕이꽃, 일명 풀명자꽃, 영명으로<맬루스 퀸시>(Maules Qu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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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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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귀가 능력이고
행복이다**
삼성창업주 고 이병철회장의 아들 이맹희 이창희 이건희 3형제에 대한 일화입니다.
병석에 누운 이병철 회장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왜 3남인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지명 하셨나요?”
기자의 질문에
이병철 회장은 짧게 대답했 습니다.
“건희는 <듣는 귀>가 있어서!”
삼남인 이건희 회장이 장남과 차남을 제치고 삼성의 후계자가 된 이유가 그 것 한 가지 뿐은 아니겠지만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능력이
아버지 이병철 회장에게 인정받 은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가정이나 학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내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유능한 남편이고,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아내가 현명한 아내입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강의 시간에 선생님 말을 잘 듣습니다.
배우자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문제와 갈등을 풀어내는 능력을 배양하는 필수 과정입니다.
평화로운 가정, 행복한 가정,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위한 소통은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보다
상대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듣는 것이 진정한 대화의 능력이고
삶의 기술입니다.
하나님이 귀를 두 개 만드시고
입을 하나 만드신 이유도 두 배로 듣고 절 반 만 말하라는 뜻이라고 여깁니다.
공자는 말하는 데 3년 걸리지만
듣는 법을 터득한데는 60년 걸린 다고 하였습니다.
“경청(傾聽)” 이라는 책이
오랜 기간 동안 베스트셀러가
된 것만 봐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대답이 좀 늦고 진행이 빠르지 못해도 배우자와 열린마음으로
천천히 다 듣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가면 가정은 평화롭고 행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 작가 장자크 상페는
자신의 책 ‘뉴욕 스케치’에서
뉴요커들의 긍정적인 말버릇을 관찰했습니다.
그들은 빤한 얘기인데도 습관 처럼 상대의 말꼬리에 감탄사(!) 를 붙이고, 물음표(?)를 달아줍 니다.
이는 '내 말에 관심을 갖는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지고, 서로의 삶과 이야기를 격려해주는 말의 효과를 높입니다.
이를테면, 누가 “이번에 터키를 다녀왔어요. 너무 좋았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옆에서 “좋은 곳이죠.
나는 두 번 가봤어요.” 이렇게 말을 받으면 일단 주춤하게 됩니다.
이럴 때 뉴요커들은 자기 경험을 내세우지 않고 “정말요? 어머, 좋았겠다!” “일정은 어땠어요?”
말머리를 계속 상대에게 돌려 줍니다. 얼쑤 같은 추임새로
상대를 신나게 해주는, 뉴요커의 말 습관이 좋아 보이는 이유입 니다.
"199대 1의 승리자"
파격적인 진급을 하고 현지에 부임한 李舜臣(이순신)은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우수영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그 울타리에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왔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 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내려온
장수를 보고 순순히 인정하고
가만 있었을리는 없는 것이다.
1597년(정유년) 2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산통제영 에서 체포된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이 열리고 선조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 / 200명 모두 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마땅하옵니다."외친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읍조 하며 임금(선조도 속으로 는 동조 함)을 압박 하고 있으니
이순신을 발탁해주고
6계급 파격 진급에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공은 공 / 사는 사라고 하며 이순신을 죽여 야 한다는 문무백관 들의 의견에
반대를 하지 못한다.
당시 이순신의 누명 상황이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ㅜ당시 領議政(영의정) 겸 都體察使(도체 찰사) 국가비상사태 직무 총사령 관인
梧里 李元翼(오리 이원익)(1547~1634)이 임금의 어명 으로 전시 상태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시상태에서는 임금과 문무 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 외쳐도 이원익의 승락 없이 는 선조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 대사로 고한다.
전하께서 전시에 신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중에 삼도수군 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 하지 못하옵니다.
이원익의 이 말에 선조도 체념 을 하고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 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없 는가 보구나.!"
오직 한사람의 곱고 바른 판단 과 집념으로 199명의 고집을 꺾 었다.
드디어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된다.
당시 문무백관 199명 대 1
이원익 한 사람만이 반대를 하여 이순신을 살려 낸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 만 떠 받든 공복 그가 있으면
온갖 사물이 제 자리를 잡게 되는
소박 하고 비범한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 초가집에 살았던
"조선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 대감"
세월은 400년이 지나고
시대만 수없이 변했을 뿐
정치는 변한게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을 알아주는 한사람만 있으면 외롭지 않은것이 대장부의 자존심이요 명예이다.
더구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통에는 더할것이다.
온갖 시기질투와 모함으로
사형 직전까지 간 만고의 충신을
알아 보고 199대 1로 임금의 불신으로 부터 믿어준 탁월한 先見之明 (선견지명)의
굳은 신념이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들의 생명과 조선 사직을 지켜낸 오리 이원익 대감이야 말로 만고에 길이 빛나는 충신이 며 나라의 보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 사람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 이원익이
나라를 구했던것이다.
한 사람.!
올바른 한 사람이 중요하다.
생각해 본다면 이순신장군은
행복한 분이셨다.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 하지않고
불의에 뜻을 굽히지 않았던 오리 대감과 같은 분이 시대에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87세로 눈을 감으시면서
모든 자식들을 불러 놓고 !
"나를 위해 부고도 알리지 마라
사후에 어떠한 사당이나 칭송된 일이나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러기에 오리 정승은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400년이 지났지만
오늘의 이 시대에 이원익 대감 같은 "정정 당당"했던 淸白吏(청백리)는 어디 에 있는지 묻고 싶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생각나게
할 뿐이다.
지금 시대에 李元翼(이원익) 政丞(정승) 같은 正正 堂堂(정정 당당)했던 분이 계시면 좋겠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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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중반노인 이야기>
마산에 사시는 문학박사 露香, 趙良來 교장님께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보내 오셨습니다.
♡ 할수없네~ 그냥 사는 수 밖에...♡
네 명의 죽마고우가 있었다.
현역에 있을 때는 기관장, 은행가, 사업가 등으로
눈부시게 활동하다가
은퇴후에 고향에서 다시 뭉쳐
노년기의 우정을 나누었다.
날마다 만나 맛집찾아
식도락도 즐기고, 여행도하니,
노년의 적적함 따위는 없었다.
어느날
한 친구가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은 괜찮지만
더 늙어 치매가 온다든지 몹쓸병에 걸려
가족을 힘들게 한다면 그것도 못할 일 아닌가?
그래서 나는 비상약을 구할 생각이라네.
무슨 비상약?
응 내가 곰곰 생각해보니
잠자듯이 죽을 약이 없을까? 생각 해 보았더니,
수면제 같은것은
처방전이 필요할 거고
다른 방법은 사고 수습하기가 번거롭고
주변이나 가족들에게 민폐가 되니까
옛날의 고전적인 방법을 찾아 냈다네.
그게 뭔데?
내가 알아보니
<복어알 말린것>이 최고라네.
그걸 먹으면 졸듯이 자물자물 하다가
고통없이 간다쟎아.
이리하여 네 친구는 비상약 각 한 봉지씩
가족 아무도 몰래 소장하였다.
어쩔 수 없는 비참한 노년을 위한 상비약이었다.
80을 지나 8십 네댓살,
옛날보다 만나는 횟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일주일에 한번씩,
생의 고비마다 서로 모여 버팀목이
되어주며 살았다.
그 사이 변화도 있었다.
A는 황혼 이혼을 했고,
B는 젊어 이혼한 전부인과
다시 황혼 재혼을 했고,
C는 부인이 암으로 이별을 했으며,
D는 부인 손밑에 사는데 국수 먹고 싶다면 밥내놓고, 라면 먹고 싶으면 손수 끓여 먹으란다.
C의 경우,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혼자서 살고 계시는 아버지가 안돼 보인다고
아들 내외가 지극 정성으로 합가를 하자고 해서
전 재산을 사업자금으로 물려주고 합가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딸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그 착한 며느리는 노인냄새 난다고 눈치를 주며 얼굴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젊은 날의 카리스마,
그 위엄은 종이 호랑이처럼 구겨진채
방구석에 버려졌다.
마누라 제사날,
예수 믿는다고 제사도 안 지내고
딸들도 오지 않으니,
쓸쓸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만나
밥을 먹고 난뒤
내색않고 혼자 추모관으로
아내를 찾아갔다.
아내 사진은 오늘도 방긋 웃고 있었다.
"여보, 내가 갈께 기다려~"
그날밤 절친들에게는
짤막한 우정에 감사하는 글을 남기고,
딸들에게 절절한 사과의 글을 남겼다.
그리고 아들 며느리에게는 아무말도 남기지 않았다.
간직해온 그 복어알 "비상약"을 꺼냈다.
그것은 마치 비상약이 아닌
삶의 질곡으로부터 탈출하는 열쇠처럼 느껴졌다.
생수 한컵에 갈색 약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모처럼 편한 잠자리에 반듯이 누웠다.
자물자물 하다가 이제 저 세상으로 가겠지...
힘들고 고된 이 세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
다음날 아침,
그 친구 C로부터
세 친구들에게 온 카톡 메시지!
"야, 니들 그 비상약 모두 버려!
내가 먼저 실험을 해봤더니
아무런 약효도 없어!"
복어 독도 오래되면
독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모양이다.
친구들이 발발이 전화가 왔다.
오늘 점심하자,
그렇게 힘들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냐!
앞으로 어쩔거냐?
묻는 말에 힘없이 대답했다.
"어쩔 수 없네,
할 수없이 그냥 살아야지!
근데 자네들 만나니
왜 이리 반갑고 좋으냐, 응..."
-- 작자 미상/ 퍼온 글 입니다 -
♡♡♡
☞ 에필로그
우스개 이야기로 넘길수 없는 나이에 우리들이 와 있습니다.
소제는 며칠 전 낮에 꿈을 꾸니,
어머님(89)과 같이 충청도 어느절에 가서 어찌나 피곤하던지 주지스님(83) 방에 누웠는데,
왼쪽은 어머님, 오른쪽은 주지 스님이었습니다.
진주로 돌아가야겠는데, 어머님은 가실 생각을 하지 않으므로
나혼자 눈을 떠서 살그머니 살펴보니,
어머님은 흰머리에 늙은 모습으로 자는듯 누워계시고,
주지스님도 꼼짝않고 누워 계셨습니다.
이상해서 일어나보니 모두들
별세하신 분들 틈에 소제가 끼여
누워 있었던 것,
이것은 소제가 조만간 그 분들 옆으로 간다는 선몽입니다.
죄만 잔뜩 지었지,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는데 머지 않아 이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갈데도 없고, 자전거타고
상북도서관에 갔으나 책보기도 힘들고,
고바이가 돼서 약 1km거리를 되돌아 걸어오는데
걷기가 힘들어 10m마다 한번씩 쉬었습니다.
할수없네~ 그냥 사는 수 밖에...
가 아니라,
할수없네~ 이대로 가야겠네, 입니다요,♡
[眞不立妄本空,有無俱遣不空空]
○ 진리는 세울것 없고
망상은 본래 없는 것,
○ 있고 없고를 모두 보내버리면
공하지 않으면서 공해진다네,
소제가 카톡 그만 두겠다고 여러번 선언했다가 다시 시작하는
실없는 인간이 되는 것은,
이처럼 남은 세월이 얼마 남지 않은 딱한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 꽃은,
밀양 초동면에서 화원을 하시는 박성배 박사께서 보내오신
<흰 공작새 동백꽃>,
2004년 일본에서 교배시켜 탄생한 <시로 큐자큐 츠바키>
(Shiro Kujaku tsubaki)입니다.
☞ 노래는,
음악박사, 晋州 梅軒 黃德男 교장님이 보내오신 장사익(1949~ 충남 홍성군)선생님의 <봄날은 간다>입니다.
☞TV는, 다시 추워진다고 호들갑이지만,
걸어보니 기온이 많이 올라 갔어요,
오늘도 많이 걷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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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백리 세분의 자녀교육
우리는, 청렴 결백한 관리를 청백리라
호칭하며 그분들 존함 앞에서는 고개가
숙여진다.
조선시대 초기 어수선 할 때 청백리의
표상...
이 세분이 없었다면 세종과 같은 대왕이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감히 해본다.
지금 이 시대 세분의 삶을 비교 해 보면...
먼저, 황희 정승께서는 아들 셋 중에 한명의 아들이 주색잡기로 방탕한 짓을 해서 골치 거리였을 때 몇 번을 좋게 타일렀지만 고쳐지지 않아서...
하루는 밤늦은 시간까지 관복을 차려입고
대문 앞에서 기다리다, 고주망태가 돼서
들어오는 아들에게
“이제 들어오는 것입니까?”
그러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아버님
왜 이러십니까?”
그러자 황희 정승께서,
“무릇 자식이 아비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 .집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이 아니라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이나 마찬가지가 되지요.”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중하게 맞이하는 것은 예의인즉, 저는 지금 손님을 맞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무릎을 꿇어 통곡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둘째, 맹사성 선생께서는
세종 초기에 이조판서였다.
그의 복장은 늘 허름하고
낡은 차림이었다.
하루는 내를 건너가려고 짚신을 벗고, 옷을 걷어 올리는데, 한 젊은이가 맹사성에게
“제가 내를 건너야 하는데
제 옷이 물에
젖으면 안돼서 그러니 저를 업어다 건너에 내려 주면 10전을 드리겠다.”
맹사성은 그 젊은이를 업어다 내려 준 후
“어디를 가는데 좋은 옷을 입고 가는가?”
“제 부친이 맹사성 이조판서와 친구인데,
저의 관직을 부탁하러 부친의 서찰을 가지고 맹사성 어른을 뵈러갑니다.”
“내가 맹사성이다.
자네가 관직에 오를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부친에게 가서,
‘자식 인성교육이나 똑 바로 시켜서 관직에 보내라.’ 한다고 전해라.”
하고서는, 호되게 야단을 쳐서 보냈다 했다.
벗의 자식이지만 잘못을 지적하여 야단을
쳤고, 그 청년은 몇 년을 자숙하며 겸손을
깨달은 후, 말단 관직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세 번째로, 세종 초기 대사헌(검찰총장)과
판서를 역임한 정갑손 선생께서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셋째 아들 정오는
효성이 지극했고 문재가 빼어났다.
정갑손이 함길도(함경도의 옛 이름) 관찰사로 있을 때, 아들 오도 어느덧 훤칠한 대장부로 자라 있었다.
함경도 관찰사 재임 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에서 한 달 가량 머물다 함경도로 돌아와서, 밀린 서류를 점검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사이 치러진 향시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아들 '오'의 이름이
‘장원 급제자’로 적혀 있었다.
향시는 지금의 도청격인 각 도의 관찰부에서 치르는 지방과거로, 향시에 합격하면
초시나 생원이 되어 한양에서 치르는 본 고사인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정갑손은 즉각 향시 출제위원들을 불러서 "정오의 합격을 취소하라." 명령했다.
출제와 채점을 했던 위원들은 “채점은 공정했고 장원 자격이 충분하다.”며 거세게 항변했지만, 정갑손의 태도는 꿈적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이곳 관찰사로 있는 한, 정오는 합격시킬 수 없소이다.”
그날 밤, 정갑손은 셋째 아들을 조용히
불러서 “오야, 나는 네가 함길도 향시쯤이야 장원을 하고도 남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들 ‘오’ 역시 미소로 답했다.
“네, 아버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후 ‘정오’는 경상도 외가로 잠시 내려갔고, 그곳 향시에서 장원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 한양에서 치러진 과거에서
장원급제, 어사화를 꽂고
함길도로 내려갔다고 한다.
청렴했던 정갑손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초가집에서 평생토록 무명
이불에 부들자리를 깔았고, 비단 이불 한번 덮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몰염치가 오히려 당당하게
호도되며, 당연지사로 여기는 즉물적 가치관이 횡행하는
혼란스러운 이 시대,
선현들의 검박했던 청백리
표상 세분의 올곧은 삶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담아서 새겨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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