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릴 때 침이라고 하면 어른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를 겁줄 때
쓰는 도구로 끝이 뾰족한 바늘을 일컬었다. 우는 아이를 뚝 그치게 하는 데도 쓰였다.
우리 동네에는 100여호가 살았는데 산골이라 약방도 없었고 면에 출입을 하시던 가실할배가 어디서 배웠는지 침을 잘 놓았다.
요즘으로 치면 무허가 돌팔이였지만 동네 사람들은 식구중에 누가 아프면 그리로 데려갔다. 나도 어쩌다가 입이 약간 돌아갔는 데 아버지가 가실할배한테 데리고 가서 팔목에 쑥뜸을 하고 침을 맞아 입이 돌아왔다고 한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허리가 아파 당시 유명하다는 온천장 간첩춤쟁이한테 모시고 간 적이 있었다.
일반 한의원도 아니고 그냥 가정집이었는데 방마다 침 맞으러 온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침을 놓을 때 입에 한묶을 물고서는 환자를 눕혀 놓고 그야말로 '호박에 침 주기' 식으로 여기 저기 찔러댔다. 그리고는 따뜻한 방바닥에 한 30분 정도 누워 있으라고 했다. 한번 맞는데 만원인가 준 것으로 기억된다. 점심때가 되어 식사하러 가면서 받은 돈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는 데 적어도 일이백만원은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왜 간첩춤쟁이로 소문이 났을까? 그가 침을 놓는 방에 사진이 붙어 있는 데 한 때 간첩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전향을 하고서 밥법이를 위해 대만에 가서 침술을 배워온 것으로 알려졌다. 침을 잘 놓기보다는 '간첩춤쟁이'란 소문이 한 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아 여러 군데 다니다가 별로 효험이 없으면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한 번 가 볼까 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머니도 몇번 모시고 갔으나 별로 효과가 없어 도중에 그만 두었다.
오늘 신문기사에 보니 우리나라 침술의 대가인 구당 김남수옹이 105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915년 전남 광산군(현 장성군)에서 태어난 김 옹은 부친인 김서중으로부터 한학과 침구학을 전수해 1943년 남수침술원을 열었다. 한의사 면허가 없고 침술사 자격증을 1983년 뒤늦게 취득한 고인은 한때 ‘무허가 의료행위’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2011년 헌법재판소는 ‘사회 통념상 용인 가능한 시술’이라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쑥 한 줌으로 뜸을 뜨는 '무극보양뜸'을 창안하여, 2015년 100세의 고령에도 고향으로 돌아가 장성군 서삼면 금계리에 무극보양뜸센터를 열어 침뜸 보급활동을 의욕적으로 펼치기도 하였다. 그 전에 TV에서 그의 조부가 조선조 마지막 어의였다고 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어슴프레 남아 있다.
어쨌든 100세 넘게 봉사를 하다가 돌아가셨다니 복노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