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칼럼
[에스프레소] 킬러문항 너머의 적과 싸울 용기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입력 2023.07.04. 03:00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3/07/04/VHFL6KQXFRHLNKAM2RYUTRNZ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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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 문제 해결하려면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결이 먼저
왜 눈앞의 쉬운 상대만 때리나
정부와 국민의힘이 실무 당정협회의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관련 교육과정 밖 '킬러 문항' 배제와 적정 난이도를 확보를 위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19일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 킬러문항 관련 안내문구가 보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소위 '수능 킬러 문항'에 관해 "공교육이 아니라 장외에서 배워야 풀 수 있는 문제로 학생을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불공정한 행태"라고 밝혔으며, '킬러 문항'은 오는 9월 모의평가부터 배제될 방침이다. 2023.06.19. /뉴시스
고3 수험생이었던 2006년, 역대 수능 기출문제집을 풀며 선배들이 부러웠던 적이 있다. 문제가 너무 쉬웠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후반의 수능은 영어 지문 길이도 짧고 수학 문제 난이도도 평이했다. ‘이때 시험을 봤다면 더 좋은 대학도 노려볼 만했을 텐데’. 하지만 그건 하나 마나 한 생각이었다. 대학입시는 본디 또래 간 경쟁이다. 그 세대 안에서 경쟁을 통해 얼마만큼의 위치에 오르느냐가 핵심이다.
경쟁이 시장의 발전과 번영을 가져온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며 경쟁에 참여하는 개인의 실력 또한 향상된다. 하다못해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도 그렇다. 임요환‧홍진호 등이 활동했던 2000년대 초반의 프로게이머들과 이제동‧이영호 등이 활동했던 2000년대 후반의 프로게이머들 사이에는 현저한 실력 차가 존재했다. e스포츠 시장이 커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며 선수들의 기량 또한 상향 평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킬러 문항의 등장은 필연이었다. 남들은 저만큼 하는데 나는 안 할 수 없으니 우선 남들이 다 보는 온라인 강의는 기본적으로 수강한다. 거기에 남들과 차별화를 위한 자신만의 ‘킬러 콘텐츠’를 준비한다. 모두가 6시간 잘 때 5시간 자면서 공부하고, 또 그렇게 모두가 5시간 자면서 공부하면 4시간 자면서 공부한다. 우리나라 청소년‧청년들에게 늘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건 당연한 결과다.
왜 킬러 문항이 필요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졌는가? 경쟁의 결과에 따른 보상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 벌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방대를 나오고 중소기업에 가도 먹고살 만하면 그깟 몇 문제 풀자고 소득의 3할, 4할을 사교육비에 쏟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제 지방대를 나와서 양질의 일자리를 얻는 건 언감생심이다. 명문대 진학이라는 1차 관문도 통과하지 못하면 주어지는 선택지는 대체로 중소기업, 비정규직이다. 그런데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5월 발표한 ‘2022년 6월 기준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 수준은 70.6%로 72.9%였던 전년보다 오히려 2.3%p 줄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는 코로나19 이후 계속 확대돼 2021년엔 그 격차가 58.4%까지 늘었다(고용노동부 사업체 노동력 조사). 패자부활전 같은 건 없다. 청년층에서는 ‘한 번 중소기업이면 영원한 중소기업’이라는 격언이 회자된다.
학령인구가 급감하면서 과거 80만 명대를 넘나들던 수능 응시 인원은 2021학년도에 이미 50만 명 아래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사교육 시장은 더 커졌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졌다는 방증이다. 양질의 일자리가 줄고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상위권 학생들은 이제 의대에 ‘몰빵’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철저한 관리를 받는다. 이게 병든 사회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런 까닭에 킬러 문항을 없애냐 마냐로 싸우는 정부 여당의 모습을 보면 솔직히 비겁하다고 느껴진다. 노동 개혁, 교육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들은 뒷전으로 미루고 당장 눈앞의 쉬운 상대만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예컨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해소는 킬러 문항보다 대학 진학률과 사교육에 큰 영향을 끼치겠지만 그만큼 해결이 어렵고 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거세다. 산업수요에 맞는 학과구조조정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근본적 구조개혁 없이 재정‧통화 같은 단기 정책으로 해결하려는 건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교육이라고 다를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