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에서 골망을 가른 많은 골중에도 중거리슛으로 연결된 골은 팬들의 가슴을 제일 시원하게 씻어주는 축구의 백미라 할만하다. 페널티 에어리어로 크로스한 볼이 수비수를 맞고 튀어나왔을 때 , 혹은 선수들이 밀집된 수비진 앞에서, 그리고 30m를 넘어가는 필드에서의 프리킥 상황. 가볍게 몇걸음을 내딛고
정확한 임펙트로 공을 강력하게 때리는 선수 그리고 파워넘치게 날아가는 공이 골망을 가를 때 우리는 흥분하고 환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중거리슛은
멋이 있을 뿐 아니라 전술상으로도 중요하기 때문에 축구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세계적으로 중거리슛에 능한 선수는 여럿이 있다. 브라질 출신 레알마드리드의 풀백 호베르토 카를로스는 단연 최고이고 98년 환상적인 아웃사이드 킥으로 스페인을 침몰시켰던 나이지리아의 올리셰, 단거리 장거리를 가리지 않는
프리킥슛의 일인자 유고의 미하일로비치, 잉글랜드의 떠오르는 스타 플레이어 제라드, 등등등 수많은 캐논 슈터들이 필드에서 강력한 슈팅을 뿌려대고 있고, 이들의 슈팅은 언제나 팬들을 감격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강력한 슈팅을 뿌릴 수 있는 선수는 누가 있을까?
사람들은 몇몇을 말할 수 있을것이다. 전남의 노장 노상래, 가끔은 어마어마하게 빗나가 좀 당황스럽게하기도 하지만 중거리슛의 대가 국가대표의 멀티플레이어 유상철, 94년 월드컵에서 마테우스를 제치고 멋진 중거리를 쑤셔넣은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등 우리나라에도 슛 좀 한다 하는 선수들이 몇 있다. 하지만 중거리슛을 논할 때 이 선수를 빼 놓고 말한다면 말이 안될게다. 그는 대표팀 시절의 화려한 중거리슛으로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고 언제나 강력한 오른발로 골문을 위협해 왔다. 빠른 발을 이용한 오버래핑, 예측하지 못하는 중거리
슈팅. 그의 이름은 수원 삼성의 오른쪽 풀백 이기형이다.
90년대 후반이라면 누가 뭐래도 윙백(풀백)을 이용한 공격전술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물론 2002년 월드컵을 거치면서 이러한 흐름은 보란치를 중심으로 하는 압박축구로 넘어오게 된다.) 과거 공격수와 몇몇의 미드필더들이 공격에 참여하던 것에 비하여 윙백이 오버래핑으로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다수의 선수를 이용한 공격이 전술의 핵심이 된 것이다. 이것은 예전에 오렌지 군단이 보여주었던 토탈 사커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프랑스, 브라질, 네덜란드, 등 많은 강팀들이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윙백들을 보유하였다. 프랑스의 날다람쥐 리자라쥐, 그리고 수비력과 공격력에 세계 탑 클래스임을 인정받는 튀랑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오버래핑으로 프랑스의 98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이중 4강전이었던 크로아티아전에서 튀랑이 2번의 오버래핑으로 동점골 역전골을 작렬하였던 모습은 윙백의 오버래핑을 이용한
공격의 극이라 할만했다. 브라질은 세계 최고의
공격형 윙백이라는 호베르토 카를로스와 노련한
카푸를 이용해 98월드컵 1순위 우승후보로 군림하였고, 월드컵 최고의 돌풍이었던 네덜란드는 코쿠(아서 뉴먼)와 라이지거라는 윙백으로 그들의 토탈사커를 완성하였다. 그외의 나라들도 상황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일본은 4-4-2 를 축으로 하여 소마와
나라하시의 좌우 윙백을 주무기로 삼았고 (그러나 본선에서는 윙백의 오버래핑을 자제한 수비형 축구를 구사하였다.) 잠실에서 펼쳐진 아시아 예선 2차전에서 마라토너 출신의 왼쪽 풀백 소마에게 우측 사이드를 농락당한 한국이 일본에게 2:0으로 무너지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국 역시 윙백의 공격력을 활용하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한국이 윙백의 오버래핑을 중요한 공격무기로 삼았던 것은 사이드 공략을 주무기로 하는 한국의 축구 전통으로 미루어볼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타국가들과 차이가 나는것은 한국은 중앙공격이 지독히 빈약했고 사이드 공격에만 의존하는 단조로운 플레이를 펼쳤다는데 있다.) 한국은 윙을 두명 윙백을 두명세우는 극도의 사이드 전술을 펼쳤고 최용수, 김도훈 등 공중볼에 능한 공격수들의 존재로 이러한 윙 전술은 상당한 성공을 이끌었다.
이기형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왜 윙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경기장안에서 이기형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윙백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야 하고 97년 월드컵 예선에서 보여준 성공적인 활약도 이러한 윙백축구의 흐름에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술은 윙백의 공격력이 무시못할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윙백 이기형의 차범근
사단 발탁과 활약은 당연한 구석이 있다. 이기형은 차범근 사단에 발탁된 이후
아시아 지역 예선을 거쳐 맹활약하며 오른쪽 윙백 자리를 굳혔다. 일본과의
1차전이었던 도쿄 대첩에서 서정원의 첫번째 골을 어시스트한 최용수에게 넘겨준 크로스는 한국이 돌풍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고 우즈베키스탄전에서 사이드로부터 골대 바로 옆까지 드리블한 후 어시스트 하는 등 이기형이
맡았던 오른쪽 윙백자리는 이상윤의 오른쪽 날개와 함께 좋은 공격을 펼쳐내었다. 이는 국가대표의 주 공격루트이던 하석주, 서정원의 왼쪽 날개의 네임벨류에 밀리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떨쳐버리며 이들과 좋은 균형을 이루었는데
다만 일본과의 2차전에서 오른쪽 사이드를 완전히 소마에게 농락당하는 등
수비력에는 허점을 보였다.
물론 강력한 오버래핑 중거리슛 빠른 발 등 좋은 공격형 윙백의 조건이 있다고는 하지만 수비력의 부재는 감독으로선 넘어가기 힘든 부분이다. 한국 국가대표팀에서의 이기형의 역할은 사이드에서의 수비를 기본으로 공격시에 윙을 뒷받침하여 사이드 공격을 지원하는데 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공격적
성향이 짙은 선수이다 보니 그의 수비력은 좀처럼 기대치에 못 미치는게 사실이었다. 물론 브라질의 호베르토 카를로스같이 떨어지는 수비력에 비해 공격력이 뛰어난 경우에는 팀의 전술을 조절하여 그의 공격력을 살려주는 방향으로 나가기도 하나 우리나라 국가대표의 경우에 이기형의 오버래핑을 위해 전술을 조절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차범근 감독은 이후 일본 다이너스티 컵에서 중국전에 골을 기록하며 맹활약한 최성용에게 오른쪽을 맞기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데 이 최성용이란 선수는 일본의 마에조노와 나카타를 맨마킹 하여 대인수비의 달인으로 정평이 나있고 엄청난 활동량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근성있는 선수였으니 이 사실은 이기형에게 악재로 다가왔던
것이다. 결국 뛰어난 공격력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국가대표 시절에는 중거리
슛이 골망을 뒤흔드는 일이 잦아졌었고 수비력까지 문제가 있었던 이기형은
월드컵 대표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 일은 이기형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후 99년 이기형은 부상으로 큰 시련을 맞는다. 그러나 그게 이기형의 끝은 아니었다.
지난 아시안슈퍼컵 1차전 알히랄과의 경기에서 이기형의 환상적인 40여m 중거리슛이 골네트를 갈랐다. 99년 부상이후 국가대표에서도 부름을 받지못해 그의 오른발이 이대로 끝나버린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낳고 있을무렵 터진 그의 초장거리 중거리 프리킥은 자신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짜릿하게 보여준 골이 아니었나싶다. 이후에도 이기형은 프로리그에서 강력한 오른발 슛으로 많은 골을
넣었고 울산전에서 헤딩으로 골을 뽑아 벌써 6골을 기록하였다. 이기형은 그렇게 2002 프로리그를
통해 부활하였다. 수원에서의 그의 위치는 국가대표에서의 위치와 약간 다르다 흔히 3-5-2 에서의 윙백이라함은 5자리인 미드필더의 후방에 위치하는 수비수의 개념이지만 수원에서의 위치는
4-4-2 혹은 4-3-3 의 4 백의 오른쪽인 풀백의 위치에 가깝다. 물론 흔히 이러한 위치를 윙백이라는 개념으로 같이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확히 두 위치는 약간의 역할 차이가 있다. 우선
3-5-2의 윙백은 스리백과 연계하여 수비를 하는
쪽 보다는 사이드를 철저히 막고 역습때 공격을
지원하는 비율이 많다. 그러나 4-4-2의 풀백은 포백의 일원으로서 옵사이드 트랙을 건다던가, 상대의 공격시 사이드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센터백들의 커버플레이도 겸해야 한다. 이기형이 이러한
수원에서의 포백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겠느냐 하면 그건 함부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는 수비력보다는 공격력에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는 선수이고 오버래핑을 하는 횟수가 잦아질 수록 그의 자리는 공백이 생겨 조직력을 우선으로 하는 포백 수비에 구멍이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원에서의 이기형이 많은 공격포인트를 올릴 수 있을까. 그것은 전술상의 조절이 있기에 가능하다. 2002 월드컵 대표팀에서 홍명보가 오버 래핑을 할 때 김남일이 커버
플레이를 해주듯 이기형이 오버래핑을 할때 커버 플레이를 해주는 선수가 있다면 가능하다. 그러한 전술의 조절로 수원에서의 이기형은 브라질의 호베르토 카를로스가 그렇듯 수시로 공격에 가담해 강력한 슈팅을 날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가 공격력이 강하다고 하는 이유는 국내최고의 능력을 지닌 그의 슈팅력에 있다. 이기형은 슈팅 비거리가 32.5m에 이를 정도로 강력한 슈팅을 가지고
있고 높이 뜨지 않을 정도로 정확히 임펙트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리고 골키퍼와의 심리전에도 능한 노련함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노련함은 알히랄과의
슈퍼컵 1차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무려 42m나 되는 거리를 기습적인 슈팅으로 연결 골로 기록한 것이다. 이밖에도 이기형의 슈팅능력은 놀라울정도로
뛰어나다. 올스타전 캐논 슛 대결에서 최고 기록인 138km/h 를 기록할 정도로 슈팅의 묵직함도 가지고 있고 K-리그 울산과의 경기에서는 왼발로 중거리
슛을 터뜨렸었던 것처럼 비록 파워는 오른발에 미치지 못하지만 왼발 슈팅도
정확도를 가지고 있다. 윙백으로서 중거리 슈팅 능력이 좋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공격포인트를 기록할 기회가 늘어난다는 얘기가 된다. 보통 공이 흘러나올때 수비가 밀집되어 있고 각이 너무 넓은 중앙으로 흐른다면 슈팅기회를 잡기가 어렵지만 수비가 적고 각이 약간 비껴있는 외곽이라면 슈팅하기에 매우 좋다. 또 이기형은 중장거리 프리킥 능력도 좋기 때문에 공격형 윙백으로서는 최고의 기술을 가졌다 하겠다. 단 전술상 뒷받침이 되어있다면 말이다.
"전 축구를 지금까지 하면서 제가 타고나서 득을 본다는 것을 없었던 거 같아요.
선천적으로 타고나서 축구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저같은 경우에는 정말 타고난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이 독기가 있어서 남들에게 지는거 싫어해서 죽기 살기로 하는 거
있잖아요. "
그는 스스로를 축구에 선천적인 기질을 타고 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사실 그는
훈련과 노력으로만 축구의 꿈을 이룬 노력파중의 한명이다. 그는 펠레나 마라도나같이 어려운 가정 환경을 딛고 일어섰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 뒤에 아버지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열두 살 위인 형의 손 에서 자랐다. 이기형이 축구와 인연을 맺게 된것은 초등학교 3학년. 육상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었던 그를 본 선생님의 권유에 의해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6번을 달고 수비형 미드 필더로 뛰었으며 이후 비쇼베츠에 의해 오른쪽 사이드 어태커 자리로 이동할 때까지 계속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있었다. 그는 신림중-정명고를 거치면서 한국 축구의 엘리트로 성장했는데 16세 이하 주니어대표와 청소년대표, 올림픽대표팀까지 한번도 빠지는 곳이 없을 정도의 기대주였다. 그는 정명고 축구팀을 지도하고 있었던
박이천 감독밑에서 많은 성장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70년대 중거리슛의 명수였던 박이천 감독에게 프리킥과 기습슈팅을 전수 받았다. 그는 정명고를
졸업하고 고려대로 진학한 이후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을 겨냥한 비쇼베츠 사단에 합류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빠른 발과 강력한 슈팅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고 93년 호주 세계청소년 선수권대회 C조 예선 미국전과 95다이너스티컵 축구대회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기록한 미사일 중거리슛 두방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놓았다. 이기형은 95년 1년간
10골을 기록, 16골을 기록한 스트라이커 최용수 다음 가는 득점력을 보이며
최용수 윤정환과 함께 한국 올림픽 대표의 핵심요원중 한명으로 급부상하였다. 이후 올림픽 대표가 가나에게 1승을 기록하며 예선 돌파 일보직전까지 갔으나 2패로 탈락하였던 이탈리아에게 비기기만 해도 되는 경기에 2-1로 패하면서 본선진출이 좌절되었다. 이때 이탈리아 전에 후반 동점골을 기록하였던
선수가 이기형이었다.
이기형은 96년 수원에 무려 1억 5천만원이라는 금액에 계약하였다. 그리고 원년멤버로 김호 감독 밑에서 수원삼성이 아시아 최고 구단으로 떠오르는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고 97년 아시아 예선을 거치면서 국가대표의 오른쪽 윙백
자리를 꿰찼다. 그러나 정작 98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99년 수원이 3관왕을 차지하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99년 오른쪽 발목속에 자라나는 뼈를 제거하는 수술과 고질적인 왼쪽 무릎 부상에
대한 수술, 그리고 부상재발 등을 겪으며 2000시즌 3경기에 출장에 그쳐 시련의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2001시즌에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하여 히딩크 사단에 잠시 부름을 받기도 하였으며 2002시즌에는 화려하게 부활, 현재 총 시즌 6골에 정규리그 4골을 기록하는 등 청소년.올림픽.국가대표를 차례로 거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이기형은 지금 통렬한 중거리포와 함께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부상후에 떨어진 체력과 자신감 부족으로 고생했지만 화려하게 부활한 이기형. 그의 환상적인 중거리슛이 작렬하고 있기 때문에 수원으로서는 기쁘게 받아들일만하다. 우선 오버래핑과 슈팅이 된다는 얘기는 김호가 꾸준히 만들어온 수원의 공격축구에도 날개를 다는 격이기 때문이다. 다만 앞으로의 수원은 이기형이 오버래핑한 그 뒷공간을 이진행과 조성환, 김진우 같은 선수들이 얼마나 메워줄 수 있는가에 수비력이 좌우될 것
같다. 한동안 흔들렸던 수원도 고종수의 복귀를
즈음하여 다시 부활하고 있는 듯 하니 수원의 전망은 밝다 하겠다. 지금은 중위권에 쳐져 있는 팀이 상위권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데니스와 적응
실패로 고생하는 외국인 선수들, 그리고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이기형, 부상에서 탈출한 고종수 등의 활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기형은
이 제 2의 전성기를 도약의 발판으로 다시 최고의
윙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에 더욱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중거리 슛이
무뎌지지 않도록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많은 팬들이 기대하듯이 다시 태극마크를
달 수 있는가의 여부가 궁금한데, 이부분은 함부로 얘기하기 힘들거 같다. 사실 유망주들이 아주
많은 국가대표로 다시 복귀한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른쪽 윙백만해도 2002월드컵으로 세계수준의 플레이어로 인정받은 송종국이 버티고 있고 그밖에도 같은
수원 소속인 최성용, 빠른 발을 가지고 있는 최태욱, 청소년 대표의 이종민, 등
많은 유망주들 속에서 이기형의 오른발이 다시 빛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다만 기대해봄직한것은 이기형의 최근 페이스가 급상승세라는 것이고 또 송종국의 유럽진출로 국대차출이 쉽지 않다는 점이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국가대표 복귀는 매우 힘든 일이다. 히딩크 사단 발탁후 부상에서 완벽히 회복되지 못했던 당시에 가졌던 체코 전에서 수비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0:5 패배를 당했던 것으로 봐서도 벌써 30을 바라보고 있는 이기형으로서는 큰 부상후의 체력상의 문제도 쉽게 넘기지 못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통의 대표팀이라고 한다면 나이가 든 선수를 대표팀에 부르기 보다는 어린선수를 기용하여 미래를 노리는게 일반적이다. 이기형이 이러한 걸림돌을 넘어 대표팀으로 발탁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그것은 두고 볼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기형의 국제무대 활약이 힘들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시아 최고 클럽 중 하나인 수원 삼성소속으로 월드 클럽 챔피온쉽 등 많은 기회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시즌 월드 클럽 챔피온쉽은 취소되었지만 아시안 슈퍼컵 우승으로 다시 아시아 제일의 클럽임을 입증한 수원으로서는 언제든지 기회를 노릴 수 있다고 본다. 점점 해외 클럽 컵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고 아시아도 새로운 제도의 클럽대항전을 추진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소속팀의 활약에 따라 개인의 거취가 결정되는 일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알 히랄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40m 중거리를 과연 우리나라의 어느 선수가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해외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그의 오른발을 세계에 보여주는 것은 문제가 없다. 다만 당분간 해외진출 등을 큰 목표로
삼고 있지는 않은 듯 보이는 이기형이기에 수원 소속으로 세계 무대 를 누비는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도 팬들은 만족해야 할 듯 싶다.
우선 한번 시련을 겪었지만 다시 부뢀한 이기형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개인적으로도 96년 올림픽 대표부터 좋아하는 선수였기에 그의 활약이 기쁘게 들렸다. 그의 중거리슈팅은 시원한 구석이 있다. 스핀등 기교를 부리는 것보다는 강력하게 꽂아넣는 그 강인함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이기형은 어려운
환경에도 노력으로 인정받았고 강력한 중거리슛을 자신의 무기로 삼고 꾸준히
훈련했을만큼 축구 스타일에 대한 주관도 뚜렷하다. 언젠가 축구 지도자가
되어 필드의 선수들을 코치하는 것이 그의 꿈이지만 아직은 그의 중거리슛이
녹슬지 않았고 그의 전성기는 끝나지 않았기에 팬들에게 보여줄 것이 많이 남아있다. 물론 안타까웠던 1998 대표팀 탈락, 부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2001년 히딩크 호에 탑승하였지만 결국 인정을 받지 못한 일, 모두 이기형에게는 아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대표팀에서 탈락하여 앞으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단정할 수 없게 되었지만 우리는 필드가 있는 곳 어디라도 그의 중거리슛이 작렬하면 환호를 보낼 것이다.
그의 오른발은 국내 최고급이다. 당연히 앞으로도 강력한 슛팅을 자랑하는
슈터들이 많이 나올테고 저마다 캐논 슈터라고 불리우겠지만 당분간 그들의
별명 앞에 '제 2의 이기형'이라는 말이 끼어듦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역시 그의 오른발은 우리 뇌리에 잊혀지지 않을 정도의 강력하고 멋있는 '캐논 슛'을 날릴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이기형 선수가 되기를 바라면서 스타프로필을 마친다. 변하지
않는 이기형 선수로 언제나 좋은 플레이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Profile
이기형(Lee Ki-Hyung)
1974년 4월 28일생, 181cm 70kg
소속팀 : 수원 블루윙즈(한국, 1996~)
출신학교: 신림중학교-정명고등학교-고려대학교
포지션 : 오른쪽 윙백(DF)
K-League 출장/골 : 127/14 (-2001시즌까지)
A-Match 출장/골 : 41/4
대표경력 : ▷U-19, U-20, U-21 대표▷제 35회 메르데카 축구대회 출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 ▷1997년 호주 4개국 축구대회 국가대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
이글은 Daum 카페 '재미 없다'에 게시되는 글입니다.
* 이글에 사용된 사진의 출처는 최정애님의 이기형 선수 팬페이지 입니다.
* 강신우 해설위원의 축구 이야기와 이기형 선수의 팬 카페인 캐논슈터
이기형의 글들을 참고 하였습니다. |
Written by Liber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