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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인류 사회의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어서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서방 국가들은 국민주의를 원리원칙으로 하여 이 지구를 정복하려 하였다(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을 살펴보기만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국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모든 기도는 민족 또는 시민 개념에 근거하여 문화와 정체성의 동질화 과정을 상정하는 것으로서, 문화적 동질성이 곧 사회의 규범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문화와 정체성의 다양성은 배제되거나 부정될 수 밖에 없었다.
다문화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이 후 196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많을 다(多’)자에 ‘문화(文化)‘라는 말이 붙어 ‘여러 나라의 생활 양식’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지닌 다문화는 1970년대 초 캐나다에서 처음 '다문화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면서 인종, 장애인, 소수 계층으로의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 파생된 다문화사회는 한 국가나 한 사회 속에 다른 인종·민족·계급 등 여러 집단이 지닌 문화가 함께 존재하는 사회를 말하며, 다문화주의는 민족마다 다른 다양한 문화나 언어를 단일의 문화나 언어로 동화시키지 않고 공존시켜 서로 존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 운동, 정책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특히 다문화주의에서는 국적, 체류자격, 인종, 문화, 성별, 연령, 계층적 귀속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보편적 권리를 가지며, 그들의 삶의 방식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다문화사회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동화이론(assimilation theory), 용광로론(melting pot theory), 셀러드 보올론(salad bowl theory)을 들 수 있다.
먼저, 로버트 파크에 의해 제시된 동화이론은 이민자들이 현지인과 관계에서 접촉-경쟁-화해-동화4개 과정을 경험하면서 주류사회에 정착함을 규명하였다. 이는 다시 용광로모델, 다원모델, 앵글로순응모델로 나누어 지며, 처음 제시되었던 시대상을 반영하였을 때 상당히 진보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두 번째로 용광로론은 동화이론의 한 부류로서 소수 집단인 이민자들이 다수집단이라는 커다란 주류사회 속으로 녹아서 용해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문화다원주의이론이라고도 불리는 샐러드 보올론은 동화이론을 거부하며 이민자들이 각자 고유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기존사회와 공존해 나간다고 본다.
이를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용광로는 많은 물건들이 용광로에 들어가면 녹아서 섞이는 것을 비유한 말이고, 샐러드 접시는 샐러드를 아무리 섞어도 결국에는 제각각의 야채인 것에 비유하면 이해가 편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론(동화이론과 문화다원주의)은 이민사회가 주류사회에 흡수되느냐 유지되느냐라는 이분적인 시각에서 파악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이민자 집단 혹은 이민자 개인마다 나타나는 다양한 적응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는 그 한계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계점에서 벗어나고자 이주민 사회가 기존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네 가지 유형으로 다시 분류하였다. 이는 어떤 이주민 집단이 기존사회와의 접촉이나 관계 유지에 대해 긍정적인가 또는 부정적인가, 그리고 이주민 집단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특징을 유지하는데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결과적으로 이들이 적응하는 방식은 동화(assimilation), 분리(separaation), 통합(interation), 주변화(margination)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동화는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으면서, 기존 문화의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모습분리는 기존 문화의 수용이나 접촉에는 소극적이면서, 자신들의 문화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는 모습
통합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정체성 유지에 적극적이면서도, 기존 문화와의 접촉을 갖고 있는 모습
주변화는 자신들의 문화 정체성 유지에 소극적이면서도, 주류사회와의 접촉도 소극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모습
기존의 주류사회(국가)가 사회의 한 부분으로 새롭게 구성된 이민자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이라는 정책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지고 있다. 사회통합은 비통합적인 상태에 있는 사회 내 집단이나 개인들이 서로 적응함으로써 단일한 집합체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으로 이러한 사회통합은 사회 갈등을 제어하고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는 동시에 구성원들에 사회적 가치를 개인적인 삶의 의미로 내면화하게 하여 사회의 내적 결속력을 높이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다문화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각국의 나라들이 이주민을 주류사회에 수용, 통합하는 방식에는 크게 동화주의 모델(Assimilationist model), 차별적 배제 모델(Differential exclusionary model), 그리고 다문화주의 모델(Multi-cultural model) 등 세 가지 유형을 들 수 있다.
우선, 동화주의 모델은 한 국가 내에 공존하는 주류문화와 비주류문화 중에서 주류문화를 통한 사회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모델은 국가와 사회의 동일한 정체성 유지, 통일에 목적을 두고 동화대상 집단이나 개인들이 주류집단의 문화와 가치관에 동일하게 변해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시행하는 흡수⋅통합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민자와 소수집단의 구성원들은 동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관습, 종교, 문화 등을 소멸하거나 상실해 가는 반면, 자연적이거나 회피할 수 없는 일방적인 습득과정을 통하여 주류집단이 보유한 것들의 정체성과 유사성을 취득하게 된다.
동화주의 전략에서는 주류문화로의 융합과 동화,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한다는 서약만 있으면 국적과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동화주의 전략은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소수집단이나 이민자는 다수집단의 사회 속에 융해되며 문화적 적용이라는 단선적 과저에 힘입어 다수집단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음으로, 차별적 배제모델은 특정한 이주민에 대해서는 자국 국민에 준하는 공식적 권리를 인정하는 반면에 그 외의 이주민에게는 일시적 체류 자격만 부여한 체 이들을 사회통합 대상에서 배제하고 각종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전략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민자를 3D 직종의 노동시장과 같은 특정 경제적 영역에만 받아들이고 복지혜택, 국적, 시민권, 선거권, 피선거권 등과 같은 사회⋅정치적 영역에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유입국에서는 국가가 원치 않는 이민자 정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전략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다문화주의 모델은 기본적으로 각 집단 간에 존재하는 문화적 이질성을 존중하며 이들의 다양한 언어, 문화, 종교, 민족 등을 보장해 줌으로써 사회통합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말한다. 즉, 다양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주류-비주류사회 간 상호 존중의 질서가 자리 잡도록 하는데 정책 목표를 두고, 비주류 집단의 문화적 사회적 차이의 잠재력과 정당성을 받아드리려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델에서는 소수집단이 자신의 특수성이나 정체성을 버리지 않더라도 주류사회에 완전한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각 인종, 민족의 전통적 문화, 언어, 생활습관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보호, 유지하기 위해 공적 원조를 하는 것과 더불어 인종 차별 금지,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를 도입하여 각 집단 내 불만의 축적을 예방하고자 노력한다. 나아가 이 모델은 기본적으로 동화주의 모델이 다문화, 다민족사회의 통합전략으로 유효하지 않고 오히려 인종간, 민족간 분쟁의 원인 될 수 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다문화주의 모델에 대해 보충 설명하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인데, 이는 다시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따라 분류되어지어진다.
다원다문화주의는 상대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자유다문화와 다르게 자유민주질서라는 틀조차 거부하고 그야말로 상대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어떠한' 외부 문화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과격하게 나간다면, 명예살인, 강제할례와 같은 것도 문화로서 존중받아야 하며, 자유나 민주 또는 인권의 잣대로 이를 제재하는 데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것. 또한 저런 잣대를 다원다문화주의자들은 일종의 '문화제국주의'의 수단으로 안좋게 보기도 한다. 더불어 법질서상 허용될 수 없는 문제 역시도 존재하기에 이를 조율하기 매우 어렵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하여 한국에서는 다원다문화주의 정책을 실행한적이 없다.
자유다문화주의는 자유주의적 질서의 범위 내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관용)하자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각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듯 음식, 의복 등 각 문화마다의 특성을 존중하자는 것. 하지만 다원다문화와 다르게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에 위배되는 일부 문화들을 배격한다.
자유다문화주의자들은 다원다문화주의자들의 태도를 비판하며 명예살인, 여성할례 같이 인권상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제도를 타국의 문화를 존중한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하면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이슬람 전통을 어기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해명하더라도 자신들에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제도로 서구의 인권을 존중한다고 해서 이슬람 비판 등을 허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이 중요하다는 건 서구의 시각일 뿐이고, 무슬림들에게 이것이 종교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인정시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통 존중과 자유주의 존중 중 어느 쪽이 중요하냐는 것은 근거나 정답이 없으며 그 국가의 사회적 합의에 의해 본인들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안에서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문화적 다양성을 선별적으로 존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근친결혼, 일부다처제, 대마초, 안락사 등 한국의 법률에 맞지 않는 외국의 제도나 문화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톨레랑스의 톨레랑스(tolerance)적 모델이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다문화' 정책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톨레랑스란 다시 말하면 관용, 용인이다. 자신과 다른 문화, 혈통,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이웃에 살아도 그들을 있는 그대로 용인하면서 그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한 문화를 한 나라 안에 둠으로써 보다 다양한 사회적 가능성을 두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안산 원곡동에 위치한 '국경없는 마을'에서 이와 같은 다문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이 똘레랑스라는 용어가 나온 프랑스에서조차 이슬람교도와의 마찰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집시들을 추방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용인적 다문화주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갈등이 없이 안정적으로 지속되기 매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는 '용인'은 '무관심' 혹은 '이질성'을 함의하기가 쉽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섞이지 않는 주류사회와 비주류사회가 공존하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사회의 유대감이 깨지고, 계층분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다문화주의의 이념대로 여러 문화가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충돌을 정치적으로 조율하기 쉽지 않고, 그로 인해 다른 이질적인 문화가 상호적 무관심 내에서 병존하고 이는 결국 게토문화주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다문화운동을 강력한 사상의 변화, 계몽적 관점에서 보는 다문화인식론도 있다. 이는 다문화 운동이 강력한 사상적 운동으로서 개념적 기반 및 지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이론들의 집합을 아래와 같이 크게 4가지의 내용을 강조하였다.
1) 현실은 만들어지는 것
2) 해석은 주관적인 것
3) 가치는 상대적인 것
4) 앎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것
이처럼 모든 국가가 문화적 다양성을 관리하는 국가 차원의 한 가지 모델이 갖는 효력을 주창한다 해도, 그러한 모델은 대부분 현실과 괴리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동화주의’ 모델인 프랑스는 때로는 다원주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에서 흔히 권장되는 정책들과 유사한 정책들을 채택했다. 어떤 정체성은 인정하고 또 어떤 것은 무시함으로써 차별적 포섭-배제를 시행하는 사회에 접근한 적도 있다.
네덜란드는 이민으로 형성된 국민 내 집단들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데 기반을 둔 소수인종 정책을 시행해왔으며, 그것은 다문화주의 정책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소수인종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민자들과 그 후손이 점점 더 주변화되는 것을 알고 의무적으로 네덜란드어를 배우게 하는 등 통합정책을 시행하였다.
전적으로 동화주의적인 사회, 또한 전적으로 다원주의적인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둘은 서로간의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 서로 경쟁하는 이념적 산물인 것이다. 이분법적 성찰은 이념적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정도는 다르지만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구체적인 과정들을 경험적으로 접근하는데 있어서 좀 더 섬세하고 세분화된 분석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 막는다.
또한 다원주의 모델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화주의적 경향, 그리고 동화주의 모델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원주의적 경향을 관찰할 수 없게 만든다. 보다 객관적인 기술로 추상적인 국가 차원의 모델과 사회·정치적으로, 흔히 지역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분명히 드러내야 할 것이다.
또 한, 다문화주의로 인해 정체성에 있어서 개인의 고립을 조장할 위험이 매우 높다. 다문화주의는 그 고유의 속성상 개인을 한 문화적 집단에 귀속시키며 한 가지 정체성을 강제로 부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문화주의는 민족·문화공동체간에 장벽을 더욱 공고히 한다. 이민자들이 새 나라의 지배적인 문화를 자기 것으로 삼아 그 사회 안에 융합되려 할 때 다문화주의는 그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민자는 자기의 근원, 문화, 민족집단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국 취향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거의 언제나 한 민족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식되고 사회가 강요하는 이국적 이미지에 부합되어야만 한다. 몇몇 형태의 다문화주의는 어떤 집단을 보호하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게 되는 제안과 정책들로 표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문화주의자들 중에는 문화적 관계에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려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제와 새롭게 대두되는 사회문제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문화를 사회를 읽는 유일한 열쇠로 삼아 문화·경제·사회의 영역간 상화작용을 소홀히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현대사회에서 작용하고 있는 역학에 대해 단순화되고 편파적인, 부분적인 관점을 가질 뿐이다.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문화의 문제로 읽어내는 것은 결국 오진이며, 무용한 대책이 될 위험이 있다.
다문화주의 정책은 새로운 도덕질서를 정립하려는 시도로 표류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변모한다. 극단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이며 교조주의적인 다문화주의는 때로 소수집단 출신의 지식인들이 인종주의적 이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다문화주의에 관한 논의를 사회적 배제와 불평등에 관한 논의와 분리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과 간극이 증가하고 그것이 민족·문화적 소속에 겹쳐진다면 민주주의적 다문화사회를 위한 모든 기도는 환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문화적 ‘게토’가 생겨나는 것을 피하려면 불평등과 사회·경제적 배제가 증가하는 데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
모두 동일한 의무를 준수하고, 상이한 문화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개인이나 집단들 사이의 대화 같은 상호 인정의 조치가 필요하다. 모두에게 평등한 완전한 민권에 이르렀다 해도,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해야하고, 모든 문화적 표현들에 대해 동등하게 대우해야 하며, 민권이 갖는 시민적·정치적·사회적 차원을 보충하는 문화적 민권이 도입되어야 한다. 또, 다문화성을 고려하는 다양화된 문화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관용의 원칙에 근거하는 모든 상징적 인정은 오히려 다르다고 간주되는 개인과 집단들이 배제될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문화적 특수성이든 무엇이든 상징적으로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상징적 인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상징적 인정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을 종식시키지 못하며, 그러한 불평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민족적·인종적·문화적 차별을 종식시키지도 못한다. 그러한 불평등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다문화적 민주주의를 촉진시킬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 공공정책을 고려해야 하며, 그러한 재분배는 상징적 인정과 보조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구별되고 배타적인 집단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는 상을 제도화해야한다. 반면 민족, 인종, 문화, 종고에 관련도니 차별의 문제에 관해서는 확실한 법률을 제정하여 적용해야 한다. 하지만 법적이고 정치적인 도구들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결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때로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약간의 양식과 선의만으로도 시민적 다문화주의의 발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상호 인정 조치는 때로 사회적 시행에 이를 수도 있고, 공적 개입의 복잡한 매커니즘에 포함되지 않고서도 공공영역 안에서 조화를 장려할 수 있는 결정들로 이어질 수 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 소수집단이 충분히 대표되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일부 집단의 특수한 관심이 정치제도 안에서 언제나 제대로 대표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치활동 하는 사람들이 주민의 다양한 범주와 감성을 고려하고, 충분히 대표되지 못한 집단과 개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다양성을 보다 잘 반영하는 정치계층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제안된 다문화적 민주주의 개념은 동일한 의무와 권리를 갖고 또한 공공영역을 공유하며 법적이고 정치적인 권리와 절차를 존중하고 공동의 민주적 기도를 갖는 적극적인 시민단체의 구성을 상정한다. 게다가 이 시민들은 사적·공적인 다양한 문화적 시행과 정체성을 제시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문화와 정체성의 다양성은 점차 사회가 진보할수록 여러 가지 양상을 드러낸다. 국민 내의 소수집단, 원주민, 소수종교 집단, 이민자 집단, 성과 ‘행태’상의 소수집단, 미국의 흑인이나 라틴계 같은 소수 ‘인종’은 제도화된 국가로 조직된 추상적 국민과 개인 사이에 수많은 중개 공간을 이룬다. 이 집단들은 언제나 공적인 인정을 요구한다. 물론 가장 약하게는 단순히 상징적인 인정을 요구하지만, 그 극단에는 사회 안에서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실체로, 심지어 전적인 주권을 주장하며 사회와 분리된 실체로서 인정받기를 요구하는 데까지 가기도 한다.
이러한 집단들은 형성되고 변모되며, 나타나고 다시 사라진다. 그리고 국민국가의 원칙에 연결된 문화와 정체성의 동질성을 숭배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화된 사회의 일상을 형성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른바 단일 문화적 사회와 다문화적 사회의 구별은 신화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모든 인간사회는 다문화적이며, 단지 그 방식이 모두 다를 뿐이다.
문화와 정체성의 다양성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간사회는 그 다양성의 정도가 달랐을 뿐 언제나 다양화되어 있었다. 완벽하게 단일문화적인 사회, 단일한 정체성을 갖는 사회는 오직 강자들이 강요하는 틀에 맞추어 인간 모두를 획일적으로 키워낼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는 사회생활이라는 원칙 자체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