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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전 268년에 중국의 공빈 孔斌 이 쓴 [東夷列傳]에 한국을 가리켜 ‘東方禮儀之國’ 이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일찍이 중국사람들은 자기들만 문화민족이고 주변의 다른 민족들은 문화인이 아니라는 뜻으로 중국을 ‘중화’ 中華 라고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화정신’은 송나라 때 주희가 황제의 명령을 받아 중국인의 자존심을 드높이기 위해 중화민족정신을 교조적으로 만들어 내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그들은 중국을 中華라고 칭한 반면에 동쪽은 東夷, 서쪽은 西戎, 남쪽은 南蠻, 북쪽은 北狄으로 호칭하였다.
자기들만이 문화인이기 때문에 사방에 사는 다른 민족을 한껏 낮추어 호칭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북쪽에 사는 사람을 ‘이리’라 부르며, 남쪽에 사는 사람을 ‘벌레’라 부르고, 서쪽에 사는 사람을 ‘병기’(창과 방패)라고 불렀으며, 동쪽에 사는 사람을 ‘큰 활’이라 불렀던 것이다.
중국사람들이 이렇게 부르는 것은 자기들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오랑케’ 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동이의 夷 자를 잘 살펴보면 큰대 大와 활 궁 弓으로 조합되어 있어서 [큰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대의 우리나라 영토였던 민주지방의 흑룡강, 송화강, 압록강 유역이나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아무르강 유역의 기슭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강궁(强弓)을 만드는데 좋은 재료로 쓰였는데, 그 당시에 좋은 활을 만들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이 우리조상들에게 있었기에 세계에서 으뜸가는 활을 쏘는 민족으로써 중화족의 중국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이의 이 자가 중국에서 나온 어떤 옥편에 보면 ‘오랑케’ 이 자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자문화권에서 한자해석의 절대권위로 인정되고 있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夷 자를 찾아 보면, “東夷는 큰(大) 것을 따랐으니 그들은 큰 사람(大人)이고, 동이의 풍속은 어질고 (夷俗仁), 어진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니 (仁者壽), 군자가 살고 있어 죽지 않는 나라(有君子不死之國)이다” 라고 해석하고 있다.
중국의 옛 사람들은 동이족은 워낙 뛰어난 민족이기 때문에 어질고 활 잘 쏘고 군자가 오래 살고 있는 나라라고 인정하였으며 그 문화를 높이 받들고 받아들인 기록들이 중국역사서에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조상은 동이족으로써 [동방예의지국]을 건설하였으며 중국 고대
孔子도 죽기 직전에 “나는 동이족의 후예다”라고 스스로 밝힌바 있다.
동이족은 모두 당대 제일의 문화인으로 중국의 문물제도는 물론이고 윤리의식, 도덕감각을 일으켜 세운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당시 사회의 모범이 되는 지배계급이었다.
동양의 역사를 시작부터 살펴보면 두 갈래의 민족 즉 동이족(東夷族 또는 朝鮮族) 과 중화족(中華族 또는 華夏族)의 패권 다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활을 잘 쏘는 기마민족인 동이족(조선족)의 절대우위 속에서 중화족(화하족)의 발목을 중국서남쪽에 있는 내륙지방의 화산(華山)주위에 묶어 놓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해안가의 황해지역을 갈망하던 중화족의 반격에 의해 차차 세력이 역전되어간 역사를 읽어볼 수 있다.
우리조상은 파나류산(波奈留山 지금의 파미르 고원)으로부터 사백력(斯白力 지금의 시베리아)으로 옮겨 왔다.
그 후 서기 전 7천년 경에 바이칼호에 이르렀고 이때부터 갈래가 나뉘어서 세계 여러 곳으로 이동해 갔다.
동쪽으로 이동해 온 동이족은 흑룡 강, 황하 강, 아무르 강을 중심으로 하는 광대한 땅을 지배하면서 삶의 터전을 경작하는 과정에서 중국 남쪽에 살고 있던 중화족과 충돌이 일어났고, 장구한 세월을 동이족의 지배를 받게 된 중화족은 동이족을 대인(大人)으로 우러러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동이족의 정복으로 시달림을 당해 온 중화족은 나중에는 동이족에 대한 적개심이 쌓여 동이의 뜻을 왜곡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왜곡이 이(夷) 자를 오랑케로 잘못 전달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잘못된 자전을 만든 시기는 근세에 이르러서가 아닌가 짐작된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모든 기록에서는 夷 자를 가리켜① 동쪽에 사는 사람 이 ② 큰 사람 이 ③ 평평할 이 ④ 떳떳할 이 ⑤ 어질 이 ⑥ 군자의 나라 이 ⑦ 오래 사는 사람 이 ⑧ 오래 사는 나라 이 ⑨ 큰 활을 쏘는 사람 이 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오랑캐’ 라는 의미는 한 군데도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시전(詩傳)에 보면 동이의 이 자는 [어질다] [떳떳하다]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사기(史記)에는 [은 나라는 동이족이고, 주 나라는 중화족이다. 동이족은 대륙의 동쪽에 화하족은 대륙의 서쪽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군자국은 사비(奢比 / 東海)의 북쪽에 있으니 사람들은 의관을 했으며 칼을 차고 짐승을 잡아 먹으며 두 마리의 큰 호랑이를 옆에 두고 서로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산해경의 주(註)에는 [그곳에는 훈화초(薰華草)가 있으니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든다. 그 나라 사람들은 야사(野絲)로써 옷을 만들어 입으며 훈화초는 詩傳에 이르는 순화(舜華 또는 무궁화)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이족과 중화족이 패권다툼을 하면서 동북아세아의 고대사를 이루어 온 것은 우리민족인 동이족의 발자취에서 나온 선사시대의 유물, 유적이 중국인의 뿌리인 중화족의 유물, 유적과는 계통을 확실히 달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황하이북의 광대한 지역에서 동이족의 유물, 유적이 많이 발견된 것은 오랜 기간 동안 동이족이 중화족을 정복하여 지배 해온 움직일 수 없는 흔적을 말해 준다.
동이족이 건국한 고조선은 동아시아의 종주국으로 자리를 굳히고 주변의 수십 제후국들을 호령하며 번영하였다.
서기전 2333년에 백악산의 아사달로부터 백두산의 아사달로 도읍을 옮겨 진조선(辰朝鮮) 변조선(卞朝鮮) 마조선(馬朝鮮)의 3 조선국을 형성하였고, 진조선을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변조선은 기씨(箕子)가 통치하고 마조선은 한씨(韓氏)가 통치하도록 하였으며 종교적으로 단군왕검을 천자로 숭배하는 제사의식을 통하여 고조선 대국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통치영역을 오늘날 세계지도에 비추어 보면 진조선은 함경도 이북 만주전역과 러시아의 아무르 강 유역전역에서 바이칼 호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변조선은 중국의 요수 강 및 황하 강 하류와 산동반도 해안지방을 따라 양자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하여 중화족의 황해 진출을 철저하게 봉쇄하는 세력권을 형성하였으며, 마조선은 중국의 요녕성과 평안도 이남의 한반도 전역은 물론 일본열도 남부지방까지 통치의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서기 전 1766년에 하 나라가 망하고 은 나라가 건국되어 농경기술이 발달하게 되자 은 나라를 통치한 동이족의 요 임금과 순 임금에 의하여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대륙의 동부는 여전히 동이족이 차지하고 중화족은 대륙의 서쪽 내륙지방에 갇혀 고조선 대국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제후국의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동방예의지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우기에 힘썼던 것이다.
이러할 즈음 중화족이 부러워하고 존경했던 동이족의 [동방예의지국]의 삶의 문화는 우리나라가 후세에 기리 남겨야 할 생활문화유산으로써 역사의 발자취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선조의 소중한 삶의 귀중한 유산이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부러움은 창조적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파괴적 시기심으로 변질되기 쉽다.
내게 없는 훌륭한 무언가를 많이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한 질투는 일종의 콤플렉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국가간에도 이러한 파워 콤플렉스가 발동할 수 있다.
상고사 시절의 옛날에는 중화족이 이러한 파워 콤플렉스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사로 넘어 오면서 조선족이 오히려 중화족에 대한 파워 콤플렉스를 많이 가지게 된다.
중세와 근세를 통하여 우리나라는 한번도 남의 나라에 침범해 보지도 못하고 식민지배를 해 보지도 못했으며 더구나 세계를 호령하는 일을 해 보지 못했다.
반면에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며 힘 있는 강대국 앞에서 사대주의에 물들기도 하고, 이유 없이 뻗대며 사사건건 어긋나는 대처를 하여 실리를 놓치고 마는 태도를 취한 경우가 너무 잦았다.
이러한 실수는 모두 나 보다 강한 대상에 대한 열등감의 구체적 표현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근대사의 오랫동안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가와 민족의 생존 그 자체에 허덕였던 우리나라사람들의 파워 콤플렉스는 중국, 일본, 미국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파워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이러한 열등감은 날이 갈수록 창조적 자극보다는 파괴적 시기심으로 변질되어 우리나라에 이롭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스스로 파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 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새롭게 다듬어야 한다.
우리의 자존감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나라 역사의 뿌리를 새롭게 인식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위대한 민족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장구한 역사를 우리 손으로 정리하여 통사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사학자들이 그들의 식민사관에 의해 작성한 ‘조선통사’를 배우면서 반 동강 나고 왜곡된 상고사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상고사를 원래대로 복원할 엄숙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뿌리와 우리선조들의 삶의 뿌리를 모르면서 우리민족의 자존감을 드높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리문화의 정체성을 새롭게 다듬어야 한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으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가 지구촌에 있을 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상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갈고 닦고 기려서 더욱 찬란한 유산으로 키워나가는데 너무 소홀히 했다.
그러는 와중에 일본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서서 자국의 정신문화 유산을 서양사회에 소개하고 마치 자신들이 동양정신의 종주국인양 대우를 받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와 언어, 정신문화를 마구 팽개쳐 버리고 오직 먹거리를 구걸하고 물질을 추구하는 서양의 타국문화에 매료 당하여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강대국 앞에서 앞뒤 재지 못하고 쓸데없이 소리 높여 억지 부리는 양태를 보여 온 것은 어느 쪽이나 모두 강대국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중국, 일본, 미국에 대한 파워 콤플렉스를 치유하는데 앞장 서야 한다.
우리 국민이 파워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민의 정신적 정체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다.
동방예의지국 하나만이라도 다시 일으켜 새워야 할 것이다.
동방예의지국은 직계가족제도를 기초로 하고 있다.
동이열전(東夷列傳)은 다음가 같이 이어진다.
“舜이 東夷(한국)에서 태어나 중국에 들어와 천자(天子)가 되어 훌륭하게 다스리니(至治) 여러 임금중에서 뛰어나셨다(卓冠百王)”
또 순전(舜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설(契)아 백성이 서로 친하지 못하면 오품(五品: 부모형제자)이 공손하지 않으므로 너를 사도(司徒: 교육담당)로 삼으니 오교(五敎: 父義, 母慈, 兄友, 弟恭, 子孝)를 공경하여 펴되 너그럽게 하라”
동양최고의 윤리는 [오교]에 있다.
이는 동이족으로 우리나라 조상인 순 임금의 가르침인 것이다.
후일 맹자는 오교(五敎)의 정신을 발전시켜 오륜(五倫)이라 칭하여 인간의 최고 윤리로 삼았다.
오교의 뜻은 [아버지는 의롭게 하고, 어머니는 자애롭게 하고, 형은 우애롭게 하고, 동생은 공손하게 하고, 아들은 효도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바로 한국인의 가족사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의로움’ ‘자애로움’ ‘우애로움’ ‘공손함’ ‘효도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대학자 토인비는 죽기 3년 전인 1973년에 이렇게 말했다.
“동양정신문화의 원류국인 한국의 가족제도가 보전 되어야 한다. 동양의 정신문화인 윤리와 도덕은 한국의 가족사상이다.”
한국의 가족제도는 직계가족제도(直系家族制度) 이다. 이는 대가족제도와는 다르다.
대가족제도는 배우자가 있는 방계가족들이 모두 한집안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방계란 직계가 아닌 곁가지를 의미한다.
형제자매, 백숙부모, 종조부모, 당숙부모 들이 혼인해서 자녀를 두고서도 한집에 모여 사는 것이 대가족제도 다.
조선조의 經國大典 戶典편에 보면 “작은 아들이 장가를 가고 스물 두 살이 되면 살림을 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의 가족구조는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 아버지 어머니 내외, 본인 내외, 자녀들만 살도록 되어 있었다.
혼인한 자녀의 형제 내외(4촌), 혼인한 부모의 형제 내외(6촌), 혼인한 조부모의 형제 내외(8촌)와는 같이 살 수 없었다.
조부모, 부모, 자기, 자녀로 이어지는 직계만 살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가족제도의 정식명칭은 [직계가족제도] 라고 했던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대가족제도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직계가족제도로 가정을 이루고 살아 왔고, 토인비를 이를 기려야 할 가족사상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한국가족사상의 기본인 [오교]를 동양정신문화의 원류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오교’의 정신이야말로 인간이 지켜야 할 근본 도덕이고 윤리다.
우리나라 국민의 정체성은 ‘오교’에서 찾아내야 하고 이를 더욱 새롭게 갈고 닦아 지구촌에 자랑할 수 있는 예절의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첫댓글 글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오교"의 정신을 다시 찿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