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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 없는 교육은 불가능한가?
강석태 (새삶교육문화연구원장) 2011. 5. 10.
#1.무한 생존경쟁의 포로가 된 죽은 교육;
<올해만 세 명의 학우가 우리 곁을 떠났다. 무엇이 문제인지 자명하다. 성적에 따라 수업료를 차등 지급하는 미친 등록금정책,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재수강제도를 비롯한 서 총장의 무한경쟁, 신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은 단순히 학업 부담을 가중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학내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우리는 학점경쟁에서 밀려나면 패배자 소리를 들어야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 고민을 나눌 여유조차 없다. 이 학교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이하 생략)>
이 글은 카이스트의 한 학생이 내 걸은 ‘카이스트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우리 사천 학우다’라는 대자보 서두의 말이다. 카이스트 2학년생 박 아무개(19)씨가 지난 4월7일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자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 집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기 전이라서 세 명의 학우라 했지, 사실은 금년 들어 네 명이 자살했다.
이 대자보에 쓰인 것처럼, 천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을 수밖에 없게 한 이유, 그리고 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명백하다. 이 나라의 교육이다. 세계가 부러워하고,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여 마지않는 이 나라의 교육이 과연 그토록 세계의 부러움과 오바마의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게 한다. 고교 졸업자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생 수는 300만 명을 헤아린다. 한데 이렇게 거의 모든 사람이 대학에 진학하도록 하는 사회가 진정 바람직한 사회일까. 다른 선진국들에서는 고교만 졸업해도 취업하는 데 있어 대졸과 크게 차별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는 학력과 학벌이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는 무서운 고학벌과 고학력 사회이다. 고교로부터, 아니 유치원서부터 유명 무명으로 차등이 되어서 대학교에까지 이어간다. 대학교는 소위 SKY대학들을 정점으로 여러 등급으로 나뉘어져서 끝내 사회에서 카스트를 형성하고 있다. 학벌 따라 형성된 대한민국 형 신판 ‘골품’사회인가!
세계 일류 공과대학을 목표로 KAIST가 출범했다. 미국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교수를 초빙하여 총장으로 앉혔다. 실적이 신통치 않아 해임하고 한국계 교육 경영 전문가를 초빙해서 맡겼다. 그는 학자로서도 유명했으나 그 보다 더 뛰어난 것이 경영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라고 미국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가 성장한 시기는 미국이 세계의 강대국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 곧 제2차 대전 후 소련과 더불어 세계 양대 강국으로 승승장구하는 때이며, 그러는 가운데 미국인은 무서운 경쟁의식의 포로가 되어 맹렬히 일했다. 만인이 ‘하면 되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공의 사다리 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르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쳇바퀴를 돌고 도는 이른바 쥐들의 경주(rat-race)의 선수가 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사람은 그와 같은 사회분위기에서 자라고 노력했다. 사다리 꼭대기에 올랐다. 그는 스스로를 성공 모델로 믿는다.
그는 서남표 KAIST총장이다. 서남표 총장은 자신의 성공 신념을 KAIST 경영의 신조로 삼고, 이 신조로 교수들과 학생들을 세뇌하려고 했다. 즉 인생은 싸워 이긴 자의 것이다. 이 세상엔 ‘공짜 점심’은 없다. 캠퍼스가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이 사회를 혼동으로 몰아갔다. 정의가 자취를 감춰 가고 있으며, 평등이니 복지니 하는 말들은 자칫 사회의 적, 즉 공적으로 몰리는 시대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한 때 서남표 호는 이와 같은 사회에서 만인의 칭송을 받는 아이돌이었다. 그러다가 ‘아뿔싸!’ 과여불급(過如不及), 그의 지나친 경쟁 일변도의 교육정책이 복병을 만났다. 그의 교육에는 철학이 없고 정책만 있으며, 인간이 없고 상품만 있었다. 대학교가 일정한 규격을 갖춘 상품화된 로봇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했다. 불량품은 쓰레기장으로 내팽개쳐진다. 경쟁의 사다리 꼭대기에 오른 자들은 정복자의 잔에 취해 악마가 되기 일쑤이다. 인간이기보다는 아수라에 가까운 삶을 영위한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부귀영화를 추구한다. 그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므로.
서남표는 그가 하는 교육방침을 교육개혁이라 이름 지었다. 시장자본주의하의 경쟁사회에서는 경쟁을 통해서만 학교교육의 질을 높이고 그래야만 교육을 개혁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사회의 시장주의자들은 그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내면서 그를 교육개혁 전도사라고 치켜세웠다. 그리하여 낙오자는 쓰레기 취급을 당해 무자비한 징벌을 받아야만 했다. 서남표 식 징벌적 등록금제도는 100% 영어강의와 함께 캠퍼스 안에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청춘을 구가하면서 상상의 꿈을 꾸면서 무한한 창의의 날개를 펼쳐야 할 젊은이들조차도 이 무서운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터졌다. 서남표 총장이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눈물까지 흘리며 변명을 느려놓았다. 그러나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호통에도 그는 굽히지 않았다. 교수들 중 다수도 그의 교육정책을 비난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학생들이 그에게 물러나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동료 학생이 네 명이나 서남표 식 교육정책, 학교운영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했는데도 그들은 그것은 자살한 자들의 몫일망정 저희들과는 무관한 것인 것 같이 행동했다. 이것은 이 나라의 오랜 교육이 길들여놓은 ‘빛나는 성과’인 것 같다.
이 사회에서 경쟁을 피하고 살 순 없다. 사람은 이기적 동물이므로 서로가 자기 이익을 위해 강자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사다리 꼭대기는 만인의 염원이다. 맹자가 양나라 혜와을 만났을 때 혜왕이 한 첫 마디가 “ 선생님께서 모처럼 먼 길을 오셨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익을 얻겠는가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자, 맹자는 대뜸, “왕은 하필이면 자기 이익을 말하오,”하며 꾸짖었다. 한 나라의 꼭대기에 올라앉은 왕도 밤낮으로 이익만을 생각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오늘의 교육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교육의 실상을 보자. 의무교육이라 해서 철이 들자마자 학교에 간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배운다. 배운 것의 성과에 대해 선생님은 평가를 한다. 곧 점수를 매긴다. 등수가 주어진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것, 교과서에 쓰여 진 것을 달달 외우고 그대로 하면 높은 점수를 딴다. 그렇게 해서 대학에 가서도 개성이 없는 인간으로 제조되어서 사회로 나간다. 교육이 아닌 사육(飼育)이다. 가축을 기르는 일과 같다. 세간엔 우스갯소리로 며느리를 고르려 하거든 서울대나 연. 고대 등 명문대 출신을 고르는 게 좋다는 말도 떠돈다고 한다. 왜냐 하면 그 명문대 출신은 유치원, 초.중.고, 그리고 대학 교육을 받으면서 그저 고분고분 교사의 말을 잘 따르는 것으로 우등생이 됐으며 그렇게 윗사람의 말을 잘 듣도록 10여 년간 잘 길들여져서 시집에서도 고분고분 시부모의 말을 잘 들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건 농담이지만 이 말속에 우리나라의 사육 적(飼育的) 교육의 썩은 열매가 보인다. 이 사육 적 교육은 곧 죽을 삿자, 사교육(死敎育)의 전제조건이다.
#2. 우리나라 어린이. 청소년의 행복지수 세계 꼴찌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이 느끼는 주관적 행복지수가 세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지난 3~4월 공동으로 전국 초등학교 4학년~ 고등학교 3학년 학생 6,410명에게‘2011년 한국 어린이. 청소년 학생 행복지수의 국제비교’를 주제로 벌인 설문 결과를 공개한 것이 따른 결론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65.98%이다. 그에 비해 스페인은 113.6%, 헝거리가 86.7%이며, OECD의 평균은 100%이다. 그러니 한국은 평균보다는 약간 높은 편이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의 주관적인 행복지수가 낮은 원인이 무엇일까? 그 답이 우리 아이들이 다른 나라의 아이들에 비해 보다 치열한 공부경쟁으로 몰아붙이는 일그러진 교육정책과 교육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가정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네 학부모는 자녀가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아이보다 공부를 더 해서 시험 점수가 단 한 점이라도 높이 받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극히 제한된 명문대에 들어가고 졸업 후엔 대기업이나 공무원 자리에 취업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우리 아이들은 요람에서부터 공부지옥에 갇혀 살아야 한다. 이 지옥에는 친구도 없고 동료의식이 존재할 수 없다. 내 이웃, 내 또래는 내 경쟁자이며 내 적일 뿐이다. 이런 사회에선 서로가 손잡고 함께 걸으며 조화좁게 살려다간 낙오자로 떨어지고 만다.
사람의 능력을 학교에서의 성적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의 능력은 다양하고 무한대하다. 교육심리학에서 인간의 능력을 지적인 것으로 측정하고 평가했으나, 최근에는 그것(IQ)을 뛰어넘어서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 /EQ)가 중요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은 사회지능(Social Intelligence /SQ)이 사회적 활동과 성공에 중요한 열쇠라고 주장하게에 이르렀다(Daniel Goleman). 사회지능에서는 “왜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사회에서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증을 받지 못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것은 사회지능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답한다. 이 사회지능의 발달이 억압당하고 지적지능에만 의존한 학교교육이 우리 아이들의 주관적 행복지수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3. 죽은 교육 벗어던지고 산교육 / 참교육의 옷으로 갈아입어라!
(1) 가르치는 교사보다 ‘배우는 교사’가 되라!
그러면 이 불 행복을 낳는 주범이라고 할 사(死)교육으로부터 탈피하여 참교육으로 가는 길이 있는가? 당연히 있다. 지금까지 그릇된 그 ‘사교육’의 빙의를 벗어던지면 가능하다. 그 빙의는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란 미신이다. 이 미신을 타파하면 길이 보인다.
지금 교사인 당신 앞엔 20~30명의 어린이의 눈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당신은 이들 모두를 한 아이도 낙오자가 되지 않게 가르칠 수 있는가? 당신은 무조건 그래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직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 한다면 당신은 지금 당장 교단에서 물러나야만 한다.
그러나 이건 억지다. 그러다간 ‘교육’이고 뭐고 이 땅에서 없어지고 만다. 왜? 학교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럼 학원이 만세를 부르리라고 생각할까? 교사들이 모조리 학원 강사로 직업 전환을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왜 내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늘여놓는가? 당장 교단을 떠나라는 가혹한 선고가 아니다. 참교육을 하는 참교사로 거듭나 보시라는 충언이다. 양약은 입에 쓰고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
당신 앞에 있는 이 어린이들은 얼굴 생김새가 제각각인 것처럼 그들 각각의 능력도 성격도 제각각이다. 이렇게 능력차가 있는 2,30명의 어린이를 교사인 당신이 혼자서 맡아서 ‘가르치려’ 하니, 먼저 당신의 힘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지금 당신은 배당된 수업시간 안에 할당된 교과내용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교과 내용을 이 2,30명 어린이의 머릿속에 ‘쑤셔 넣어’야만 할 책임감과 강박감의 포로가 되어 있다. 초조하고 괴롭다. 이 2,30층으로 나누어진 영역 차의 벽을 꿰뚫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 답은 ‘학교는 교사가 학생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곳”이며, 그것이 “교사의 직분”이라는 완고한 선입관을 벗어던지라는 것이다. (막간여담: 이 글을 쓰다가 생각난 책이 있다. 김용택, 도종환, 양귀자, 이순원 등 우리시대 대표 문인 18인이 전하는 학창시절 잊을 수 없는 수업과 추억을 담은 <수업: 황소북스 펴냄>이다. 교사는 물론 모든 학부모님께 필독을 권한다) ’교사는 가르치지 마라‘는 것은 결코 방임하라는 것은 아니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이 말은 노자(老子)가 말한 ’導而不引‘, 곧 이끌되 억지로 잡아당기지 않는다는 정신이다. 시쳇말로 바꿔 말하면 ’스스로 배우게 하라‘는 것, 우리 귀에 익은 자학자습 정신이다. 노자의 이 가르침은 공교롭게도 교육의 영어 ’Education‘의 함의인 ’이끌어냄(Drawout)‘과 상통한다.
실상 가르치는 것은 가장 쉬운 것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가르치기 이전의 일과 가르친 이후의 일이다. 교사가 작성하는 교안에서 도입과 평가의 단계가 그것이라 할까. 교육이란 작업은 문자 그대로 ‘가르치고(敎) 기르는(育)’ 것이어야 하는데, 오늘의 교육엔 ‘교’만 있고 ‘육’은 없다. 예를 들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 어른과 아이가 공놀이를 하면서, 어린 아이에게 공을 던질 때, “공을 던질 터이지 잘 받아라”라고 말하면 아이가 이쪽을 보고서 잘 받으려고 마음먹고 받을 태세를 갖춘다. 던지는 어른이 이 아이의 역량을 알고서, 어느 만큼의 강도로 공을 던지면 잘 받을까를 마음으로 측량하고서, '자, 받아라‘라고 하면서 아이와 호흡을 맞춰서 공을 던지면 아이는 공을 틀림없이 잘 받을 것이다. 이것은 던지는 사람이 아이가 공을 잘 받게 할 뿐 아니라 공을 받는 기쁨도 함께 주는 것이다>
교육도 이와 같이 ‘준비’단계가 필요하다. 배우는 아이에게 배울 태세를 갖추게 하는 것이다. 유아교육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아이가 글자를 외우고 쓰는 경우를 하나의 보기로 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선 아이로 하여금 뭐든지 쓰고 싶어지게 만들 내용을 가진 경험을 듬뿍 하도록 한다. 그와 같은 경험이 있은 연후에 아이가 꼭 글자를 쓰고 싶은 요구가 발생하게 할 조건을 부여한다. 여기 필자의 어릴 적 기억을 피력하면 이렇다. 나는 아마 6,7세 때에 사랑채에서 할아버지 빙에서 새벽이 눈을 뜨면 안채의 할머니 방으로 곧장 달려가서 할머니를 졸라 옛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내 할머님은 유식하셨다. 장화홍련전, 춘향전 등 이야기책을 늘 읽으셨다. 친정이 한학자 집안이어서 글을 깨치셨다고 했다. 그러다가 나는 몸이 약해서 서당엘 가지 못하고 내 큰 형님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워야 했다.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면 강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더러 못 읽는 글자가 있다. 그러나 그건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로부터 한글(당시는 언문)을 배워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적을 만큼 글자를 터득했었기 때문에, 천자문 글자 중 어려운 것에다 연필로 나만 읽을 수 있을 만큼 깨알같이 적어서, 형님 앞에선 못 읽는 글자 없이 모두 패스를 하곤 했었다. 커닝을 한 것이다. 이건 순전히 내 필요에 의해 스스로 한글을 터득한 예다. 나는 한글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스스로에게 학습동기를 부여했던 셈이다.
이것은 아이가 바라는 것을 기다리다가 아이가 알고 싶어 할 바로 그 때를 교육의 계기로 삼는 방법, 곧 아이의 내발적인 동기부여나 자발성을 존중하는 사고이다.
이에 대해 한편으로 아이는 그 (주로 연령적) 발달단계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이는 잠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가령 매우 발달이 늦된 아이의 경우라 할지라도 교육자가 뒤에서 밀어줘서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는 사고가 있다. 곧, 아이는 의도적인 교육에 의해 비로소 눈을 뜨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잠재적인 능력이 개발되고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에는 아이의 내발적인 동기부여나 자발성만을 기다리고 있다간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초래할 지도 모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그 아이는 다른 또래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인 뒤처짐을 필요 이상 자각하게 됨으로써 열등감을 갖게 되고 의욕을 상실하게 될 수 있다. 이 의욕상실은 큰 마이너스이므로 성인, 곧 어떤 의미로건 교육적인 입장에 있는 자가 강한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뒷받침을 해 줘야만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성인이 뒷받침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면 아무래도 성인 중심, 곧 교사중심 교육과 얽히게 되어서, 아이가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밀어붙이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에 대해 전자의 경우, 곧 아이가 자연히 뭔가를 하고 싶어 하기를 기다리는, 곧 ‘기다림’의 교육은 확실히 하나의 이상이긴 하나 자칫 하다간 때를 놓질 우려가 있다.
여기서 부모나 교사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부딪친다. 특히 부모의 입장에서는 다른 집 아이와 비교를 하게 되기 십상이다. 우리 집 아이와 같은 또래 이웃집 아이는 그림책을 줄줄 읽고 있는 것을 보면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아이가 의욕을 일으키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다. 야단을 치면서도 문자를 가르치려고 한다. 매우 흔한 광경이다.
그런데 여기서 숨을 고르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순히 지적교육의 방법 뿐 아니고, 더 나아가 기본적인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도대체 어린이, 곧 인간의 아이란 어떤 존재인가? 또한 인간으로서 어떤 교육을 베풀어야 할 것인가? 글 읽고 쓰기의 능력이 아이의 성격 형성상의 왜곡을 일으키는 데까지 가도 된다는 것일까? 조기교육, 특히 지적인 조기교육을 생각할 때 여기엔 큰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부터 교육의 대상인 어린이를 보는 견해에 두 가지가 있어왔다. 하나는 어린이는 그냥 내버려둬도 흥미가 있는 것에는 스스로 그것을 가져보고 싶어 하거나, 조사해 보려는 강한 ‘동기’를 갖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자연적인 동기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활동은 동물실험에서도 확실히 나타난다. 그리고 이 동기부여의 범주에는 자기의 능력을 발견한 것에 대한 즐거움이 따른다. 즉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냈다는 성취감이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유능함(Competence)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린이가 자기 자신의 유능함, 곧 능력을 발견하면 어린이는 얼마든지 스스로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 B. S. White 교수의 Competence Motivation Theory) 앞에 예를 든 아이에게 공을 던져서 받게 해서 기쁨을 맛보게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생각이다.
따라서 교사나 학부모는 아이가 배울 준비도 하기 전에 억지로 가르치려 하지 말 것이다. 이것 때문에 한국의 교육이 아직도 다른 교육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쳐져 있는 원인이다. 교육은 ‘교=가르침’과, ‘육= 기름’의 두 가지로 이뤄지는 것인데, 육은 빠지고 교만 있는 것이 한국의 교육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지적으로는 단편적인 지식이 머릿속에 잔뜩 들어 있어서 모르는 것이 없으나, 창의적, 상상적 능력은 모자라고, 행동력이 부족한, 다시 말해 무능한 고학력자(高學歷者)만 거리에 쏟아져 나온다.
(2) 어린이가 스스로 배우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학습이란 어린이가 자진해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했을 때에 비로소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린이는 본능적으로 자기 주위로부터 여러 가지 것을 배우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이것은 생물로서 살아가기 위한 본능적인 활동이라 할 것이다. 환경을 알고, 환경에 익숙해지고, 안심하여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린이가 학습을 싫어한다는 말이 나오게 될까? 이것은 어린이의 유아시기에 그의 육아를 담당하는 사람, 곧 어머니의 유아에 대한 육아태도라는 것이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유아가 걸음마를 시작할 땐 수없이 넘어져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서 걷기를 시도한다. 그 때에 곁에서 엄마가 뒤에서 몸을 지탱해 줄라치면 싫다고 하면서 피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도와주려고 하거나 허리를 붙들어 주거나 하는 일을 되풀이하다보면, 이번에는 거꾸로 엄마가 곁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걷지를 않으려고 할 것이다. 어린이는 자기 능력을 발전시키려고 항상 시도해 보는데, 그것을 엄마가 몇 번 방해를 하게 되면 엄마에게 의뢰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두 욕망, 곧 하나는 전진하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후퇴하려는 것, 이 둘이 어린이를 지배한다. 물론 어느 엄마가 내 아이를 후퇴시키려고 하진 않는다. 의식적으로는 내 아이를 전진시키고 보다 많은 능력을 얻게 하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맹목적인 애정에 끌려서 불필요한 도움의 손길을 내는 경우가 많은 것이 탈이다.
학교교육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이전에 교사가 자세히 손에 쥐어주다시피 친절히(?) 가르치려고 하니까 아이는 스스로 배우려는 의욕을 빼앗기고 만다.
오늘날 ‘배움의 공동체’ 운동이 활발하다. 일본의 사토 마나부(佐藤 學) 교수의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는 교육철학을 도입한 것이다. 이 ‘배움의 공동체’의 관점에서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수업은 실패한 수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사는 ‘가르치는 전문가’가 아니라 ‘배우는 전문가’로서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훌륭한 교사는 배우는 자로서의 자세를 가진 ‘귀 밝은 사람’이다. 곧, 학생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잘 들어주는 사람인 것이다. 교실에서 교사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되살아나야 한다. 수업은 활동중심, 협동중심, 표현중심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 명의 아이도 배움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하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천년 이전에 예수께서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rm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으려고 들을 돌아다니지 않겠느냐”라고 가르치신 것은 오늘에도 참교육을 하려는 교사들에게 소중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당신들은 단순한 한 사람의 월급쟁이가 아니다. 당신이 가르치려고 마음먹은 학생들을 ‘한 아이의 낙오자가 없도록’ 길러야 할 귀한 일을 하늘로부터 받은 성직자이다. 스승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보급되고 있는 ‘몬테소리 교육법’의 창시자인 마리아 몬테소리(이탈리아의 교육학자/의사.1870~1952)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 교사는 어른 중심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아이의 다름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라.”
“ 그것을 쓰면 아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당신들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당신 눈앞의 피와 살이 있는 아이의 생생한 모습을 보라.”
“ 하나의 교육 방법을 독단적으로 설립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찾아 길 위에 있는 아 이가 밖으로 드러내는 삶의 모습들을 따라가라.”
“ 교사는 아이들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할 뿐, 뒷전에 물러서야 할 것이 라는 생각이 경험에 비추어 더욱더 뚜렷해지고 있다. 우리들이 할 일은 간섭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무간섭 방법’이라고 말한다.
“ 교사는 고생해서 주인의 음료수를 마련해 주인이 언제나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 도록 남겨두는 시종과 같이 아이가 무엇이 필요한가를 판단하여야 한다. 교사는 소극적으로 할 것을 배워야 한다. 곧, 아이들을 돌볼 때에는 아이에게 자기 자신을 밀어붙이지 말고, 부단히 주의하여 아이들의 진도에 따라 그들이 다음 활동단계에서 필요로 할 것 같은 것들을 남김 없이 준비해야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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