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청인(淸人)이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세우고자 하여 그 비문을 요구하였다. 상이 장유(張維), 조희일(趙希逸)에게 명하여 지어
올리게 하였지만 두 사람이 지은 비문이 모두 저들의 뜻에 차지 않아 더욱 거칠게 으르렁대자 상이 마침내 공을 면대하여 명하기를, “구천(句踐)은 신첩(臣妾)이 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강(自强)을 도모하였으니, 지금은 다만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지 혹시라도 격노를 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이 마지못해 명을 받들고 석문공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문자를 배운 것을 후회합니다.” 하였고, 또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도다.”라는 시구가 있으니, 공의 뜻을 알 수 있다.
서계 박세당이 찬술한 '영의정 백헌(白軒) 이공(李公) 신도비명'에 이경석이 치욕의 삼전도비문을 짓게 된 사정을 싣는다.
조선왕조실록도 청나라의 요청으로 청태종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문을 지어야하는 딱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를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
-<인조실록> 15년 11월25일)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360여 년 된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있다. 사적 제101호.
유리지붕 건조물 아래 높이 570cm, 너비 140cm의 이수(螭首)와 귀부를 갖춘 커다란 비이다.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우리에게 치사한 역사보다 더 가증스러울 만큼 부끄러운 인멸의 역사를 가르쳐 주는 상징물이다.
조선의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죄수복을 입고 오랑캐로 여기던 그 청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해야했다.
청은 청의 왕이 전쟁 중에 조선에서 '선정을 베푼 공덕'을 기리는 비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울 것을 강요하였다.
청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금수만도 못한 돼지'라고 무시한 오랑캐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치러야 했던
조선으로서는 그 보다 치욕적인 비문을 누가 짓느냐가 더 큰 문제였다.
청나라에서 원하는 이 치욕의 비문을 누군가는 지어야 했다.
인조는 1637년 11월에 이 역사의 오명을 짊어지는 일,바로 비문을 지을 사람을 추천하라고 비변사에 명을 내렸다.
장유(張維), 이경전(李慶全), 조희일(趙希逸) 이경석(李景奭) 등 네 명의 명단이 올라왔다.장유는 모친상을 이유로 사양했다.
다른 이들도 각자 나름의 이유를 댔으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며칠 후 고령에 병중에 누었다고 한 이경전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세 사람이 비문을 지어 올렸다. 그 가운데 조희일은 일부러 글을 조잡하게 써서 일차로 탈락했다.
장유와 이경석이 지은 비문은 청나라에 보내져 최종적으로 이경석의 비문이 채택되었다.
인조는 이경석에게 그 비문을 고칠 것을 명했다.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向背)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해서 판가름난다.”
이경석은 왕의 요청대로 그 일부를 고친다.공부를 가르쳐 준 형 이경직(李景稷)에게 편지를 보내고 한탄한다.
"나에게 왜 글 공부를 시켰습니까?참으로 천추의 한이 됩니다."
“수치스런 마음 등에 업고 백 길이나 되는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이경석은 나라의 보존이란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명예란 소절(小節)을 버린 것이다.
"개조차도 삼전도 비문을 쓴 이경석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
반청숭명(反淸崇明)의 선봉에 있던 우암 송시열은 이경석을 두고 이렇게 비난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명분을 앞세웠던 노론의 선비들은 이경석이 삼전도비문을 쓰고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비판했다.
이경석이 찬술한 비문은 이렇다.그 일부를 옮겨 음미하려고 한다.
“황제께서 십만 군대로 동방에 원정오니 천둥 같은 기세에다 범처럼 용맹했네.(중략)
우리 임금 복종하여 다 함께 귀순하니 위엄 때문 아니요 덕에 귀의한 것이라네.(중략)
우뚝한 비석이 한강 가에 서 있으니 만년토록 조선 땅에 황제의 덕 빛나리라.”
이 비는 거북 받침대를 상당히 큰 크기로 만들었다.
더 크게 만들라는 요구에 또 한번의 치욕을 당하며 더 큰 받침돌에 비석을 세웠다.
높이 약 5.7m로 만주 지안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약 6.4m)에 버금가는 매우 큰 비석이다.
이렇게 비석의 크기 역시 조선에서 준비한 것은 묵살된 것이다.
청나라에서 요구하는 크기로 변경되어 비신 12척에 용두 2척 2촌으로 그 규모가 커졌다.
비문은 세 가지 문자로 기록하였다. 정면은 청나라 문자와 몽고 문자이고 후면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비문의 글씨는 당시 형조 참판인 오준이 쓰고 비문 위에 전서로 쓴 `대청황제공덕비`란 글씨 일곱 자는 여이징이 썼다.
이렇게 새긴 다음 비면의 황제 자는 황금빛 니금(泥金)을 입히고 나머지 글자는 주홍색으로 칠을 하여
1639년 12월 8일에 모든 공역을 완료했다.
청나라 사신은 조선에 올 때마다 한강을 건너가 이 비석과 남한산성을 둘러보며 조선의 종주국임을 과시했다고 한다.
이 비석을 대청황제공덕비라고 부르지 않았다. 건립 당시부터 후대의 각종 문헌에 이르기까지 비석이 있는 삼전나루의
이름을 따서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 불렀다. 우리민족에게는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은 치욕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형 이경직에게 글과 역사를 배웠다. 예학의 대가 사계 김장생의 문하생이다.
이경석이 13세 때 부친의 임지인 개성에 따라 갔을 때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이 공부하는 이경석을 보고는
"후에 우리같은 사람은 따르지 못하게 출세할 것이고 인격이 출중하리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훗날 이경석은 영의정이 되고 김상헌은 좌의정이 되었다.
1617년 이경석은 문과에 합격하였다.
북인 주도하던 인목대비의 폐비론에 반대를 하다가 과거 급제가 취소된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오른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갈 때 조정백관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인조를 호종하는 신하는 이경석과
승지 한효종 내시 2명 뿐이었다고 전한다. 그후 핵심관직을 두루 거치며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상대열에 오른다.
백헌 이경석이 지은 시가 있다. 시의 제목이 참으로 길다.
<병자호란 후 대군(大君)을 따라가는 궁녀의 어미가 손가락을
잘라주며 딸과 이별하니 듣는 자들이 코끝이 찡했다.>
모녀가 괴로이 생이별을 하는데
서로 붙잡고 길에서 통곡하는구나.
스스로 능히 목숨을 가볍게 여겼거늘
어찌 다시 살갗을 아끼리오?
떨어진 손가락에 옷은 붉게 물들고
애간장이 끊어져 구슬 같은 눈물이 방울지네.
간곡히 뜻을 같이하는 이에게 말하노니
죽음을 아끼는 것은 결코 장부가 아니라네.
만휴정에 나가 머물며(出寓晩休亭)
서쪽으로 서호에 나가니 물빛도 밝은데(西出西湖湖水明)
한가한 정자라 이름도 만휴(晩休)(閑亭亦以晩休名)
내 몸은 이미 인간세상의 구속을 벗어났나니(吾身已脫人間累)
가볍게 나는 저 물가의 백구를 배우고 싶구나.(欲學沙邊白鷗輕)
치욕의 병자호란을 치른 뒤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몸서리 친 백헌이다.
그가 조선 백성을 무참하게 도륙한 청태종을 찬양한 비문을 찬술했으니
그의 수치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간다.
“붉은 충성심은 하늘을 꿰뚫었고 굳센 절개는 서릿발 같았으며,
험한 일 어려운 일을 잘 대비해 넘겼다.”-백헌의 신도비문에서
숙종 때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백헌 상공이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구국의 충신이라고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