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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업을 시작 할 때의 일이었다. 할머니 젯날에 모인 식구들이래 봐야 우리 집안에는
몇 안된다. 특별히 손이 귀한 집안도 아니지만 제 다 바쁜 일상에 쫓기다 그랬을 것이고
알게 모르게 제사 모시러 오는 경비가 아까워 오지 못하는 친지 또는 서로의 감정이
상해 발걸음을 줄인 사람 등등 이유야 많지만 각설하고, 여튼 그날 작은 아버지의
말씀은 나를 일약 갑부로 만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한마디로 꿈 속의 메아리 였다.
나의 일, 일명 사업을 해 보겠다고 결심을 굳힌 날이다.
그 취지로 보면 한심하기 짝이없다. 당시 난 제법 잘 나간다는 창원의 중소기업에 갓
입사한 신출내기 월급쟁이였는데 봉급이래 본들 대학시절 부모 그늘에 쓰던 용돈 정도도
되지 못해서 늘 불만이었고 씀씀이가 헤픈 나로서는 오랫적부터 계획 해 오던 어떤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보다는 자유분방하고 남들에 앞서 어깨에 힘을 주고 사회적인 입지를
보다 낫게 하려는 욕심과 젖 비린내 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사업을 하겠다는 그 동기가
그 얼어 죽을 권위욕에서 비롯된 내 욕망달성의 보완적인 액세서리에 불과 했다.
우선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중형 신차가 머리에 먼저 떠 올랐다. 둘째는 화려한 정원이
있는 집 그 다음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 돌아 가는 것인지 뻔히 아는 일이다.
나는 사업을 하는것이 아니라 내 머리에 꿈틀거리는 욕망의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신혼 때 부모님이 사 주신 마산의 집을 팔고 고가의 건설 장비를 중고로 두 대를 샀다.
월 사십만원 안팎의 월급쟁이가 꿈으로만 월 천만원을 벌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꿈만 같아 잠을 설칠 정도로 부를 이룬다는데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그 해 오월에 사업자 등록을 하고 사무실을 개설, 시작한 일이
장비 월 임대료가 고작 구백만원인데 기사 월급이 삼백만원, 기름값, 사무실 경비 및
나의 품위유지비, 중고장비라 수리비는 또 얼마나 드는지 그 뿐인가 비가 오면 일을
하지 못하는 날이고 뻔히 앉아서 그 많은 경비를 부담 해야 하는 날이 절반이 넘었다.
결과적으로 두달도 채 되지 않아 장비 한대를 팔아야 하는 걱정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떤 일을 하면서 경험이라는 것은 사실이지 내가 구입한 장비 두 대는 아무런 재화 가치가
없을 정도임을 그때야 깨달았지만 이미 벌여 놓은 일은 이제 거둘 수도 계속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진퇴 양란에 빠지고 만 것이다. 주변에 마땅히 그 일로 인해 도움을
청할 곳도 없던 나는 무작정 고교동문들의 신상명세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떡하든 이 일이
시작됐고 처음에는 모든 것들이 순탄하겠지 했던 생각이 큰 불찰이라고 판단되었던 그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내 나이 서른 일이었다.
마침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선배 후배 동기 세명을 차례로 만날 수 있는데 그 중 선배의
도움으로 나는 날개를 달게 된다. 부산에는 "까치고개"라는 곳이 있다 대학병원 뒤로
87번 종점에서 괴정으로 넘어가는 약 오백미터의 도로공사를 수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내가 무슨 도로 공사를 알며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것을 그 선배는 자상하게 일러
주었고 선배의 말대로 나는 일을 진행 시켜 나갔다. 그때부터 나는 욕망의 이데올로기를
일단 접고 현실의 냉혹함을 햇병아리처럼 맞으며 일을 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막상 건설이라는 직종은 일을 수주하고 난 후 부터는 오너가 현장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발주한 회사, 관공서, 인근 주민들의 민원 등등 골치아픈 일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난 늘 그들에게 시달려도 끝까지 지쳐 넉다운이 되지 않는 것이 일이라면
일이었던 것이다. 술이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술에 강한줄을 몰랐다. 술이라면 우리집안에는
삼촌 한 분이 주당이었을뿐 별로 마시는 사람들도 없는데 나는 그 방면에 일찌기 타고 난 사람처럼
같이 마시고 돌아서 나올 쯤이면 언제나 술이 모자라 혼자 더 마시다 집으로 간 적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 해보면 그게 술이 모자라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욕심,
어떻게 하면 내가 오늘 지불한 이 술값을 내일 일하고 있는 그 현장에서 뽑아내야 하는가
라는, 이를 가는 쉼호흡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음주운전이 거의 습관화
되고 잡히면 십만원짜리 한장이면 차를 집앞까지 몰아다 주는 시절 이었으니 크게 걱정
할 일이 아니라는 안이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짭새에게는 `그거 이서를 해
드릴까요` 라고 농담까지 하면서 집에 들어 간 일이 있었다
까치고개에는 한나모자원이라는 곳이 있었다. 6.25적 아비를 잃어 자력으로 생계가 곤란한
유가족 또는 빈민들에게 양식과 의복의 무상 배급과 자립을 할 수 있도록 제반 지원을 받게
했던 일종의 보호시설이었다. 도로는 정확히 그곳을 가로 질러 나는데 움막같은 스레이트 집과
제법 양옥 구조를 갖춘 철근 콘크리트 집들이 철거를 기다리며 구릉지를 따라 대략 오십여 체에 달했다.
철거를 기다리며 비워진 집들에 들어 가 보면 온갖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먼지속에 쌓인 비밀들을 캐내듯이 여기 저기 뒤져보다 문득 주름진 이마에 깊숙히 난
상처를 지닌 어떤 할머니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깨어진 유리 조각 안해서 단아한
눈을 감지 못하고 빤히 쳐다보는 동자에 군홧발 같은 발자욱이 선명하리 만큼 찍혀
있었다. 아마 이 할머니는 가까운 자갈치에서 좌판을 하며 온 가족들의 생계를 고단한 어께에
걸머지고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서쪽 감만동 부두 일대에서 일일 노역을하며
새벽별을 헤아리며 출근과 퇴근의 사슬에 엮여 살았는지도 어긋나가는 자식의 손을
잡고 애원을 하며 바르게 또 바르게 살아 달라고 이불 속 눈물로 근심을 풀면서 불면의
숱한 밤을 지샜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그런 상상을 하게 된 이유는 우리 회사의 직원 중에 한나모자원에서 자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의지의 한국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불굴의 집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을 법 했다. 국민(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중국집 배달을 하게
되었는데 겨울 길이 미끄러워 철가방을 내동댕이 치면서 주방방에게 맞기도 많이 했다는
이야기며. 모든 직업이라는 것이 먹는데 다 맞춰 선택해야 하는 그 불우한 이야기들이며
양복점에 취직을 해서 일년 견습에 첫 작품으로 바지를 만들었는데 그 바지를 만든 시간이
가히 장난이 아닌 5일이 걸렸다는 둥 그런데도 이것도 바지라고 만들었냐며 주인이
삭둑 가위질을 해버린 이야기며 웃으며 하는 그 이야기들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한나모자원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이해 해 볼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철거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생활의 근거를 군홧발로 마구 짓밟아 버리는 행동도 될 수
있듯이 할머니의 사진에 찍힌 그 자국만큼이나 철거하는 내내 막걸리며 돼지고기며 등을
주민들에게 나누며 마음들을 쓰다듬느라 많은 배려를 했다. 기실 그런 나의 마음들이
통감했던지 그 말많은 동네에서 민원 하나 없이 약 일 년 여의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어떤 지역이든 공사를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그 지역의 정서를 잘 이해하여 오히려
그것을 진솔하게 활용하려 노력한다면 절대 실패나 문제 제기가 없을 것이다.
만약에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가 현저히 가벼울 것이며 그것으로 그곳의 정서를 읶히면
그것 또한 다음 일의 노하우가 되어 축척이 되는 것이다. 많은 것들을 알려고 하면
다친다는 말도 있듯이 나의 주장을 펴기 위한 오만한 생각 보다는 그냥 부드럽게
수용하하고 같은 입장에서 이해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가장 중요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 어디서든 항상 건전한 인격체가 되어 있어야 만이 이 모든게 이루어
진다는 것을 경험상으로 부딛힌 일이라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살아가면서 수난 아닌 수난을 수 없이 격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난을 어떻게 대처 하느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격의 수위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을 자기식으로 받아 들이고 해석해 버리는 오리지날 무식꾼이 있는가
하면 곧 죽어도 상대의 편에서서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또 하나의 유형은 상대든 나든 그 현실이 불가피한 어려움이라면 어떤 수단을 동원하여
빨리 회피하거나 불씨를 진화하려는, 적극적이다 못해 불화와 같은 사람도 있다.
내게 비견되는 타입은 아마 마지막의 경우일 것이다.
참지를 못한다. 피가 터지더라도 그것의 결말을 봐야 직성이 풀리고 상대의 어떤
홑소리도 끝까지 갋아 질릴 정도로 헤쳐 밀고 나간다. 그렇다고 내게 연관되지 않은
일은 결코 관여하는 부분이 없다. 물론 나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인정 할 것은 깨끗이
인정은 하지만 절대 상대의 진솔한 관점을 놓쳐서 왜곡하는 일도 없다.
물론 그것 또한 나의 객관적이지 못한 어설픈 관점일지는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노력은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쫓아가다 보면 상대나 나나 정말 꼭 같다는 생각을 나중에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경륜의 짧음이 절대적으로 작용을 하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나의 인격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묵시적으로나마 시인하게 된다. 반성 한다는 것과는
격이 있지만 언젠가 철이 들면 아마 그것을 반성의 습관으로 바뀔 것이리라 믿어면서도
또 한편은 언젠가는 같은 상황이 분명히 올거라는 경우도 결코 배제하지 못한 채
그냥 살았다.
나는 이익을 위해 싸우는 사람을 경멸 해 왔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물욕이라는 그것
자체가 사람을 추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의 가벼움을 논하자고 억지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이다. 왜냐면 나도 그 틈을 비집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형편이다 보면 상대적인 나의 이익도 결코 배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배가
아픈 그런 현실에서 유발된 아주 이기적인 개념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표리부동한 이중잣대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적절한 노력에 대한 댓가, 그것을 사람들은 바라는 것일까. 나는 단연코 그런 적이 없다.
노력은 조금 댓가는 노다지, 이런 관념이 내 정신에 고정이 되어 언제라도 바뀌지 않을
심산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원칙을 들지 못한다. 그 보다 더 우월한 이익을 늘
추구 해 왔으니까 이것은 어떤 재화나 만족 또는 욕망 등등 어느 한 곳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은적이 없었다. 욕심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고나면 먹어야 하듯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먹거리 그 이상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날들의 회후를 더듬어
보고싶다. 나는 어떤 주인공이 되어 산으로 강으로(산전수전) 쏘아 다녔던지...
첫댓글 "---그러나 그런 수난을 어떻게 대처 하느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격의 수위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고맙습니다.......................................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