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깊이와 시간 더러 영혼의 깊이가 느껴지는 눈빛을 만날 때가 있다. 우수에 잠긴 여인의 눈빛, 예지와 통찰력으로 빛나는 선승의 눈빛, 지혜롭고도 인자한 노인의 눈빛. 그런 눈들을 마주할 때면 웅숭깊은 그늘 뒤에 드리워진 비밀스런 삶이 궁금해져서 한 발 바짝 다가앉고 싶어진다. 속 깊은 영혼에의 이끌림이다. 속 깊은 영혼이라`─`표현이 좀 모호하긴 하다. 보이는 눈의 깊이도 잴 수 없거늘 보이지 않는 영혼의 깊이를 어찌 감지한다 할 수 있으랴. 깊이란 겉에서 속까지, 위에서 아래까지의 물리적 거리를 의미하거나 어떤 수준이나 정도를 가늠할 때에 쓰는 말이다. 깊은 맛, 깊은 밤, 깊은 사랑, 깊어가는 가을……. 그런 어휘들을 되뇌다 보면 깊이라는 것이 일단 시간이 빚어내는 유현幽玄함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깊어지고 싶다. 어딘가 좀 그윽해지고 싶다.`─`깊이가 주는 아름다움을 동경하며 사는 내게 시간과 깊이의 함수관계는 저만치 가물거리는 불빛과도 같다. 그것이 바다를 밝혀주는 등댓불일지 미혹하는 도깨비불일지 알 수 없다 하여도, 길 위에 선 자에게는 아득한 그 불빛이 일단은 희망이고 위로일밖에 없다. 깊이도 없이, 어리숭한 말재간으로 엮어내는 문장에 울림이 생겨날 리 없건만, 나는 자주 잡초 무성한 글 이랑 사이를 안타깝게 서성이곤 한다. 울림이 없는 글은 음영이 없는 풍경화처럼 눈앞을 다 스치기도 전에 잊혀져버리고 말 것이기에, 더러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붙잡아 함께 울어주기를 청하는 억새풀의 심사가 되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어찌하면 더 깊어질 수 있을까. 세월이 흐르면 희미해지는 육안 대신 밝은 혜안慧眼이 생겨나기도 하는가. 뜬금 없는 기대로 가슴이 설레는 날엔 가는 세월의 무정함조차 잊어버리고 싶어진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연륜이란 사물의 핵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의 이름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믿어보다가도 깊이라는 것이 반드시 시간과 짝을 이루어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연륜에 희망을 걸어볼 만큼 내 나이가 이미 젊지 않다는 사실에, 이내 쓸쓸해지곤 한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디 다 깊어지던가.
2. 깊이에의 강요
젊고 유망한 여류 화가의 전시회에서 한 비평가가 이야기한다. “당신의 작품은 재능도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지만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어요.” 악의 없이 던진 그 한 마디에 순수하고 열정적인 화가의 일생은 뒤틀리고 만다. 그래, 나는 깊이가 없어.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정체 불명의 허깨비와도 같은 예술적 깊이에 끊임없이 집착하게 되면서부터 화가는 점점 자신감을 잃고 끝없는 절망에 빠져들게 된다. 날이 갈수록 의기소침해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고, 비만과 알코올과 약물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어가다가 마침내는 139미터나 되는 높은 송전탑 위에 올라가 전나무숲에 떨어져 죽는다. 무심코 내뱉은 예전의 비평을 잊어버린 평론가는 다음 날 신문에다 이렇게 쓴다. 그 여자의 작품에서는 삶을 예리하게 파헤치려는 치열함, 깊이에의 강요를 느낄 수 있노라고. 전에 읽다 책장에 꽂아둔 쥐시킨트(Patrick Suskind)의 『깊이에의 강요』를 다시 꺼내어 읽어본다. 넉 장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인 만큼 내용이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고, 복잡하고 어려운 심리 묘사도 없다. 그런데도 이 가벼운 읽을거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나약한가 하는 것과 우리가 얼마나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삶을 예리하게 파헤치려는 열정으로 사물의 핵을 향해 내딛는 묵묵한 걸음걸이가 깊이인 줄을 화가가 알았다면, 송전탑 같은 데에는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검정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로소 빛이 보인다”고 한 사람은 천진한 탈속의 화가 장욱진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음에 맑은 빛이 차오르게 하는 무구한 그의 그림들은 철저한 자기응시를 통하여 내면의 속기俗氣를 밀어내는 노력이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진지하고도 무겁지 않은 사유, 차분한 성찰의 눈으로 세상을 밝게 그려내기 위해서 작가란 얼마나 오래 자기 안의 어둠과 눈싸움을 해야 하는 것일까. 예술이란, 아니 삶이란, 더 높이 올라가기보다는 더 깊이 파들어가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굴 파기 놀이 같은 건지도 모른다.
3. 깊은 물
마음이 어지러운 저녁, 나는 가끔 한강에 나간다. 양화나루의 둔치를 천천히 따라 걷다 선유도 공원을 돌아오거나 올림픽 대로를 차로 달리며 어두워오는 강물을 바라보곤 한다. 길가 가로등들이 밤의 강물 위에 얼비쳐내는 빛 고드름이 아름답다. 깊은 물이 투사해 내는 빛의 스펙트럼을 바라보고 섰노라면 글을 쓰는 일도 저렇듯 일상의 삶을 저마다의 심경心鏡에 비추어 상像을 지어내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에 비친 불그림자가 불빛보다 아름답듯, 일상의 지리멸렬함이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형상화되려면 명경지수와도 같이 평정한 마음 상태가 먼저 다져져야 하지 않을까. 깊고 잔잔한 물이 되는 일. 적막한 골짜기와 허무의 늪을 지나 침묵으로 흐르는 저 강물처럼, 살아 있음의 기쁨과 슬픔, 한숨과 그리움을 삭히고 가라앉혀 고른 화소畵素의 액정화면을 다듬어내는 일이 상을 아름답게 맺는 첫째 비결인 듯싶은 것이다. 물방울이 사라지고 흐름만 남아 있는 도도한 저 강물과도 같이, 빗방울도 빗줄기도 그리지 않고 젖혀진 댓잎파리의 표정만으로 비와 바람을 그려내는 선인들의 옛 그림과도 같이, 말은 삭아 없어지고 혼만 여울져 어리는 글의 고요함 같은 것. 깊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깊은 물은 흔들리지 않는다. 소리를 내어 흐르지도 않는다. 넉넉하고 고요한 물만이 하늘을 나는 새의 비상과 금빛 노을과 푸른 산그림자를 비추어낸다. 제 바닥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얕은 냇물에는 뜬구름인들 머물 리 없다. 한 자락 바람에도 물결이 이는 내 마음 바닥에 아득한 푸른 빛이 차오를 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오래 어두워오는 강둑을 서성거려야 할까.
(최민자님의 수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