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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둥글이세상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둥글이
5월 8일
[의정부 시내 저 멀리 양주의 ‘불국산’이 눈에 들어온다. 직선거리로 6.5km. 양주시를 가로지르는 국도를 타고 저 산을 비껴 지나가야할 것이다.]
[왼 팔뚝만 타서 허물이 벗겨진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하는 와중에 하늘은 참 정직함을 새삼 느낀다. 현재 일정이 계속 북상 중이고, 시군 이동하는 시간이 주로 점심 이후이다 보니, 계속 태양을 왼쪽에 두고 이동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왼쪽 팔만 탈 수밖에...]
[한 시간 좀 넘게 걸려서 양주시 경계면에 도착한다.] 양주시 양주는 18여명의 인구를 가진 지역으로 1읍 4면 6동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양주는 원래 서울동북부(도봉 · 노원 · 강북 · 중랑) 및 경기동북부(의정부 · 동두천 · 남양주 · 구리)의 모태였다. 시군 분할 정책에 의거 갈갈이 찢기고 현재는 ‘양주’라는 이름으로 협소한 지역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양주시는 길쭉이 뻗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우선 양주시청은 서울 쪽과의 행정적 편의성을 위해서였는지, 주택가가 거의 없는 남쪽에 벌줌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위로 덕계동과 덕정동이 자리 잡고 있다. 덕정역이 자리한 덕정동이 양주의 중심지역인 듯하다. 양주시청을 지나, 덕계동 우편취급소에서 전단지 뭉치를 찾아서, 덕정동으로 향하는 것이 일정이었다. 아마 위치가 의정부 쯤 되었으면 투자가치가 높아지는 등의 이유로 해서 건설족 등과 정치인들이 합세해서 산들 다 깎아 평지를 만들고, 관공서와 상가, 주거지 등을 모두 모두 한데 모아 놓았을 것이다.]
[평화로 표지석. 박정희 친필로 쓰였다고 한다. 전 충남민언련대표이자, 전 뉴스서천대표였던 ‘양수철 대표’가 이 표지석을 봤다면 드릴 가져다가 때려 부쉈을까?] 친일청산 이야기
2005년 3월 1일 그 당시 충남민언련 대표이자, 뉴스서천 대표였던 양수철씨는 윤봉길 의사 사당인 예산군 충의사 현판을 떼어내 도끼로 때려 부순다. 우스게 소리로 ‘도끼만행? 사건.’
[양수철 대표/사진 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의 압제로부터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 받친 [윤봉길 의사의 사당]에 일본군 군관으로 복무했던 [박정희의 친필 휘호 현판]이 씌어졌음의 사실에 오래도록 문제를 제기해 왔었다. 더군다나 2004년 국회에서 통과된 친일반민족 관련법의 의미가 역사바로세우기에 뜻을 두고 있기에, 이러한 도무지 있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괴리는 청산되어야할 그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에서 보수단체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도저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양수철 대표는 혈혈단신으로 충의사를 찾아가 현판을 떼어내 도끼로 때려 부순 것이었다. 재미난 사건은 그 다음에 빚어졌다. ‘파평윤씨’ 종친회에서 대형버스 22대와 승용차 50여대를 동원 총 500여명의 ‘윤’씨들이 모여서 궐기대회를 치뤘는데, 이름하여 ‘충의사 현판 훼손범 양수철 규탄대회’.
[파평윤씨의 궐기대회/사진 펌] 상식적으로 봤을 때 항일운동가의 사당에 친일파의 현판이 달려있으면 이를 떼어내는 것이 그 직계 후손 된 도리일 터이고, 본인들이 직접 못하면 다른 이들이 해 준 것에 감사를 해야 할 일이지, 규탄대회라니? 하지만, 이들 궐기대회에 함께 참여한 조직들의 면면을 보면 사태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자유총연맹 지회, 바르게살기 지회... 그렇다. 이들은 단순히 사당의 시설물이 하나 박살 난 것에 그리 분개 한 것이 아니고, ‘박정희 현판’이라는 보수 기득권 세력의 상징적 집적 물에 위해를 가한, ‘반보수 기득권청산 세력’에 반발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윤봉길 의사 사당과 전혀 관계가 없는 그런 보수조직들까지 달라붙어서 양수철 대표 규탄에 나섰던 것이 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결국 윤봉길 의사는 보수 기득권 조직의 상징적 인물인 박정희 추앙을 위한 들러리로 전락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결국 ‘충의사 현판 훼손범 양수철 규탄대회’는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대회가 아닌 박정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치러졌던 보수 기득권 조직의 굿판의 다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윤봉길의사’가 이 모습을 봤다면 과연 뭐라고 얘기했을 것인가? 사직이 무너지고 민족의 운명이 폭풍 앞의 한 가닥 흔들리는 호롱불 같았던 시절. ‘이대로는 안 된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며, 국운을 일으키고자 이전의 세계(일본제국주의)를 파괴하려고 나섰던 한 청년. 폭탄을 손에 움켜쥔 그의 투철한 소명은 다만 ‘(일본제국주의를)무너트리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것은 그 후손들의 몫이었다. 그는 일제에 잡혀 처형되면서 오직 간절히 그 후손들에 의해 ‘새로운 세상’이 세워지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혈육’이라고 위세를 떠는 세력들은 오히려 기득권세력화 해서 친일청산을 가로막으면서 오히려 민족의 역사가 바로 세워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니 이는 어찌된 영문인가. 민족 역사의 전통과 경험을 시대에 맞게 오늘에 적용하여야 함은 세대가 건강히 대물림 되어야 하는 필요에 의한다. 가령 “우리 고장은 3.1운동의 투쟁이 있었던 고장이야!”라며 3.1절 만세 행진만 그럴싸하게 ‘공연’만 해대며 ‘자부심’에만 취해 있는 지역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3.1운동의 정신(제국주의로부터의 약자의 해방-평등-박애)을 계승하여, 이를 현재화(노동자, 농민, 장애인 등의 사회적 약자를 위해 힘쓰는 노력)하지 못한다면 이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들은 민족의 역사와 경험을 정체된 그것으로만 인식되는 듯하다. 그 정체된 역사와 경험은 우상화되고, 이를 세력화하고 기득권화해서 위세만 높이려 하는 자들에 의해서 편협하고 조잡하게 재단되는 듯하다. 역사가 바로 세워지지 않는 한 이 민족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민족의 미래는 있어서도 안 된다.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내던진 수많은 선조들도 아마 지하에서 그리 여기시며 통탄하고 계실 것이다. 하여튼 보수 수구세력들의 위세에 힘입어 양수철 대표는 '공용물 손상과 건조물 침입'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고, 박정희 친필 충의사 현판은 다시 그대로 복원되었다. 그게 불과 4년 전의 일이었는데, 이 나라의 역사는 그 이후로 계속 후퇴되고 있는 듯하다.
[새로 걸린 충의사 간판/사진 펌]
[어느새 불국산 봉우리가 눈앞에 가까워 졌다. 왼쪽 봉우리 불국산 오른쪽 구석 양주시청.] 땡볕에 세 시간 쯤을 걸어왔더니 땀이 뻘뻘 흘러 내려 속옷을 적셨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반팔을 입는다. 개인 사진 남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반팔 입은 기념으로 한 컷.
[작년 여름부터 올 봄까지 열심히 운동해서 57킬로 까지 찌어 놨었는데, 유랑 3주 만에 3킬로가 다시 빠졌다. ㅠㅜ. 아가씨, 아줌마들은 살 뺀다고 헬스클럽 다니고, 비싼 약 먹으며 죽을 고생할 필요 없다. 저 배낭 매고 몇 주만 생활하면 살 쑥쑥 빠진다. [공고]짐꾼 구함- 밥 조금 먹고, 먹을 것을 잘 물어오며, 야간 경비에 특기를 보이는 O명의 짐꾼 구함.]
[땀 쭉 빼고 났더니 허기가 져서 양주시청 근처 식당에서 보이는 음식(김치찌게)을 초토화 시켰다.]
[시청 한편 잔디밭에 들어가 한숨 자고.]
[참새가 방앗간 지나가지 않듯이 둥글이는 길가 과일 좌판대를 지나치지 않는다. 맘 좋은 주인아주머니로부터 사과하나를 받아가지고 나온다.]
[과일가게의 멍멍이. 욘석 ‘지적인 살가움’을 보인다. 무턱대고 와서 좋다고 안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속 빼지도 않고, 주변 기웃거리면서 내 반응을 살피다가 안심할만한 사람이라고 여겼는지, 앞으로 다가와서 머리는 디민다.]
[양주시 덕계동 들어가는 길목-우편물을 찾고 하루 묵어야할 동네.] 덕계동의 한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주차장에 하루 묵을 수 있는지를 교장선생님께 물었더니, ‘학교에는 그런게 가능하지 않다’고 딱 잘라 말씀하신다. 의정부에서부터 벌써 삼연타석 아웃이다. 과거 고양과 파주에서 연타석으로 학교에 텐트 칠 수 있음을 허락받아서 ‘웬일인가?’했더니, 역시 그 때 일은 웬일이었다. 도시 지역 학교에는 웬만하면 텐트치고 자라고 허락해주지 않는데, 그때는 그야 말로 극히 희박한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났던 이례적인 일이었다. 역시나 그 이후로 계속 거부와 박대의 쓰라림을 맞보고 있는 중.
[어기적거리다가 인근 주민 주차장에 텐트를 세운다. 앞쪽 길로 지나는 사람들의 소음과 뒤쪽 주택 가정에서 들리는 화목한 대화가 귀를 간질이기는 했지만, 하루 묵기는 상당히 우수한 입지였다.] - 텐트 꾸미기 텐트 앞뒤로는 환경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드러내는 간략한 구호가 붙어 있다.
[경기도 화성에서 찍은 컷] 이는 스스로 활동의 의지를 다지기 위한 다짐의 의미도 있지만, 텐트에 접근하는 이들을 겨냥한 구호이기도 하다. 이 대상이라는 것은 수위 아저씨나, 혈기 왕성하고 호기심 많은 중-고생, 지나는 행인 등을 일컬음이다. 이 구호는 그 대상들의 텐트 접근의지를 상실시키며 전투력을 무력화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앞뒤로만 글이 쓰여 있다 보니, 옆 공간이 좀 ‘횡~’하여 어떤 문구를 집어넣을까 고민 중이다. 부디 혜안 있는 분들의 조언 주시기를...
[과연 어떤 문구를 새겨야 ‘적’들의 접근을 최소화 할 것인가??? 기타 아이디어 있는 분들은 조언 주시기를...]
[텐트친 자리가 쫓겨날 일도 없고, 지나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느긋한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콩밥이 가능했음은 이러한 느긋함으로부터 충분히 콩을 물에 불릴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 의한다. 한 달 만에 처음 해 먹은 듯하다.] 5월 9일 토
[양주시 덕계동에서 빠져나와 논길을 따라 덕양동 가는 길]
[생명을 잉태해 온 차량? 차에 하나 가득 실린 묘목들]
[저 멀리 목적지 덕양동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자재창고 터에 자리 펴고. 저녁에 텐트 칠 곳을 찾아서 기웃거리다가 천주교성당이 보이기에 주차장 자리에 텐트를 칠 수 있을지 타진하려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건물 입구와 계단 쪽에 많이 나와 있다. 뭔가 했더니 성당봉헌식 한다고 대주교님을 맞는 행사 예행연습이었다. 생소한 차림의 이방인을 대하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한분이 다가오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하고 묻기에, “지나가며 여행하는 사람인데 신부님이나 사무장님 만나 뵐 수 있을까요?”하고 여쭈니 잠시 행사 준비하는 와중이니 끝나고 말씀 나누시면 된다고 하신다. 그래서 한쪽에서 20여분 기다리고 있었는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그 옆의 자재 창고로 보이는 공터로 들어갔다. 무릎높이의 바리케이드가 있었지만, ‘살짝~’ 뛰어 넘어서.(무단 침입)]
[저녁밥을 해서 반절을 가른다. 늘 그렇듯이 왼쪽은 저녁밥, 오른쪽은 다음날 아침밥. 오늘 반찬은 특별 메뉴인 ‘김’이 포함되어 있다. 1주일 전 쯤 가방 한쪽에 쳐 박아 놨던 것인데 뒤늦게 발견했던 것이다. 의정부 오면서 얻은 고추장도 반찬통 바닥에만 색칠되어 있는 수준이라 저녁밥으로 긁어 먹으면 바닥날 것이다. 암튼 맛있게 먹어야지.]
[헛! 저녁밥을 먹고 나니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닫게 된다. 늘 주의를 해도 한 번씩 이런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남은 고추장을 다음날 먹던지 김을 다음날 먹던지 했어야 했는데, 무작정 먹고 나서 보니 다음날 아침 먹어야할 반찬이 없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은 맨밥이다. ㅠㅜ. 좌절이 밀려오는 순간 문득 군생활하면서 늘 마음에 새기고 다녔던 ‘병사의 결의’가 떠오른다. ‘작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있으나 배식에 실패한 병사는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 5월 10일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텐트 옆 3m 가량 떨어진 곳에 개미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전날 저녁에 배고파서 라면을 하나 빠개 먹었었는데, 그 부스러기를 하나 끌어다가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이동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세상모르게 자고 있던 그 순간에도 욘석들은 이렇게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부지런하기는 한데 한편으로 효율적이지 못한 그들만의 아픔을 보게 되었다. 라면 부스러기가 개미굴에 집어넣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보니, 그 앞에서 계속 아등바등 대다가 다른 굴로 가져가려고 갔다왔다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 후 두어 시간 이후까지 계속.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결말은 각자 상상하길]
[오랜만에 자연의 화장실을 사용한다. 저 안쪽 그 어디엔가...]
[볼일 보는 중에 나무 하나의 표정이 유난히 찡그려져 있어서 봤더니... 인간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대목.]
[폐지를 버릴 곳이 없다보니, 며칠 전부터 먹은 우유곽이 계속 첩첩히 쌓이고 있는 상황이다. 매일 짐 꾸렸다 풀었다 할 때 마다 상당히 번거롭다. ‘버림’ 활동은 ‘먹고’ ‘싸고’ ‘잠자고’ ‘이동’하는 활동과 함께 둥글이 유랑의 난제 중의 하나이다.] 쌀과 고추장이 떨어진 터였다. 일요일이라 사람 만나기 좋기에 구걸 좀 하기 위해 다녀야 했다. 12시 좀 안되어 인근 교회를 찾아 들어간다. 보통 교회는 예배보고 늘 점심 챙겨서 먹이곤 하기에 가서 쌀 등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보통 교회는 텐트 치고 묵으라고 허락은 안 해줘도 일요일에 먹을 것 인심은 그래도 좋다.
[교회 식당가서 얻어온 ‘쌀’ ‘고추장’ ‘떡’. 교회 식당에 예닐곱 분이 바쁘게 식사 준비를 하고 있기에 “여행 다니는 중에 배가 고파서 그런데요. 밥 해 먹을 쌀 좀 얻을 수 있을까요?”하고 말씀 드리자, 뜬금없는 상황에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신다. 다시 사정 얘기를 하니 쌀을 챙겨주시기에 “죄송한데 고추장도 좀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여쭙자 역시 퍼주신다. 나오는 길에 떡까지 받아온다. 오~ 트리플 크라운!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니이이다.”]
[저녁 역시 전날 텐트를 쳤던 자재창고 터로 간다. 바닥이 평평하지 않아서 몸 눕히기에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시비 걸릴 일 없이 조용한 공간.] 밥 해 먹고 누워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고 후뢰시 번쩍 거린다. 땅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화들짝 놀라서 텐트를 열고 나간다. 사정 얘기를 했더니 쾌히 승낙하신다. 가족들과 잠깐 볼일 보로 오신 듯 했는데, 일 보고 가실 때 친절한 말씀과 함께 명함까지 건네주신다. 주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녁밥을 해 먹고 눈이 스르르 감겨서 잠을 청하려 하는 중. ‘우두두...’ 텐트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많은 양은 아니기에 한편으로 걱정을 하면서도 곧 그칠 것이라며 안위를 했다. 혹시나 해서 기상청 (각 지역 국번)131번 전화를 해서 경기 북부지역 기상상태를 확인해 봤더니, 비올 가능성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차분하지만 딱딱한 기계음 아가씨의 목소리를 듣고 안심한다. (131번 기상예보 전화번호를 빨간 표시 해 놓은 것은 여러분들이 혹시나 실수로라도 저 번호를 잘 못 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이유이다.) 비가 잠시 오다가 그쳐서 안심한지 30여분도 안돼, 또 비가 떨어진다. 오다 그치기를 몇 번 반복한다. 밖으로 나가 후뢰슁(텐트 덮게)를 돌로 잡아 당겨 빗물이 최대한 밖으로 흘러 내려가게 조치한다. 하지만 이 싸구려 텐트에는 곧 빗물이 스며들기 시작할 것이다.
[젖어가는 텐트] 인근에 비를 피해 텐트 칠 공간이라도 있다면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움직이련만 사방 4- 500m 주변에 그런 공간이 없음은 확인한 터였다. 이런 때는 방법이 없다. 하늘에 기도하는 수 밖에. 물론 나는 절실한 기독교 신자는 아니다. 보통의 기독교 신자도 아니다. 교회 헌금 낸 기억이 집에서 500원 받아다가 100원만 내고 나머지 과자 사먹던 초등학교 이후로는 없다. 또한 그 본인은 ‘다신론자’(여러 신이 있음을 인정)이시기에 “나 이외의 다른 신은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나는 여러 잡신?들의 입장을 두둔하는 데에다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편의적인 습성이 있는지라, 신께서는 내 기도에 응해 주시지 않았다. 그간 예수께서 나로 인해서 뻑치기 당했던 것에 대한 분풀이실까?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좀 마음 좀 넓게 쓰쇼”하며 비를 그쳐주시기를 기원하지만, (기독교인들 말에 의하면)‘안 믿으면 지옥 보낸다’는 속 좁은 우리 하나님. 그간 밀린 응징을 하고 계신가보다. 사태가 심상치 않아서 기상예보 전화를 다시 해봤더니, 금세 멘트가 바뀌어져서 ‘비 내릴 확률 80%’란다. ㅠㅜ 그렇다면 그 전에 예보를 할 때 “예보는 이렇게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고 마무리를 해주던지 해야지, 확신에 찬 어조로 얘기를 했다가 순식간에 말을 바꿔 버리면 난 뭐가 된단 말인가.ㅠㅡ(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뉴스 보니 강화도 지역은 강수량 예보가 100mm 차이 났다고 소개된다.) 무릎 꿇고 절규하던 나는 굳은 다짐을 한다. ‘기상청 근무하는 아가씨와는 절대로 데이트 하지 않겠노라’고... 이제 비는 잠깐잠깐 쉬기를 멈추고 아예 줄기차게 내리기 시작하는 터였다. 텐트 한쪽으로는 물이 스며들고 있었기에 이도저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맞는다. 이제는 빗물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몇 시간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짐 수습을 한다. 비 떨어지는 소리가 빚어내는 불안감은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나는 최후의 결단을 내리게 된다. 어차피 이 순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아 있지 않다. 만물을 관장하는 저 거대한 ‘운명’이라는 이름의 대양에 나를 내 맡기는 수밖에. 비와 사투하는 중에 5월 11일은 찾아왔는데 새벽 세시 반에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타이타닉과 운명을 같이 했던 ‘J 스미스 선장’과 같이, 침몰하는 텐트에 그냥 나를 내 맡겼다. 침낭이 최대한 젖지 않도록 몸을 웅크린 상태로 비 떨어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빗물은 이리 저리 새들어왔지만, 깔게 바닥을 쳐 올라오지는 못한 터였다. 다행히 침낭도 그리 많이 젖지 않은 상태였다.
[여전히 밖에 비오는 광경] 하지만 빗물이 흥건한 텐트 등을 꾸려서 배낭에 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텐트를 잠시 버린다.
[텐트 놓고 철수/안에 젖은 배낭과 옷과 전단지가 들어 있는데, 설마 도둑놈이 여기까지 와서 가져가지는 않겠지?] 계속 비가 내려서 아침부터 비닐을 뒤집어쓰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도서관도 월요일 휴관인 이유로 마땅히 있을 곳이 없다. 이날도 밤새 비가 내린다고 했던 터고, 어차피 이날 저녁 텐트와 침낭이 젖어서 잠을 청하기도 힘든 상황이기에 찜질방으로 들어간다. 찜질방에 들어 앉아 전날 못 잤던 잠도 자고, 책도 읽고 하며 뒹굴뒹굴하는데 텐트를 친 곳 사장님께서 전화를 주신다. 순간 뜨끔했다. 이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텐트를 걷어 간다고 말씀 드렸었는데, 비가 계속 내려 못 걷고 나가면서 사무실에다 메모를 남겨뒀던 터였다. “언제오시냐?”고 묻는다. 난감하다. 빨리 와서 텐트를 걷으라는 것인지... 속으로 진땀을 빼고 있는데, ‘쌀 좀 가져왔다’고 텐트에 넣고 가신단다. 흐흑~ 이런 고마울 수가. 먹구름이 걷히면서 눈앞에 한줄기 빛이 내리 쬐이는 듯하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구걸해서 먹을 것을 얻어온 적이 있고, 잠자리를 제공 받았으며, 털어주시는 잔돈도 받아온 경험은 있어도, 미리 쌀을 챙겨주신 것은 또 처음이다. 쌀 챙겨주시는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떠돌이 나그네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임을 헤아리는 마음이었다. 아마 본인 자신도 길을 떠나 본 적이 있기에 떠돌이 나그네에게 쌀자루를 채워줄 필요를 역시 느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분 카페에 들어가 보니, http://www.gaksim.com/서예, 전각, 서각 등에 예술적 취향을 가지고 계신 분인신데, 등산을 좋아하시는 듯 했다. 감사한 마음을 배낭에 넣어가게 해주셔서 고마울 따름.
[김봉지 확대. ㅠㅡ 감격.]
[칠봉초등학교 캠페인] 찜질방에서 나와 보니 하늘은 흐리지만, 비는 떨어지지 않는다. 전단지를 가지고 인근 학교로 향한다. 교문 옆에 느티나무 가지 하나가 드리워져 있는데, 저 안에도 뭔가가 있었다.
[느티나무 가지 사이에 뭐가 있을까요? / 보호색 참조]
[그렇다. 송충이 한 마리가 고개를 디밀고 자고 있는 것이었다. 손으로 콕 눌러서 깨워 볼까 했지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정도 이듯이 송충의 잠 역시 깨울 일 없다.]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데, 갑자기 이슬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서서히 보슬비 수준으로 굵어진다. 땀과 비에 젖고 말리고를 수 없이 반복한 껄쩍지근한 몸을 1주일 만에 목욕으로 씻어내고, 옷 갈아 입은지 한 시간도 안 된 터다. 또 빗물에 젖어야 하다니... ㅠㅡ. 시작이 이러니 앞으로 1주일 말미에는 땀 냄새와 섞여 쾌쾌한 냄새를 사람들에게 풍기겠지? 그나마 다행으로 신께서는 내 코를 막히게 해서 냄새를 잘 못 맡게 해주셨다는 것.
[우산을 쓰고 등교하는 아이들] 5월 12일
[덕계 시장 길가의 바구니에 담긴 강아지들. 한 마리씩 쓰다듬어주고 놀고 싶었지만, 주인아저씨가 손 탄다고 뭐라 하실까봐 주인아저씨 딴 쪽 볼 때마다 ‘콕콕’ 찍어보기만 한다.]
[낮에는 그간 텐트를 세워뒀던 자재창고 터로 돌아와서 장비들을 펴 말리며, 달콤한 낮잠을 한숨 즐긴다.]
[한숨 자고 난 후에 인근 숲을 잠깐 휘젓다 보니, “지화자!” 드릅나무가 눈에 띈다.]
[이미 먼저 거쳐 간 이가 있어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저녁 반찬꺼리를 마련한다.]
[허락을 받았으니 대범하게~ 공터 중간에 텐트를 치고. 맘 편히 한가함을 즐긴 하루.]
5월 13일 이빨 닦으려고 보니 칫솔이 없어진 것이다. ㅜㅠ 어디서 흘린 것일까? 전날 양치질 하고 좀 마르라고 배낭 위쪽에 올려놨었는데, 깜빡 주의하지 않고 배낭 짊어지다가 떨어진 듯하다.
[칫솔 살아생전 마지막 찍혔던 모습. 의정부 모 초등학교에 쫓겨 나오면서 손에 들고 오던 모습. 누가 이 칫솔을 주워서 사용할 리도 만무하고, 길바닥에 굴러다니던지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전우여~ 잘 가라!!! / 참고로 2006년 8월 31일 유랑활동 시작으로 여태껏 분실된 물품은 렌즈 뚜껑 두 개, 2m 노끈 하나, 구멍 난 양말 한 짝이 전부이다.]
[2009년 5월 13일 오전부터 양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발탁된 ‘양하사’. 6개월간 충실히 복무하면 중사로 진급됨.]
[그간 잘 묵었던 자재 창고 터 사무실 앞에 메모를 하나 남겨둔다. "직접 보답드릴 수는 없어도 제가 길을 가면서 만나는 이들에게 되갚겠습니다."는 표현은 내가 만들었어도 참 잘 만들었다. "나중에 언젠가 보답드리겠습니다."라고 써놔 버리면 그에 대한 채무감이 나를 늘 압박할 것이지만, "길 가는 이들에게 되갚겠습니다."는 말은 언듯 듣기에는 참 고상하게 들리지만, "잘 먹었으니 입 씻겠습니다."는 말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지생활하면서 늘어가는게 간교함 밖에 없으니 원...] --- 2009년 5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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