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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김씨족보 원문보기 글쓴이: 죽산
1. 有明朝鮮正憲大夫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金公神道碑銘 幷序
유명조선 정헌대부[1]삼도통제사[2]겸 경상우도[3]수군절도사 김공 신도비명(병서)(김예직,1565~1623)
[1] 정헌대부(正憲大夫); 조선 때, 정2품의 문무관 품계
[2]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조선 때, 해군 총지휘관. 국초에는 각도마다 수군 절도사가 지휘하였으나, 선조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 통제사를 신설하고, 전라 좌수사 이순신으로 이를 총 지휘하게 한 것이 그 시초였는데, 본영은 지금 경남 통영(忠武市)에 있었음.
[3] 경상우도(慶尙右道); 낙동강 서쪽의 각 고을
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吳始萬撰(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 오시만[4] 지음)
嘉善大夫刑措參判朴慶後書(가선대부 형조참판 박경후[5] 씀)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權珪篆(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권규 새김)
[4] 오시만(吳始萬,1647~?); 자는 영석(永錫), 호는 춘헌(春軒), 벼슬은 대사간, 관향은 동복(同福). 생부는 오정일(吳挺一)이고 부친은 오정위(吳挺緯,1616~1692)로서, 오정위는 휘예직의 아들인 휘수검(1592~1644)의 사위이다. 즉 휘수검의 따님이 오정위의 계실로 들어 갔다. 따라서 오시만은 휘수검의 외손자 뻘이 된다.
[5] 박경후(朴慶後1644~?); 자는 휴경(休卿), 호는 취옹(翠翁). 만오(晩悟), 벼슬은 형조 참판, 관향은 함양(咸陽)으로 글씨를 잘 썼다.
昔我曾祖晩翠 黙齋公兄弟 曁兩胤學士 俱樹節于昏朝 嘗稱統制使金公 忠節卓卓可觀 家庭傳誦之不衰 不侫 無嘗艶服于心焉
옛날 나의 증조부 만취(晩翠)공[6]. 묵재(黙齋)공[7] 형제분 및 두 아들 학사(學士)는 모두 지난 조정(광해군)에서 절의를 세웠는데, 일찌기 일컫기를 『통제사 김공(예직)의 충절은 높고 높아서 가히 장관이었다』하고, 가정에서 전해오며 칭송하기를 마지않았기에, 불초(오시만)는 언제나 마음으로 흠복하였던 터이다.
[6] 만취(晩翠); 오억령(吳億齡)의 호, 자는 대년(大年), 시호는 문숙(文肅), 벼슬은 우참찬(右參贊), 관향은 동복.
[7] 묵재(黙齋); 오백령(吳百齡)의 호, 자는 덕구(德耈), 관직은 대사헌, 관향은 동복.
公諱禮直 字文伯 系出金海 鼻祖首露王 生有金盒之異 仍姓金 中世有諱普 高麗侍中 金海(=寧)府院君 諡忠簡 歷三司副使到門 戶曹摠郞覲 瑞興府使 贈兵曹參判孝芬 承文院校理 贈戶曹判書震孫 知敦寧事 贈補祚功臣 諡安敬公永貞 承文院參校 贈左贊成世鈞 司贍寺僉正 贈領議政從壽 有司導寺僉正 贈領敦寧府事 海寧府院君諱希哲 娶安東權氏 忠義衛璋之女 文忠公近之裔 贈花山府夫人 是爲公考妣
공의 휘는 예직(禮直)이요, 자는 문백(文伯)이요, 김해에서 계출하였으니, 시조 수로왕(首露王)께서 탄생하실 때 금합(金盒)의 이적(異蹟)이 있었으므로, 이에 성을 김(金)씨라고 하였다. 중세(中世)에 있으신 휘 보(普)는 고려 「시중. 금녕부원군」으로 시호는 충간(忠簡)이었고, 「삼사부사」를 지낸 도문(到門), 「호조총랑」근(覲), 「서흥부사 증병조참판」효분(孝芬), 「승문원교리 증호조판서」진손(震孫), 「지돈영부사 증보조공신, 시호 안경(安敬)공」인 영정(永貞), 「승문원참교, 증좌찬성」인 세균(世鈞), 「사섬시첨정, 증영의정」종수(從壽)를 지나서, 「사도시첨정[8], 증영돈영부사, 해녕(海寧)부원군」휘 희철(希哲)이 있어서,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맞이하였는바, 「충의위」장(璋)의 따님이었고, 「문충공」근(近:號 陽村)의 후예로서, 화산부 부인(花山府夫人)의 증직을 받았으니 이가 공의 부모님이 되신다.
[8] 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 조선 때, 궁중의 미곡과 장의 공급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종4품관
三世之 贈 以公娣 爲光海母妃故也 及光海廢 收其封 贈 以公之貴 改贈 考戶曹參判 妣貞夫人 生考諱希賢 妣全州李氏 無 贈 戶曹參判 貞夫人 以公伯氏節度公貴也
3세대에 걸친 증직(세균, 종수, 희철의 세분?)은 공의 누이(女弟)가 광해군의 어머니(母妃)였기 때문이더니, 광해주가 폐위됨에 이르러 그 봉작과 증직(封贈)은 회수되었으나, 공이 귀하게 되어 부친(희철)은 「증 호조참판」을, 모친(안동권씨)은 「증 정부인」을 고쳐 받았으며, 그리고 생부(生父) 휘 희현(希賢)과 생모(生母) 전주이씨(全州李氏)는「증 호조참판」과 「증 정부인」을 증직받았는데 이는 공의 백씨(伯氏;형) 절도공(節度公:義直)이 귀하게 되어 받은 것이었다.
以嘉靖乙丑擧公 九歲爲伯父僉正後 公少好學業博士 値島夷亂 公以白衣 從駕至永淸 時設慰科 公於是慨然投筆 擢武科 歲萬曆癸巳也 拜宣傳官
가정 을축년(명종20, 1565)에 공이 나셔서, 9세에 백부(伯父) 첨정공(僉正公: 希哲)의 양자로 들어갔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업을 좋아하여 박사가 되었다. 섬 오랑캐의 난(임진왜란)을 만나자, 공은 벼슬없이(白衣)로 왕의 가마(王駕)를 호종하여 영청(永淸:지금 平北 永柔의 옛 이름)[9]에 이르렀다. 그때 위과(慰科)를 설치하므로, 공은 이에 한탄하며 붓을 던져버리고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니, 만력 계사년(선조26년, 1593)으로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9] 영청(永淸); 평안북도 영유군(永柔郡)의 옛 이름.
丙申丁內憂 制除復以宣傳官 兼備局郞 陞忠州判官 龍川郡守 還拜內乘 庚戌加僉知中樞 辛亥選拜豊川府使 以異績陞嘉善 歷京畿水使 南道兵使 入爲捕盜大將 同知中樞 戊午加嘉義 己未出爲三道統制使 用壬辰扈衛功 加資憲階 公守海防 籌畵廢置 悉得其宜 防鎭賴以安
병신년(1596)에 모친상(內憂: 母喪)를 당하였다. 상제(喪制)를 마치고 다시 「선전관, 겸 비국랑」으로써 「충주목사」, 「용천군수」[10]를 거쳐 「내사복시내승」(內司僕寺內乘)[11]으로 임명되었다가, 경술년(광해2년, 1610)에 「첨지 중추부사」로 가자되었고, 신해년(1611)에는 「풍천 부사」[12]로 선임되어 훌륭한 정치를 베풀어(異績:善政) 「가선대부」에 승진되고, 「경기수사」(喬桐)[13]. 「남도병사」(北靑)[14]를 역임하고 들어와서 「포도대장, 동지 중추부사」가 되었고, 무오년(광해10년, 1618)에 「가의대부」로 가자되었다가, 기미년(1619)에 「삼도수군통제사」(統營)가 되어서 나갔으며, 임진왜란 때의 <왕을>호위했던 공로로 「자헌대부」품계에 가자되었다. 공은 해상방위를 수비함에 계획과 개선에 전부 사정이 좋아졌으니 막고 진압하는 데(防鎭) 힘을 입어 편안하였다.
[10] 용천군(龍川郡); 평안북도 북서단 압록강구에 위치한 고을 이름.
[11] 내승(內乘); 조선 태조원년(1392)에 설치한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임금이 타는 말과 수례를 맡아보던 관직으로, 여기에서 옮길 때는 반드시 고관에 영전하였다.
[12] 풍천부(豊川附); 황해도 송화군(松禾郡)에 있었던 지명.
[13] 경기 수사(京畿水使); 조선의 무관직으로, 수군을 통제하기 위하여 둔 정3품 당상관. 경기도 수군 절도사의 본영은 강화도 교동(喬桐)에 있었음.
[14] 남도 병사(南道兵使); 남도 병마 절도사 또는 남병사 라고도 했음. 조선 때 종2품 무관직으로 함경도 북청(北靑)에 그 본영이 있었다. 함경도는 지역이 광대하므로, 병사(兵使) 3인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남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公素與鄭造不善 時造按嶺臬 來視舟師 以公爲武將 簡其禮 公執不屈 造回修舊郄 誣公罪狀 計陷之法 造黨群起 齮齕公不己 公遂辭病免 還拜訓鍊都正 加正憲階
공은 평소에 정조(鄭造,1559~1623)와 더불어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그때 정조는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와 통제사 영(營)을 순시하였다. 공이 무장이므로 그 예를 간략히 하려고 하여 공(예직)이 이를 굽히지 않았다. 정조는 돌아가 과거의 혐의를 꾸미고, 공의 죄상을 무고하여, 법으로 모함할 계획이었다. 정조의 간당들은 무리를 지어 일어나, 공을 헐뜯어 마지않았다. 공은 마침내 병으로 사퇴하였으나 다시 「훈련원 도정」으로 임명되어 「정헌대부」품계로 가자되었다.
時群孼柄用 斁亂天常 仍之以土木師旅 邦命將殄 天菑屢警 公以肺腑之親 不可坐視淪隮 上章 言天人之際 語剴切無諱 大忤光海意 時公以兜䥐宿生 纍擬訓局大將 卒不見庸
이 때 여러 소인배들이 등용되어 천륜이 문란하였고, 겹쳐서 토목(土木)공사로 백성을 괴롭히니, 국운(邦命)은 장차 끊어지고, 천재(天災)는 자주 일어났다. 공은 폐부(肺腑;허파, 여기서는 광해군)의 외친으로, 위망(危亡)의 현상을 앉아서 볼 수 없어, 글을 올려 천리와 인륜의 극단을 말하였다. 말씀이 가깝고 간절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크게 광해의 뜻에 거슬렸던 것이다. 당시 공은 투구의 노장으로 여러 번 「훈련대장」을 기대했으나, 끝내 기용됨을 보지 못하였다.
臨海 永昌之獄 公皆抗疏請全恩 及廢母論起 屢上密疏 言倫紀大閑 其議賓廳 啓曰 臣忝在外親 義同休戚 願上以堯舜之德 慱采愛老 憂國之論 以安 宗社 勗其君以虞舜 公意可見也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獄事)에 공은 다 항소(抗疎)를 올려서 골육의 은혜를 보전하도록 청하였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남에 있어서도 여러 번 밀소(密疏)를 올려서 윤리와 기강의 대법을 말하였고, 그 빈청(賓廳)[15] 회의를 듣고 장계하기를 『신은 외람되게 외친이 되어, 지켜야할 도리가 친척과도 같습니다. 원컨대 왕상(王上)은 요와 순(堯舜)의 덕으로 널리 노인을 공경하고 나라를 걱정하는(愛老憂國) 중론(論)을 채택하여 종묘사직을 편안히 하고, 그 임금을 헤아려 뛰어 나도록(虞舜) 힘쓰게 하소서』하였으니, 공의 뜻을 볼 수 있었다.
[15] 賓廳; 조선 시대에, 비변사의 대신이나 당상관이 정기적으로 모여 회의하던 곳
自是兇黨交奸 目之以護逆不忠 光海益疎之 公知國事 無可爲者 憂憤成疾 凡有除拜 輒辭疾不就 請歸死田里 光海憚其讜 無許之 當時 公{辶+無}危一髮 然終不能非辟罪之 以公近戚故也
이로부터 흉당은 간악함을 서로 보태어 역적을 두둔하는 불충이라 하였고, 광해도 이에 더욱 멀어졌다. 공은 나라 일을 할 수 없음을 짐작하고 근심하여 분하게 여겨(憂憤) 병을 않기도 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제수 받아도 번번이 병으로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서 죽을 것을 청하였다. 광해는 직언을 꺼리면서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당시 공은 위기일발이었으나 마침내 죄를 주지 않은 것은 공이 가까운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及仁廟改玉 公以戚近廢朝 不自安 舁疾席藁闕下 仁廟誇公之樹立 慰諭之 俾仍前職 廩俸如舊 以天啓三年八月六日 感疾卒于城南舊第 壽五十九 是年閏十月十六日 厝于原州先隴坎坐之原
인조반정에 이르러 공은 물러난 조정(광해)의 가까운 인척이므로, 스스로 불안하였다. 병앓는 몸을 「들것」에 실려, 궁궐 앞에 나아가 집 자리를 깔고 대죄하였다. 인조대왕은 공의 세운 절의를 자랑하고 위로하면서 전직(前職)을 계속시키며 직위(品封)도 옛날과 같게 하였다. 천계3년(인조원년, 1623) 8월 6일에 병으로 성남 옛집(城南舊第)에서 세상을 여의시니 향년 59세 이었다. 이해 윤10월 16일에 원주 선산(先山) 감좌(坎坐南向)의 언덕에 장례를 하였다.
公天姿英粹 品度宏亮椒房之親 位致宰列 未嘗營立家産 爲子孫計 立朝事君 竭忠盡智 凜然有古直臣風 至其臨大節 確乎有不可奪之志
공은 천성(天性)이 아름답고 순수하고(英粹)하고 인품(人品)이 넓고 밝아(宏亮), 초방(椒房)[16]의 근친으로 직위는 재상의 계열에 이르렀으나, 일찌기 가정 살림을 세워서 자손을 위한 계책을 마련하지 않았었고,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였으니, 늠름하게 옛날 강직한 신하(直臣)의 기풍이 있었으며, 그 큰 절의를 다스림에 이르러서는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의지가 있었다.
[16] 초방지친(椒房之親); 항후의 친족. 漢官儀『皇后稱椒房』
當人彛汨喪 熖虐熾張 刀鋸鼎鑊 驅一世 世之以 名行自多者 尠不淄磷 公戚屬 處掣肘之勢 乃能舍命抗節 批尺鱗 犯兇鋒扶萬世之綱常 及 王綱改紐 陰翳掃蕩 公獨巍然無恙 首膺華獎 永綏天祿 非中有守而直其義者 能若是乎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없어지고 잔학한 불꽃이 치열하였고, 칼에 베이고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刀鉅鼎鑊) 악형(惡刑)이 전국을 휘몰았으나, 세상에 공명과 행적이 스스로 많았던 사람은 조금도 검게 물들지 않았거니와, 공은 왕의 친척으로서 휩쓸릴 수 있는 상황에 처했으나 능히 생명을 버리고 항거하였다. 밀소(密疏)로 부딪쳐 흉악한 칼날을 범하여, 만세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綱常) 세웠다(扶植). 인조반정 후 간악한 무리를 소탕함에 이르러서도, 공은 홀로 우뚝하여 걱정이 없었으며, 먼저 포상되고 영원하게 하늘의 복을 누렸으니, 마음에 지킴이 있고 그 의리를 굳게 하지 않았으면, 능히 이와 같았겠는가.
夫人李氏 廣興守夢殷之女 以丁卯五月五日生 年十七 歸于公 後公十六年卒 壽七十三 祔公葬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광흥창수(廣興倉守) 몽은(夢殷)의 따님으로, 정묘년(명종22년, 1567) 5월 5일에 출생하여, 17세에 공의 배우자가 되었고, 공보다 16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3으로 공의 무덤에 부장(附葬)하였다.
公有三子一女 守溫宣務郞早{土+勿;몰} 守良監役 守儉縣監 女適郡守韓翼明
공은 3남 1녀를 두었으니, 수온(守溫)은 「선무랑」인데 일찍 죽었고, 수량(守良)은 「감역」이요, 수검(守儉)은 「현감」이요 따님은 「군수」한익명(韓翼明: 淸州人)에게 출가하였다.
宣務一子大聲 監役二子一女 大亨 大聲 大聲出繼 女進仕成後述 庶子大律 縣監一子二女 大任正郞 女長主簿沈榎 次爲吾先大夫 行判書 東沙公諱挺緯繼室 庶子大鼎 大鉉 庶女愼世基 郡守三子三女 鼎相僉正 斗相判官 柱相都事 女長鄭以和 次生員任垕 次牧使吳始益
「선무랑」(守溫)은 1남이니 대성(大聲)이요, 「감역」(守良)은 2남1녀이니, 대형(大亨), 대성(大聲)인데, 대성은 수온의 양자로 가고(出繼), 1녀는 「진사」성후술(成後述: 昌寧人)에게 출가하고 서자는 대율(大律)이었다. 「현감」(守儉)은 1남 2녀이니, 대임(大任)은 「정랑」이요, 장녀는 「주부」심가(沈榎: 靑松人)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나의 선대부 「행 판서」동사(東沙)공 휘정위(挺緯)의 계실이요, 서자는 대정(大鼎). 대현(大鉉)이요, 서녀는 신세기(愼世基: 居昌人)에게 출가하였다. 「군수」(한익명)는 3남 3녀로서 정상(鼎相)은 첨정이고 두상(斗相)은 판관이고 주상(柱相)은 도사를 지냈다. 장녀는 정이화에게, 차녀는 생원 임후에게, 막내딸은 목사 오시익에게 시집갔다.
大聲一子一女 宣傳官纘夏 進士李國英
대성(大聲)은 1남 1녀이니 찬하(纘夏)는 「선전관」이요, 1녀는 「진사」이국영(李國英: 全義人)에게 출가하였다.
大亨四子三女 重夏 鼎夏 相夏 纘夏 纘夏出繼 女長兵使閔鏞 次朴自華 申漵 庶子從夏 光夏 成後述一子琇
대형(大亨)는 4남 3녀이니, 중하(重夏), 정하(鼎夏), 상하(相夏), 찬하(纘夏)인데, 찬하는 출계(대성의 양자)하였고, 장녀는 「병사」민용(閔鏞: 驪興人), 다음은 박자화(朴自華:密陽人), 다음은 신서(申漵:高靈人)에게 출가하고, 서자는 종하(從夏). 광하(光夏)이었다. 성후술은 외아들 수(琇)가 있었다.
大律一子一女 益夏 女洪應龜 正郞一子鎭夏 庶子昌夏 胤夏 女李弘慶
대률(大律)은 1남 1녀이니, 익하(益夏)이요, 1녀는 홍응구(洪應龜: 南陽人)에게 출가하였다.
「정랑」(大任)은 1자이니 진하(鎭夏)이요, 서자는 창하(昌夏), 윤하(胤夏)이요, 딸은 이홍경(李弘慶:全州人)에게 출가하였다.
主簿三子三女 廷謙 廷泰 廷益 趙以遠 閔命錫 朴溟羽 先考四女 長生員壯元李浹 次李性鴻 次權週 次進士李萬維
「주부」(沈榎)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정겸, 정태, 정익, 이고 딸은 조이원, 민명석, 박명우에게 시집갔다. 오정위(先考)에게 시집간 수검의 따님은 4녀를 두었는데 첫째는 생원에 장원한 이협에게, 둘째는 이성홍, 에게 셋째는 권주에게, 넷째는 진사 이만유에게 시집갔다.
大鼎一女萬戶睦昌浚 大鉉一子弼夏
대정(大鼎)은 1녀이니 「만호」목창준(睦昌俊:泗川人)에게 출가하였다.
대현(大鉉)은 1남이니 필하(弼夏)이었다.
世基四子 文建 行建 成建 德建 僉正三子二女 宗建 宗運縣監 宗迪都事 女縣監金鼎臣 生員洪萬通 判官五子一女 都事宗老 宗大 次參奉宗揆 宗彦 宗秀 女歸于不侫 都事一子二女 進士宗岱 女朴慶裕 李弘模
신세기는 4명의 아들을 두어 문건, 행건, 성건, 덕건이고 첨정(한정상)은 3남 2녀를 두어 종건, 현감 종운, 도사 종적이고, 딸은 현감 김정신, 생원 홍만통에게 시집갔다. 판관(한두상)은 5남 1를 두어 도사 종로, 종대, 참봉 종규, 종언, 종수이고 딸은 저(오시만)의 처이다. 도사(한주상)은 1남2녀를 두어 진사종대이고 딸은 박경유, 이홍모에게 시집갔다.
正郞公 以公宅兆不利 旣遷厝于先壟外岡坎坐之原 又將伐石 謨不華者銘 屬之不侫 不侫辭以匪其人 正郞公 强之曰 此先相公意 子何解焉 乃銘曰
「정랑공」(大任)이 공(예직)의 묘지가 불리하다고 하여, 이미 선산의 바깥 산등성이(先山外岡) 감좌(坎坐)의 언덕에 이장하고, 또 비석을 마련하여, 겉보기만 화려하지 않은 자의 명문을 구하더니, 불초에게 이를 청하므로, 불초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였다. 정랑공은 굳이 말씀하되 『이는 선상공(先相公)의 뜻이니 자네는 어찌하여 면하겠느냐?』하였다. 이에 명문으로 말한다.
烈烈丈夫 邦之杰也 海邦之師 施不卒也 居逼守正 讚不怵也 是有廣譽 可表而出也 我銘不華 窈附陽秋之筆也
열렬한 대장부는 나라의 호걸이었고, 해국(바다에 있는 나라?)의 장수는 시책이 거룩하도다. 궁핍함에 있어서도 정의를 지켰으니,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찬양하도다. 이에 대한 큰 영예가 있었으므로 가히 바깥으로 나타나는구나. 나의 명문이 화려하지 않으므로, 간절히 따뜻한 가을과 같은 글로서 이에 붙이고자 한다.
崇禎紀元甲申後五十二年 乙亥 月 日 立
숭정기원 갑신후 52년 을해(숙종21년, 1697년) 월 일 건립
원문,역문: 1978년간 안경공파세보
2. 統制使 毅憲金公傳
통제사 의헌김공전(김예직,1565~1623)
원문;1799년기미보,1876년 병자보
해석 ; 2005. 6. 18. 金順大
承旨 閔百順著
승지 민백순(1711~1774) 씀
金禮直 字文伯 古駕洛國 首露王之後 父僉正希哲 大司憲 安敬公永貞其高祖也 宣廟朝 其妹入後宮 生光海主
김예직의 자는 문백이고 옛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다. 부친은 첨정 희철이고 대사헌을 지낸 안경공 영정이 그의 고조이다. 선조 때에 그의 누이가 후궁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낳았다.
禮直少好學 性慷慨 有氣義 壬辰倭亂作 宣廟西幸 禮直曰我雖一書生世受 國恩厚 且有宮掖親與 凡民草間求活不可也 遂白衣扈 駕奮奮有效力意 卽投筆登武科 拜宣傳官
예직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성품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慷慨) 의기가 있어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서쪽지방으로 피신하자 예직이 말하기를 “나는 비록 한사람의 서생에 불과하나 나라의 은혜를 두텁게 입었고 또 궁중에는 나의 혈육이 있다. 무릇 민초(백성)들 사이에서 살고만 있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는, 마침내 벼슬도 없이(白衣) 임금의 가마를 호종하고 분함을 떨쳤으니, 그러한 힘과 뜻이 있어 붓을 던져 버리고 무과시험을 보아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丙申丁母憂 服 闋復拜宣傳官兼備局郞 陞忠州判官 龍川郡守 還拜太僕內乘 庚戌陞僉知中樞
병신(1596)년 모친상을 지내고 상복을 벗고, 선전관겸 비국랑으로 다시 돌아와 충주판관으로 진급되고, 용전군수를 지낸 후 태복내승을 거쳐 경술(1610)년에 첨지중추로 승진되었다.
辛亥擢豊川府使 有異績陞嘉善 歷京畿水使 咸鏡南兵使 入爲捕盜大將 戊午陞嘉義 己未出爲三道水軍統制使 籌畵廢置 咸得其宜用 壬辰扈衛功 陞資憲 入爲訓鍊院兼都正旋陞正憲
신해(1611)년에 풍천부사로 발탁되어 훌륭한 정치를 베풀어(異績:善政) 가선대부에 승진되고, 경기수사를 거쳐 함경남도병사를 지내고 들어와서 포도대장이 되었다. 무오(1618)년에 가의대부로 승진되고, 기미(1619)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서 나가서 계획과 개선을 시행하니 모두 사정이 좋아졌다. 임진왜란 때 <왕을>호위했던 공로로 자헌대부로 승진되고 들어와서 훈련원 겸 도정으로 돌아왔다가 정헌대부로 승진하였다.
當是時 光海主臨朝追崇所生母封贈迤及外戚一如王妃家 光寵方赫 然禮直顧不以爲喜每憤群小輩慫{曳/心}昏主斁亂彛倫 燕居輒仰屋出涕往往稠 坐中大言激烈略不顧忌凶徒皆疾之必欲置之死卒爾瞻韓纘男誣以在外藩遙制朝廷鄭造至稱以謀逆禮直益知國事無可爲憂憤成疾
이 당시 광해군은 조정에 있으면서 그를 낳은 모친을 존경하여 인척과 외척들을 왕비의 가문으로서 봉작과 증직을 내리고, 방혁(?)을 총애하였으나 예직은 깊이 생각하여 기뻐하지 않았다. 매번 앙심을 품은 여러 소인배 무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왕(광해)를 놀라게 하고, 도리와 윤리를 어지럽혔으며 편안히 살면서도 번번이 집에서 나와서는 눈물을 흘렸다. 때때로 빽빽이 앉아있는 좌중에서 큰 소리로 격렬하게 언쟁하며 뒷일을 염려하여 꺼리거나 하지 않았다. 흉악한 무리들은 모두 괴로워하며 반드시 귀양을 보내어 죽이고자 하여, 이이첨(1560~1623)을 따르는 한찬남(1560~1623)이 죄를 꾸며서 바깥 먼 곳에 가두도록 하였다[1]. 조정에서는 정조가 <예직이> 역모를 꾀했다고 모함하여 예직은 더욱더 나랏일에 우환이 되면 안되겠다는 것을 알았으나 분하고 괴롭기만 하였다.
[1] 1613년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킨 사건을 말하는가?
凡有除輒辭多不就 前後數上章言闕失 其論宮闕營繕曰方今天變於上民怨於下北虜陵虐南夷伺釁加之以土賊蜂起亂亡之禍 迫在朝夕而 殿下深拱九重惟近習之言 是聽宴安之具 是講閭里疾苦 人民愁怨 邊警土賊之所可虞者 殿下安得以聞之方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으며, 전후로 여러 번 대궐에 상소를 올렸으나 실패하였다. 궁궐을 새로 고치는 일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를 “방금 하늘의 변고가 있어서 위로는 백성들이 슬퍼하고 아래로는 북쪽의 오랑캐가 침범하여 <백성을> 학대하고 있고(陵虐) 남쪽의 오랑캐가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伺釁) 설상가상으로 지방의 도적떼들이 봉기하여 나라가 없어지는 화가 아침저녁으로 닥쳐들고 있습니다. 전하는 팔짱을 끼고 구중궁궐에만 있어, 가까이에서 말씀을 드리고자 해도 한가하고 편안하게 그냥 흘려들을 뿐이고, 백성들이 사는 동네(閭里)는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고, 인민들은 근심하고 원망하니 국경에서 지방의 도적떼를 경비하는 것이 우려됩니다. 그러나 전하는 한 쪽 말만 들어 걱정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且大興土木營繕不己昌慶昌德工纔告訖 慶德仁慶巨役繼作內則撤毁閭舍使民失所外則輸運材木徵求百般以是民方 嗷嗷如在水火而
또 크게 토목과 수리 공사를 일으켜 창경궁과 창덕궁을 보수하고, 겨우 이 공사가 끝나자, 또 경덕궁과 인경궁의 대 공사를 계속해서 시행하여 안으로는 민간인의 집들을 철거하고 헐어내어 백성들로 하여금 손실을 입히고, 밖으로는 목재를 운반하는 일에 백성들 소유인 여러 온갖 것들을 징발하니 시끄럽고 떠들썩한 소리가 물이나 불난리가 난 것 같습니다.
又有營慶福及江華羅州行宮之說傳播民間百姓皆疾首相顧曰玆役未罷吾其無休息日矣 無不扶携荷擔怨咨之聲曷喪之謠中外同然則民之相聚爲盜固其勢也
또 경복궁을 건설하고 강화도와 나주의 행궁을 짓는 것을 민간에 전가시켜 백성들이 모두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이에 서로 쳐다보며 말하기를 ‘이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우리들이 쉴 수 있는 날이 없겠다.’ 고 합니다.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애는 이끌어 일을 분담하는 것이 없지는 않았으나 원성과 탄식의 목소리가 초상집의 곡소리와 같고, 나라 안팎이 이와 같았으니 백성들이 서로 모이면 강도로 돌변하는 것이 진실로 그러한 분위기입니다.
言之氣塞念之膽寒臣聞民惟邦本本固邦寧殿下以無用之營繕亂我邦本民如盡版盜賊大熾則殿下雖高官室大園囿將誰與守邦而安心遊宴乎 臣以肺腑之親不忍坐視危亡有此冒瀆殿下若輕臣罔念聞國家之亡可翹足俟也
말할 기운이 막히고 생각할 마음이 얼어붙었으나, 신(예직 자신)이 백성들을 설득하기를 오히려 나라의 근본(邦本)은 본래 나라를 튼튼히 하고 전하를 편안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필요한 건설공사로 우리나라의 백성들의 목재는 다 없어지고 도적들이 크게 일어났으나, 전하는 그러나 큰 집에 넓은 정원을 짓는 것에 얽매이니, 장차 누가 같이 이 나라를 지켜서 안심하고 놀며 즐길 수 있겠습니까. 신은 임금(肺腑)의 친척으로서 앉아서 위험하고 망해가는 것은 보고 참지 못하겠으니, 이것에 전하를 모독함이 있어서 만일 신을 거물 속에 가둘지라도, 국가의 존망에 대해서 생각하시고 들으시면 홀가분해져서 충분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疏入主不省臨海君永昌大君皆次第被誣以死 禮直連以密疏請全恩及廢 母議起又密疏累爭有曰國家不幸骨肉之獄累起臣嘗日夜痛心繼以流涕不意 今者又有賓廳會議之命此何擧措 噫噫母子天倫是豈讒舌之所惎間哉 臣雖武夫亦嘗讀史虞舜之不格 姦鄭莊之復如初垂輝簡策願殿下體虞舜之至孝追鄭莊之深悔以扶倫紀大關焉
상소가 들어갔으나 광해군은 깨닫지 않고 임해군과 영창대군 모두를 즉시 붙잡아 죄없이 죽였다. 예직은 계속해서 밀소를 올려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청하고, 폐모론[1]이 일어나자 또 밀소를 여러 번 올려서 간하기를 “국가의 불행인 골육을 죽이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나니 신은 벌써부터 낮이나 밤이나 마음이 아파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뜻하지 않게 이번에 또 빈청[2] 회의에서 명령이 있었는데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만 두십시오. 아! 모자의 관계는 천륜인데 어찌 남을 헐뜯는 말을 받아들이십니까. 신은 비록 무사이나 일찍이 역사책을 읽어보니 우순[3]도 바로잡지 못할 간신인 정나라 장공을 돌아오게 한 것은 처음으로 드리워져 빛나는 책이었습니다. 원하옵건데 전하께서는 우순의 지극한 효도를 본받으시고 정나라 장공의 깊은 뉘우침을 생각해 보소서. 인륜과 기강을 되살리는데 큰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썼다.
[1] 1617년에 일어난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 인목대비는 선조의 비로서 광해군에게 죽은 영창대군의 모이다.
[2] 賓廳; 조선 시대에, 비변사의 대신이나 당상관이 정기적으로 모여 회의하던 곳
[3] 虞舜; 전설상의 유명한 성군의 한 사람.
禮記(예기)의 三皇(3황) 五帝(5제)는 복희(여호와)-신농-황제헌원 ”을 삼황이라 하고 “-소호금천-전욱-고신-당요제-우순 ”을 5제라 한다.
主覽其疏怒甚裂而投諸火凶黨遂構以護送 主命黜田里後累經赦乃叙或有除心 先詣
광해는 그 상소를 보고 노하여 갈가리 찢어서 불속에 던져버렸다. 흉악한 무리들은 마침내 <예직을> 잡아들일 일을 꾸몄으나 임금은 <예직을> 고향으로 내 쫓아버렸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사면하고 관작도 주었고 혹은 벼슬을 제수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먼저 출두하였다.
西宮肅謝時 西宮幽廢日久闕朝夕供奉禮直造大布袋儲以精米每乘夜掛 西宮墻宮人輒晨出以伺一日掛差晩宮人曰金兵使米帒不至將奈何言未己帒己掛矣 又爲統使 又船運米布及凡百器用密納之主聞而深憾之然亦不敢罪也
서궁[1]을 숙배하고 하례할 때, 서궁에 유폐되고 오랫동안 아침저녁으로 돌보고 받드는 사람이 없어, 예직이 큰 포대를 만들어 쌀을 넣어 매일 밤에 서궁의 담장에 걸어 두니 서궁의 사람이 새벽마다 나와서 찾아갔다. 하루는 <쌀을 갖다 놓는 일이> 실수로 늦어지자 서궁사람이 말하기를 “김병사(예직)의 쌀 포대가 오지 않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나.” 하였더니 이미 포대가 걸려 있었다. 또 통제사로 있을 때 쌀 포대를 배에 싣고 여러 생필품을 비밀리에 갖다 주자 임금이 이 사실을 듣고 매우 서운해 했으나 이것 역시 죄를 묻지 않았다.
[1]西宮;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한 궁(본래 경운궁)
許筠獄起禮直又疏論治獄不 公平生主怒 又黜之先考參判公墓在交河 其追封府院君也 凡國家例賜禮葬之需竟力辭無所受及除畿閫 其隧道碑碣之役力非不贍而亦不肯爲之此亦足爲觀公明識之一端
허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에도 예직이 또 상소를 올려 옥에 가두어 다스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논하였다. 공은 평생 임금(광해)을 노하게 하여 교하에 묘소가 있는 부친인 참판공(희철)의 작위를 낮추게 하였다. 그(희철)는 부원군(해녕부원군)으로 추봉되었었다. 무릇 국가에서는 전례에 따라 예의로서 장례를 치르기를 바랐지만, 힘을 다하여 사양하여 받지 않았고 또 서울지방의 왕가의 선영에 모시지 않았다. 그 묘소의 비갈을 만드는 것도 도움을 받지 않았으며 또한 그렇게 되는 것도 옳다고 여기지 않았으니, 이러한 것들은 역시 공의 분명한 의식의 한 단면을 보기에 충분하다.
至 癸亥仁祖反正禮直曳疾上京席藁請罪 仁祖嘉其樹立 特命仍前職廩給如故 禮直嘗於光海有前後諫疏百餘外人莫有知者 光海怒輒投諸一籠子至是 仁廟偶見之問知爲禮直疏益嘉之所以寵異之己甚而擧義諸臣之不爲害公亦 大妃殿特敎全保之力也
계해(1623)년에 이르러 인조반정 때에 예직은 아픈 몸을 이끌고 상경하여 석고대죄하자 인조가 기뻐하여 그를 일으켜 세우고 특명으로 전직의 품계를 주었다. 예직은 일찍이 광해군 때에 전후로 간하는 말과 상소가 백여 건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광해가 노하여 번번이 모든 상소문을 넣은 통을 던져 버렸으나 이 인조조에 이르러 우연히 이를 보고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예직의 상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더욱 더 기뻐하였고, <상소가> 총명하고 특이한 까닭으로 도리를 세울 수 있었다. 여러 신하들은 공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또한 대비전에서도 특별히 온전히 그 힘을 보존하라고 교시하였다.
是年八月感疾而卒年五十九外史氏曰余嘗觀大唐中興時如李泌張鎬張巡許遠皆一代魁傑人也
이 해(1623) 8월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59세였다. 야사를 쓴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보니 <예직은> 당나라가 중흥할 때의 이필[1], 장호[2], 장순[2], 허원[2]과 같은 사람이고 이들은 모두 일대의 으뜸가는 호걸이었다.” 라고 했다.
[1]李泌; 당나라(618~907)에서 숙종(재위;756~762)때 재상을 지냄
[2]張鎬, 張巡, 許遠; 당나라 안록산의 난(755~763) 때 장군
顧唐史無發揮泌與鎬者司馬溫 公取泌家乘而載之史然後人始知 其神機英略聳動千古鎬則特因杜工部詩語略得其出處之高籌策之良焉
당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필과 장호는 뛰어나지 않았으나, 사마온[1]공이 이필의 가승을 구하여 역사서에 실은 후에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 신기한 기략과 뛰어난 계략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놀랄 정도로 뛰어나고, 빛나게 하는 것은 특히 두보의 공부시어이다. 대략 그 출처를 얻어 보니 아주 이해관계의 계책(籌策)이 훌륭하였다.
[1]사마온(司馬溫); 북송(北宋,960~1127)시대의 명신(名臣)
如巡遠者時多異議而李翰韓愈皆極力發揮故 能大著於世然則其所賴以傳者非可徵之家乘必名公筆也 世無此二者而湮沒不傳者亦何可勝道哉嗟夫 國朝光海時可謂至危而艱矣
장순, 허원과 같은 사람에 대해서 그 때에 많은 이견이 있었던 것은 이한, 한유 모두가 아주 그 능력을 발휘하여 이 세상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뛰어 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남의 덕을 본(所賴) 것은 이를 전한 사람 때문이지 그들의 가승에 반드시 유명한 정승의 글이 있어서 이것이 증거가 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세상에는 이런 2가지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취도 없이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는 자들도 있으니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아! 도대체 우리나라의 조정인 광해군 시절은 지극히 위태롭고 어려웠다고 말할 수 있다.
有若金統制禮直者乃能以椒房之親力扶大義 忠言讜論凜烈如秋霜比諸李白沙諸公所言無不及而或過之是豈非傑然偉男子哉
만일 김 통제사 예직이 능히 왕의 인척임을 내세워 힘을 얻었다면, 큰 뜻과 충성된 말과 직언으로 늠름하고 위엄있고 가을 서릿발과 같이 했겠는가. 이백사[1]등 여러 사람들과 비교하여 공의 말은 못한 것이 없었고 때로는 지나칠 정도였으니 어찌 뛰어나고 위대한 남자가 아니겠는가.
[1]이항복 (李恒福 ; 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자상(子常)이다. 그리고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이다.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 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然至今幽晦莫有爲之闡揚者豈世無其人而然歟余得見其家狀於從舅金公用謙家金公素好古樂善命余立傳以表章之余顧非 其人而幸 其家狀存焉 因是以略加叙次以候 後之立言者未爲不可且有感乎金公樂成人之美於是乎書
그래서 지금 아득하고 희미하여 막막하나마 밝히고 드러내어 널리 알리니(闡揚) 어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는가. 그래서 나는 그의 장인(또는 외삼촌)인 김용겸(金用謙)씨 집에서 그의 가장(家狀)을 보았고, 김공(金用謙)이 본래 옛 것을 좋아하며 친하게 지내어, 나에게 <예직>을 글로서 드러내어 전기(傳記)를 써 달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해 보니 그런 사람은 못되나 다행히 그의 가장이 남아 있어서 이것으로서 간략히 차례대로 가미하여 최종적으로 이런 말을 하니 미숙한 것이 불가하여 유감이다. 김공은 성인의 아름다움을 좋아했다고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