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박래여
온종일 비가 내린다. 태풍 민들레는 일본 쪽으로 지나갈 모양이지만 그 영향일까. 가을비치고는 무척 굵고 거친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쳤다 반복한다. 덕분에 골짝 물소리 우렁차다. 날궂이 하는 몸은 온종일 개운치 않다. 수영장에도 다녀오고 집안에서 운동도 하지만 가벼워지지 않는 몸이다. 아직도 코로나 2차 백신 후유증이 계속되는 것인가. 어떤 백신이든 후유증은 있고 기저질환자일수록 후유증이 오래 간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심장질환자에 퇴행성관절염 환자라 기저질환자로 분류된다.
구월 초입에 코로나 2차 백신을 맞았다. 1차도 2차도 아스트라제네카였다. 열은 안 났지만 며칠 동안 속이 메슥거려 체한 줄 알고 소화제를 먹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여 심장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매주 한의원에 치료를 다니던 중이라 의사께 내 증상을 이야기했다. 의사 입장에서 백신의 부작용이 여러 가지로 나타난단다. 내 정도 경미한 부작용은 누구나 나타나지만 예사롭게 생각하기 쉽단다. 때문에 보건소에 이야기해도 별 반응이 없을 것이라 했다.
백신 2차 접종의 여파는 거의 한달 정도 갔다. 속이 메슥거리고 가슴이 답답하던 증상이 일주일 정도 지나자 사라졌다. 대신 알레르기성 비염이 나를 강타했다. 면역체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밤새도록 재채기에 콧물에 코 막힘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한 통씩 비워냈다. 비염이 조금 나아지자 목이 아팠다. 밥 알갱이 넘기기도 힘들었다. ‘내가 죽을 때가 됐나보다. 밥알이 목에 걸려 안 넘어가.’ 농담을 하며 꺽꺽거렸다. 밥을 국에 말아 겨우 넘겼다. 그 인후 통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뼛속이 아리기 시작했다. 퇴행성관절염이 심한 왼쪽 다리였다. 골반에서부터 뼛속이 아렸다. 잠도 못 자고 무기력증도 찾아왔다. 이불이 축축할 정도로 식은땀은 기본이었다. 갱년기를 앓는 여자처럼 추위와 더위에 허덕거렸다.
내 몸 상태와 증상을 지켜보면서 1차 코로나백신을 병원에 입원 중일 때 맞기를 잘한 것 같았다. 병원에서 백신 접종을 하자 우선 마음부터 편했다. 만약 후유증이 나타나면 병원에서 제 때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덕이었다. 백신 맞고 하루나 이틀 만에 안면와사가 와서 입원했다는 환자를 서너 명 만났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일까. 병원에서는 백신 후유증으로 보지 않았다. 나 역시 1차 백신 후유증은 경미하게 넘어갔다. 2차 백신 후유증도 그러길 바랐다. 농부도 2차 백신을 맞고 한 달 넘게 무기력 증에 허덕였다. 금세 지쳐서 농사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사실 2019년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사망자수가 벌물처럼 불어나는 것을 보고 바짝 긴장했었다. 백신에 대한 불신도 깊었다. 제약회사에서 일부러 바이러스를 퍼뜨려 백신을 만들어 파는 것은 아닐까. 음모론에 공감하기도 했다. 사회전반에 대한 불신의 벽이 높아졌다. 지구 재앙에 대한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럴까. 현실은 경악스러웠다. 세계 여러 나라는 전쟁을 방불케 했다. 죽어나가는 시신을 처리하지 못해 길거리에서 부패하는 모습까지 비쳤다. 백신이 공급되었지만 백신의 부작용으로 사망에 이른 사람들 이야기가 심심찮게 도마에 올랐다.
한국도 백신이 보급되었다. 기저질환자인 나는 백신주사가 두려웠다. 맞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동안 갈등이 심했다. 두 아이도 못 맞게 했지만 우선 농부가 맞고 미세한 후유증으로 지나가는 것에 용기를 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병원에서 맞으면 부작용이 생겨도 치료해주겠지. 믿는 구석도 있었다. 1차코로나 백신 맞고 타이레놀을 이틀에 걸쳐 세 번 먹고는 괜찮았다. 1차가 괜찮았으니 2차도 괜찮겠지. 가볍게 생각했는데 의외로 무기력 증에 시달리고 몸의 면역성이 떨어져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겠지. 죽지 않으면 산다. 고생은 좀 하더라도. 마음은 편했다.
현재 신축 년 추석연휴가 끝나고 다시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하여 흔든 지 2년이 지났다. 지난해는 각 나라마다 사망자수가 속출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 했었다. 2021년 9월 초 현재 전 세계 코로나 사망자 수는 9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는 보도다. 한국의 현재 코로나 사망자도 18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세계 인구가 얼마나 줄어들어야 코로나바이러스가 잡힐까. 감기처럼 공존하게 된다면 어떤 백신이 더 효과적일까.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지만 소시민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뉴스나 언론 보도로 판단할 따름이다. 무성한 가십거리에서 불편한 진실까지 나돌면서 사람과 사람사이는 벌어지고 벽이 생겨버렸다.
처음 코로나가 번질 시기에 나는 이상한 증세에 시달렸다. 감기도 아니고 비염도 아니면서 몸이 아팠다. 내가 사는 곳은 동네에서도 뚝 떨어진 산기슭에 해발 400고지쯤 되는 곳이다. 청정구역이다. 나는 기저질환을 앓고 있어서 몸에 면역성이 떨어지면 당장 이상증상이 나타나곤 한다. 콧물, 재치기는 기본이고 궁둥이와 허리에 포진 등이 나왔다. 뉴스에서는 중국 우한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보도 되고 있을 때였다. 세계 보건기구 WHO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2019년 가을쯤이었던 것 같다.
“이상하지. 벌써 저 바이러스가 중국 황사를 타고 이 곳까지 온 것일까? 내 증상과 비슷하네. 난 사람들 모이는 곳에도 안 가고 겨우 오가는 곳이 시댁이랑 읍내 마트랑 수영장과 목욕탕이 전분데.”
예민하게 굴다가 농부에게 지청구만 들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감기바이러스와 비슷하다고 했다. 비말 전파라고도 하고 공기전파라고도 했다. 비말 전파라면 마스크로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다. 마침 동네 이장을 맡았던 농부는 날마다 노인들을 계몽하려 마을을 돌아다녔다. 마스크를 나누어주는 일, 동네 회관에 모임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 도시에 사는 자식들도 못 오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마스크 구입에 애먹지 않았다. 고사리 작업을 하려면 마스크가 필수였기에 집에 저장해 놨던 마스크만으로도 충분했다. 승용차 안에 덤으로 한 뭉텅이 넣어 다니며 마스크를 못 사서 허덕대는 사람을 만나면 흔쾌히 나누어 줬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의 강타로 사망자가 속출한다는 보도가 연일 방영되면서 사람들 인심도 박해졌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안 심리가 팽배해졌다. 목욕탕도 수영장도 복지회관도 문을 닫았다. 오일장도 문을 닫았다. 음식점도 정해진 시간까지만 영업을 했고, 술집도 노래방도 문을 닫아야 했다.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가 불신이었다. 악수보다 눈인사가 전부고 혹여 비말 전염이라도 당할까봐 멀리 떨어졌다. 외지인이라면 아주 꺼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하는 친밀함을 단절했다. 만나고 수다 떠는 일이 저절로 없어졌다. 대신 손전화가 친구가 되고 소통수단이 되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물가는 폭등하고 한 때 사재기도 설쳤다. 서로 쉬쉬하면서 ‘어디에 누가 자가 격리중이라더라.’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계에 치명타를 입었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긴급재난 지원금이 나왔다. 지원금을 받은 사람은 좋아하지만 못 받는 사람은 불만이 터졌다. 대통령에 대한 불신, 정치계의 한심한 작태를 개탄하면서도 소시민은 살아가게 마련이었다. 국가에 어떤 재난이 닥치면 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망하는 사람도 있다. 마스크 업계와 생필품, 먹을거리 사업자는 떼돈을 벌었고 학원이나 스포츠 센터는 문을 닫아야 했다.
나도 은근히 불만이었다. 돈 나올 구멍 없는 농번기였기 때문이다. ‘농민은 왜 안 도와주는데?’ 했다가 농부에게 꾸지람만 들었다. 농민도 도와준단다. 공익직불금제도가 도입되었단다. 나라가 힘들 때는 근검절약하면서 나라에 손 안 벌리고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나라를 돕는 일이란다. 국가에서 저리로 주는 긴급재난 지원 대출금도 신중하게 받아써야 한단다. 주는 대로 받았다가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고 긴축경제를 무엇보다 강요했다. 소소한 것 중에 내가 이행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씀씀이를 줄이기 시작했다. 농부는 영세농민에게 주는 긴급재난 지원금을 포기했다. 우리 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란다. ‘그래, 선한 뒤끝은 있어도 악한 뒤끝은 없다더라. 삼시세끼 안 굶고 살면 되는 거지.’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보통사람이고 이 나라를 지탱하는 대다수 국민이 아닐까.
2021. 10월 초입 현재 하루 코로나 확진자 수가 25000명을 넘나들고 있다. 사람들 역시 불안공포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감기나 독감처럼 우리 삶과 함께 익숙해지기 시작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닌가 싶다. 마스크 쓰는 것도 일상화 되었다. 갑갑하고 힘들다 느꼈던 것도 이젠 좋은 점이 더 많은 것으로 부각된다. 구취가 심한 사람은 입 냄새 때문에 걱정할 필요 없고, 보기 싫은 사람은 마스크 넓게 쓰고 모르는 척 외면해도 된다. ‘어머, 몰랐네. 마스크 쓰면 잘 알아보기 힘들잖아. 더구나 난 눈이 나빠서.’ 그런 핑계를 댄다. 만날 일도 없다. 밖으로 나돌던 사람이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많아지는 것도 좋은 현상이다.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글로 다 쓸 수는 없지만 노인들은 외로움에 더 많이 노출 되었고, 혼자 보내는 시간에 익숙해진 만큼 가족의 소중함은 더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만연되었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서서히 사라지는 추세다. 마스크 안 쓰고 일상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도 는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한다. 감기나 독감처럼 앓고 지나가기도 한다. 코로나를 감기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는다. 나도 감기처럼 받아들이는 것에 찬성이다. 백신 안 맞은 사람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광고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 베풀고 권장할 수는 있지만 공산주의 사회처럼 강요를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누구도 그 자유를 빼앗을 권리는 없다. 죽고 사는 것 역시 각자 몫이라고 생각한다.
2021. 11. 30. <2021년 코로나 19 예술로의 기록 선정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