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독일,영국,프랑스 등에서 유행한 문예사조의 하나.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생겨난 것으로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고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풍만한 감정표출을 특징으로 한다.
2.다다이즘
1차 세계대전 중 나타난 전위적 예술운동에 대해 시인 트리스탄 짜라가 붙인 이름.전쟁의 잔인성을 증오하고 합리적 기술문명을 부정하여 일체의 제약을 거부하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과격한 실험주의적 경향뒤에 초현실주의에 흡수되었다.
3.낭만주의(浪慢主義)의 개념
(1) '낭만'의 개념
낭만주의의 원어인 'romanticism'은 'romantic'이란 말에서 온 말이며, 그것은 은'romance'에서 유래한다. 즉, 기사도, 모험 및 애정의 이야기들과 관계되어 있었으며 허황한 감정, 비개연성, 과장 및 비현실성과 같은 것, 곧 건전하고 합리적인 인생관과 정반대되는 요소들로 특징지어져 있었다.
로망스는 기이하고 가공적이며 경이적인 것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로망스는 등장 인물(신비의 보물을 찾아 떠나는 기사들, 고독한 영웅들), 풍경(폐허,절벽,폭포), 감정(우수, 정열, 자연에 대한 심취)등 모든 면에서 낭만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최초로 이 말을 문학사에서 쓴 이폴리트 텐은 낭만주의 작가들이 고전적인 것과 대조되는 당대성을 지닌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 용어를 사용하였다.
(2) 낭만주의의 정의
넓은 의미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체에 걸쳐 서구에 나타난 문예 사조이며, 좁은 의미로는 18세기 말 부터 19세기 초 사이에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서구의 주관적이고 개성이며 공상적, 상징적, 신비적, 초자연적, 혁명적인 특성을 지닌 문학 예술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대체로 후자에 중심을 두고 개념을 사용하지만 추상적인 초시대적 사조로서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의 폭퐁 노도 운동에서 시발점을 찾으며 프랑스 혁명과의 상관 관계 속에서 혁명적 낭만주의와 병적 낭만주의를 구분하기도 한다. 전자는 사회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서 나온 문학이며 후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침체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으로 도피하려는 지향을 보이는 등 퇴폐적인 성향이 두드러진다.
4. 낭만주의의 시대적 조건
(1) 사회의 상태
낭만주의가 발생한 조건은 산업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에서 전형적인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산업 혁명은 발달한 과학 기술을 생산에 이용하여 대량 생산을 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자본주의 사회는 생활의 편의를 도모라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전통적인 삶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낭만주의는 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태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한편 프랑스 혁명은 사회체제를 민주적인 제도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사회의 진보를 촉진하는 계기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진전 과정에서 여러 부정적인 측면이 노출되기도 하고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환멸이 낭만주의를 촉진하기도 하였다. 즉 합리화되어 가는 사회, 도시적인 생활, 부르주아적인 생태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낭만주의의 배경을 형성하였다.
(2) 사상적 배경
낭만주의의 사상적 배경은 고전주의와 함께 나타난 계몽주의에서 찾는 경우도 있지만, 통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경구로 유명한 루소의 사상에서 기원을 찾는다. 루소는 모든 불행과 죄악의 원인이 문명에 있고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하고 완전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전시대의 철학자들이 전능한 이성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대비되는 양상으로서 루소는 사회의 진보를 믿지 않았으며, 사적 소유권에 의해서 원시적인 자유와 평등이 깨졌다고 보고 자연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즉 사회계약에 의해 달성되는, 인간의 문화적 성과와 도덕적 자유에 의한 평등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루소는 인간의 기본 성정(性情)이 이성보다 감성에 있음을 주장하여 낭만주의의 인간관을 선취하였다.
5. 낭만주의의 문학 이론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규범성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 났다. 이에 따라 어떤 이론이 먼저 제시되고 낭만주의 문학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시인, 작가, 비평가들의 활동에서 낭만주의에 고유하다고 할 수 있는 공통적인 문학관을 살펴볼 수는 있다.
(1) 감정의 표현
고전주의가 감정의 절제를 주장한데 비해서 남만주의는 감정 표현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루소는 <참회록>에서 "한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의 진실을 꾸밈없이 보여 주고자 한다."며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고, 영국의 시인 위즈워스는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 발생적 유출(流出)이다."고 말했다. 즉, 낭만주의 시인, 작가들은 상상력을 통해 자아의 감정, 인상(印象), 대상물을 보다 큰 전체로 통일시켜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주고자 했던 것이다.
(2) 천재론
낭만주의자들에게 문학은 더 이상 현실에 있는 것의 재현이 아니었다. 감정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상상력에 의해 '생명력(生命力) 있고, 창조적력이 있는 힘으로 심미적 균형과 통일을 나타내며 주관과 객관, 현실과 이상, 감각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결합 시키는'는 것이었다. 영국의 시인 블레이크가 말했듯이 상상력은 "궁극적 실재를 창조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이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동이 가장 뛰어난 존재가 독창성을 지닌 천재들이고 고전주의의 모방 원칙과 대조적인 것이다.
모방은 기왕의 소재를 가지고 제작 시술이나 노력을 통해 만들어 내는 데 비해 천재는 '반항적이고 초인간적이며 신적인 거인'으로, 신적인 영감, 순간적 인상과 직관(直觀)에 의해 일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실재의 깊이에 도달하는 존재였다. 즉, 고전주의에서 천재가 좀더 세련된 교양, 더 높은 지성에 의해 특정지어지는 인물이었다면, 낭만주의에서는 일상의 논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물의 내적연관을 찾고 여러 가지 관련의 연합을 통해 환상과 꿈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이상화된 인격의 소유자였다.
(3) 상징과 암시
낭만주의는 감정 표현론과 천재론을 주장함으로써 표현 수법에 있어서 상징과 암시를 중시하게 된다. 특히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장르인 서정시에서의 상징과 암시는 창조적 변용력(變容力)의 중심이었다. 독일의 슐레겔은 낭만주의가 표현하는 초월적인 것은 '오직 이미지(Image)와 기호(記號)를 통해 상징적으로만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4) 민족 문화의 강조
낭만주의는 시어로는 일상 생화에 쓰이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민족의 전설적인 과거를 되살려 주제를 다양화해야 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이는 현실의 정치를 비롯한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6. 낭만주의의 전개
낭만주의는 맨 먼저 독일에서 발생하여 영국으로 건너가고 이어서 프랑스에 전해진 문예 사조였다.
(1) 독일(獨逸)
낭만주의의 징조는 18세기 전반에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집단적 현상으로 구체화한 것은 독일의 폭풍 노도 운동에서이다. 고전주의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표현한 폭풍 노도 운동은 문학이 제약이나 구속을 넘어서 인간의 마음에 깃든 정서, 감정이나 정열을 표현해야 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실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운동의 과정에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작품이 산출되었다.
(2) 영국(英國)
독일의 낭만주의가 관념적인 주장이 앞선 것이었음에 반해서 영국의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대보다도 당시의 사회적 변동에서 더 많은 자극을 받았다. 산업 혁명 이후 부르주아적 질서가 확립되어 가던 현실이었던 만큼 문학인들은 동시대 사회에 대해 포괄적인 거부감을 나타냈으며 물질적인 소유에 대한 경멸감을 표시하고, 합리적인 곳에 대해 자연적인 것을 선호했으며 인간 심정의 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한편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퇴색해 가던 1798년 무렵부터는 현실에 대한 환멸이 시인들에게 더 강한 자극을 주었으며 상상력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블레이크, 워즈워스, 키츠, 바이런, 셀리, 콜리지 등이 있었다.
(3) 프랑스
1750년경 독일과 영국에서 시발된 낭만주의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 확산되는 데는 1세기가 필요했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초반 권력에서 밀려난 인사들을 중심으로 귀족적 낭만주의가 발생하여 돈이 유일한 관심사인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환멸을 표현하였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스탈 부인, 샤토브리앙, 비뉘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 중반에는 정치적, 사회적 난국이 펼쳐지는 가운데 인간 조건에 대한 반항과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낭만주의를 이끌었다. 고전주의적 규칙에서 해방된 문학, 영감의 자유, 언어와 형태의 자유, 진보의 문학을 주장했던 스탕달의 '라신과 셰익스피어'가 출간된 이후 낭만주의는 본격화된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뮈세, 네르발, 고티에, 위고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고티에는 예술 지상주의를 주장하여 '무용한 것만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는 신조를 내세운다. 사실주의 작가로 알려진 발자크, 스탕달 등의 소설도 혐오스런 현실 세계에 맞서는 인물을 그린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의 경향을 드러내었다.
7.다다이즘
제1차 세계대전(1914~18) 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 다다(dada)라고도 한다. 조형예술(造形藝術)뿐만 아니라 넓게 문학·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語)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木馬)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다다이즘은 처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H.발이 카바레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인 T.차라, R.휠젠베크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반도덕·비심미적(非審美的)인 것을 찬미하였다. 차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鐵]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特急機關車)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有機體)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objet)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중립(中立)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外的)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20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R.하우스만, G.그로스, W.메링 등이 주된 예술가였는데, 여류인 H.헤히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므로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아상블뢰즈(assambleuse:여러 가지 오브제 모음)나 헤히의 포토몽타주(2장 이상의 사진을 붙여 중복인화·중복노출 등으로 새로운 시각효과를 노림. 고안자는 J.하트필드라고도 한다) 이외에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反戰) 시리즈인 《이 사람을 보라》 등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 상층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는 무산계급의 옹호를 그 특색으로 한, 예리한 시각의 소묘집(素描集)이다. 베를린에서의 다다이즘은 대전이 끝난 18년부터 33년까지 계속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 인물은 K.슈비터스였다. 슈비터스도 시와 조형(造形)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나타내어 23~32년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되는 작품은 《메르츠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 만든 기둥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주(collage)의 선구적 예(例)이기도 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콜라주는 다다이즘의 유력한 무기인데, 일찍이 입체주의(큐비즘)의 P.코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 수 있다. 다만 다다이즘의 경우에는 응용하는 소재를 신문지·우표 등에서 우모(羽毛)·철사·성냥개비·화폐 등으로 더욱 넓히고 있으므로 작품 효과는 입체주의 시대의 것과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슈비터스는 콜라주의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쾰른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M.에른스트와 J.T.바르겔트로 대표된다. 바르겔트는 잡지 《선풍기(扇風機)》의 창간자이기도 하며, 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제작을 시도한 일도 있는 화가로서 아상블뢰즈를 잘하였다. 에른스트의 기법(技法)은 콜라주이며, 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주전(展)은 이제까지의 회화개념(繪畵槪念)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그는 24년에 초현실주의(surr럂lisme) 운동에 참여하여 독특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타주(frottage)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그것을 보면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과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파리에 있어서의 다다이즘 운동은 19년에 이루어졌다. 자살한 23세의 시인 J.바셰 외에 ‘검은 유모어’의 A.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으로서 빼놓을 수 없으며, P.엘뤼아르, B.페레, L.아라공 등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뉴욕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展)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M.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裸體)》는 사진가 A.스티그리츠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요소로서의 광채(光彩)라고까지 절찬한 브르통을 포함해서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작품은 순전히 메커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고속사진(高速寫眞)의 한 장면과 같이 역동적이며, 미래파(未來派)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후 뒤샹은 기성품(旣成品)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M.레이의 《선물》(1921)이냐 뒤샹의 《샘[泉]》(17)이냐라고 할 정도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F.피카비아, H.알프, 실험영화로 유명한 H.리히터도 빼놓을 수는 없다. 다다이즘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었다. 부활의 배경은 전후 고조되고 있던 기계문명·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였다.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로는 R.리히텐슈타인, J.팅게리, C.올덴버그, H.로젠버그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