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디모디 웨어는 1934년 소머셋트의 바트에서 태어나,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와 신학읽기 뿐만 아니라, 고전학에서 수석을 차지한 옥스포드 마그달렌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1958년 동방정교회에 입교한 후, 그는 특별히 성 요한 파트모스 수도원에 체류하면서 그리스를 광범위하게 여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토스 산과 예루살렘과 같은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에서도 생활하였다. 1966년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칼리스토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고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옥스포드로 돌아와 1966년이래로 옥스포드대학 동방정교회 연구소의 Spalding 강사로 있어 왔다. 그는 또한 옥스포드내의 동방정교회 교구의 목회책임을 지고 있다. 1970년 그는 옥스포드 펨브로크대학의 연구원이 되었다. 1982년 그는 디오클레이아(Diokleia)의 명예 감독에 서임 되었고,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의 관할하에 있는 디아테이라(Thyateira)와 대영제국의 동방정교회 대주교관구의 보조감독에 임명되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은 Eustratios Argenti:터키 지배하의 그리스 교회사 연구(A study of the Greek Church under Turkish Rule(1964)) 와 동방정교회의 길(The Orthodox Way(1979))등이 있다. 그는 또한 두개의 동방정교회 예배 모범서인 Festal Menaion(1969)과 The Lenten Triodion(1978)의 공동번역자이며, 또한 필로칼리아(The philokalia;진보: 세권 1979,1981 그리고 1984)의 공동번역자이다.
내용 목차
제 1부 : 역사
1. 시 작
2. 비잔티움 Ⅰ : 일곱공의회의 교회
3. 비잔티움 Ⅱ : 대분열
4. 슬라브족의 회심
5. 이슬람 지배하의 교회
6. 모스코바와 성 피터스버그
7. 20세기 Ⅰ : 그리스인과 아랍인
8. 20세기 Ⅱ : 동방정교회와 전투적 무신론자들
9. 20세기 Ⅲ : 디아스포라와 선교
제 2부 : 신앙과 예배
10. 거룩한 전통 : 동방정교회의 신앙의 원천
11. 하나님과 인간
12. 하나님의 교회
13. 동방정교회의 예배, Ⅰ : 지상의 천국
14. 동방정교회의 예배, Ⅱ : 성례전들
15. 동방정교회의 예배, Ⅲ : 축일, 금식일, 그리고 개인적 기도
16. 동방정교회와 기독교인의 재연합
더읽기
서 론
무명한것 같으나 유명한.(고린도후서 6장 9절)
러시아 신학자 알렉시스 콤미아코프는 1846년 한 영국인 친구에게 보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든 개신교도들은 숨어 있는 교황주의자이다.' ' .... 정확한 대수학언어를 사용하면, 모든 서구인들은 단지 하나의 기지수인 a만을 알고 있다.
whether it be preceded by the positive sign+, as with the Romanists, or with the negative-, as with the Protestants, the a remains the same. Now a passage to Orthodoxy seems indeed like an apostasy from the past, from its science, creed, and life.(로마 가톨릭주의자들에 의해서 처럼 긍정적인 표시+(플러스)에 의해 선행되든지, 개신교들에 의해서 처럼 부정적인 표시-(마이너스)에 선행되든지, 이 a는 동일하게 존속한다. 이제 동방정교회에 대한 논쟁은 진실로 과거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과학, 신조 그리고 삶으로부터 하나의 배교처럼 보인다.)
동방정교회는 새롭고 잘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 콤미아코프가 기지수 a를 이야기 했을때, 그는 자유교회(Free Church:개신교(역자주)), 성공회 혹은 로마 가톨릭이든지 서방기독교인들은 과거에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였다. 그들이 항상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서로 똑같이 동일한 사건들, 예를 들면 중세시대의 교황 중심주의와 스콜라주의, 인문주의,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등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의 회원들-그리스인, 러시아인 그리고 그 나머지-뒤에는 매우 상이한 배경들이 놓여져있다. 그들은 서방적 의미의 중세를 알지 못하며,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단지 16, 17세기 서유럽을 변형시킨 문화적 종교적 격변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서방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은 비록 그 대답에 있어서는 불일치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동일한 문제들을 질문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에서는 그 대답들이 다를 뿐만아니라, 그 문제들 자체도 서방처럼 동일하지 않다. 동방정교회인들은 역사를 다른 전망에서 본다. 예를들어 서방의 종교적 논쟁에 대한 동방정교회인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자. 서방에서는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주의와 개신교주의를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인에게 그들은 동일한 동전의 양면으로 나타난다. 콤미아코프는 교황을 '첫번째 개신교도', '독일 합리주의의 아버지'로 부른다. 그리고 그는 동일한 동전으로 인하여 의심할 바 없이 기독교 학자를 괴짜의 로마 카톨릭교인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1847년 옥스포드를 방문하여 한 고교회 성공회원으로부터 '어떻게 우리가 개신교주의의 유해한 영향들을 저지할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당신의 로마 가톨릭주의를 떨어버리시요' 러시아 신학자의 눈에 이 둘은 손을 맞잡고 가고 있었다. 개신교주의는 로마 가톨릭이 낳은 달걀로부터 부화하였기 때문에, 양자는 똑같이 동일한 전제들을 공유하였다.
'새롭고 잘알려지지 않은 세계' 콤미아코프가 이런 방식으로 동방을 말한 것은 옳았다. 동방은 교황없는 일종의 로마 가톨릭주의가 아니라, 서방에 있는 종교적 체계와 상당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가까이 서 보는 사람들은 그 안에 다양하지만 이상하게 친밀한 많은 것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항상 믿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분적으로 정당하다. 이러한 말은 동방정교회와 그들의 가르침에 관하여 보다 충분히 배우자 마자 나타난 여러사람들의 반응이다. 900년 이상 동방의 그리스와 서방의 라틴은 각자 자신의 방식을 따라, 서로 떨어져서 착실하게 성장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세계(Christendom)의 처음 세기들 속에서 양측은 공통의 배경을 발견할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와 바질은 동방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서방에 속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에서 산 동방정교회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 땅의 민족적 성자들-알반(Alban)과 패트릭(Patrick), 쿠트베르트(Cuthbert)와 베드(Bede), 파리의 제네비에브(Genevieve)와 캔터베리의 어거스틴(Augustine)-을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교회의 구성원들로서 볼수 있다. 모든 유럽은 오늘날 그리스와 러시아가 그런것 처럼 옛날에는 많은 부분이 동방이었다.
콤미아코프가 1846년 그의 편지를 썼을때, 사실상 양측에는 개인적 접촉으로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싼 가격에 구입할수 있는 원고들을 찾아서 1830년대에 레반트를 걸쳐 여행하고 있던 로버트 쿠르존(R. Curzon)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캔터베리의 대주교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황하였다. 상황들은 확실히 그때 이후로 변화하였다. 여행은 비교가 안되게 쉬어졌고, 물리적 장애들은 제거되었다. 그리고 여행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서방세계의 시민은 직접 동방정교회를 관찰하기 위하여 더이상 자신의 나라를 떠날 필요가 없다. 특선품과 경제적 필요로 서방쪽으로 여행하는 그리스인들과 박해에 의해 서방쪽으로 내몰린 슬라브인들은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교회를 가져왔고, 전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에 걸쳐 주교관구와 교구망, 신학대학과 수도원들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가시적 일치를 위한 강력하고도 전례없는 열망이 현 세대의 수많은 여러 기독교단체들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방정교회내에서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서방 기독교인들이 재연합을 위한 그들의 관심속에서 동방의 적절성을 의식하게 되고, 그것에 관해 더 배우기를 갈망하는 순간에, 그리스-러시아 디아스포라들은 전세계에 흩어졌다. 연합을 위한 논의에서 동방정교회의 기여는 종종 예기치 않게 밝게 빛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정확히 동방은 서방과는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신선한 사고의 지평을 열수가 있고, 오래된 어려움들에 대하여 오랫동안 잊혀진 해결책들을 제안할수 있다.
기독교세계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 캔터베리, 제네바 그리고 로마에 제한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을 서방은 결코 결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과거에 이러한 인물들은 광야에서 우는 소리였다. 서방은 이제 더이상 그렇지 않다. 9세기 이상 지속된 소외의 결과들은 빠르게 풀려질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작은 이루어졌다.
'동방정교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독교세계의 현재의 분단을 야기한 분열들은 대략 500년 간격으로 세가지 주된 단계들 속에서 일어났다. 분열에 있어서 첫번째 단계는 오늘날 오리엔트 동방정교회들(the Oriental Orthodox Churches)로 알려진 교회들이 기독교의 주된 몸으로부터 나누어졌을때인 5, 6세기에 일어났다. 이 교회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즉 동방교회(the Church of the East:주로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에 있고, 종종 '앗시리안', '네스토리안', '칼디안(Chaldean)', '동방 시리안' 교회로 불린다)와 5 개의 비칼세도니안 교회들(자주 '단성론자'라 불린다: 안디옥의 시리아 교회(소위 야곱교회), 인도의 시리아 교회, 이집트의 콥틱교회, 아르메니아와 에디오피아교회) 오늘날 동방교회는(The Church of the East) 비록 한때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550,000만명 정도이다. 비칼세도니안 교인들은 모두 약 27만정도이다. 이 두 그룹들은 종종 함께 '작고(lesser) 분리된(seperated)' 동방교회(Eastern Churches)라 불려진다. 그러나 그들이 가치있는 판단을 행하였음을 나타내는 이러한 명칭들은 가장 잘 회피된다.
복잡하게 동방 기독교인들을 다루려고 하지 않는 이 책은 비록 때때로 그들을 언급해야 할지라도 직접적으로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주제는 '오리엔트(Oriental)'가 아니라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라 불리는 기독교인, 다시말하면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칼 총주교와 연합속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될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동방정교회'를 언급할때, 우리가 지니는 관점은 '오리엔트'가 아니라 '동방 정교회'이다. 다행히 우리 시대에 이 두 기독교 가족들- 오리엔트와 동방정교회-간의 충만한 화해를 위한 큰 희망들이 있다.
이 첫번째 분열의 결과로서 동방정교회는 동쪽으로는 주로 그리스어를 말하는 세계로 제한되었다. 그후 두번째 분열이 1054년에 형식상으로 일어났다. 이제 기독교인들의 주된 몸은 두단체, 즉 서유럽에서는 로마 교황아래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비잔틴 제국에서는 동방 정교회로 나누어졌다. 동방은 이제 서쪽까지도 제한되었다. 16세기에 로마와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일어난 세번째 분열은 여기에서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은 아니다.
문화적이고 교회적인 분열이 어떻게 동시에 일어났는가를 지적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기독교는 선교에 있어서는 보편적(혹은 우주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세 문화들-셈, 그리스, 라틴-과 연합하였다. 첫번째 분열의 결과 시리아의 셈족적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학자들과 저술가들의 번영하는 학교와 더불어 기독교세계의 나머지로부터 벗어났다. 그후 2차 분열이 일어났다. 이 분열은 기독교세계에 있어서 그리스와 라틴전통 사이를 이간시켰다. 그래서 동방정교회내에서 기본적인 문화적 영향은 그리스의 문화적 영향이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와 라틴교부들이 또한 동방정교회의 풍요함안에 하나의 위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방정교회는 배타적인 그리스 교회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해서는 안된다.
동방정교회는 먼저 동쪽으로 그다음에 서쪽으로 제한되는 동안, 북쪽으로 확장하였다. 863년 슬라브족의 사도들인 성 시릴과 성 메토디우스는 선교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의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여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의 개종으로 인도하였다. 비잔틴의 힘이 쇠약해지자, 북쪽의 이 새로운 교회들은 중요성이 증가하였고, 1453년 터키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모스코바의 지위는 동방세계의 수호자인 비잔틴의 위치를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최근 2세기동안 이러한 상황에 부분적 역전이 있어 왔다. 콘스탄티노플 자체는 아직도 터키인들의 손에 옛 영화의 창백한 그림자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의 동방기독교인들은 1821년 그들의 자유를 다시 얻기 시작했다. 한편 러시아 교회는 20세기에 호전적인 반 기독교 정부의 통치아래 70년동안 고통을 당하였다.
이것이 동방정교회의 외적 발전을 결정 지은 주된 단계들이다. 지리학적으로 동방정교회의 기본적 지역분포는 동부유럽, 러시아 그리고 동부지중해 연안을 따라 놓여있다. 동방정교회는 현재 다음과 같은 자치 혹은 독립적인(autocephalous)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1) 4개의 고대 총대주교관구
콘스탄티노플 (6백만명)
알렉산드리아 (350,000)
안디옥 (750,000)
예루살렘 (60,000)
크기에 있어서 상당히 줄었을지라도 역사적 이유들 때문에 이 4개의 교회들은 동방정교회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명예에 있어서 첫번째 위치에 있다. 이 교회들의 수장들은 총대주교(Patriarch)명칭을 지닌다.
(2) 9개의 다른 독립적인 교회들
러시아 (5000-8500만명)
세르비아 (800만명)
루마니아 (1700만명)
불가리아 (800만명)
게오르기아 (500만명)
키프러스 (450,000)
그리스 (900만명)
폴란드 (750.000)
알바니아 (210,000, 1944년)
이 9개 교회들중 2개-폴란드와 알바니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독교인의 인구가 완전히 혹은 현저하게 동방정교회인 나라들이다. 그리스와 키프러스의 교회들은 그리스인들이고, 나머지중 네개-러시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폴란드-는 슬라브인들이다. 러시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교회들의 수장들은 총대주교(Pariarch)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게오르기아 교회의 수장은 Catholicos-총대주교로 불려지고, 다른교회들의 수장들은 대주교(Archbishop) 또는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라 불려진다.
(3) 여기에 더하여 대부분의 측면에서 자치적이나 완전한 독립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하는 몇개의 교회들이 있다. 이들은 '자치'(autonomous)이나 '독립'(autocephalous)이라 불려지지는 않는다.
체코슬로바키아(100,000)
시나이 (900)
핀란드 (52,000)
일본 (25,000)
중국 (? 10,000-20,000)
(4) 여기에 더하여 서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 커다란 동방정교회 디아스포라들이 있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이 동방정교회인들의 대부분은 법적으로 총대주교관구(Patriarchates)나 독립(autocephalous)교회들 가운데 하나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의 지역들내에서 자치를 향한 운동이 있다. 특별히 아메리카(1,000,000)에서 독립적인 동방정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발걸음이 취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공식적으로 다른 대다수 동방정교회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는 자치적인 교회들의 하나의 모임(family)이다. 동방정교회는 중앙집권화된 조직이나 전체 몸위에 한사람의 고위성직자가 휘두르는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안에서 일치와 성례전들 속에서 교제라는 이중적 결합에 의해 함께 모인다. 각각의 총대주교관구와 독립교회들은 독립적이지만, 모든 교리의 문제들에 있어서 나머지 교회들과 충분한 동의 가운데 있으며, 그들 모두간에는 원칙적으로 충만한 성례전적 교제 가운데 있다.( 사실 교제에 있어서 특별한 불화는 있으나 -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교회 가운데- 이러한 상황은 예외적이며, 사람들은 특성상 일시적이기를 희망한다.) 동방정교회 안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내의 교황과 동등한 위치를 지닌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에큐메니칼적(보편적) 총대주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동방과 서방 사이의 분열 때문에, 그는 모든 동방정교회 공동체들 가운데 특별한 명예를 지닌 위치를 지녀왔다. 그러나 그는 다른 교회들의 내적인 사건들을 간섭할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그의 위치는 세계 도처에 있는 성공회 연합내에 캔터베리 대주교와 유사하다.
독립된 지역교회들의 지방분권화된 체계는 고도로 유연한 이점을 지니고 있으며, 쉽게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였다. 지역교회들은 만들어질수도 있고, 억압받을수도 있다. 그리고 후에 교회의 전체적인 삶에 약간의 저해요소를 동반하여 다시 회복될수 있다. 과거 동방국가들내에 있는 교회와 국가는 일반적으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이지역교회들은 또한 민족교회들 이었다. 그러나 특정한 독립국가가 자주 자신의 독립적인 교회를 소유하고 있지만, 교회의 분열은 필수적으로 국가의 경계선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4개의 고대 총대주교관구지역은 정치적으로 몇개의 상이한 국가들안에 나누어져 있다. 동방정교회는 지역교회들의 연합체이지, 모든 경우에 민족적 교회들의 연합체는 아니다. 동방정교회는 자신의 근거로서 국가교회의 정치적 원리를 지니지는 않는다.
이미 본것처럼, 다양한 교회들 가운데에는 크기에 있어서 러시아와 시나이 교회 사이에 있는것과 같은 거대한 편차가 있다. 다른 교회들 또한 나이에 있어서 다르다. 몇몇은 사도시대까지 올라가고, 한편 일부는 1세대에 불과한 것들도 있다. 예를들어, 알바니아 교회는 1937년에서야 독립교회가 되었다. 동방정교회는 보편적이라고 주장한다.-색다르고 오리엔탈적인 것이 아니고, 단일한 기독교이다. 인간의 실패와 역사의 사건들 때문에, 동방정교회는 대부분 과거에 특정한 지리적 구역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인 자신들에게 그들의 교회는 지역적 몸들의 집단(a group of local bodies) 이상의 것이 되었다. '동방정교회(Orthodoxy)'라는 단어는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영광'(혹은 올바른 예배)라는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동방정교회는 우선 놀라운 주장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교회로서 간주하며 올바른 예배로 그를 영화롭게 하는 즉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간주한다. 이러한 주장이 어떻게 이해되며 동방은 그들의 교회에 속하지 않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이책의 목적이다.
제 1 부
역 사
제 1장
시 작
마을의 땅아래 깊숙히 예배당이 있고, 그 입구는 조심스럽게 위장되어 있었다. 이곳은 사제가 은밀히 그 마을을 방문 하였을 때, 성만찬(Liturgy)과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다. 수상한자가 나타나면 이를 알려주기 위해 밖에 남아 있는 파수군을 제외하고, 마을 사람들은 일단 자신들이 경찰의 감시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으면, 전체주민들이 이 예배당에 모였다. 다른때에는 예배가 이동하면서 행해졌다.
부활절 예배는 공식적 국가 기관의 한 방에서 드려졌다. 출입은 내가 나와 나의 작은 딸을 위하여 얻은 특별한 통로로만 가능했다. 약 30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였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늙은 사제는 내가 결코 잊을수 없는 예배를 집례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를 부드럽게 찬송하였지만, 기쁨으로 충만하였다....내가 이 카타쿰 교회의 예배에서 느꼈던 기쁨은 오늘날 까지도 나에게 살아갈 힘을 제공해 주고 있다.
위의 인용문들은 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러시아에서의 교회의 삶에 관한 두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만약 약간의 변화들이 있어났다면, 그 변화들은 네로나 디오클레티안의 통치 아래에서의 기독교인의 예배에 관한 묘사들로 쉽게 생각될 수 있다. 그 변화들은 19세기에 기독교의 역사가 충만한 집단을 통해 어떻게 전달 되었는가 하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조부모들 보다 훨씬 더 초대교회와 가까이에 서 있다. 기독교는 유력한 비기독교사회 속에서 실존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종교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한번 이러한 경향이 도래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 초기에 국가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되었다. 그리고 지금 여러나라에서 교회와 국가의 전통적인 동맹은 종말을 향해가고 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a religio illicta이다, 즉 정부에 의해 금지되고 박해받는 종교이다. 오늘날 박해는 더 이상 과거의 사실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뒤따른 3백년 보다 1918년과 1948년 사이의 30년 동안 더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특별히 동방정교회의 회원들은 그들 가운데 다수가 아주 최근까지 반-기독교 공산주의 정부의 통치 아래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들을 매우 잘알고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일로 부터 콘스탄틴의 회심에 이르는 기독교 역사의 처음 기간은 오늘날의 동방정교회인들과 특별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임하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2-4) 그래서 기독교회의 역사는 오순절 기간중 예루살렘에서 사도들 위에 성령이 강림함으로, 첫번째 성령강림주일을 시작하였다. 같은날 성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삼천명의 남녀가 세례를 받았고, 예루살렘에서 처음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오래지 않아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들은 성 스테판의 죽음후에 일어난 박해로 흩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제자를 삼으라.'(마 28:19)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은 어디를 가나, 먼저 유대인에게, 또한 곧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다. 이러한 사도적 여행에 관한 몇개의 이야기가 성 누가에 의해 사도행전에 기록되었다. 다른 이야기들은 교회의 전통속에 보존되었다. 놀라웁게 짧은 시간안에 작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로마제국의 모든 주요 지역들과 심지어 로마의 국경선을 넘어서 있는 장소들에서도 자라났다.
이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여행한 제국은 특별히 동부에 있는 제국 도시들이었다. 이것은 원시 교회의 행정적 구조를 결정하였다. 기본적 단위는 각 도시에 있는 공동체였으며, 그들 자신의 감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감독을 돕기 위해서 장로들, 사제들 그리고 집사들이 있었다. 도시주변 사람들은 도시의 교회에 의존하였다. 감독, 사제 그리고 집사의 삼중적 교역직을 지닌 이러한 패턴은 이미 1세기 말경 일부의 장소들에서 확립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안디옥의 감독 성, 이그나티우스가 A.D.107년경 순교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고 있을 때에 기록한 7개의 편지에서 볼수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특별히 감독과 성만찬(Eucharist)라는 두가지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교회를 계층질서적이고 성례전적으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개교회 내에서 감독은 하나님의 위치에서 주재한다.' '감독없이는 어느누구도 교회와 관계된 그 어떤 일도 할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보편 교회가 존재하듯이, 감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불멸의 약인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감독의 기본적이고 구별되는 직무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를 각지역의 지체가 크고 좀더 포괄적인 전체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하나의 세계적인 조직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보지 않았다. 그에게 지역공동체는 교회이다. 그는 교회를 성만찬 속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받고 주의 만찬을 기념할때, 오로지 그것의 참된 본성을 실현하는 성만찬적 사회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성만찬은 감독을 중심으로 모인 각각의 특수한 공동체안에서 지역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지역적 성만찬에 단지 그의 한부분이 아니라 전체적 그리스도가 현존한다. 그러므로 주일마다 성만찬을 거행할때 각 지역공동체는 완전한 상태의 교회이다.
이그나티우스의 가르침은 동방전통에서 영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동방정교회는 아직도 교회를 성만찬적 사회로 생각한다. 교회의 외적인 조직은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내적이고 성례전적인 삶보다는 이차적이다. 그리고 동방정교회는 아직도 교회의 구조에서 지역 공동체의 기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감독이 그의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교회의 중앙에서 예배의 초기에 서 있을때, 지역공동체내에서 감독을 일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의 사상은 동방정교회의 성만찬(Pontifical Liturgy)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독특한 생동감을 일으킬것이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 이외에 또한 교회의 광범위한 일치가 있다. 이 두번째 측면은 또 다른 순교자 감독인 카르타고의 성, 키프리안(258년 사망)의 저술들에 나타나 있다. 키프리안은 모든 감독들이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각자는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감독직은 단일한 전체성(a single whole)이며, 이 단일한 전체성 속에서 각 감독은 충만한 소유권을 향유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것의 번식력이 증대함에 따라 다수의 교회로 멀리 광범위하게 퍼져 나갈지라도, 단일한 전체성이다.'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단지 하나의 교회가 있다.; 많은 감독들이 있지만 단지 하나의 감독직이 있다.
교회의 처음 3세기는 키프리안과 이그나티우스와 같이 그들의 삶을 순교로 마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박해는 종종 지역적 특성이었으며 일반적으로 지속성에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당국자들이 오랜기간동안 기독교에 커다란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항상 이 위협이 현실이 될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순교사상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영적 전망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지녔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 뿐 아니라, 다른 작은 그리스도들의 피 위에 설립된 것으로 보았다. 교회가 확립되고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는 이후의 세기들 속에서도 순교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순교의 사상은 다른 형태를 취하였다. 예를들면 수도사적 삶은 종종 그리스 작가들에 의해 순교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접근은 또한 서방에서도 발견되어 진다. 예를들면 한 ?트족 본문은 -7세기 한 아일랜드인의 설교- 순교의 길을 심미적 삶과 비교하였다.
이제 한 사람에게 하나의 십자가로 여겨지는 세 종류의 순교가 있다. 흰색의 순교,녹색의 순교 그리고 붉은 색의 순교이다. 흰색의 순교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녹색의 순교는 순교자가 금식과 노동으로 자신을 그의 악한 열정으로부터 자유케 하거나 혹은 형벌과 회개속에서 고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붉은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나 죽음을 견디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동방정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많은 기간동안 붉은 순교의 가능성은 꽤 거리가 멀었고, 녹색과 흰순교의 형태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대시대에 동방정교회와 다른 기독교인들이 다시 한번 피의 순교를 경험하도록 불려졌을 때, 또한 몇번 경험하였다.
키프리안이 강조했던 것처럼,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감독들이 그들의 공통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공의회에서 함께 만나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방정교회는 항상 교회의 삶에 있어서 공의회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동방정교회는 공의회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선택한 주요한 기구라 믿으며, 보편 교회를 본질적으로 협의회(conciliar)적 교회로 생각한다. (사실 러시아에서 형용사인 소보르니(soborny)는 '보편적(가톨릭)'과 '협의회'(conciliar)의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편 이에 상응하는 명사 소보르(sobor)는 '교회'와 '공의회'(council) 양자를 의미한다.) 교회내에서 독재나 개인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조화와 만장일치가 존재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유롭지만 고립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 믿음, 그리고 성만찬적 교제 속에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의회에서 조화와 자유로운 만장일치의 사상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참된 공의회에서 한회원이 자의적으로 그의 뜻을 나머지 회원들에게 강요할수 없으나, 다른회원들과의 대화 와 그들 모두가 자유롭게 '공동의 마음'을 만들어 내는 방식속에서 그의 뜻을 강요할수 있다. 공의회는 교회의 본질적 본성의 살아있는 구현체이다.
교회사에서 첫번째 공의회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들이 참석한 그 공의회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어느정도 모세의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였다. 그들이 마침내 그들의 결정에 도달하였을때, 사도들은 다른 상황들에서는 주제넘을 것으로 보이는 말투로 말하였다. '이것은 성령과 우리에게 올바르게 보인다...'(행 15:28) 이후의 공의회들은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위험을 무릎쓰고 말하였다. 소외된 개인은 '이것은 성령과 나에게 올바르게 보인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로 모일때, 교회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 그들중 어느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함께 주장할수 있었다.
전체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였던 예루살렘 공의회는 하나의 예외적인 모임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때까지 필적할만한 모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프리안 시대까지 로마제국의 특별한 시민지역내에 있는 감독들이 참석하는 지역 공의회들은 흔하게 개최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지역공의회는 통상 지방의 수도에서, 메트로폴리탄이란 이름이 주어지는 그 수도의 감독의 주재 아래 모였다. 제 3세기가 지남에 따라 공의회들은 규모가 확장되었고, 하나가 아니라 여러 시민지역으로부터 온 감독들을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모임들이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같은 제국의 주요한 도시들에서 모이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대도시들의 감독들은 지방적 메트로폴리탄들보다 더 큰 중요성을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동안 이 커다란 교구들의 정확한 지위에 관하여 어떠한 결정도 없었다. 공의회들의 이러한 계속적인 팽창은 3세기에도 그것의 논리적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아직은 (사도적 공의회로부터 떠나) 단지 작거나 좀더 큰 정도의 지역적 공의회들이 있었으며, 전체 기독교 세계로 부터 감독들을 형성하고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보편적'공의회는 없었다. 312년에 교회의 외적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의 군대와 더불어 프랑스를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을때,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태양 앞에 있는 십자가 빛을 보았다. 십자가와 함께 거기에 비문이 있었다. 이 표시 속에서 정복하라(In this sign conquer). 이 환상의 결과 콘스탄틴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첫번째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날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의 연속은 교회사의 첫번째 주요한 시기를 끝내고, 비잔틴 기독교 제국의 창조로 움직이게 하였다.
제 2 장, 비잔티움, Ⅰ :
일곱 공의회의 교회
All profess that there are seven holy and Ecumencial Councils, and these are the seven pillars of the faith of the Divine Word on which He erected His holy masion, the Catholic and Ecumenical Church (모든 사람들은 일곱개의 거룩하고 에큐메니칼적인 공의회들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집인 보편적이고 에큐메니칼적 교회를 그의 말씀위에서 세우셨다는 것을 믿는 일곱 개의 기둥들이 있음을 고백한다.)
요한 2세, 러시아의 메트로폴리탄(1080-89)
제국 교회의 설립
콘스탄틴은 교회 역사상 분수령에 서 있다. 그의 회심과 더불어, 순교와 박해의 시대는 끝나고, 카타콤의 교회는 제국의 교회가 되었다. 콘스탄틴의 꿈의 첫번째 위대한 영향은 그와 그의 동료 황제 루키니우스가 313년 발행하여, 기독교 신앙의 공적인 관용을 선포한 소위 밀란 칙령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콘스탄틴이 단지 관용만을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 로마 제국내에 있는 다른 관용된 종교들 보다도 기독교에 호감을 가졌음을 명백히 하였다. 콘스탄틴의 사후 50년이내에, 테오도시우스는 이 정책을 끝까지 수행하였다. 그의 법령에 의해 그는 기독교를 제국에서 가장 최고로 혜택받고 유일하게 인정된 종교로 만들었다. 교회는 이제 세워졌다. 로마 당국자들은 한때 이렇게 기독교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존재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것은 억압받고 있는 이교도들의 몫이 되었다.
콘스탄틴의 십자가 꿈은 또한 그의 일생과 마찬가지로, 이후 기독교 세계의 발전을 위하여 중대한 두가지 결과들로 인도 하였다. 첫째로 324년 그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이태리에서 제국의 동쪽 보스포로스 해안으로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여기 비잔티움의 그리스 도시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후에 이 도시를 스스로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명명했다.
이 천도의 동기는 부분적으로 경제적이고 정치적이었지만 또한 종교적이기도 하였다. 옛 로마는 너무 깊게 이교도에 더렵혀져 있어서, 그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기독교 제국의 중심을 형성할수 없었다. 새 로마안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330년 그 도시에 대한 장엄한 축성식이 있은 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이교 제의는 영원히 수행될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콘스탄틴의 새로운 수도는 동방정교회의 역사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두번째로 콘스탄틴은 325년 니케아에서 기독교회에 있어서 처음으로 보편적이고 에큐메니칼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 제국이라면, 콘스탄틴은 유일한 정통신앙(the one Orthodox faith)에 확고하게 기초한 기독교제국을 보기 원하였다. 그 신앙의 내용을 정교하게 하는 것은 니케아 공의회의 의무였다. 니케아에서의 모임의 외적 환경만큼 교회와 국가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명확하게 상징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황제 자신은 가이사라의 감독 유세비우스가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의 천상적 使者처럼' 참석한 사람들 중 하나로 회의를 주재하였다. 공의회의 말미에 감독들은 황제와 식사를 하였다. 이러한 일들(황제와 식사)에 의해서 감동되는 경향이 있는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회의 분위기가 형용할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경호대와 다른 병력이 검을 가지고 궁전의 입구를 에워 쌌으며, 이들을 지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황제의 방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일부는 테이블에서 황제의 동료가 되었으며, 나머지는 한쪽에 정돈된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 왕국의 모습이며, 현실이라기 보다 하나의 꿈이라고 생각하였다.' 네로가 밤에 그의 정원을 밝히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을 살아있는 횃불로 이용한 이래로, 상황들은 확실히 변화 하였다. 니케아는 일곱개의 보편 공의회중 첫 번째 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들 도시들도 동방정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세가지 사건- 밀란칙령, 콘스탄티노플의 설립, 니케아 공의회-은 도래하는 교회의 시대를 나타낸다.
처음 여섯 공의회들(325-681)
초기 비잔틴 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삶은 일곱개의 보편적 공의회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공의회들은 이중의 과제를 수행하였다. 첫째로, 그들은 다섯개의 대관구들 혹은 총대주교관구들의 위치를 구체화하여, 교회의 가시적 조직을 분명하게 하였다. 둘째로, 더 중요한 것은 공의회들이 삼위일체와 성육신과 같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교리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단호하게 규정하였다. 모든 교회들은 이러한 것들을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넘어서 있는 신비들로 간주하는데 동의하였다.
감독들이 공의회에서의 규정들을 작성하였을때, 그들은 자신들이 신비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신비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하는 거짓된 방법들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오류와 이단에 빠지는 것으로 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은 신비의 주변에 방어막을 세웠다.
항상 공의회에서의 논쟁은 추상적이고 관계가 먼 것처럼 들리지만, 공의회들은 인간구원과 같은 매우 실제적인 목적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는 죄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인류의 죄악이 만든 분리의 벽을 인류의 노력을 통해서는 깨뜨릴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셨다. 즉 그는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죽은자들로부터 다시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죄와 죽음의 노예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 메세지이며, 이것이 공의회가 보호하기 위해 관심하였던 구속의 메세지이다. 이단들은 신약성서를 손상시키고,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장벽을 세우고, 그리고 인류가 충만한 구원을 달성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들은 위험스럽고 정죄할 필요가 있다.
성 바울은 나눔(sharing)이라는 용어로 이 구속의 메세지를 표현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의 신성의 부요함을 공유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가난을 공유하셨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으며, 그의 가난을 통하여 너희는 부요하게 되었다.'(고린도후서 8장 9절) 동일한 사상이 성, 요한의 복음속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나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신적인 영광속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의 나눔(a share)을 주셨고, 제자들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도록 기도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 너희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다. 곧 저희안에 내가, 내안에 저희가 있어, 그들이 온전하게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요한복음 17장 22-23절)
희랍 교부들은 이 구절들과 문자적 의미에서 이와 유사한 본문들을 취하여, 대담하게 인간의 신성화(deification)를 말하였다.(그리스어로 theosis)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공유한다면, 만약 그들이 완전하게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면, 이것은 사실상 인류가 신성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은혜에 의해 본질상 하나님이 되기 위해 불려졌다. 따라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god)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고 말함으로 성육신의 목적을 요약하였다.
이제 만약, 인간이 신이됨 즉 신성화(theosis)가 가능하다면, 구속자이신 예수는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가 구원한다면, 그는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우리처럼 참으로 인간이라야, 우리 인간들은 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에 참여할 수 있다. 하나의 다리가 동시에 인간이며 신이신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놓여졌다.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셨다. '지금부터 너희는 하늘이 열림과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볼것이다.(요한복음 1장 51절) 천사들 뿐만아니라 모든 인류가 그 사다리를 이용한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각 이단들은 번갈아 이 생생한 확증의 일부를 훼손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열등하게 만들어지지(아리우스주의) 않았으며, 그의 인성이 신성으로부터 나누어진 하나의 위격(네스토리우스)대신에 두위격으로 되어 있으며, 그가 참 인간으로써 나타나지 않았다(단성론)고 할수 없음을 확정하였다. 각공의회는 이 확증들을 방어하였다. 제 4세기에 열렸던 처음 두공의회는 첫번째 부분(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다)에 집중하였고 삼위일체 교리를 공식화하였다. 5, 6, 7세기중에 열린 나머지 4개의 공의회들은 두번째 부분(그리스도의 인성의 충만함)에 관심을 돌렸고, 또한 어떻게 인성과 신성이 하나의 단일한 위격속에서 연합될수 있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성상에 대한 방어속에 있는 제 7차 공의회는 처음에 다소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나, 처음 6개의 공의회처럼 궁극적으로 성육신과 인간의 구원에 관계하였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주된 과제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정죄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신부였던 아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고, 하나님과 피조물사이에 경계선을 작성하면서 아들을 피조물들 가운데 위치시켰다. 가장 뛰어난 피조물, 그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이었다. 의심할바 없이 그의 동기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을 보호하였으나, 그의 주장의 결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보다 열등하게 만들므로 우리 인간의 신성화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참하나님이라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할수 있다고 답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인간들에게 연합의 길을 열어줄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질적으로 동일본질(homoousios)이시다. 그는 半神 혹은 최상의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가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공의회가 작성한 신조 속에서 '참하나님으로부터 온 참하나님' '피조된 것이 아니라 낳으신, 성부와 본질상 하나'를 선포하였다.
니케아 공의회는 또한 교회의 가시적 조직을 다루었다. 공의회는 세개의 커다란 중심-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인디옥(제 6항)을 언급하기 위해 뽑아내었다. 공의회는 또한 가이사라의 메트로폴리탄에 소속되어 있는 예루살렘 교구는 영예에 있어서이 세개의 교구 다음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제 7항) 콘스탄티노플은 5세기 후반까지 새로운 수도로써 공식적으로 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언급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은 전처럼 계속 헤라클레아 (Heraclea) 메트로폴리탄에 종속되었다.
니케아의 과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확장시키고 개정하였다. 특별히 성부와 성자가 하나님인 것처럼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확정하여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발전시켰다. 즉 '성부로 부터 나오시고(proceeds),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를 받으시고 영화되신 분.' 또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니케아의 제 6조항을 개정하였다. 이제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지위는 더이상 무시될수 없었으며, 로마 다음과 알렉산드리아 바로 위인 두번째 위치를 차지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은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로마(제 3항)이었기 때문에 영예에 있어서, 로마 감독 다음의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규정들 배후에는 공의회가 이용한 용어들에 정확성을 제공한 신학자들의 노고가 있었다. 니케아 신조에 있어서 중심어의 충분한 암시를 제공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의 주요한 업적이었다.: 동일본질(homoousios), 본질상 혹은 실체상, 동질상 하나(One in essence or substance, consubstantial). 그의 작업에 대한 보충은 신학자 그레고리로 동방정교회에 알려진 나지안쥬스의 성, 그레고리(?329-90?), 대, 바질(?330-79), 그의 젊은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394년 사망)등 세명의 갑바도키아 교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한편 아타나시우스는 성부 하나님과 아들의 연합-본질상 하나(ousia)-을 강조하였으나, 캅바도키아인들은 하나님의 삼위성(threeness)을 강조하였다.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삼위격이다(hypostasis). 하나님안에 있는 삼위성과 단일성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들은 삼위일체론의 고전적 요약-하나의 본질속에 세위격-에 충분한 의미를 주었다. 교회가 한세대속에서 이러한 능력을 가진 네명의 신학자를 소유한 경우는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381년이후 아리우스주의는 일부의 서유럽지역을 제외하고, 곧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공의회의 과제중 논쟁적인 측면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가 똑같이 분개한 제 3항에 놓여 있었다. 옛 로마는 새로운 로마의 주장이 어디에서 끝날 것인지 궁금하였다. 오래전에 콘스탄티노플은 첫번째 위치를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로마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조항을 무시하기로 하였고, 라테란 공의회(1215)때에서야 비로소 교황은 공식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두번째 위치에 대한 주장을 인정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그 당시 십자군과 라틴 총대주교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그 조항은 동일하게 지금까지 동방에서 첫번째 위치를 차지해 온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다음 70년은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날카로운 투쟁을 증거한다. 이 투쟁 속에서 잠시동안 승리는 알렉산드리아에 돌아갔다. 처음의 주요한 알렉산드리아의 성공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Theophilus)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즉 '황금의 입을 가진 요한'으로 불리는 성 요한 크리소스톰(?334-407)의 파면과 추방을 얻어냈던 아크 대회(Oak synod)에서 였다. 유창하고 설득력있는 설교가-그의 설교는 종종 한시간 혹은 그이상 계속되었다.-인 요한은 알렉산드리아와 갑바도키아인들에 의해 주장된 신학적 사상들을 대중적으로 표현하였다. 엄격하고 간소한 삶을 살아온 사람인 그는 가난한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회정의를 위한 타오르는 열정으로 충만해 있었다. 모든 교부들 가운데 그는 아마도 동방정교회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며, 그의 저작이 가장 넓게 읽혀지는 사람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두번째 주요한 성공은 테오필루스의 조카이며 계승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성, 시릴(444년 사망)에 의해 획득되었다. 그는 431년 에베소에서 개최된 제 3차 보편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다른 감독인 네스토리우스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사람이다. 그러나 에베소에서는 두 대교구(역자주:로마와 콘스탄티노플)사이의 경쟁보다 더 위태로웠다. 381년 이후 조용했던 교리적 문제들이 한번 더 나타났고, 이제는 삼위일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하여 집중하였다.
시릴과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참하나님이며, 삼위일체중 한분이심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인성에 대한 묘사와 하나의 단일한 위격(a single person)안에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설명하는 방법에 있어서 의견이 달랐다. 그들은 다양한 전통들과 신학학파를 대표하였다. 안디옥 학파에서 성장한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성을 지지했으나, 인성과 신성 사이를 너무 명확하게 구별하여서 그는 결국 동일한 몸안에 한 위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두 위격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알렉산드리아의 반대되는 전통의 주창자인 시릴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다양성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위격의 일치성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는 안디옥인들 보다 덜 생생하게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말하였다. 만약 너무 지나치게 주장한다면, 이 둘의 접근방법은 이단이 될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전체적인 그리스도의 균형잡힌 모습을 만들기 위하여 양자를 필요로 하였다. 이 두학파가 서로 조화를 유지하지 않고 투쟁으로 들어간것은 기독교세계에 하나의 비극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처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부르기를 거절함으로 논쟁을 촉진시켰다. 이제목은 이미 대중적 신앙속에서 받아들여졌으나, 네스토리우스에게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의 신성의 혼동을 내포하고 있는것으로 보였다. 그는 -여기에서 그의 안디옥의 분리주의가 명백한데- '마리아는 그녀가 단지 그리스도의 신성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성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단지 '사람의 어머니(Mother of Man)' 혹은 기껏해야 '그리스도의 어머니(Mother of Christ)로 불려질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공의회에 의해 지지를 받은 시릴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한복음 6장 14절)는 본문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마리아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머니이다. 마리아가 낳은 것은 하나님과 느슨하게 연합된 한 인간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하나의 단일하고 나누어지지 않는 인격이다.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위격의 일치성을 안전하게 한다. 그녀에게 이 명칭을 부정하는 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둘로 나누는 것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중간에 분리의 벽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제목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참된 메세지가 에베소에서 관련되어 있음을 볼수 있다. 본질상 하나( homoousios)라는 단어가 삼위일체론에서 우선성을 차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단어가 성육신론에서도 우선성을 차지한다.
알렉산드리아는 449년 에베소에서 개최된 두번째 공의회에서 또 다른 승리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은 - 대부분의 기독교세계에서 느낀 것처럼 - 알렉산드리아의 입장을 너무 멀리 밀고 갔다. 시릴의 계승자인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로스(Dioscorus)는 그리스도안에 단지 하나의 본성(physis)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구속주는 두본성으로 부터 존재하나, 그의 성육신 후에는 '하나님의 성육신 하신 본성이신 말씀'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단성론'(Monophysite)이라 명명된 입장이다. 시릴 자신이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것이 사실이나, 디오스코로스는 시릴이 433년 안디옥인들에게 양보했던 균형잡힌 진술들을 생략하였다. 이것이 거의 확실하게 그의 입장에 대한 불공정한 해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디오스코로스가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과 2년후인 451년, 황제 마르키안(Marcian)은 비잔틴 교회와 서방이 제 4차 보편 공의회로 간주한 감독들의 참신한 모임을 칼세돈에 소집하였다. 추는 이제 안디옥 방향으로 돌아갔다. 공의회는 디오코로스의 단성론적 입장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는 단일하고(a single) 나누어지지 않은 위격(undivided person)이며, 그분은 두본성으로 부터 나왔을 뿐만 아니라, 두본성 안에 존재한다고 선포하였다. 감독들은 로마의 위대한 교황인 성 레오의 교서(Tome)를 환영하였다. 이 교서 안에는 그리스도의 위격의 연합이 또한 강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본성 사이의 구별이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었다. 신앙에 대한 그들의 선포속에서 그들은 신성에 있어서 완벽하고 인성에 있어서 완벽한 참 하나님 참 인간인 '하나의 동일한 아들'(one and same son)에 대한 신념을 진술하였고...... 혼동되지 않고(unconfusedly), 변하지 않고(unchangeably), 나눌수 없고(indivisibly), 분리할수 없는(inseparably) 두 본성을 인정하였다. 이 본성들 사이의 차이는 연합 때문에 결코 제거될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각 본성의 특수한 자산은 보존되어 있으며, 양자는 한 위격과 하나의 hypostasis 안에서 결합하였다. 우리가 지적한 칼세돈의 정의는 단성론파(혼동되지 않고, 변하지 않는 두본성들 안에) 뿐만 아니라, 또한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나눌수 없고,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동일한 아들)을 겨냥하였다.
그러나 칼세돈은 알렉산드리아 신학에게는 패배 그 이상이었다. 동방에서 최상의 지배권을 가질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장은 실패하였다. 칼세돈의 제 28항은 콘스탄티노플의 제3항을 따르게 하였고, 새로운 로마에게 영예에 있어서 옛로마 다음의 위치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동방은 늘 그것의 타당성을 인정해왔다. 공의회는 또한 가이사라의 사법권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하고 예루살렘에게 대교구들중 다섯번째 위치를 주었다. 후에 동방정교회들 가운데 5두정치(Pentarchy)로 알려진 이 제도는 교회내에 다섯개의 대교구들이 특별한 영예를 차지하고, 이전에 정착한 질서들이 그들 가운데 확립되어 있음으로 완벽하게 되었다. 순서상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이 된다. 이 다섯개는 사도적 원천을 주장하였다. 앞에 있는 네개는 로마제국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들이다. 다섯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은자들로부터 부활하신 장소이기 때문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도시들내에서 감독들은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받았다. 에베소 공의회에서 독립이 보장되었고 그이후 자치를 유지해온 키프러스를 제외하고, 다섯개의 총대주교들은 알려진 전체세계를 사법관할권으로 분류하였다. 5두정치에 대한 동방정교회의 개념을 말할때, 피해야만 하는 두가지 가능한 오해가 있다.
첫째로 총대주교와 메트로폴리탄의 체계는 교회조직의 문제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교회의 질서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신적 권리의 관점으로 교회를 본다면, 우리는 모든 감독들은 각자가 관장하고 있는 도시들이 비천하거나, 존귀하거나 본질적으로 동등하다고 말해야만 한다. 모든 감독들은 동일하게 사도적 전승을 공유하고 있다. 모두는 동일한 성례전적인 권능을 지니며, 신성하게 신앙의 교사들을 임명한다. 교리에 관한 논쟁이 일어나면, 총대주교들이 그들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모든 교구감독들은 보편 공의회에 참석하여 말할 권리와 투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5두정치의 체계는 모든 감독들의 본질적인 특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이그나티우스가 각 지역공동체에 할당한 중요성을 지역공동체로부터 빼앗지 않는다.
두번째로, 동방정교회는 다섯개의 총대주교들 가운데 특별한 지위가 교황에게 속한다고 믿었다. 동방정교회는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조들안에 선포되고,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내에서 가르쳐지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동방정교회는 거룩하고 사도적인 로마교황에게 모든 기독교 세계로 부터 오는 호소를 들을 권한(특정한 상태들 아래)과 더불어 영예에 있어서 우선권(a premacy of honour)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최상권(supremacy)이 아니라 우선권을 사용하였음을 주의하라. 동방정교회는 성 이그나티우스의 말을 적용하여 교황을 사랑속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감독으로 생각한다. 로마의 실수는- 동방정교회가 믿은것처럼- 이 우선성과 사랑의 사회권(presidency of love)을 외적 능력과 최상의 사법관할권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로마가 향유했던 이 우선권은 세가지 요소로 부터 그 기원이 유래한다. 첫째로, 로마는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이 순교당하였으며, 베드로가 감독이었던 도시이다. 동방정교회는 베드로를 사도들 가운데 으뜸으로 인정한다. 동방정교회 신학자들이 현대 로마 가톨릭 주석가들과 같은 방식으로 동일하게 이 본문을 이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방정교회는 복음서에 있는 유명한 '베드로 본문'(Pertrine texts:마태복음 16:18-19; 누가복음 22:32, 요한복음 21:15-17)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동방정교회 신학자들은 로마 감독 뿐만 아니라, 모든 감독들이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이야기하며, 동시에 그들중 대부분은 로마의 감독이 특별한 의미에서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인정한다. 두번째로 로마 교구는 또한 제국내에서 차지하는 로마시의 지위에 그 우선권을 빚지고 있다. 로마는 고대세계의 수도이며 최고의 도시였다. 로마는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의 설립이후에도 이러한 것을 얼마동안 지속하였다. 세번째로 교황들이 이단에 빠진 경우가 있었을지라도, 교회사의 처음 6세기 기간동안 로마 감독은 교회의 신앙의 순수성을 위해 전체교회에 의해 주목되었다. 다른 총대주교들은 커다란 교리 논쟁 기간중 흔들렸으나, 로마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확고했었다. 이단과의 투쟁속에서 눌려있을때, 사람들은 그들이 확신을 가지고 교황에게 의지할수 있다고 느꼈다. 로마의 감독뿐만 아니라 모든 감독들은 하나님에 의해 신앙의 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교황은 사실상 진리에 대한 현저한 충성을 가지고 신앙을 가르쳤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초기 세기에 있어서 안내를 호소한것은 무엇보다도 로마였다.
그러나 교황도 총대주교들과 마찬가지이다. 로마에 할당된 우선권은 모든 감독들의 본질적 동등성을 전복시킬수 없다. 교황은 교회안에서 첫번째 감독이다. 그러나 그는 동등한자 가운데 첫번째이다.(the first among equals)
에베소와 칼세돈은 동방정교회의 견고한 지반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공격을 위한 장엄한 기초이기도 했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점차적으로 화해하였고 지속적인 분열을 이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동방교회(the Church of East)에 속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종종 잘못 오도되어 네스토리우스주의라고 불렸지만) 그들은 에베소의 결정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디오코로스의 단성론적 가르침을 추종하고 칼세돈의 정의와 레오의 교서를 거부하는 비-칼세돈주의자들이 있었다. 동방의(east) 교회는 거의 완전하게 비잔틴제국의 외곽에 놓여져 있었으며 비잔틴 역사속에서 더이상 그 역사가 들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다수 비-칼세돈주의자들은, 특별히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제국에 종속되어 있었고, 그들을 비잔틴 교회와 연합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성공적이지는 못했으나 반복되었다. 종종 신학적 차이는 문화적 민족적 긴장에 의한 것보다 더 심각하였다. 언어와 배경에 있어서 현저하게 비그리스적인 이집트와 시리아는 종교적이고 정치적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콘스탄티노플의 힘에 분개하였다. 그래서 교회의 분열이 정치적 분열에 의해 강화되었다. 만약 이러한 비신학적 요소들이 있지 않았다면, 양측은 칼세돈이후 신학적 이해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비-칼세돈주의자들과 칼세돈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신학적 차이가 아니라, 전문용어의 차이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분파는 다른 방식으로 '본성(nature;physis)이라는 단어를 이해한다. 그러나 양자는 동일한 기본적 진리를 확정하고자 하였다. 즉 구속자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다. 그러나 그분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칼세돈의 정의는 그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두개의 공의회에 의해 보충되었다. 제 5차 에큐메니칼 공의회(553)는 알렉산드리아 관점으로 칼세돈을 재해석 하였고, 칼세돈이 사용했던 것보다 건설적인 용어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의 단일한 위격을 형성 하도록 연합 되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제 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680-81)는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의 단일한 위격이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의지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단성론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공의회는 만약 그리스도가 두본성을 가졌다면, 그는 또한 두의지를 가져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인간의 의지가 없는 인간적 본성은 불완전하고, 단순한 추상이 될수 있기 때문에,단성론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충만함을 훼손하였다고 느껴졌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참 인간이다. 그는 신적 의지 뿐만 아니라 인간적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제 6차 공의회의 모임이 개최되기 이전의 50년동안 비잔티움은 이슬람의 등장이라는 갑작스럽고 놀라운 발전에 직면하였다. 이슬람의 팽창에 관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팽창의 속도였다. 예언자(모하멧트)가 632년 사망하였을때, 그의 권위는 헤자즈(Hejaz)를 넘어서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15년내에 그의 아랍 추종자들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유린하였다. 50년 이내에는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벽을 에워 싸고, 그 도시를 거의 점령하였다. 100년이내에 그들은 북 아프리카를 삼키고, 스페인을 통하여 전진하였으며, 포이투에르(Poitiers) 전투에서 서유럽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을 위해 싸우도록 하였다. 아랍의 침입은 '원심력적 팽창 이라 불려지며, 식량, 약탈 그리고 정복을 요구하면서 침략적인 작은 몸들을 모든 방향으로 움직였다. 옛 황제들은 그들에게 저항할 상태에 있지 않았다.' 기독교세계는 살아 남았으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비잔틴인들은 그들의 동쪽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하였고,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그리고 예루살렘의 세개의 대관구는 이교도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다. 동쪽의 기독교 제국내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제 경쟁자가 없게 되었다. 이후로 비잔티움은 이슬람의 공격으로부터 오랫동안 자유롭지 못했으며, 8세기이상 지탱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였다.
성상들(The Holy Icons)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들은 681년 공의회에서 끝나지 않았으나, 8, 9세기에는 다른 형태로 확장되었다. 논쟁은 성상, 그리스도의 모습, 하나님의 어머니, 그리고 교회와 개인의 집에서 숭배 되던 성자들에 집중 되었다. 인간과 하나님을 묘사하는 종교 예술을 의심하는 성상파괴론자 또는 성상 분쇄론자들은 성상 파괴를 요구하였다. 그 반대파인 성상론자 또는 성상숭배론자들은 격렬하게 교회의 삶 속에서 성상의 위치를 방어하였다. 투쟁은 단순히 기독교 예술에 대한 두개의 개념들 사이의 투쟁이 아니었다. 보다 깊은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의 특징, 물질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참된 의미.
성상파괴론자들은 유대교와 이슬람의 사상에 의해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에서 성상파괴론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3년전에 이슬람의 칼리프 예지드(Yezid)는 그의 영역안에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할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성상파괴론은 단순하게 외부로부터 들어온것은 아니다. 기독교 자체내에 항상 성상을 비난하는 '순수한' 전망이 있어왔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모든 이미지들 속에서 잠재적 우상숭배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아이소리안(Isaurian) 황제들이 성상을 공격했을때, 그들은 교회안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발견하였다.
약 120년 동안 지속된 성상파괴 논쟁은 두단계로 구분된다. 첫번째 기간은 레오 3세가 성상들에 대하여 그의 공격을 시작했을 때인 726년 시작되어, 여제 아이레네(Irene)가 박해를 중지했을 때인 780년까지의 기간이다. 성상옹호론자들의 입장은 제 1차 공의회처럼 니케아에서 모인 제 7차 마지막 에큐메니칼 공의회에 의해 지지되었다. 제7차 공의회는 성상은 교회안에서 보존되며, '소중하고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와 복음서와 같은 다른 물질적 상징들에게 제공되는 동일한 상대적 존경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상에 대한 새로운 공격은 815년 아르메니아인인 레오 5세에 의해 시작되어, 성상들이 또다른 여제 테오도라에 의해 영구적으로 다시 복원된 때인 843년까지 계속되었다. 843년 성상에 대한 최종적 승리는 '동방정교회의 승리'로 알려졌으며, 사순절 첫번째 주일인 '동방정교회 주일'에 거행된 특별한 예배속에서 기념 되었다. 첫번째 기간에 성상론에 대한 주요한 전사는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675-749)이었으며, 제 2차 기간에는 스토디오스(Stoudios)의 성 요한(759-826)이었다.
요한은 그가 비잔틴 정부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이슬람의 영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이 때는 이슬람이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로 무의식적으로 행동했던 마지막 기간은 아니었다.
동방정교회의 특징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는 동방정교회가 성상에 제공하고 있는 위치이다. 오늘날 동방정교회는 성상들로 가득차 있다. 교회에는 건물의 몸체로 부터 성소를 나누는 견고한 스크린, 즉 완전히 성상들로 덮혀 있는 아이코노스타티스(Iconostatis)가 있다. 한편 다른 성상들은 교회 주변에 있는 특별한 성상보관 장소에 두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벽들은 프레스코나 모자이크로된 성상들로 덮혀 있다. 동방정교회인들은 이러한 성상들 앞에서 엎드리고, 그것들에 입 맞추고 그것들 앞에서 초를 불 태운다. 그 초들은 사제들에 의해 불 피워지고 행진 속에서 운반된다. 이 제스처와 행동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왜 다마스커스의 요한과 다른 사람들은 그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가?
우리는 먼저 성상파괴론자들이 성상옹호론자들에 대항하여 제시한 우상숭배라는 비난, 그리고 교훈의 한수단으로써의 성상의 긍정적 가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교리적 중요성을 생각해야 한다.
(1) 우상숭배의 문제.
동방정교회 교인이 성상에 입을 맞추거나 그앞에 업드릴때, 그는 우상숭배에 대한 책임이 없다. 성상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다. 상징들에 주어지는 존경은 돌, 나무, 그림을 향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된 인물들에게 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성상파괴논쟁 이전에 네아폴리스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Neapolis:약 650년경 사망)에 의해 잠깐 지적되었었다.
우리는 나무의 본성에 경의를 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숭배하고 경의를 표한다.... 십자가의 두 들보가 함께 연결되어 있을때,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때문에 그 모습을 경배한다. 그러나 만약 그 들보들이 분리되어 있다면, 나는 그들을 던지고 그들을 불 태울 것이다.
성상이 단지 상징이기 때문에, 동방정교회는 그들을 예배하지 않고, 그들을 존경하고 공경한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사려깊게도 물질적 상징들에게 표해지는 상대적 존경과 하나님께만 적합한 경배를 구별하였다.
(2) 교회 가르침의 부분으로서의 성상
레온티우스가 말했듯이, 성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회상하도록 하는 개방된 책들이다.' 그들은 교회가 신앙을 가르치기 위하여 고용한 수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학책들을 배우거나 연구할 시간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의 앞에 있는 벽면에 펼쳐진 기독교의 모든 신비들을 보기 위해 교회에 들어와야 한다. 성상옹호론자들은 만약 어떤 이교도가 당신의 신앙을 보여 주기를 당신에게 간청 한다면, 그를 교회 안으로 데리고가 그를 성상들 앞에 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방식속에서 성상들은 성스러운 전통의 한부분을 형성한다.
(3) 성상들의 교리적 중요성
이제 우리는 성상파괴논쟁의 실제적 의미에로 왔다. 성상들이 우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들이 가르침을 위하여 유용하다고 한다면, 그들은 허용할만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것인가? 성상을 지니는 것은 본질적인 것인가? 성상옹호론자들은 성상이 충분하고 적절하게 성육신론을 보호하기 때문에, 본질적이라고 주장했다. 성상파괴론자들과 옹호론자들은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본성안에서 묘사될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였다. '어느때에도 하나님을 본사람은 없다.'(요한 1:18) 그러나 성상옹호론자들은 성육신이 전형적인 종교 예술을 가능하도록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이 되셨고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묘사될수 있다. 다마스커쿠스의 요한은 물질적 상징들이 물질적 몸을 취하신 하나님을 구성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체가 없고 외형이 그려질 수 없는 옛 하나님은 도대체 묘사될수 없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육체로 나타나 인간들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나는 볼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들을 만들수 있다. 나는 물질을 숭배하지 않지만, 나를 위하여 물질이 되시고 물질 가운데 거하신, 물질을 통해 나의 구원을 이루신 물질의 창조자를 믿는다. 나는 나의 구원을 가져온 물질을 숭배함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묘사를 거부함으로, 성상파괴론자들은 성육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실패하였다. 많은 청교도들이 하였던 것처럼, 그들은 일종의 이원론에 떨여졌다. 물질을 오욕으로 간주함으로 그들은 물질적인 것과의 모든 접촉으로 부터 종교적 자유를 원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인 것은 비물질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성, 그의 육체에 어떠한 역할도 허락하지 않음으로, 성육신을 배반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가 구원되어야 하고 변형되어야 함을 잊은 것이다. 그래서 성상파괴논쟁은 초기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종교 예술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성육신, 인간구원, 전체의 물질적 우주의 구원에 대한 문제였다.
하나님은 육체를 취하셨고, 그럼으로서 물질도 구속될수 있음을 증명하셨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육신을 입으신 말씀은 그 육신을 경배하였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물질을 신성화 시키시고, 그 물질을 영적 담지자로 만드셨다. 그리고 만약 육신이 영의 전달수단이 된다면, 다른 방식이지만 나무와 페인트도 될수 있다. 성상에 대한 동방정교회의 교리는 영적일 뿐만아니라, 물질적인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는 구속될수 있고 영화될수 있다고 하는 동방정교회의 신념과 결합되어 있다. 니콜라스 제르노브(Nicolas Zernov:1898-1980)가 러시아인들에 관하여 말한 것은 모든 동방정교회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상은 러시아인들에게 단순히 그림이 아니다. 그들은 미와 예술을 통하여 피조물을 구속하는 인간의 영적 권능에 대한 역동적인 표현들이다. 성상의 색상과 선들은 본질을 흉내내고자 의도된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인간, 동물, 그리고 식물과 전 우주가 그들의 현재의 타락의 상태로부터 구조될수 있고, 그들의 적절한 '모습'이 회복될수 있다는 설명을 목표로 한다. 성상은 타락된 피조물을 넘어 구속받은 피조물의 도래하는 승리에 대한 약속이다.... 성상에 대한 예술적 완성은 단지 하늘의 영광에 대한 반영이 아니다. 성상은 그것의 근원적 조화와 아름다움으로 회복되고, 성령의 수단으로 봉사하고 있는 물질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성상은 변형된 우주의 한 부분이다.
다마스커쿠스의 요한이 지적한것처럼,
성상은 성자들의 승리와 사단의 치욕에 대한 승리의 노래이며, 계시이며, 지속적인 기념물이다.
성상파괴논쟁의 결론, 제 7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모임, 843년 동방정교회의 승리, 이러한 것들은 동방정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제 2기의 종말을 의미한다. 7개의 공의회들은 동방정교회에 대단히 중요하다. 동방정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7개의 공의회들의 관심은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적이다. 7개의 공의회들은 학자와 성직자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의 관심사이다. 딘 스텐리(Dean Stanley)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스페인과 이태리에서 동방의 농부들과 동일한 삶의 계층의 사람들이 콘스탄스와 트리엔트라는 이름은 아마도 잘 알지 못하지만, 동방정교회의 무식한 농부들은 그들의 교회가 7개의 공의회의 기초 위에 의지하여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그들은 아직도 그시대의 악들이 일소될 제 8차 보편공의회를 보기 위해 산다는 희망을 소유하고 있다.' 동방정교회는 종종 자신을 7개의 공의회들의 교회라고 부른다. 이것으로 그들은 동방정교회가 787년 이후로 창조적이기를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의회의 기간들 속에서 위대한 신학의 시대를 보았다. 동방정교회는 모든 세대들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구함에 있어서, 공의회들을 성경다음의 기준과 안내서로 삼고 있다.
성자, 수도사 그리고 황제
비잔티움은 이유없이 '천상의 예루살렘의 모습'이라고 불려지지 않는다. 종교는 비잔틴의 삶의 모든 영역으로 들어왔다. 비잔틴의 휴일은 종교적 축제일이었다.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경기들은 찬양의 노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무역계약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가호를 빌었고, 십자가 표시로 날인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비종교적인 시대에 있어서, 당시의 성직자와 평신도, 법관과 학자, 가난한자와 교육받지 못한자, 그리고 사회의 모든 분야들이 종교적 문제들에 대하여 얼마나 불타는 관심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깨닫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니싸의 그레고리는 제2차 보편공의회 기간에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끝없는 신학적 논쟁들을 묘사하였다.
전체도시-광장, 시장, 교차로, 골목길-는 그것으로 꽉찼다. 낡은 옷을 입은 사람들, 환전가, 음식판매자, 그들은 모두 바쁘게 논쟁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돈을 환전해주기를 요구하면, 그는 출생한자(the Begotten)과 출생하지 않은자(the Unbegotten)에 관해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만약 당신이 한덩이의 빵의 가격에 관하여 묻는다면, 당신은 성부가 위대하고 성자는 열등하다는 방식으로 대답을 듣는다. 만약 당신이 나의 목욕통이 준비되었냐고 묻는다면, 종은 아들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대답한다.
이 이상한 이야기는 공의회들이 직면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열정이 너무나 열렬하여 회의의 기간은 항상 규제되거나 위엄을 갖추지 못하였다. 나지안쥬스의 그레고리는 ' 나는 약간 멀리서 대회들과 공의회들에 경의를 표한다. 왜냐하면 나는 대회들과 공의회들이 얼마나 다루기 힘든지 알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두루미와 거위들의 모임에 결코 앉지 않을 것이다.' 고 건조하게 말하였다. 교부들은 항상 의심스러운 방법들로 그들의 근거를 지지하였다. 예를들면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은 네스토리우스에 대항한 그의 투쟁속에서, 재판관을 심하게 매수하였고, 사적인 수도승단으로 에베소시를 위협 하였다. 그러나 비록 시릴이 그의 방법에 있어서 난폭하였지만, 올바른 근거가 승리한것은 그의 타는듯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록 기독교인들이 항상 비판적이였지만, 그것은 그들이 기독교 신앙에 관하여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질서는 무관심보다는 더 나았다. 동방정교회는 공의회들에 불완전한 인간들이 참석하였음을 인정하였으나, 이 불완전한 인간들이 성령에 의해 인도됨을 믿었다.
비잔틴의 감독은 공의회에 참석한 두드러진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 경우에 있어서 그의 백성에게 진실한 아버지이며, 어려움이 있을때 백성들이 확신있게 바라보는 친구요 보호자였다. 요한 크리소스톰이 주장한 가난한자와 압제받는자들에 대한 관심은 많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발견된다. 예를들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자선가, 성 요한(619년 사망)은 그의 교구의 모든 재산을 그가 '나의 형제 자매인 가난한자들'이라 부른 자들을 돕는데 바쳤다. 그 자신의 재산이 떨어졌을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그의 동시대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누군가가 악의없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하여 부자들의 셔츠를 벗긴다면, 그는 잘못을 범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 요한은 '나는 당신이 가난한자, 거지라 부르는 사람들을 나의 주인이요 도움자라고 선포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만이 진실로 우리를 도울수 있으며, 우리에게 천국을 줄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비잔틴제국 내에서 교회는 교회의 사회적 의무들, 그리고 교회의 주된 기능중 하나는 자선임을 간과하지 않았다.
수도원주의는 모든 동방정교회 국가들에서처럼, 비잔티움의 종교적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방정교회의 영성을 관통하는 최상의 길은 수도원주의를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라고 적절히 이야기된다.' '영적 삶의 풍성한 형태들이 동방정교회의 영역 안에서 발견되지만, 수도원주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고전적이다.' 수도사적 삶은 우선 4세기에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일정한 기구로 출현하였고, 거기에서 부터 급속하게 기독교 세계에 퍼져 나갔다. 수도원주의는 박해가 끝나고 기독교가 유행하게 된 콘스탄틴의 회심 이후에 발전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가 않는다. 그들의 검소함과 더불어 수도사들은 피의 순교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순교자들이었다. 그들은 제도권 기독교 세계와 균형을 이루었다. 비잔틴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비잔티움이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와 상징임을 잊어버리는 위험 속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의 왕국과 동일시하는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사회로 부터 사막으로 은둔한 수도사들은 교회의 삶에 있어서 예언자적이고 종말론적 사역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님을 일깨워 주었다.
수도원주의는 세가지 중요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들 세가지 형태는 모두 350년 이집트에서 출현하였고, 아직도 오늘날 동방정교회 안에서 발견된다. 첫 번째로 은둔자들이 있다. 이들은 오두막이나 동굴, 그리고 심지어 무덤, 나무가지들 가운데, 기둥 꼭대기에서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금욕주의자들이다. 이 은둔자적 삶의 위대한 모델은 수도원주의의 아버지인 이집트의 성 안토니(Antony:251-356)이다. 두 번째로 공동체 생활이 있다. 이것은 수도사들이 공통된 규칙아래 그리고 합법적으로 세워진 수도원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위대한 개척자는 이집트의 성 파코미우스(Pachomius)이며, 그가 저술한 규칙서는 후에 서방에서 성 베네딕트에 의해 이용되었다. 그의 금욕주의적 저작들이 동방의 수도원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대 바질은, 비록 그가 방문한 파코미안의 집들 보다 시리아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생활의 강력한 변호자였다. 수도원주의에 사회적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그는 종교적 집들이 병원들과 고아원을 세우고 직접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위해 일함으로 병자들과 가난한자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방의 수도원주의는 서방보다 활동적 사역에 훨씬 덜 관심을 기울였다. 동방에서 수도사의 제일의 과제는 기도의 삶이었으며, 그가 다른 자들을 섬기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였다. 수도원제도는 수도사가 그 문제들을 어떻게 행하는가에 있지 않고, 수도사는 어떻게 존재하여야 하는가에 있었다. .
마지막으로 앞의 둘사이를 중개하는 수도원적 삶의 형태인 반-은자적 삶이다. 이 중용의 길은 하나의 고도로 조직된 공동체 대신에 소수의 정착촌이 느슨하게 연합된 집단이다. 각 정착촌은 한명의 연장자의 지도아래 함께 살아가는 아마도 둘에서 여섯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집트에서 반-은둔적 삶의 큰 중심지는 니트리아(Nitria)와 세티스(Scetis)인데 이곳은 4세기경말까지 다수의 뛰어난 수도사들을 배출하였다. 니트리아의 설립자 아몬(Ammon), 이집트의 마카리우스(Macarius)와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 본도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대 아르세니우스(Arsenius the Great)등이다. (이 반-은둔자적 제도는 동방 뿐만 아니라 멀리 서방의 켈트족 기독교에서도 발견된다.) 처음부터 수도사적 삶은 동방이건 서방이건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하나의 소명으로 보였다. 그래서 비잔틴 세계 전역에 걸쳐 수많은 수녀 공동체가 있었다. 수도사들 때문에 4세기에 이집트는 제 2의 거룩한 땅으로 여겨졌으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자들은 나일 강변의 금욕주의적 집들을 포함시키지 않고서는 그들의 순례가 불완전한것으로 느꼈다. 5, 6세기에 수도원 운동의 주도권은 위대한 성 유티미우스(Euthymius 532년 사망)와 그의 제자 성 사바스(Sabas 532년 사망)와 더불어 팔레스틴으로 옮겨졌다. 요르단 계곡에 성 사바스에 의해 설립된 수도원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이 바로 이 공동체에 속한다. 현재까지 지속되는 또 다른 중요한 집은 시내산에 있는 성 캐더린 수도원으로 황제 저스티니안(527-65년 통치)에 의해 설립되었다. 팔레스틴과 시내산과 더불어, 아랍의 통치하의 비잔틴 제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수도원은 9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스토디오스(Stoudios) 수도원이다. 799년 여기에서 수도원장이 된 성 테오도르(Theodore)는 공동체를 다시 활동시켰으며, 그 규칙을 개정하고 수많은 수도사들을 끌어들였다.
10세기 이래로 동방정교회의 수도원주의의 중심은 아토스가 되었다. 이 산은 북 그리스에서 에게해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바위로 된 반도로, 그 정상은 해발 6,670피트에 달한다. 거룩한 산으로 알려진 아토스는 20명의 지도급 수도사 그리고 은둔자들의 방 뿐만 아니라, 다수의 작은 집들을 포함하고 있다. 전체 반도는 전적으로 수도를 위한 정착지로 주어졌고, 그것이 최고로 확장되었을때 거의 4만명의 수도사가 거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20명의 지도급 수도사들 가운데 최고의 연장자인 대 라브라(Great Lavra)는 혼자서 26명의 총대주교와 144명 이상의 감독을 배출하였다. 이것은 동방정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아토스의 중요성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을 제공한다.
동방정교회의 수도원주의에 있어서 직제는 없었다. 서방에서 수도사는 Carthusian, Cistercian, 혹은 몇개의 다른 직제에 속한다. 동방에서 물론 그가 특별한 수도원에 속해 있을지라도, 그는 단순히 모든 수도사와 수녀를 포함하는 하나의 커다란 친교의 구성원이다. 서방의 작가들은 종종 동방정교회 수도사들을 바실리안 수도사들(Basilian Monks) 혹은 바실리안 직제(Monks of Basilian Order)의 수도사들이라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성 바질은 동방 수도원주의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는 직제를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두 저작이 긴 규칙들(the Longer Rules)와 짧은 규칙들(the Shorter Rules)이라 알려졌지만, 이것들은 성 베네딕트의 규칙에 비교될 수 없다.
동방 수도원주의의 특징적 인물은 장로 또는 연장자이다. (그리스어로 geron, 러시아어로 starets, 복수로 startsy) 장로는 영적으로 분별력있고 지혜로운 수도사로 다른 사람들이-세상에 있는 수도사건 사람들이건- 그들의 안내자와 영적 지도자로 택한 사람이다. 그는 때때로 사제였으나, 종종 평신도 수도사였다. 그는 장로직을 위해서 특별한 안수나 임명을 받지 않았으나, 성령의 직접적 영감에 의해 장로직으로 인도 되었다.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이 직무에 불려졌다. 그 이유는 동방정교회가 자신의 '영적 아버지들' 뿐만 아니라 '영적 어머니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장로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상담하러 오는 각개인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본다. 이것은 장로의 특별한 선물 혹은 은사이다. 수도원적 장로들 중 가장 초기의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자는 성 안토니 자신이었다. 18세부터 55세까지 초기의 그의 삶은 퇴거와 고독속에서 보냈다. 그후 사막에서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엄격하게 닫혀진 삶을 버리고 방문자들을 받기 시작했다. 일군의 제자들이 그의 주위에 모였고, 이 제자들 이외에도 그의 충고를 듣기 위해 종종 먼 거리로부터 온 큰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안토니의 전기작가 아타나시우스가 지적한 것처럼, 방문자들의 행렬이 너무나 많아 안토니는 모든 이집트인의 의사가 되었다. 안토니는 다수의 후계자들을 가졌고, 그들의 대부분은 사건들에 대한 동일한 외향적 경향이 발견된다. 즉 돌아오기 위한 퇴거. 수도사는 먼저 퇴거하여 침묵으로 그 자신과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고독속에서 이 길고 혹독한 준비후에 장로에게 필요한 분별의 은사를 얻은 후, 그는 그의 방문을 열고, 그가 전에 벗어났던 세상으로 들어갈수 있다.
비잔티움의 기독교 정책의 중심부에 있던 황제는 일반적 통치자가 아니라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였다. 만약 비잔티움이 천상적인 예루살렘에 대한 형상이라면, 황제의 지상적 통치권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권의 형상이나 상징이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형상 앞에서 업드린다. 그리고 궁전에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형상인 황제 앞에서 업드린다. 미로의 궁전, 정교한 의식을 가진 궁정, 무감정의 사자들이 으르렁대고 노래를 잘하는 새들이 노래하는 왕의 침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써 황제의 지위를 명백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다. 황제 콘스탄틴 7세 포르피로제니투스(Porphyrogenitus)는 '제국의 권세가 조화와 질서 가운데 있는 동안, 우리는 이러한 수단들을 통해 이 우주에 편만해 있는 창조자 하나님의 조화로운 운동을 나타낸다.' 고 기록하였다. 황제는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특별한 지위를 지녔다. 그는 물론 성찬식을 집례하지 않았으나, 사제들처럼 성소안에서 영성체(communion)를 받았고- 축성된 빵을 그의 손으로 떼었으며, 그리스도의 피를 수픈으로 받는 대신에 잔으로부터 마셨다.- 그는 또한 설교를 하였고, 특별한 축일에 제단에 분향하였다. 동방정교회의 감독들이 지금 입고 있는 예복들은 한때 교회에서 황제가 입은 예복들이다.
비잔티움의 삶은 통일된 전체성을 형성하였고, 종교와 세속, 교회와 국가 사이의 엄격한 분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둘은 하나의 단일한 조직의 부분들로 보였다. 그러므로 황제가 교회의 사건들속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하는것은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캐사로-파피즘(Caesaro-Papism)의 비잔티움이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킨다고 고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교회와 국가가 하나의 단일한 조직체를 형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의 조직체 안에 성직(sacerdotium)과 제국의 권세(imperium)라는 두개의 뚜렷한 요소들이 있었다. 밀접한 협력속에서 함께 일하는 동안 각각의 이 요소들은 그자체의 고유한 자치적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둘사이에 합창과 조화가 있었으나, 각 요소들은 상대방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것은 저스티니안의 통치아래 작성된 비잔틴의 대법전 조항(제6항을 보라)속에서 설명되고, 다수의 다른 비잔틴 본문들 속에서 반복된 교리이다. 예를들어 황제 요한 티츠미세스(Tzimisces)의 말들을 취해보자. '나는 성직과 황제의 두 권위를 인정한다. 세상의 창조자는 영혼의 치료를 성직자에게 위탁하였고, 인간의 몸의 지배는 황제에게 위탁하였다. 세상이 번성하도록 하기 위해 권위가 공격을 받도록 하지 말자.' 그래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 교리들을 성공적으로 다루는 것은 황제의 일이다. 그러나 이 교리들의 내용을 진술하는 것은 그의 권세를 넘어 있다. 참다운 신앙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공의회에 모인 감독들에게 있다. 감독들은 하나님에 의해 신앙을 가르치도록 임명되었다. 반면에 황제는 신앙의 해설자가 아니라 보호자이다. 이론은 이러했으며, 또한 대부분의 경우 실천도 이러했다. 본의아니게 황제가 근거없이 교회적 문제들을 방해하는 많은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진지한 원칙의 문제가 발생하였을때, 교회 당국은 곧바로 그들이 그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를들면 성상파괴는 전체 황제들에 의해 격렬하게 옹호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에 의해 성공적으로 거부되었다. 비잔틴 역사속에서 교회와 국가는 밀접하게 상호의존적이지만, 결코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지는 않았다.
오늘날 동방정교회 안과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매섭게 비잔틴 제국과 그것이 지지하는 기독교사회의 이상을 비판한다. 그러나 비잔틴인들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는가? 그들은 한 인간으로 지상에서 사신 그리스도가 인간 실존의 모든 측면을 구속하였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 개인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전체적 정신과 조직을 세례주는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비잔틴 정부의 원칙들과 매일의 삶속에서 정책들을 전적으로 기독교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사실상 비잔티움은 성육신의 충만한 적용을 받아들이고 적용한 하나의 시도이다. 확실히 이 시도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특별히 비잔틴인들이 종종 비잔틴의 지상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고, 그리스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졌었다. - 오히려 로마 사람들이 그 용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였다.- 확실히 비잔티움은 자신들이 생각한 고도의 이상을 매우 짧은 기간동안 실현하였다. 그 실패는 종종 슬프고 재난과 같았다. 비잔티움의 이중성, 폭력성, 잔인성의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져서 여기에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실의 한부분에 불과하다. 비잔티움의 결점뒤에는 항상 비잔티움이 영감받은 위대한 비젼, 즉 하늘에 있는 하나님 통치의 살아있는 이미지를 여기 지상에서 세우기 위한 비젼이 보여진다.
제 3 장 비잔티움, Ⅱ : 대분열
우리는 변화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8세기의 우리와 동일하다.... 오, 우리가 신앙과 성만찬(Communion)속에서 연합되어 있을때, 당신은 다시 예전의 당신이 될수 있다.!
알렉시스 콤미아 코프
동방과 서방 기독교세계의 불화
콘스탄티노플의 성스런 지혜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Wisdom)에서 예배가 막 시작되고 있던, 1054년 어느 여름 오후, 추기경 훔베르트와 교황의 두명의 다른 대리인들은 건물안으로 들어가 성소에까지 나아갔다.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오지 않았다. 그들은 출교 교서를 제단위에 올려놓고 한 번 더 행진해 나아갔다. 그가 서쪽문을 통과 했을때,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말과 더불어 그의 발의 먼지를 털었다. '하나님이 보시고 심판하시리라' 한 집사가 큰걱정 속에서 그를 뒤따라 나갔고, 그에게 교서를 가져가도록 간청하였다. 훔베르트는 거절하였다. 그리고 교서는 길거리에 떨어졌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동방 정교회와 서방 라틴교회의 대분열의 시작을 묘사하기 위하여 취해지는 사건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지금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분열은 사실 그 시작이 정확히 날짜로 정해질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11세기 이전에 시작하여 그후 약간의 시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은, 점차적이며 오래고 복잡한 과정의 결과로써 일어난 사건이엇다.
이 오래고 복잡한 과정속에서 많은 다양한 영향들이 작용하였다. 분열은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요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분열의 근본적 원인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이다. 최종적으로 동방과 서방이 싸운것은 교리의 문제들이었다.-특별히 두가지 문제, 즉 교황의 주장들(Papal Claims)과 필리오케(Filioque)문제들-. 그러나 우리가 이 두가지 주요한 차이들을 좀더 세밀하게 보기 전에, 그리고 우리가 분열의 실제적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광범위한 배경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 동방과 서방사이에 첫번째 형식적인 분열이 있기 오래 전에, 양측은 서로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기독교 세계의 교제가 어떻게, 왜 깨어졌는가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점증하는 소외의 사실과 더불어 시작해야만 한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지중해 세계를 두루 여행했을때, 그들은 밀접한 정치적, 문화적 통일성(로마 제국)속에서 이동하였다. 제국은 종종 그들 자신의 언어와 방언을 가진 많은 다양한 민족적 집단들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집단들은 동일한 황제에 의해 통치되었다. 제국 전역에 걸쳐 교육받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광범위한 그레코-로마 문명이 있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제국의 거의 모든 장소에서 이해되었고, 다수의 사람들이 이 두언어를 말할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독교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초대교회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다음 세기들 속에서, 지중해 세계의 통일성은 점차 사라졌다. 정치적 통일이 먼저 사라졌다. 이론적으로는 아직 하나였던 3세기 말부터 제국은 일반적으로 동방과 서방이라는 두부분으로 나뉘였고, 각각 자신들의 황제 아래 있었다. 콘스탄틴은 이태리에 있는 옛로마와 나란히, 동방에 제2의 제국 수도를 세움으로 분열의 과정을 촉진시켰다. 그후 5세기 초에 야만인들의 침입이 있었다. 이태리를 제외하고 오래전부터 제국안에 많은 야만인들이 거주하였다. 서방은 야만인 추장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비잔틴인들은 아우구스투스와 트랴얀의 통치 아래있는 로마에 대한 생각들을 결코 잊을수가 없었고, 비잔틴인들은 아직도 그들의 제국을 이론상 우주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저스티니안은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메우고자 진지하게 시도했던 마지막 황제였다. 그리고 서방에서 그의 정복지는 곧 버려졌다. 동방 그리스와 서방 라틴의 정치적 통일은 야만인들의 침입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영구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6세기 후반과 7세기중에, 동방과 서방은 발칸반도에 있던 아바르족(the Avar)과 슬라브족(the Slav)의 침입으로 서로 더욱더 고립되었다. 하나의 다리로써 이용된 일리리쿰(Illyricum)은 동일한 방식으로 동방과 서방사이의 하나의 장벽이 되었다. 이 단절은 이슬람의 등장에 의해 한 단계 더 높아졌다. 로마인들이 한때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라 부른 지중해는 이제 대부분 아랍의 지배아래 넘어갔다. 동방과 서방 지중해의 문화적 경제적 접촉은 결코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접촉은 훨씬 더 어렵게 되었다.
성상파괴논쟁은 비잔티움과 서방의 분열에 더욱 더 기여하였다. 교황들은 성상옹호론자들의 입장을 지원하였고, 그래서 수십년동안 그들은 성상파괴론자인 황제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의 교제가 단절되었음을 발견하였다. 비잔티움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도움의 요청되는 상황 속에서 교황 스테판은 754년 북쪽으로 관심을 돌려 프랑크족의 통치자인 페핀을 방문하였다. 이것은 교황이 관계된 가장 결정적인 방향 전환에 있어서 첫번째 발걸음을 나타낸다. 지금까지 로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비잔틴세계의 일부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 방향전환의 결과들이 11세기 중반에서야 충분히 나타났지만, 이제 로마는 점차 프랑크족의 영향 아래로 들어갔다.
교황 스테판의 페핀 방문은 반세기후에 보다 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진다. 800년 성탄절에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족의 왕 찰스 대제를 황제로 대관하였다. 샤를마뉴는 비잔틴에 있는 통치자로 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아직도 제국 통일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비잔틴인들은 샤를마뉴를 침입자로, 교황의 대관을 제국 분열의 행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유럽을 가까이 끌어 당기는 대신에, 서방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탄생은 이전보다 더욱더 동방과 서방을 소원하게 만들었다.
문화적 통일은 간신히 연명되었으나, 대부분 약한 형태였다. 동방과 서방에서 학식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물려받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고전적 전통안에서 아직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점차 다양한 방법으로 이 전통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언어의 문제에 의해 더욱 어렵게 되었다. 교육받은 사람들이 2개 국어를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450년경 서부유럽에서 그리스어를 읽을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600년이후 비잔티움이 아직 로마제국이라 불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의 언어인 라틴어를 말하는 비잔틴인은 드물었다. 9세기 콘스탄티노플의 가장 위대한 학자인 포티우스(Photius)는 라틴어를 읽을수 없었다. 그리고 864년 비잔티움에 있는 '로마' 황제 미카엘 3세는 바질이 한때 '야만인 그리고 스키틱(Scythic) 혀'라고 기록한 언어를 부르기 까지 했다. 만약 그리스인들이 라틴어 작품 혹은 vice versa을 읽기 원하거나 라틴인들이 그리스어 작품을 읽기 원한다면, 그들은 단지 번역으로만 읽을수 있었고, 그들은 그렇게 하는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11세기 저명한 그리스 학자인 셀루스(Psellus)는 라틴 문학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개략적이어서 그는 시쎄로(Cicero)와 시이저(Caesar)를 혼돈하였다. 그들은 더이상 동일한 자료들을 사용하지도 동일한 책들을 읽지도 않았기 때문에, 동방 그리스와 서방 라틴은 더욱 더 분리되어 표류하였다.
샤를마뉴 궁정에서의 문화적 부흥이 초기에 강력한 反-그리스적 편견에 의해 특징지어져야 했던것은 불길하지만 의미있는 전례이다. 4세기에 유럽에는 하나의 기독교 문명이 있었다. 13세기에 유럽은 두개의 기독교 문명이 되었다. 아마도 문명의 분열이 처음으로 분명히 나타난것은 샤를마뉴의 통치기간이다. 그들 자신을 위하여 비잔틴인들은 그들 자신의 세계라는 사상으로 뭉쳤고, 반쪽인 서방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9세기와 그 다음 세기들에 있어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서방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진지하게 배우는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모든 프랑크족들을 야만인이나 그보다 더 못한 존재로 대충 생각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문화적 요소들은 교회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을수 없었고, 종교적 일치를 유지하는데 어렵게 만들었다. 문화적 정치적 소외는 샤를마뉴의 경우에서 볼수있는 것처럼, 너무 쉽게 교회적 논쟁으로 인도 되었다. 비잔틴 황제에 의해 정치적 영역에서 인정을 받지못함으로, 샤를마뉴는 재빨리 비잔틴 교회를 이단으로 고소함으로 보복하였다. 그는 희랍인들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Creed)(우리가 잠시 좀더 이야기 할)안에 필리오케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제 7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정들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샤를마뉴는 단지 그것의 참된 의미를 심하게 왜곡한 잘못된 번역을 통하여 이 결정들을 알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 半-성상파괴론자였던 것처럼 보인다.
동방과 서방에서 다양한 정치적 상황들이 교회로 하여금 다양한 외적 형태들을 취하도록 하였고, 그결과 사람들은 전투적 방식속에서 교회의 직제(order)를 생각하였다. 처음부터 동방과 서방 사이에 강조점의 차이가 있었다. 동방에서는 그 기초가 사도들에게 기원하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다. 동방에는 모든 감독들의 동등성, 교회의 집단적이고 협의회적(Collegial and conciliar) 본질에 대한 강력한 의미가 있었다. 동방은 교황을 교회안의 첫번째 감독으로 인정하였으나, 그를 동등한자 가운데 첫 번째(the first among equals)로 보았다. 한편 서방에서는 사도적 근거를 주장하는 유일한 하나의 위대한 교구(로마)만이 있었다. 그 결과 로마는 사도적 교구로써 간주되어졌다.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정들을 받아들였으나, 서방은 스스로 공의회들에서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교회는 대학이라기보다 군주제-교황의 군주권-처럼 보였다.
외관상 이러한 초기의 이탈은 정치적 발전들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볼때, 서방에서 야만인들의 침입과 그 결과로 일어난 제국의 붕괴는 서방교회의 자치적 구조를 상당히 강화시켰다. 동방에는 시민질서를 지탱하고, 법률을 집행하는 강력한 세속적 우두머리인 황제가 있었다. 야만인들의 칩입이후, 서방에는 모두 약간은 찬탈자들인 다수의 전사 제후들만이 있었다. 대부분 서유럽의 영적 정치적 삶에 있어서 연속성과 안정성의 요소로써, 일치의 구심점으로써, 행동할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교황권 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교황은 그의 교회적 추종자들과 더우기 세속통치자들에게 명령을 함으로써 그리스의 총대주교가 할수 없었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서방교회는 점차 동방의 4개의 총대주교좌(아마도 이집트를 제외하고)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지위를 얻었다. 서방에서는 군주제(Monarchy), 동방에서는 집단지도체제(Collegiality).
이것은 야만인들의 침입이 교회의 삶에 가져온 유일한 결과는 아니다. 비잔티움에는 신학에 활발한 관심을 갖는 다수의 교육받은 평신도들이 있었다. 평신도 신학자들은 항상 동방정교회에서 받아들여진 인물이 되었다. 몇몇의 가장 박식한 비잔틴 총대주교들은- 예를들면 포티우스- 그들이 총대주교에 임명되기 전에 평신도였다. 그러나 서방에서 암흑기를 통하여 살아남은 유일한 효과적인 교육은 교회에 의해 성직자들에게 제공된 것이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글을 읽을수 없었고, 더군다나 신학 논의의 전문용어들을 이해할수 없었기 때문에, 신학은 사제들의 영역이 되었다. 감독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의 지위를 제공하는 동안, 동방정교회는 중세 서방에서 일어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이 날카로운 구별을 알지 못하였다.
동방과 서방 기독교 세계 사이의 관계는 또한 공통된 언어의 결핍으로 더 어렵게 되었다. 양측은 더 이상 서로 쉽게 교제할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각자가 더 이상 상대방이 기록한 것을 읽을수 없었기 때문에, 오해는 보다 쉽게 일어났다. 공유할수 있는 논쟁의 영역은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동방과 서방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어갔고, 양측은 이것을 쉽게 경험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신앙안에서 일치와 신학적 학파의 다양성이 있었다. 처음에 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은 그들 자신의 방식속에서 각자 기독교적 신비에 접근하였었다. 약간의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릎쓰면, 라틴적 접근은 조금 더 실천적이었고 그리스는 조금 더 사변적이라고 이야기 할수 있다. 라틴적 사고는 법적 사상들, 로마법의 개념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신학을 예배의 맥락과 거룩한 성만찬의 빛(the light of the Holy Liturgy) 속에서 이해 하였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생각할때, 라틴인들은 신성(Godhead)의 통일성을 가지고 시작하였고, 그리스인들은 위격의 삼위성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십자가 달린 예수에 관하여 생각할때, 라틴인들은 그리스도를 기본적으로 희생자로,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도를 승리자로 생각하였다. 라틴인들은 구속을,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더 생각하였다. 동방에서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마찬가지로, 이 두 뚜렷한 접근방법들(역자주:동방과 서방)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았다. 각자는 서로를 보충하였고, 충만한 가톨릭 전통(the Fulliness of Catholic tradition)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녔다. 그러나 이제 양측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어갔다. 정치적 통일성은 없었고, 문화적 유대는 적었으며, 공통의 언어를 가지지 못하였다. 양측이 다른 견해속에 있는 가치를 잊어 버리고 고립속에서 자신의 접근방법을 ?아, 끝까지 그것을 고수한 것은 하나의 위험이었다.
우리는 동방과 서방에 있어서의 다양한 교리적 접근들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양측이 더이상 서로 보충하지 못하고, 직접적 투쟁으로 들어간 두가지 교리적 관점-교황의 주장들과 필리오케-이 있었다. 우리가 이전 장에서 언급했던 이 요소들은 그 자체로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 위에 심각한 흠집을 내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것 때문에 통일성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이두가지 관점은 어려움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불일치의 충만한 정도가 처음으로 적절하게 공개 된것은 9세기 중반이었으며, 이 두차이는 상당히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방과 서방의 다양한 정치적 상황들을 말할때, 우리는 이미 교황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그리고 우리는 서방교회의 중앙집권화되고 군주적 구조가 야만인들의 침입에 의해 어떻게 강화되었는지 보았다. 교황이 서방에서 유일한 절대적 권력을 주장하는 한, 비잔티움은 반대를 하지 않았다. 교황이 동방에서 방해하지 않는 한, 비잔틴인들은 서방교회가 중앙집권화되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은 그의 사법관할권에 대한 직접적 권력을 서방 뿐만 아니라 동방에까지 확대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동방 총대주교좌내에 이 주장을 실행하고자 하자, 싸움이 일어났다. 그리스인들은 교황에게 명예에 있어서 우선권을 인정하였으나, 교황이 그의 직무로써 생각한 보편적 수위권(the unversal supremacy)은 인정하지 않았다. 교황은 무오류성을 그 자신의 특권으로써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 결정은 교황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감독들을 대표하는 공의회에 의존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시적 교회 조직의 두가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교황권에 대한 동방정교회의 태도는 20세기의 저술가이며 니코메디아의 대주교,니케타스(Nicetas)에 의해 경이롭게 표현되었다.
나의 친애하는 형제여! 우리는 로마교회를 다섯개의 자매 총대주교좌들 가운데 최고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리에 대한 그녀의 권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가 자랑을 통하여 그녀의 지위에 속하지 않는 군주권을 취하였을때, 그녀는 그녀 자신의 행동에 의해 우리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였다. ..... 우리와 논의하지 않고 심지어 우리의 승인없이 그녀로부터 문서화된 교령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수 있겠는가? 만약 그의 높은 영광의 보좌위에 앉은 로마의 제사장이 우리를 호통치고자 한다면, 소위 높은곳에서 우리에게 그의 명령을 던진다면, 그리고 만약 그가 우리와 대화하지 않고 그 자신의 자의적 즐거움으로 우리를 심판하고 심지어 우리와 우리의 교회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어떤 종류의 형제애, 혹은 어떤 종류의 부성애가 이와 같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아들의 아니라 노예가 되어야하고, 로마 교구는 아들의 경건한 어머니가 아니라, 노예의 거칠고 오만한 여주인이다.
모든 문제가 개방되어지자, 문제는 동방정교회인들이 12세기에 어떻게 느끼는가였다. 초기의 세기들 속에서 교황권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아직 논쟁으로 첨예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동일하였다. 850년까지 로마와 동방은 교황의 주장들에 대하여 개방된 투쟁을 피하였다. 그러나 관점들의 차이는 부분적으로 감추어진것에 대하여 심각하였다.
두번째 커다란어려움은 성령의 출원문제(Filioque) 였다. 그 논쟁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내에서 성령에 관한 언어들을 포함하였다. 근본적으로 그신조는 '나는 성부로부터 나시고 성부와 함께 그리고 성자와 더불어 예배를 받고 함께 영광스럽게 되신 생명의 시여자시며, 주님이신 성령을 믿습니다'고 기록되었다. 이 기본적 형식은 오늘날까지 동방에 의해 변함없이 인용된다. 그러나 서방은 외부적인 절인 '그리고 아들로부터'(라틴어로 Filioque)를 삽입하였다. 그 결과 니케ㅇ-콘스탄티노플신조는 이제 '성부와 성자로부터 출원하신 분'이라고 읽는다. 이 추가가 처음 만들어졌을때와 장소에서는 분명치 않으나, 그것은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한 하나의 안전판으로 스페인에서 기원한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 이전이 아니라면, 스페인교회는 제3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필리오케를 삽입하였다. 스페인에서부터 그 추가는 프랑스로 퍼졌고, 그이후에는 샤를마뉴에 의해 환영되고 半성상파괴 프랑크푸르트 공의회(794)에서 독일로 퍼졌다. 샤를마뉴의 궁정에서 그리스인들이 원래의 형태대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를 재인용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처음으로 필리오케를 논쟁점으로 만든 사람들은 샤를마뉴의 궁정에 있는 작가들이였다. 그러나 전형적인 보수주의와 더불어 로마는 11세기의 초기까지 필리오케 없이 계속적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사용하였다. 808년 교황 레오 3세는 그 자신이 필리오케는 교리적으로 건전하다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는 그 신조의 원문을 함부로 고친 것은 실수로 생각한다는 편지를 샤를마뉴에게 보냈다. 레오는 사려깊게 필리오케 없이, 은으로 장식된 판에 새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가졌으며, 성베드로 성당안에 세웠다. 당분간 로마는 프랑크족과 비잔티움의 중재자로 행동하였다.
850년에야 비로소 그리스인들은 필리오케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들의 반작용은 매우 비평적이었다. 동방정교회는 두가지 이유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에 대한 이러한 추가를 반대하였다.(그리고 지금도 반대한다.) 우선, 그 신조는 전체교회의 공통의 소유이다. 그리고 만약 어떠한 변화든지 그 신조 속에서 이루어 진다면, 이것은 단지 에큐메니칼 공의회에 의해서 이루질수 있다. 동방과 협의없이 신조를 바꿈으로, 서방은 (콤미아코프가 표현한것처럼) 형제살해죄와 교회일치를 반대하는 죄를 범한것이다. 두번째로, 대부분의 동방정교회는 필리오케가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출원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성령이 성자에게서도 출원한다고 말하는것을 이단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필리오케는 본질적으로 이단적이지는 않고, 만약 그것이 적절히 이해된다면, 하나의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신학적 견해로 허용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몇몇의 동방정교회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마저도 필리오케를 아직 권위를 가지지 못한 추가로 생각하였다.
교황권과 필리오케라는 두가지 주요한 문제들 이외에, 동방과 서방사이에 투쟁을 야기하는 교회의 예배와 훈련이라는 보다 낮은 차원의 문제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결혼한 성직자를 인정하였으나, 라틴인들은 제사장적 독신을 주장하였다. 양측은 금식에 대하여 다른 규칙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성만찬에서 발효한 빵을 사용하였고, 라틴인들은 발효하지 않은 빵 혹은 무교병(azymes: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쓰는 빵)을 사용하였다.
850년경까지 동방과 서방은 아직 서로 충분한 교제가운데 있었고,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문화적이고 정치적 분열들은 점증하는 소외와 결합되었으나, 아직 대분열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양측은 교황권에 대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형태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인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아직 충분히 분열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1190년 안디옥의 총주교이며교회법의 권위자인 테오도르 발자몬(THeodore Balsamon)이 매우 어렵게 문제들을 바라보았다.
여러해동안(그는 얼마나 되었는가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서방교회는 다른 4개의 총주교관구와 영적 교제에 있어서 나누어져 있었고 동방정교회와 소외되어있었다....... 그래서 라틴교회는 자신을 우리로부터 분리하는 교리들과 관습들을 삼가하고, 동방정교회와의 교제속에서 교회법에 따를것을 먼저 선포하지 않는한, 교제는 이루어질수 없다.
발자몬의 눈으로볼때, 교제는 깨어졌다. 동방과 서방사이에 끝없는 분열이 존재하였다. 둘은 더이상 하나의 가시적 교회를 형성할 수 없었다.
소원에서부터 분열로의 변천속에서, 4개의 사건들이 특별히 중요하다. 포티우스와 교황 니콜라스 1세 사이의 싸움(일반적으로 포티우스주의자들의 분열로 알려졌다.:동방은 그것을 니콜라스의 분열로 부르기를 좋아한다), 1009년 Diptychs의 사건, 1053-4년 화해의 시도와 그것의 비참한 결과, 십자군.
소원으로부터 분열까지:858-1204
테오도라 아래 성상주의자들의 승리한 후 15년이 지난 858년, 콘스탄티노플의 새로운 총대주교는 동방정교회에 위대한 성 포티우스로 알려진 포티우스가 임명되었다. 그는 '가장 뛰어난 사상가, 가장 두드러진 정치가,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써 직무를 맡는데 가장 노련한 외교가'로 불려진다. 그의 즉위후 곧 그는 교황 니콜라스 1세와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858-67). 그 이전의 총대주교인 성 이그나티우스는 황제에 의해 추방되었고 추방기간중 강압아래 사임하였다. 이사임을 유효한것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이그나티우스의 지지자들은 포티우스를 찬탈자로 생각하였다.포티우스가 교황에게 그의 즉위를 선언하는 편지를 보냈을때, 니콜라스는 포티우스를 인정하기전에 새로운 총대주교와 이그나티우스파 사이의 투쟁을 좀더 조사할것을 결심하였다. 따라서 861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을 보냈다.
포티우스는 교황과 논쟁을 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사절단을 커다란 경의를 가지고 대하였고, 이그나티우스와 자신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들이 사회를 보도록 초청하였다. 사절단들은 동의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이 포티우스가 합법적인 총대주교라고 결정한 공의회의 나머지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절단이 로마에 돌아왔을때, 니콜라스는 그들이 그들의 권한을 벗어났다고 선언하고, 그들의 결정을 부인하였다. 그후 그는 로마에서 그사건을 스스로 재심리하였다. 863년 그의 주재아래 열린 공의회는 이그나티우스를 총대주교로 인정하였고, 포티우스는 모든 사제적 권위로부터 퇴위된다고 선포하였다. 비잔틴인들은 이 선고에 주목하지 않았고, 교황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방된 골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들사이에 존재하였다.
이 논쟁은 명백히 교황의 주장들(Papal Claims)을 수반하였다. 니콜라스는 그의 교구의 특권이라는 고상한 생각을 가진 위대한 개혁적인 교황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서방에서 모든 감독들위에 절대적인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것을 행하였다.그러나 그는 이 절대적 권력을 동방에까지 확장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865년의 편지에서 그것을 주장한 것처럼, 그는 '모든 지상 즉 모든 교회 위에'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정확하게 비잔틴인들이 허락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포티우스와 이그나티우스사이의 논쟁을 대면한 니콜라스는 그가 보편적 사법관할권에 대한 그의 주장을 강화할 황금의 기회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양쪽 모두 그의 중재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포티우스가 교황의 사절단에 의한 조사에 자발적으로 복종하였고, 그의 행동이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인정으로 여겨질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다른 이유들 가운데) 니콜라스가 그의 사절단의 결정들을 취소한 이유이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 비잔틴인들은 기꺼이 로마에 호소하기를 허락했으나, 사르디카 공의회(the Coucil of Sardica)의 교회법 3장이라는 특별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항복하였다.이 교회법은 만약 유죄 선고 아래 있다면, 그는 로마에 호소할수 있고, 교황은 원인을 살펴보고 재심을 명할수 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재심은 로마에서 교황자신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죄 선고 받은 감독의 교구와 인접한 지역의 감독들에 의해 행해진다. 그래서 비잔티움인들은 그의 사절단의 결정들을 바꾸고 로마 자체에서 재심을 주장하는 니콜라스가 이 교회법의 규정을 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그의 행동을 다른 총대주교의 사건들 속에서 부당하고 비교회법적인 방해로 간주하였다.
곧 교황의 주장들과 필리오케가 논쟁속에 연류되었다. 비잔티움과 서방(주로 독일인들)은 모두 슬라브족들 가운데 위대한 선교적 모험을 진수시키고 있었다. 동방과 서방으로 부터의 두 선교적 진출은 곧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와 독일인 선교사들이 스스로 동일한 대륙에서 사역하고 있음을 발견 하였을때, 두 선교단체들이 광범위하게 다른 원칙들 위에서 운영되었기 때문에 충돌을 피할수 없었다. 충돌은 자연적스럽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그리스인이 아니라 독일인들에 의해 사용된 필리오케의 문제를 전면으로 가져왔다. 투쟁의 주된 지점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서로 그들의 사법권의 영역에 추가하고자 했던 나라인 불가리아였다. 칸 보리스(The Khan Boris)는 처음에는 독일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요청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비잔틴인들의 침입과 더불어 위협을 받게 되자, 그는 그의 정책을 변경하여 865년경에는 그리스 성직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보리스는 불가리아에서 교회가 독립되기를 바랬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이 교회의 자치권을 거부하자, 그는 좀더 나은 조건이라는 희망속에서 서방에 호소하였다. 불가리아에 자유로운 손(자치권)을 제공한 라틴선교사들은 비잔틴적 실천이 그들 자신의 것과 다른 것들(결혼한 성직자, 금식의 규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필리오케)을 지적하면서, 신속하게 그리스인들에게 격렬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로마에서 필리오케는 아직 사용되지 않았으나, 니콜라스는 독일인들이 불가리아에서 그것의 삽입을 주장하였을때, 그들에게 충분한 지지를 제공하였다.808년 프랑크족과 그리스인사이를 중재를 했던 교황은 이제 더이상 중립적이지 않았다.
포티우스는 당연히 비잔틴제국의 경계위에 있는 발칸반도에서 독일인들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에 의해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이제 강제적으로 그의 주목을 끌게한 필리오케 문제에 의해 더욱 놀랐다. 867년 그는 행동을 취하였다. 그는 결국 필리오케를 비난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회람서신을 동방의 다른 총대주교들에게 보냈다. 포티우스는 종종 이 편지 때문에 비난을 받아왔다. 심지어 위대한 로마 가톨릭 역사가이며, 포티우스에게 상당히 동정적인 프란시스 드보르니크(Francis Dvornik)도 이 경우의 그의 행동을 무익한 공격이며, '그 실책은 경솔하고, 성급하였으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만약 포티우스가 정말로 필리오케를 이단적이라고 생각하였다면, 그의 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그가 그밖의 무엇을 할수있었을까 ? 필리오케를 논쟁점으로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 포티우스가 아니라 60년전 샤를마뉴와 그의 학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최초의 침략자는 동방이 아니라 서방이다. 포티우스는 그의 편지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는 교황 니콜라스를 출교하고 그를 주님의 포도원을 약탈한자로 선언하였다.
이 논쟁의 이 결정적인 지점에서, 전체 상황이 갑자기 변하였다. 같은해(867) 포티우스는 황제에 의해 총대주교좌로부터 폐위되었다. 이그나티우스가 다시 총대주교가 되었고, 로마와의 교제가 회복되었다. 869-70년 反-포티우스 공의회로 알려진 또다른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고, 867년 결정을 바꾸어 포티우스를 정죄하고 파문하였다. 후에 서방에서 제8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로 간주된 이 공의회는 비록 다음 회기에 103명으로 늘어났으나 인상적이지 못한 총 12명의 감독들로 개회 되었다.
그러나 도래하는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869-70년 공의회는 황제가 불가리아 교회의 지위를 해결하도록 요청하였고, 놀라웁게도 그는 그것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로마가 비잔틴보다 그에게 자치권을 덜 허락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리스는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870년부터 독일 선교사들은 추방되었고 필리오케는 더이상 불가리아에서 들려지지 않았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이그나티우스와 포티우스는 서로 화해하였고, 이그나티우스가 877년 죽자, 포티우스는 다시 그를 계승하여 총대주교가 되었다. 879년 그러나 다른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이공의회는 10년전 빈약했던 反-포티우스 모임과는 현저히 다르게 383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869년 공의회는 파문되었고 포티우스에 대한 모든 정죄는 사라졌다. 이 결정들은 로마에서 저항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포티우스는 승리를 장식했고 로마에 의해 인정되었으며, 교회적으로 불가리아의 주인이 되었다. 최근까지 제2차 포티우스의 분열이 있었다고 생각되었으나, 드보르니크 박사는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이 제 2차 분열이 하나의 신비라고 주장한다. 포티우스의 재위 후기에 콘스탄티노플과 교황사이에 교제가 유지되었다. 이 당시 교황, 요한 8세(872-82)는 프랑크족들과 친하지 않았으며 필리오케문제를 억압하지 않았고, 그는 동방에 교황의 권리들을 강화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니콜라스의 정책이 얼마나 심각하게 기독교세계의 일치를 위협했는지 알았다.
그래서 분열은 외적으로 치료되었다. 그러나 니콜라스와 포티우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도록 강요했던 두가지 커다란 차이점에 관한 실질적 해결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문제들이 일시적으로 수습되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항상 동방에서 성자, 교회의 지도자, 그리고 신학자로 존경을 받는 포티우스는 과거에 서방에 의해 덜 열광적으로 분열의 주인공으로 간주되었다. 그의 좋은 성품들이 이제 좀더 광범위하게 인정 되었다. 그래서 드보르니크 박사는 그의 기념비적인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만약 나의 결정이 옳다면, 우리는 다시 포티우스를 그의 적들을 용서하기에 충분한 관용을 지닌 위대한 교부,박식한 인본주의자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인정하고 화해를 향한 첫 발걸음을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11세기 초에 필리오케에 대한 신선한 충돌이 있었다. 마침내 교황은 그 추가를 채택하였다. 1014년 로마에서 거행된 황제 헨리 2세의 대관식에서, 그 신조는 삽입된 형식으로 찬미되었다. 4년전인 1009년 새롭게 선출된 교황, 세르기우스 4세는 비록 확실하지 않지만, 필리오케를 포함하고 있을 편지를 콘스탄티노플에 보냈다. 이유야 무엇이었는지, 또한 세르기우스라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Diptychs속에 새로운 교황의 이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거기에는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정통으로 인정하는 다른 총대주교들의 이름을 포함하며, 각 총대주교들에 의해 보존되는 목록이 있었다. 그 Diptychs는 교회 일치의 가시적 표지였으며, 사려깊게 그것으로부터 개인의 이름을 생략하는 것은 그와 친교속에 있지 않다는 선언과 같았다. 1009년 이후 교황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의 Diptychs속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기술적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들은 그때부터 친교속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술성을 더욱 강제하는 어리석음이 있었다. Diptychs는 빈번히 불완전하였고 그래서 교회 관계에 관한 오류없는 안내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1009년 이전 콘스탄티노폴리탄 목록들은 단순히 그들의 회기중에 새로운 교황들이 자신을 동방에 알리는데 실패 하였기 때문에 종종 교황의 이름을 빠뜨렸다. 1009년의 이 생략은 로마에서 논평을 하지 않도록 야기시켰고,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사람들은 곧 교황의 이름이 Diptychs에서 왜 그리고 언제 빠졌는지 잊어버렸다.
11세기가 지나가자, 새로운 요소들이 교황과 동방 총대주교들 사이에 관계를 더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전 세기는 로마 교구에게는 중대한 불안정성과 혼돈의 시기였다. 추기경 바로니우스가 10세기를 교황권의 역사에 있어서 철과 납의 시대였다고 부른 것은 옳다. 독일의 영향아래 로마는 이제 자신을 개혁하고, 힐데브란트(교황 그레고리 7세)와 같은 사람의 통치를 통하여, 로마는 서방에서 결코 이전에 성취해 보지 못한 권력을 획득하였다. 개혁된 교황은 자연적으로 니콜라스가 만든 보편적 사법관할권에 대한 주장들을 부활시켰다. 비잔틴인들은 자신들의 편에서 대부분 약하고 조직화되지 않은 교황권을 다루는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키는것이 어려움을 발견하였다. 비잔틴 이태리에서 노르만족의 군사적 침입, 그리고 11, 12세기중에 동부지중해에 속한 이태리 해안 도시들의 상업적 침입과 같은 정치적 요소들에 의해 문제들이 더욱 더 악화되었다.
1054년 혹독한 싸움이 있었다. 노르만족은 비잔틴이태리에 있는 그리스인들에게 라틴 관습에 순응할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미카엘 셀루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는 대신에 콘스탄티노플의 라틴교회들이 그리스 관습들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1052년 그들이 거부했을때, 그는 그들(교회)를 폐쇠했다. 이것은 아마도 거칠었으나, 총대주교로써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하기에 충분한 권리가 있었다. 미카엘과 그의 지지자들이 특별히 반대했던 관습들 가운데에는 성만찬에서 라틴인들의 무교병 혹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의 사용이었다. 이 문제는 9세기의 논쟁 가운데에는 없었다. 그러나 1053년 세루라리우스는 좀더 화해적인 태도를 취하고, 교황 레오 9세에게 편지를 써, Diptychs에 교황의 이름을 회복시키겠다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답하여, 그리고 논쟁된 그리스와 라틴 관습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1054년 레오는 세명의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보냈다. 그들 가운데 실바 칸디다의 감독인 훔베르트가 우두머리였다. 추기경 훔베르트의 선택은 불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셀루라리우스는 고지식하고 비타협적인 성질의 사람이었으며, 그들의 상호만남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선한 뜻을 증진시키지 못하였다. 사절단이 셀루라리우스를 방문하였을때, 그들은 좋은 인상을 만들지 못하였다. 교황이 준 편지를 그에게 내어 밀고, 일반적 인사도 없이 물러갔다. 레오에 의해 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편지자체는 사실상 훔베르트에 의해 작성되었고, 특별히 음조에 있어서 불친절하였다. 그후 총대주교는 사절단들과 더 만나기를 거부하였다. 결과적으로 훔베르트는 인내를 상실하였고, 성소피아 성당의 제단위에 셀루라리우스에 대한 파문교서를 올려놓았다. 이 문서 속에 다른 나쁜 요소들 가운데에 훔베르트는 그리스인들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부터 필리오케를 생략한 것을 저주하였다. 훔베르트는 즉각 그의 행동에 대한 어떤 해명도 없이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그리고 이태리에 돌아오자 마자, 그는 모든 사건을 로마 교구의 위대한 승리로 묘사하였다. 셀루라리우스와 그의 대회(Synod)는 훔베르트를 파문함으로 보복하였다.(그러나 로마교회자체를 파문한것은 아님) 화해의 시도는 이전보다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그러나 1054년이후에도 동방과 서방의 친절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기독교세계의 두부분은 아직 그들사이에 커다란 분열의 심연은 심각하지 않았고, 양측의 사람들은 아직까지는 오해들이 많은 어려움없이 일소될수 있으리라 희망하였다. 그 논쟁은 동방과 서방에서 일반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남아있었다. 분열을 무한정으로 만든것은 십자군이었다. 그들은 증오스럽고 씁쓸한 새로운 정신을 도입하였고 전체문제를 대중적 차원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군사적 관점으로, 십자군은 대성공으로 시작하였다. 안디옥은 1098년, 예루살렘은 1099년 터키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첫번째 십자군은 만약 피로물든 것으로 본다면, 빛나는 성공이었다. 십자군들은 안디옥과 예루살렘에 라틴 총대교구를 세우기 위해 나아갔다. 이것은 그 당시에 예루살렘 교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이해할만 하였다. 지난 몇년간 키프러스에 추방되어 살고있는 그리스 총대주교가 예루살렘을 관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 자체내에서 라틴인 뿐만 아니라 그리스인 모든 백성들은 처음으로 라틴 총대주교를 그들의 수장으로 받아들였다. 1106-7년 예루살렘에 온 러시아 순례자인 대수도원장 다니엘 Tchernigov는, 성스런 불(Fire)의식에서 그리스 등불이 기적적으로 빛을 발하고, 라틴 등불이 그리스로부터 점화되는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기록하였지만, 그리스인과 라틴인들이 성스런 장소에서 협력하여 함께 예배하는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안디옥에서 십자군들은 실재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그리스 총대주교를 발견하였다. 곧바로,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도망 갔으나, 그지역의 그리스인들은 십자군들이 그들의 장소에 세운 라틴 총대주교를 기꺼이 인정 하지 않았다. 그래서 1100년 부터 사실상 안디옥에는 지역적 분열이 존재하였다. 1187년 이후, 살라딘(Saladin)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성스러운 땅에서의 상황이 나빠졌다. 팔레스틴내에 거주하는 두 경쟁자들은 이제 그들 가운데 있는 기독교인들을 양분하였다.-아크레(Acre)에 라틴 총대주교, 예루살렘에 그리스 총대주교. 안디옥과 예루살렘에서 이러한 지역적 분열은 불길한 발전이었다. 로마는 매우 멀었다., 만약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싸운다면, 그것은 시리아와 팔레스틴의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실재적 차이를 만들겠는가? 그러나 두 경쟁적 감독들이 동일한 권좌를 주장하고, 두 적대적인 집단들이 같은 도시에 존재하자, 분열은 일반 신자들이 직접적으로 연류된 즉각적 실재가 되었다. 논쟁을 단지 교회지도자들에게만 아니라, 기독교 회중들의 것으로 전환시킨 것은 십자군이었다. 십자군은 분열을 지역적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1204년 제 4차 십자군 기간중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 상황이 더욱 더 악화되었다.십자군들은 원래 이집트를 향하여 갈예정이었으나, 비잔틴의 폐위된 황제 이삭 안젤루스(Issacc Angelus)의 아들, 알렉시우스(Alexius)에 의해 설득되어 그와 그의 아버지를 권좌에 복위시키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길을 돌렸다. 비잔틴 정치에 서방의 간섭은 불행 하였으며, 결국 그리스인들을 표리부동하다고 생각함으로 혐오감을 받은 십자군들은 인내를 상실하고 그 도시를 약탈하였다. 동방기독교세계는 소름끼치는 이 삼일간의 약탈을 결코 잊을수가 없다. 니케타스 쵸니아테스(Nicetas Choniates)는 다음과 같이 저항하였다. '그들의 어깨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 이 사람들과 비교하면, 차라리 사라센인들이 더 자비롭고 친절하였다.' 스티븐 룬시만(Steven Runciman)경은 '십자군들은 평화를 가져온것이 아니라 검을 가져왔다.'고 말하였다. 이 오랜 교리적 불일치는 이제 강렬한 민족적 증오, 서방의 침략과 신성모독에 저항하는 원한과 분노에 의해 그리스인들에게 강화되었다. 1204년이후 동방과 서방기독교가 둘로 나뉘어졌다는 것은 의심할수 없는 사실이다.
동방정교회와 로마는 각각 그들 사이에 일어난 교리적 논쟁들에 있어서 자신들이 정당하고 상대편이 잘못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분열이후 로마와 동방정교회는 각각 참교회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각자는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믿는 반면, 슬픔과 회개함으로 과거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양측은 그들이 분열을 방지할수 있었고, 해야만 했다는 정직한 인식속에 있어야 한다. 양측은 인간적 차원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예를들어, 동방정교회는 비잔틴기간동안 서방을 경멸하고 교만했던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반성하여야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라틴 거주자들이 비잔틴 사람들에 의해서 대량학살되었던, 1182년 폭동과 같은 사건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비난하여야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측에서 볼때 1204년의 약탈과 비교될수 있는 행동은 없다.)그리고 각측은 유일한 참교회라고 주장하는 대신에, 인간적 차원에서 교회가 분리에 의해 심하게 손상되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동방 그리스인들과 서방 라틴인들은 서로서로를 필요로하였고 지금도 필요하다. 양측에게 대분열은 커다란 비극으로 증명되었다.
일치에 있어서 두가지 시도 : 헤시케스트(Hesychast)논쟁
1204년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짧은기간동안 라틴왕국을 세웠다. 이왕국은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수도를 재탈환한 1261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비잔티움은 2세기이상을 살아남았고, 이시간은 훌륭한 문화적, 예술적 그리고 종교적 부흥기였다. 그러나 정치,경제적으로 회생한 비잔틴 제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고, 동방으로부터 비잔틴제국위에 밀어닥친 터키군대에 직면하자 더욱 희망이 없는것 같았다.
두가지 중요한 시도가 13세기에 처음으로 그리고 14세기에 두번째로 동방과 서방 기독교사이에 재결합을 확보하기 위해 취해졌다. 이 첫번째 시도 배후에서 움직이는 정신은 콘스탄티노플을 재탈환한 황제 미카엘 8세(1259-82년 재위)였다. 의심할 바 없이 종교적 바탕위에서 기독교 일치를 진지하게 갈망하는 동안에도, 그의 동기는 또한 정치적인 것이었다. 시실리의 통치자인 앙주의 찰스에 의해 공격을 받자, 그는 교회의 일치를 통해 가장 견고해질수 있는 교황의 지지와 보호를 절망적으로 필요로 하였다. 재연합 공의회가 1274년 리용에서 열렸다. 참석한 동방 사절단은 교황의 주장들을 인정하였고 필리오케를 지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암송하였다. 그러나 그 재연합은 지면상의 동의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동의는 불가리아와 다른 동방정교회 국가들 뿐만 아니라, 비잔틴교회내의 압도적인 다수 성직자와 평신도에 의해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리용공의회에 대한 일반적 반작용은 황제의 여동생에 의해 언급된 말들 속에 요약된다. "동방정교회의 순수성이 소멸하느니, 차라리 나의 오빠의 제국이 소멸하는것이 더 낫다." 리용의 재연합은 미카엘의 계승자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미카엘 자신도 그의 배교 때문에 기독교적 방식으로 매장되지 않았다.
한편 동방과 서방은 그들의 신학과 기독교적 삶을 이해하는 그들의 전체적 방식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사이가 벌어졌다. 비잔틴은 4세기 그리스 교부들의 사상과 언어를 사용함으로 교부적 분위기에서 계속 살았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교부들의 전통은 스콜라주의에 의해 대치되었다. - 철학과 신학에 대한 이 위대한 분석은 12,13세기에 이루어졌다. 서유럽 신학자들은 이제 새로운 사상 범주, 새로운 신학적 방법, 그리고 동방이 이해하지 못한 새로운 전문용어를 사용하였다. 양측은 영구적으로 증가하는 범위에까지 공통된 '보편적 강화(universe of discourse)'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 자신의 측면에서 비잔티움은 또한 이 과정에 기여하였다.여기에는 또한 비록 스콜라적 혁명만큼 급진적인 것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이 참여하거나 공유하지 못한 신학적 발전들이 있었다. 이 신학적 발전들은 주로 헤시케스트 논쟁과 연관되어 있었는데, 이 논쟁은 14세기 중반에 비잔티움에서 일어난 것으로, 동방정교회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본성과 기도의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
헤시케스트 논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잠시 동방 신비신학의 초기역사에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신비신학의 주된 모습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215년 사망)과 캅바도키아 교부중 특별히 니싸의 성,그레고리에 의해 4세기에 발전된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253/4년 사망)의 사상, 그리고 이집트 사막에서 수도승이었으며 캅바도키아인들의 제자였던 본도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신비적 전통은 특별히 클레멘트와 그레고리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이 긍정적 용어들보다 부정적 용어로 묘사되는 부정적(apophatic)접근법의 강력한 사용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신으로 적절하게 이해될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 적용되는 모든 언어는 불가피하게 부정확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하여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거부하고, 단순히 그가 아닌것을 진술하는것-이 오류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 니싸의 그레고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모든 지식을 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은 불가시적이고 불가해성의 어둠에 의해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과 비젼은 이 방식 속에서 존재한다.'
부정적 신학은 소위 '디오니시안'의 저술들속에서 그 고전적 표현을 나타낸다. 수세기 동안, 이 책들은 아테네에서 바울의 회심자(행17:34)인, 아레오파기트의 성 디오니시우스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실상 아마도 5세기 말경 시리아에서 살았고, 비-칼세돈주의에 동정적인 학파(circles)에 속하였을 무명의 저자에 의한 것이다. 고백자 성 막시무스(662년 사망)는 디오니시우스주의 저술들에 관한 논평을 작성하여, 그들에게 동방정교회 신학속에서 영구한 지위를 보증해주었다. 디오니시우스는 또한 서방에 강력한 영향력을 주어왔다. 디오니시우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숨마(Summa)에서 1,760번 인용된 것으로 계산된다. 한편 13세기 영국 연대기 작가는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이 '야생사슴'처럼 영국을 통과하여 질주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적 언어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반복되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하나님은 무한하며, 불가해적이며, 그에 관하여 이해할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무한성과 불가해성이다....하나님은 실존하는 것들의 계층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 넘어에, 심지어 존재 그 자체를 넘어 존재한다.'
신적 무지능력(unknowability:역자주:신에 관해 알수 없다.)에 관한 이 강조는 첫번째로 하나님에 관한 어떠한 직접적 경험도 배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부정적 접근법을 사용된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하나님의 완전한 초월성을 지적하기 위한 철학적 고안물로서가 아니라, 보다 더 본질적으로 기도를 통하여 그분과 연합하고자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았다. 부정들(negations)은 하나님에 관한 긍정적 진술들을 제한하는데 봉사할 뿐만 아니라, 신비신학자가 모든 그의 혹은 그녀의 존재의 충만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신비안으로 도약하고자 할때 쓰이는 도약판 혹은 트램폴린(trampoline:도약을 위해 쓰이는 운동기구)으로 역할을 한다. 이것이 예를들면, 니싸의 그레고리,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막시무스를 비록한 그들 모두가 부정적 접근법을 과중하게 이용하게 된 이유이다. 그들에게 '부정의 길'은 동시에 '연합의 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완전히 초월적인 그 분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만남을 가질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동시에 알수도 있고 알수 없을 수도 있도록 존재하는가?
이것은 14세기 헤시케스트들이 직면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이름은 그리스 단어, 헤시키아(hesychia)에서 유래하였고, 내적 침묵을 의미한다. 헤시케스트는 가능한한 모든 이미지들, 단어들 그리고 산만한 생각을 제거한 침묵의 기도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또다른 하나가 그의 첫번째 질문과 관계되어 있다. 기도 가운데 육체는 어디에 있는가? 오리겐처럼 에바그리우스는 종종 너무 지나치게 플라톤주의로부터 빌려왔다. 그는 기도를 지적 용어속에서 전인이라기 보다는 정신의 활동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는 구속과 신화의 과정속에서 인간육체에 대한 긍정적 역할을 허락하지 않는것 같다. 그러나 정신과 육체사이의 불균형은 또 다른 저술, 마카리안 호밀리스(Macarian Homilies) 속에서 시정되었다.(이것은 전통적으로 이집트의 성 마카리우스(300-90?)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들이 380년대에 시리아나 아마도 소아시아에서 기록된것으로 생각된다.) 마카리안 호밀리스는 인간의 인격에 대한 보다 더 성서적인 생각을 지지하였다.- 영혼이 육체속에 갇혀있는 것(그리스 사상처럼)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함께 단일하고 연합된 전체로- 에바그리우스가 정신 혹은 지성(그리스어로 nous)을 말할때, 마카리우스는 마음에 대한 히브리적 사상을 사용하였다. 강조의 변화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음은 단지 지성이 아니라, 의지 감정 그리고 심지어 육체인 전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마카리안적 의미에서 '마음'을 사용한 동방정교회는 종종 '마음의 기도'에 관하여 말한다.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군가가 먼저 입술을 사용하여 기도를 시작할때, 그 사람은 말해진것의 의미를 알기위해 의식적으로 지적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기억을 보존하고 계속적으로 기도 한다면, 지성과 마음은 연합되어진다. '마음의 장소'를 발견함으로, 영은 '마음속에 내주하는 힘'을 얻는다. 그래서 기도는 '마음의 기도'가 된다. 이것은 단지 입술에 의해 이야기된것, 정신에 의해 생각된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존재-입술, 지성, 감성, 의지, 그리고 육체에 의해 자발적으로 제공된 것이다. 그 기도는 완전한 의식으로 충만해 있고, 더이상 강제되지 않고 스스로 말한다. 이러한 마음의 기도는 단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진 선물이다.
동방정교회 저술가들이 '마음의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할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특별한 기도인 예수의 기도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스의 영성주의적 저술가들 가운데, 먼저 포티스(Photice)의 디아도커스(Diadochus:5세기 중반)와 후에 시나이 산의 성 요한 클리마쿠스(Climacus:579?-649?)는 특별히 가치있는 기도의 형식으로 '예수'라는 이름을 끊임없이 반복하거나 회상할것을 추천하였다. 시간의 과정속에 그 이름에 대한 초대는 예수의 기도로 알려진 짧은 문장으로 구체화된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13세기경(만약 그이전이 아니라면) 예수의 기도를 암송하는 것은 특정한 육체적 운동과 관계되었고, 집중을 돕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호흡은 조심스럽게 그 기도에 맞춰져 규칙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특별한 몸의 자세 - 즉 머리는 숙이고, 턱은 가슴에 기대고, 눈은 심장에 고정시킴-가 추천되었다. 이것은 종종 '헤시케스트 기도법'으로 불려지나, 헤시케스트들에게 이 운동은 기도의 본질을 구성하는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 자체를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집중을 돕는 것, 일부에게만 부수적으로 유용하나 모든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헤시케스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데에 기계적 수단은 없으며, 자동적으로 신비적 상태에로 인도하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잔틴의 헤시케스트들에게, 신비적 경험의 절정은 신(Divine)과 창조되지 않은 빛(Uncreated Light)에 대한 환상이었다. 신약 신학자이며, 비잔틴 신비신학의 거장인, 성 시메온(Symeon:949-1022)의 저작들은 이 '빛의 신비주의'(Light mysticism)로 충만하였다. 그가 그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였을때, 그는 누차 신적인 빛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는 그것을 시작도 없고 비물질적인, 창조되지 않고 비가시적인 불, 진실로 신적인 불이라 불렸다. 헤시케스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것이 세명의 제자들이 타볼산 위에서 예수의 변형시에 본 그분을 둘러싸고 있던 창조되지 않은 그 빛과 동일한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신적인 빛의 환상이 어떻게 초월적이고 접근할수 없는 하나님에 관한 부정적인 교리와 조화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초월성, 기도에 있어서 육체의 역할, 그리고 신적인 빛과 관계된 이 모든 질문들은 14세기 중반에 정상에 도달하였다. 헤시케스트들은 이태리 출신의 학식있는 그리스인이며, 극단적 형태로 하나님의 '타자성'과 무지능력(unknowability)교리를 주장한 카리브안 발람(Barlaam the Calabrian)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종종 발람이 그 당시에 서방에서 유행한 유명론 철학에 의해 영향을 받았음이 주장되지만, 아마도 그는 그의 가르침을 그리스 자료들로부터 끌어내었다. 디오니시우스를 한방면으로의 해석하기 시작한후, 그는 하나님은 단지 간접적으로만 알려질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헤시케시즘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은 현재의 삶속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헤시케스트들이 사용한 육체적 훈련을 부여잡고, 발람은 기도에 대하여 엉뚱하게 물질적 개념을 주장하는 그들을 고소하였다. 그는 또한 신적이고 창조되지 않은 빛의 환상을 얻는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 분개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그는 그들이 엉뚱한 물질주의로 떨어뜨린다고 비난하였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의 육체적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질을 볼수 있을까? 그의 관점에서 볼때, 헤시케스트들이 주장하는 그 빛은 신의 영원한 빛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창조된 빛이었다.
헤시케스트들의 방어는 데살로니가의 대주교인 성 그레고리 팔라마스(Palamas:1296-1359)에 의해 취해졌다. 그는 기도에 있어서 육체적 훈련의 사용을 허락한 인간 인격론을 지지하였고, 발람에 반대하여, 헤시케스트들은 참으로 타볼산의 신적이며 창조되지 않은 빛을 경험하였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레고리는 하나님의 본질(essance)과 에너지(energies)사이에 구별을 발전시켰다. 전체적인 동방신학안에 그것을 통합함으로 확고한 교리적 근거위에 헤시케시즘을 확립한 것은 그레고리의 업적이다. 그의 가르침은 1341년과 135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두 공의회에 의해 확정되었다. 이 공의회들은 비록 에큐메니칼적이지 않고 지역적이었으나, 7개의 일반적 공의회에 거의 열등하지 않은 교리적 권위를 동방신학내에서 지녔다. 그러나 비록 수많은 서방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팔라마스의 신학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방 기독교 세계는 결코 공식적으로 이 두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레고리는 인간 인격과 성육신에 관한 성서적 교리를 다시긍정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존재는 단일한, 연합된 전체이다. 인간정신과 전인격은 하나님의 형상속에서 창조되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영혼의 적이 아니라, 동반자요 협력자이다. 성육신에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무진장한 성화의 원천으로 만드셨다.' 여기에서 그레고리는 마카리안 호밀리스와 같은 초기 저술들속에서 암시된 사상을 취하고 발전시켰다. 우리가 본것처럼, 인간의 육체에 대한 동일한 강조가 성상에 대한 동방정교회의 교리 배후에 놓여 있다. 그레고리는 인격에 대한 이교리를 헤시케스트의 기도 방법에 적용하여 나아갔다. 그래서 그는 기도중에 있는 육체에 관하여 동일한 강조를 놓음으로 헤시케스트들이 거친 물질주의를 범한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치로서 성서적 인간론에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고 전인간을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육체와 영혼이 함께 있는 전인이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것으로부터 그레고리는 주요한 문제 즉,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알수없다는 두 주장들을 결합하는 방법에 관심을 돌렸다.그레고리는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우리는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 그의 에너지들(energies)을 안다. 하나님의 본질(ousia)과 그의 에너지사이의 이구별은 캅바도기아 교부들에게 소급된다. 성 바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는 그의 에너지로부터 우리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본질에 가까이 접근할수 있다고 주장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에너지는 우리에게 내려오지만, 그의 본질은 접근할수 없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는 이구별을 받아들였다. 그는 부정의 신학에 대한 어떤 해설 보다도 강조적으로 하나님은 본질상 절대적으로 알려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자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자연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존재들 위에 계시기 때문이다.... 창조된 모든것의 것은 최상의 본질 혹은 그것에 가까운 것과 최소한의 교제를 가질 수 없고, 영원히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질상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의 에너지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 하신다. 이 에너지들은 하나님과 떨어져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인간들위에 주신 선물이 아니다. 그들은 그의 행동속에서 하나님 자신이며, 세상을 향한 계시이다. 하나님은 각각의 그의 신적 에너지들속에서 완벽하고 완전하게 존재하신다. 게라르트 맨레이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 말했듯이, 세상은 하나님의 위엄으로 차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말할수없이 경이로운 불 에너지에 의해 소실되지 않고 침투된 거대한 타는 숲이다.
하나님은 이 에너지들을 통하여 인간과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관계으로 들어간다. 우리 인간과과 관계하여, 이 신적 에너지는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는 단지 하나님의 선물, 또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표현, 또는 피조물과 창조자의 인격적 만남이다. '은혜는 그것이 인간과 교통하는 한에 있어서, 신적 본질의 모든 풍부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변형되거나 신성화 되었다고 말할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의 본질이 아니라, 그의 에너지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에너지들에 대한 경험은 빛의 형태로 얻는다. 팔라마스가 주장했듯이, 헤시케스트들이 받아들인 환상은 약간의 피조된 광채가 아니라 타볼산에서 그리스도를 들러싼 것과 같은 신성 자체의 빛이다. 이 빛은 어떤 사람이 신성화되었을때, 영혼 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적 기능들도 변형되기 때문에,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빛은 아니다. 그러나 이 빛은 변화사건속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진 것과 같이 그것은 육체적 눈으로 볼수 있다. 그러므로 빛에 대한 헤시케스트들의 환상은 그의 신적인 에너지들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환상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피조되지 않은 타볼산의 빛과 동일시함은 아주 정확하였다.
그러므로 팔라마스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존하고, 부주의한 신비주의가 쉽게 인도할수 있는 범신론을 피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계속적 현존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내재성을 허락하였다.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로 계신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자체인 그의 에너지들을 통하여 세상과 직접적 관계로 들어가신다. 살아있는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안에서 성육신하신 역사의 하나님, 성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직접적 인식을 거부하고, 신적인 빛은 피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발람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간격을 넓혀 놓았다. 그러므로 발람을 반대하는 그레고리의 근본적인 관심은 아타나시우스와 보편공의회들의 관심과 동일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접근을 보호하고, 우리의 충만한 신화와 완전한 구속을 지지하는.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위격, 그리고 거룩한 성상에 관한 논쟁을 밑에 깔고 있는 구원론은 또한 헤시케스트 논쟁의 심장부에 놓여져 있다.
돔 그레고리 딕스(Dom Gregory Dix)는 '6세기 이후 일찌기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 밀폐된 비잔틴 세계로 들어왔다.....9세기에 아마도 그보다 이른 6세기에 잠들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였다.
14세기의 비잔틴의 논쟁들은 이러한 주장의 허위성을 충분하게 증명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혁명적 혁신가는 아니라, 과거의 전통에 확고히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첫번째 반열의 창조적인 신학자였으며, 그의 작품은 동방정교회 신학이 8세기와 7세기 에큐메니칼 공의회 이후에 활동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레고리 팔라마스와 동시대인들 가운데, 그 논쟁에 깊게 연류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헤세키스트들에게 동정적이었던 평신도 신학자인 성 니콜라스 카바실라스(Cabasilas)가 있었다. 카바실라스는 이 주제에 관한 고전적인 동방의 작품이 된 '신적 제의에 관한 논평'(a Commentary on the Divine Liturgy)의 저자이다. 그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이라 명명된 성례전에 관한 논문을 기록하였다. 카바실라스의 작품들은 특별히 두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영혼 보다도 우리에게 가까운' 구원자,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생생한 의미와 성례전에 관한 끊임없는 강조. 그에게 신비적 삶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이며, 성례전 속에서의 삶이다. 신비주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역사적 계시와 성례전을 가진 교회의 협력적인 삶과 동떨어질 사변적이고 개인주의적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카바실라스의 신비주의는 항상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성례전적이고 교회적이다. 그의 작품은 신비주의와 성례전적 삶이 얼마나 밀접하게 비잔틴 신학에서 함께 관련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팔라마스와 그의 학파는 신비적 기도를 정상적인 기구적 교회의 삶을 우회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제 2차 연합 공의회가 1438-9년 플로렌스에서 열렸다. 황제 요한 8세가(재위기간 1425-48) 다른 동방정교회의 대표들 뿐만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비잔틴 교회의 대부분의 대표단들과 함께 개인으로 참석하였다. 논쟁들이 장기화 되었고, 커다란 논쟁점들에 관한 참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들이 양측에 의해 만들어졌다. 동시에 그리스인들은 정치적 상황이 이제 절망적이 되었다는 사실- 즉 서방의 도움으로 터키인들을 격퇴 시킬려는 유일한 희망-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침착하게 신학을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결과적으로 필리오케, 연옥, 무교병(azymes), 그리고 교황의 주장들을 포함하는 연합의 규정(a formula of union)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동방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앙된 에베소의 대주교 마크(Mark)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공의회에 참석한 모든 동방정교회에 의해 서명되었다. 플로렌스의 연합은 교리문제에 있어서 만장일치와 각 교회에게 독특한 합법적인 제의들(rites)과 전통들에 대한 존중이라는 두가지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교리문제에 있어서, 동방정교회는 교황의 주장들을 받아들였다. 비록 여기에서 연합의 형식을 기록하는 것이 몇가지 측면에서 모호하고 불합리하더라도. 그들은 비록 그들이 신적 제의에서 신조의 논문 속에 필리오케를 삽입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이중적 발현에 관한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연옥에 관한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동방과 서방사이에 하나의 논쟁으로, 이것은 겨우 13세기에 대화가 되었다.) 그러나 무교병에 관계 되어서는, 그리스인들은 발효한 빵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반면 라틴인들은 발효하지 않은 빵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만장일치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플로렌스의 연합은 서유럽 전역에서 경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잉글랜드의 모든 교구교회들에서 벨이 울렸다.- 전에 있었던 리용공의회보다 동방에서는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요한 8세와 그의 승계자이며,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이며 대 콘스탄틴이후 18번째 황위 계승자인 콘스탄틴 11세는 연합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강요하기에는 힘이 없었고, 1452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감히 그것을 선포하지 못하였다. 플로렌스에서 날인한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집에 돌아왔을때, 그들의 서명을 취소하였다. 공의회의 교령들은 소수의 비잔틴 성직자와 평신도들에 의해서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랜드 공작 루카스 노타라스는 리용이후 황제의 여동생의 말을 되풀이 하면서, '나는 시의 중심에 라틴 주교관보다 오히려 이슬람의 모자를 보기 원한다'고 말하였다.
요한과 콘스탄틴은 플로렌스의 연합이 서방으로부터 그들에게 군사적 도움을 확보해주기를 바랬으나, 그들이 실제로 받은 도움은 작았다. 1453년 4월 7일 터키인들은 육지와 바다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0대 1로 열쇠였던 비잔틴인들은 7주동안 찬란하나 희망없는 방어를 지속하였다. 5월 29일 이른시간에, 마지막 기독교 예배가 성소피아 대성당에서 열렸다. 이것은 이 위기의 순간에 플로렌스 연합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그들의 차이를 잊었기 때문에, 동방과 로마 가톨릭의 연합예배가 되었다. 황제는 성만찬을 받은후 나갔고, 성벽 위에서 싸우다 죽었다. 같은 날 늦게 그도시는 터키인들에게 함락되었고, 기독교세계의 대부분의 영광스러운 교회들은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
이것이 비잔틴 제국의 종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종말은 아니었으며, 동방정교회의 종말은 더욱이 아니었다.
제 4장
슬라브족의 회심
은혜의 종교가 지상에 퍼졌고 마침내 러시아 국민들에게 전해졌다.... 모든 다른 나라들을 돌보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이제 더이상 우리를 경홀히 여기시지 않으신다.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지성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분의 뜻이다.
힐라리언, 러시아의 메트로폴리탄(1051-1054?)
시릴과 메토디우스(Cyril and Methodius)
콘스탄티노플에게 9세기 중반은 강렬한 선교활동의 시기였다. 성상파괴주의자들에 대항한 오랜투쟁으로 부터 마침내 자유하게 된 비잔틴 교회는 그들의 열정을 제국의 경계를 넘어 북쪽과 북서쪽에 있는 모라비안들과 불가리아인들, 세르비아인들 그리고 러시아인들에 있는 이교도 슬라브인들의 회심에로 방향을 돌렸다. 포티우스는 이들 슬라브족들 가운데 대규모로 선교사업을 시작한 콘스탄티노플의 첫번째 총대주교였다. 그는 이 사업을 위하여 데살로니가 출신의 그리스인 두형제 콘스탄틴(826-69), 그리고 메토디우스(815?-85)를 선택하였다. 동방정교회 내에서 콘스탄틴은 일반적으로 그가 수도사가 될 때 사용한 시릴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초기의 삶 속에서 철학자 콘스탄틴으로 알려진 그는 포티우스의 학생들 가운데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었으며,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고 심지어 사마리아 방언을 포함한 여러 언어에 능숙하였다. 그러나 그와 그의 동생이 지닌 특징은 슬라브인들에 대한 그들의 지식이었다. 어린시절 그들은 데살로니가 주변에 있는 슬라브 방언을 배웠으며, 그들은 그것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시릴과 메토디우스의 첫번째 선교여행은 860년경 코카서스 지역의 북쪽에 살고 있는 카자흐인들에게로의 짧은 여행이었다. 이탐험은 영구적인 결과를 지니지 못하였고, 몇년후 카자흐인들은 유대교를 택하였다. 이들 형제들의 실질적 사업은 그들이 모라비아(대략 현대의 체코슬라바키아에 해당)를 향해 출발하였던 863년에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 지역의 군주 로치슬라브(Rostislav)로 부터 온 호소에 응답하여 갔다. 그는 그들 자신의 언어로 백성들에게 설교를 하고 슬라비아어로 예배를 인도할수 있는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슬라비아인들의 예배는 슬라비아어로된 성경과 슬라비아 예배모범을 필요로 하였다. 그들은 모라비아로 출발하기 전에 두형제는 이미 이 거대한 번역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우선 적절한 슬라비아 알파벳을 발명하여야 했다. 그들의 번역속에서 이 형제들은 어린시절부터 그들에게 친숙했던 슬라브어 형태인 데살로니가 주변의 슬라브인들에 의해 말해진 마케도니아 방언을 사용하였다. 이 방식 속에서 마케도니아 슬라브인들의 방언은 현재까지 러시아와 다른 슬라브 동방정교회들의 예배 언어로 남아있는 교회 슬라브어(Church Slavonic)가 되었다.
우리는 동방정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시릴과 메토디우스가 미지의 북쪽을 향해 비잔틴을 떠날때 가지고 간 슬라브 번역판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할수 없다. 교회의 선교사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사건들은 거의 없다. 출발부터 슬라브 기독교인들은 서유럽의 어떤 민족도 그 당시에 누리지 못한 귀중한 특권을 향유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이해할수 있는 언어로 복음과 교회의 의식들을 들었다. 라틴어에 대한 고집을 지닌 서방의 로마 교회와는 달리, 동방정교회는 결코 언어 문제에 있어서 완고하지 않았다. 그들의 일반적 정책은 그 민족의 언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불가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라비아에서, 그리스인들의 선교는 곧 동일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게르만 선교사들과 충돌하였다. 이 두 선교단체는 다른 총대주교에 소속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원칙들에 의해 사역하였다. 시릴과 메토디우스는 그들의 예배의식에 있어서 슬라브어를 사용하였고, 게르만인들은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시릴과 메토디우스는 최초의 형태로 된 니케아-콘스탄틴신조를 암송하였고, 게르만인들은 필리오케를 삽입하였다. 게르만인들의 방해로부터 그의 선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시릴은 선교사업을 교황의 직접적인 보호아래 놓기로 결심하였다. 로마에 호소하는 시릴의 행동은 그가 포티우스와 니콜라스 사이의 심각한 싸움을 고려하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 그에게 동방과 서방은 아직도 하나의 교회로 연합되어 있으며, 그가 교회예배에서 슬라브어를 계속 사용할수 있는한, 그가 콘스탄티노플 혹은 로마에 의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두형제는 868년 개인적으로 로마로 여행하였고, 호소에 완전히 성공하였다. 로마에서 니콜라스 1세의 승계자인 하드리안 2세는 그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고, 모라비아 지역의 예배 언어로 슬라브어를 사용하도록 확정함으로써 그리스인들의 선교사업에 대한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였다. 그는 그 형제들의 번역을 승인하였고, 그 도시의 주요한 교회들의 제단위에 슬라브어로된 예배 모범책의 사본을 올려 놓았다.
시릴은 로마에서 죽었으나(869), 메토디우스는 모라비아로 돌아갔다. 슬프게도 게르만인들은 교황의 결정을 무시하였고,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가지고 메토디우스를 방해하였고, 심지어 그를 1년이상 감옥에 가두었다. 메토디우스가 885년 죽었을때, 게르만인들은 모라비아로 부터 그의 추종자들을 추방하였고, 그들중 상당수를 노예로 팔았다. 슬라브 선교의 흔적들은 2세기 이상 모라비아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나, 결국은 근절되었다. 그리고 라틴 문화와 라틴어(물론 필리오케)를 지닌 서방적인 형태의 기독교가 보편화 되었다. 모라비아 지역에서 슬라브 민족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시릴과 메토디우스의 작업은 보기에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실패가 아니었다. 이 두형제가 스스로 설교하지 않은 다른 나라들 가장 두드러지게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고 러시아들은 그들의 사역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우리가 본것처럼 불가리아의 왕 보리스는 잠시동안 동방과 서방사이에서 주저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의 관할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불가리아에서 시릴과 메토디우스의 비젼을 결여하고 있는 비잔틴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교회예배에서 일반 불가리아인들에게 라틴어 만큼이나 알수 없는 언어인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모라비아로부터의 추방이후,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불가리아로 방향을 돌렸고, 여기에서 모라비아 선교에서 사용된 원칙들을 도입하였다. 그리스어는 슬라브어에 의해 대체되었고, 비잔틴의 기독교 문화는 그들이 동화할수 있는 슬라브 형태로 불가리아인들에게 소개되었다. 불가리아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926년경, 위대한 티사르 시메온(Tsar Symeon the Great:893-927년 재위)의 통치기간중 독립된 불가리아 총대주교 관구가 만들어졌고, 이것은 92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 의해 인정되었다. 보리스의 꿈-그 자신의 독립교회-은 그의 죽음이후 반세기내에 현실이 되었다. 불가리아는 슬라브족의 최초의 민족 교회였다.
비잔틴 선교사들은 마찬가지로 세르비아로 나아갔고, 세르비아는 9세기 중반인 867-74년경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세르비아 또한 동방과 서방의 경계선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불확실한 기간이 지난후, 모라비아가 아닌 불가리아의 예를 따라 콘그탄티노플의 권할 아래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또한 슬라브 예배모범책이 도입되었고, 슬라브-비잔틴 문화가 성장하였다. 세르비아교회는 성 사바 아래 부분적 독립을 얻었다. 성 사바(St Sava:1176-1235)는 1219년 니케아에서 세르비아의 대주교로 서임되었고, 세르비아 민족 성자들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1346년 세르비아 총대주교관구가 만들어졌고, 1375년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의해 인정 되었다.
러시아의 회심은 또한 간접적으로 시릴과 메토디우스의 사업에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음장에서 보다 상세히 말할것이다. 그들의 영적인 자녀로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고 러시아인들을 지닌 데살로니가로부터 온 두 그리스인은 충분히 그들의 이름으로 '슬라브인들의 사도'로 불릴 가치가 있다.
발칸반도에서 다른 동방 민족인 루마니아는 더욱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루마니아인들은 비록 그들의 이웃인 슬라브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원래 언어와 인종적 특징이 라틴인들이었다. 근대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다키아(Dacia)는 106-271년 어간에 로마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중 거기에 설립된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인들의 철수 이후 사라진것 처럼 보였다.로마 국민들의 일부가 분명히 9세기 후반과 10세기 초에 불가리아인들에 의해 기독교로 회심하였다. 그러나 왈라키아(Wallachia)와 몰다비아(Moldavia)의 두 로마인 공국의 완전한 회심은 14세기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동방정교회를 특성상 그리스인과 슬라브인으로 배타적으로 '동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두번째로 큰 동방정교회인 루마니아 교회가 민족적 정체성에 있어서 뛰어난 라틴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비잔티움은 슬라브족들에게 두개의 선물 즉, 기독교 교리의 충분히 분명한 체계와 충분히 발전한 기독교 문명을 주었다. 슬라브인들의 회심이 9세기에 시작되었을때, 위대한 교리적 논쟁기-7개의 공의회 시대-가 끝났다. 신앙의 중요한 윤곽-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이 이미 완결되었고, 정식화된 형태로 슬라브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슬라브 교회들이 소수의 기본적 신학자들도 생산하지 못한 이유이다. 한편 슬라브 지역에서 일어난 종교적 논쟁들은 일반적으로 특성상 교리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신앙은 공백의 상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전체 기독교 문화와 문명은 기독교 신앙과 더불어 나아갔고, 그리스 선교사들은 비잔틴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왔다. 슬라브인들은 동시에 기독교화하였고 문명화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이 신앙과 문명을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슬라브인들의 복장(여기에서 시릴과 메토디우스의 번역이 가장 중요하다)으로 전달하였다. 슬라브인들이 비잔틴으로부터 빌려온것을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만약 처음에 주로 통치 계급에게만 제한되었다면, 비잔틴 문화와 동방정교회의 신앙은 조만간 전체 슬라브 민족들의 일상적 삶의 한 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교회와 국민간의 관계는 독립된 민족 교회들을 만드는 제도에 의해 확고해 졌다.
확실히 동방정교회와 국민의 삶과의 이 밀접한 동일화는 불행한 결과들을 지니게 되었다. 교회와 민족이 너무 밀접하게 연합되었기 때문에, 동방의 슬라브인들은 종종 이 두개를 혼동하였고, 민족적 정책 목표를 섬기도록 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그들의 신앙을 주로 세르비아인, 러시아인, 혹은 불가리아인으로 생각하고 신앙이 원래 동방정교회와 가톨릭적이라는 사실을 잊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근대시대에 그리스인들에게 하나의 유혹이 되어왔다. 민족주의는 지난 10세기 동안 동방정교회의 재앙이었다. 그러나 교회와 국민의 통합은 결국 막대한 이익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슬라브족들 가운데 기독교는 사실 전국민의 종교, 최고의 의미에 있어서 대중적 종교였다.
러시아의 세례: 키예프인들의 시대(Kievan period:988-1237)
포티우스 또한 러시아의 슬라브족들을 회심시킬 계획들을 만들었다. 864년경, 그는 러시아에 감독을 보냈다. 그러나 이 첫번째 기독교 이식은 878년 키예프(이 당시 주요한 러시아 도시)에서 권력을 지녔던 올렉(Oleg)에 의해 근절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비잔틴, 불가리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로부터 기독교의 유입을 계속적으로 경험하여, 945년에는 키예프에 명백히 교회가 있게 되었다. 러시아의 女帝인 올가(Olga)는 955년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그녀의 아들 Svyatoslav는 그녀의 전례를 따르기를 거부하였고, 만약 자신이 기독교 세례를 받는다면, 그의 수행원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988년경 올가의 손자 블라디미르(Vladimir:980-1015년 재위)가 기독교로 회심하여 비잔틴 황제의 여동생 안나와 결혼하였다. 동방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고, 이것은 1917년까지 유지되었다. 블라디미르는 그의 영토를 열심히 기독교화 하였다. 사제, 유물, 성스러운 그릇, 그리고 성상들이 수입되었다. 거대한 세례의식이 강에서 행해졌다. 교회법정이 세워졌고, 교회적 세금들이 제정되었다. 은으로된 머리와 금으로 된 콧수염을 지닌 거대한 페론(Perun)신상이 키예프의 가장 높은 언덕에서 굴욕적으로 아래로 굴려졌다. '천사의 트럼펫과 복음의 번개가 모든 도시에 울려 퍼졌다. 하늘은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향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수도원들이 산위에 세워졌다. 남녀, 노소, 모든 사람들이 거룩한 교회들을 채웠다.' 그래서 메트로폴리탄 힐라리온(Hilarion)은 60년후에 이 사건을 의심할바 없이 약간 이상화하여 묘사하였다. 왜냐하면 키예프 러시아인들이 갑자기 완벽하게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며, 교회는 처음에 주로 도시에 제한되었고, 대다수의 시골은 14, 15세기까지 이교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는 암스기버인 요한(John the Almsgiver)이 했던 것처럼 기독교의 사회적 의무에 동일한 강조를 하였다. 일찌기 그가 그의 궁정에서 축연을 베풀었을때, 그는 음식을 가난한자들과 병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중세유럽에서 이렇게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적 봉사들은 10세기에 키예프 말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키예프 러시아에서 다른 통치자들은 블라디미르의 예를 ?았다. 블라디미르 모노마코스(Monomachos:1113-25)왕은 그의 유언 속에서 그의 아들에게 '무엇보다도 가난한자들을 잊지말며, 그들을 방법이 허락하는 한 도우라. 고아를 구제하고, 과부를 보호하라. 그리고 어떤 사람도 파괴할수 없는 힘을 지녀라'고 기록 하였다. 블라디미르는 또한 깊게 기독교의 자선법을 인식하였고, 그가 키예프에서 비잔틴 법체계를 도입하였을때, 그는 그 법의 미개하고 잔인한 특성들을 완화시키도록 주장하였다. 키예프 러시아에는 사형, 다수의 형벌, 고문이 없었다. 신체적 형벌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동일한 고상함이 블라디미르의 두아들-보리스와 그레브-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볼수있다. 1015년 블라디미르가 죽자, 그들의 형 시브야코폴크(Svyatopolk)는 그들의 공국을 빼앗고자 했다. 그들은 비록 쉽게 저항할수 있었으나, '문자적으로 복음의 말씀들을 가지고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각자는 차례로 스브야토폴크의 신복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만약 피가 흘려진다면, 보리스와 글레브는 그들 자신의 것이기를 더 좋아하였다. 비록 그들은 신앙의 순교자가 아니라, 정치적 투쟁의 희생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고난의 사자들'이라는 특별한 명칭을 받았다. 그들은 천진스럽고 자발적 고통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하였다. 러시아인들은 항상 기독교인의 삶속에 고난의 위치를 크게 강조한다.
비잔틴과 중세서방처럼 키예프의 러시아에서, 수도사들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들 모두의 강력한 영향력은 키예프에 있는 동굴수도원인 Petchersky Lavra이었다. 아토스산에서 살았던 러시아인 성 안토니에 의해 반-은둔적 형제애로 세워진, 그 수도원은 콘스탄티노플의 스토디우스 수도원을 따라 그곳에 완전한 공동체 삶을 도입한 안토니의 후계자 성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블라드미르와 같이,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서방에서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가 한 것처럼, 자신을 가난한자들과 밀접히 일치시키면서, 급진적 형태로 그들에게 적용하였다. 보리스와 글러브는 희생적 죽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다. 테오도시우스는 그의 삶과 가난 그리고 자발적 '자기 비움'(케노시스)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다. 귀족으로 출생한 그는 어린시절에 거친 헝겁으로 된 옷을 입었고, 노예들과 함께 들판에서 일하기를 좋아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의 모범으로 삼으사, 가난하고 비천하게 되시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이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비천하게 하여야 한다. 모욕당하신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침 뱉음을 당하셨고, 매맞음을 당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어떻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수도원장 시절에, 그는 가장 초라한 종류의 옷을 입었고 권세에 대한 모든 외적 표시들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귀족과 제후들의 존경받는 친구요 충고자였다. 자기 비하의 겸손과 같은 이상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보이는데, 예를들면 블라디미르의 연대기에 블라디미르의 감독 누가(Luke of Vladimir:1185년 사망)는 '여기에 있는 도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도시를 추구함으로, 그리스도의 겸손을 지닌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러시아 민족전승과 톨스토이나 도시트예프스키 같은 작자들의 작품 속에서 종종 발견되는 이상이다.
블라디미르, 보리스와 글레브, 그리고 테오도시우스는 모두 복음의 실천적 의무와 강력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사회정의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으로 범죄자들을 다루고자 하는 그의 열심 속에서, 보리스와 글레브는 자발적인 고난과 죽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 속에서,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을 겸비와 일치시킴으로. 이 네명의 성인들은 키예프 기독교안에 가장 매력적인 특징들을 형성시켰다.
키예프 기간동안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 종속되어 있었고, 1237년까지 러시아의 메트로폴리탄은 일반적으로 그리스인이었다. 메트로폴리탄이 비잔틴으로부터 왔던 시절에 대한 기억속에서 러시아 교회는 감독을 환영하는 장엄한 인사말을 그리스어로 계속 노래하였다. eis polla eti, despota(unto many years, O master) 그러나 나머지 감독들 가운데 절반은 키예프 기간동안 순수한 러시아인이었다.; 한편 한명은 심지어 회심한 유대인이었고, 다른 한명은 시리아인이었다.
키예프는 비잔틴 뿐만 아니라 서유럽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초기 러시아 교회의 조직가운데 교회의 세금제도와 같은 몇가지 모습들은 비잔틴이 아니라 서방적이었다. 비잔틴 달력에는 나타나지 않는 다수의 서방 성인들이 키예프에서 존경을 받았다. 11세기에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성 삼위일체에 대한 한 기도서는 알반(Alban)과 보톨피(Botolph)와 같은 영국성자들과 트우르의 마틴(Martin of Tours)같은 프랑스 성자들를 기록하고 있다. 몇몇의 작가들은 심지어 1054년까지 러시아 기독교는 그리스만큼 라틴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과장이다. 러시아는 피터 대제의 통치까지 어떤 다른 때보다 키예프 기간에 서방과 가까웠다. 그러나 러시아 교회는 라틴 문화보다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비잔틴에 힙입고 있다. 나폴레옹은 그가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1세를 '열등한 제국의 그리스인'이라고 불렀을때, 역사적으로 정당했다.
러시아가 비잔틴의 충만한 영적 유산과 동화하기에는 너무 적은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러시아커다란 불행이었다고 말해져왔다. 1237년 키예프 러시아는 몽골의 침입으로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종말을 맞이하였다. 키예프는 약탈 당하였고, 전 러시아 땅은 북쪽 노브고로도를 제외하고 모두 유린당하였다. 1246년 몽고 궁정을 방문한 한 사람은 그가 러시아 지역에서 도시나 마을을 결코 볼수 없었고 단지 폐허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두개골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키예프가 파괴되었지만, 키예프의 기독교는 하나의 생생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었다.
어린시절의 황금기같은, 키예프 러시아는 결코 러시아 민족의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의도한 러시아 문학작품의 순수한 원천 속에서 그의 종교적 목마름을 해소시킬수 있었다. 러시아의 존경스러운 작가들 속에서 그는 근대세계의 복잡성을 뚫고 그의 길을 발견할수 있다. 키에프 기독교는 러시아 예술적 의미에서 프쉬킨이 지니는 가치처럼 러시아 종교 정신을 위하여 동일한 가치가 있다. 기준, 황금과 같은 가치, 영광스러운 길.
몽고의 지배아래 러시아 교회(1237-1448)
러시아에 대한 몽고 타타르의 종주권은 1237년부터 1480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큐리코보(Kulikovo:1380)의 대 전투이후 러시아인들이 마침내 개방된 싸움에서 그들의 압제자들과 마주쳐 실제적으로 그들을 패배 시켰을때 몽고의 지배권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1450년까지 몽고 지배권은 대부분 유명무실 하였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후에 터키의 지배아래 그리스인들의 일치감을 보존한 것처럼, 13, 14세기에도 러시아 민족 의식을 되살린 것은 교회였다. 몽고의 통치기간에 출현한 러시아는 외적 모습에 있어서 상당히 변화된 러시아였다. 키예프는 1237년 함락된 후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고, 키예프의 지도력은 모스코바 공국에 의해 14세기에 빼앗겼다. 몽고에 저항할 것을 고무시키고 큐리코보에서 러시아를 지도한 사람은 모스코바의 그랜드 공작이였다. 모스코바의 등장은 교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도시가 아직 작고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을때, 1308년부터 1326년까지 러시아의 메트로폴리탄이었던 피터는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결국 두 메트로폴리탄, 하나는 모스코바와 다른 하나는 키예프 사이의 러시아 교회의 분열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고착화 되지 않았고, 15세기 중반까지 영구적이지 않았다.
몽고의 지배기간 동안 러시아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세인물이 특별한 주의를 끈다. 이들 모두는 성인들이다.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 페름의 스테반(Stephen of Perm), 그리고 라도네츠의 세르기우스(Sergius of Radonezh).
러시아의 위대한 전사 성자들 가운데 한사람인 알렉산더 네브스키(1263년 사망)는 그 당시 서방의 프랑스 왕인 성 루이와 비교되어진다. 그는 1237년에 러시아에서 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주요 공국인 노보고로드(Novogorod)의 제후였다. 그러나 타타르의 침입이후 곧, 알렉산더는 서방으로부터 오는 다른 적들-즉 스웨덴, 독일, 그리고 리투아니아인들-에 의해 자신이 위협을 받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동시에 두전선에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알렉산더는 타타르의 지배권아래 복종하여 조공을 받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서방 적대자들과 대항하여 그는 격렬한 저항을 하였고 그들에게 두개의 결정적 패배를 안겨 주었다.- 1240년 스웨덴과 1242년 튜튼 기사들-. 서방보다 타타르족과 화해한 이유는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타타르족은 조공을 받았지만 교회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삼가하였다. 반면에 튜튼족 기사들은 그들의 공공연한 목적으로 러시아 분파주의자들을 정복하고 교황의 관할권을 관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라틴 총대주교가 콘스탄티노플에서 통치했을때를 가리키며, 마치 그들의 추종자 십자군들이 남쪽에서 1204년 동방 콘스탄티노플을 쳐부순 것처럼, 북쪽에서 게르만 십자군들이 동방 노브고로도를 쳐부수는것을 목적하였다.
그러나 몽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어떠한 종교적 타협도 거부하였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온 사절단에게 다음과 같이 응답한 것으로 보도 되었다. '우리의 교리들은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것들이다. 우리는 7개의 공의회의 성스러운 교부들의 전통을 상세히 지키고 있다. 당신들에 말에 관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당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며 당신들의 교리를 원하지 않는다.' 2세기후의 플로렌스 공의회이래로 그리스인들은 동일한 선택을 하였다. 그들이 느낀것은 로마교회에 영적 포로가 되기보다 이교도들에게 정치적 복종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났다는 것이었다.
페름의 스테판은 우리에게 몽고지배하에서의 교회의 삶의 또 다른 측면- 즉 선교사업-을 제공한다. 몽고의 지배초기부터 러시아교회는 선교적 교회였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은 그들의 이교 정복자들에게 선교사들을 보내는데 신속하였다. 1261년 한 어떤 미트로판(Mitrophan)이 선교 감독으로 볼가에 있는 타타르의 수도 사라이(Sarai)로 갔다. 다른 사람들은 몽고인들에게는 아니었지만, 러시아 대륙의 북-동쪽과 그보다 더 먼북쪽에 사는 원시 이교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시릴과 메토디우스의 모범에 충실하였던, 이들 선교사들은 성서와 교회 예식을 그들이 사역한 민족의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하였다.
페름의 감독(1340?-96), 성 스테판은 지리안족(Zyrian) 가운데서 사역하였다. 그는 번역작업이 좀더 적합하도록 하기 위해, 원주민 방언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를 공부하면서, 수도원에서 13년을 보냈다. 한편 시릴과 메토디우스가 슬라브어의 번역에 적절한 그리스 알파벳을 채택한 반면, 스테판은 원주민의 문자를 이용하였다. 그는 성상 화가였으며, 하나님을 단지 진리의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미의 하나님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다수의 다른 초기 러시아 선교사들 처럼, 그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정복의 결과가 있은후에 선교지로 가지는 않았으나, 정복에 한발 앞서 선교지로 나아갔다.
러시아의 위대한 민족 성자, 라돈네즈의 세르기우스(Sergius of Radonezh)는 14세기에 땅의 재발견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의 삶의 외적 패턴은 이집트의 성 안토니의 삶을 회상시킨다. 성년초기에 세르기우스는 숲(이집트 사막에 견줄만한 북쪽)으로 은둔하였고 여기에서 그는 성 삼위일체께 헌신할 은둔지를 발견하였다. 7년간의 고립후, 그의 은둔장소가 알려졌고, 제자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는 영적 지도자, 장로 혹은 starets로 성장하였다. 마침내(그리고 여기에서 안토니의 목표와 동일하게) 그는 그의 제자 집단을 정규적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이 수도원은 그의 전생애 가운데에 지상에 있는 가장 위대한 종교적 집이 되었다. 동굴 수도원이 키예프 러시아에 있었던 것 처럼, 모스코바에는 성 삼위일체 수도원이 있었다.
세르기우스는 테오도시우스와 동일한 자기비움(Kenosis)과 사려깊은 자기 겸비를 실천하였고, 농부(그의 귀족 출신에도 불구하고)처럼 살았으며, 허름한 옷을 입었다. '그의 복장은 오래되고 헤어졌으며, 세탁을 하지 않아 땀으로 범벅이 되고, 심하게 헝겊으로 기운 거친 농부 펠트(felt)이었다.' 큰 공동체의 수도원장으로 그의 명성이 최고에 달하였을때, 그는 아직도 부엌에서 일하였다. 종종 그는 방문자들에게 발견되었을때, 그들은 그것이 실제로 거룩한 세르기우스임을 믿을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혐오스럽게 외쳤다. '나는 예언자를 보기 위해 왔다. 그런데 너희는 나에게 거지를 보여주고 있다.' 테오도시우스처럼, 세르기우스는 정치에서 활동적 역할을 하였다. 모스크바의 그랜드 공작의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그 도시가 확장되는 것을 격려하였다. 큐리코보의 전투후, 러시아 권력의 지도자이며 제후인 디미트리 돔스코(Dimitry Domskoy)가 특별히 그의 축복을 확보하기 위해 세르기우스에게 온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와 세르기우스의 삶속에 많은 동일한 점들이 있지만, 중요한 두가지 차이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우선 키예프 러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수도원들처럼 동굴 수도원은 그 도시의 변두리에 있었던 반면, 성 삼위일체 수도원은 문명세계로 부터 떨어져 있는 광야에 세워졌다. 세르기우스는 그의 방식속에서 문명의 경계선을 앞으로 밀고 나가며 숲을 문명세계로 바꾸는 탐험가요 식민주의자였다. 그가 당시 식민주의적 수도사의 유일한 본보기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처럼 숲으로 가 은둔자가 되었다. 세르기우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은둔자의 집으로 출발하여 곧 담 넘어에 문명세계를 지닌 정규적 수도원으로 성장하였다. 그후 전 과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고립된 삶을 추구하는 새로운 수도사 세대가 좀더 먼 숲에서 그들의 길을 만들어 갔고, 그들의 제자들이 뒤를 따랐다. 새로운 공동체들이 형성되었고, 새로운 땅이 경작을 위하여 개간되었다. 식민주의 수도사들의 이 꾸준한 발전은 14-15세기 러시아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였다. 라돈네즈와 다른 중심들로부터 광대한 종교적 집들의 연결망이 빠르게 백해와 북극권까지의 북 러시아 전체에 걸쳐 퍼졌다. 50여개의 공동체들이 세르기우스의 제자들에 의해 세르기우스의 생애동안 세워졌고, 40개 이상이 그 다음 세대에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들 탐험 수도사들은 식민주의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훨씬 북쪽으로 통과하여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숲 속에서 사는 거친 이교 종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두번째로, 테오도시우스의 종교적 경험 속에는 특별히 신비적이라고 부를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세르기우스에게는 영적 삶의 새로운 차원이 명백하게 있었다. 세르기우스는 그레고리 팔라마스와 동시대인이었다. 그는 비잔틴내에 있었던 헤시케스트 운동의 일부를 알고 있었다. 어쨋든 그의 전기작가 에피파니우스(Epiphanius)가 기록한대로 기도속에서 세르기우스에게 주어진 몇가지 환상은 신비적 의미에서만 해석될수 있다.
세르기우스는 '러시아의 설립자'로 불려졌다. 그는 세가지 의미에서 그러하였는데, 정치적으로 그는 모스크바의 등장과 타타르에 대한 저항을 고무시켰기 때문이고, 지리적으로 수도사들을 숲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영감을 그 누구보다도 그가 불어넣어 주었고, 영적으로 러시아 교회의 내적 삶을 깊게한 그의 신비적 기도의 경험을 통하여서이다. 아마도 다른 러시아 성자들 보다도 그는 수도원주의의 사회적 신비적 측면을 조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의 영향아래, 1350-1550년까지 두세기는 러시아 영성에 있어서 황금시기로 증명되었다.
이 두세기는 또한 러시아 종교예술에 있어서 황금기이다. 이 기간동안 러시아의 화가들은 그들이 비잔틴으로 전수받은 초상화법적 전통을 완성하였다. 성상 페인팅이 성 세르기우스의 영적 자녀들 가운데 번창하였다. 예술적 관점으로 모든 동방정교회의 성상들중 가장 우수한 것-성 앤드류 류브레브(Rublevi:?1370-1430)에 의해 만들어진 성 삼위일체-은 성 세르기우스에 대한 존경 속에서 그려지고, 그것이 라돈네즈에 있는 그의 수도원에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세르기우스의 사후 61년이 지나 비잔틴 제국은 터기에 의해 멸망하였다. 큐리코브이후 모습이 만들어지고, 성자 자신이 건설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행한 새로운 러시아는 이제 동방 세계의 보호자로서 비잔틴의 위치를 대신하는 소명을 받았다. 러시아는 이 소명에 가치가 있기도 하고 무가치 한것으로도 증명 되었다.
제 5장 이슬람 지배하의 교회
The stable perseverance in these our days of the Greek Church...notwithstanding the Oppression and Contempt put upon it by theTurk, and the Allurements and Pleasures of this World, is a Confirm!!ation no less convincing than the Miracles and Power which attended its first beinnings. For indeed it is admirable to see and consider with what Constancy, Resolution, and Simplicity, ignorant and poor men keep their faith.
터키에 의해 놓여진 억압과 유혹, 그리고 이 세상의 유혹과 기쁨에도 불구하고, 우리시대에 그리스 교회의 견고한 보전은 기독교의 초기에 나타났던 기적과 힘들보다도 더 확신 있는 확증이다. 진실로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어떠한 불변성, 결심, 그리고 단순성을 가지고 지켰는가를 보고 생각하는 것은 감탄할 만하다.
폴 리코트(Rycaut)경 , 그리스 아르메니안 교회의 현재의 상태(1679)
제국에서의 통치권
에드워드 브라운은 콘스탄티노플의 영국대사관 신부로 도착한 직후, 1677년 이렇게 기록하였다. '십자가가 그렇게 오래도록 의기양양하게 서있던 모든 장소에 회교의 깃발이 게양되는 것을 보는것은 비위를 크게 상하게 하였다.' 1453년 그리스인들에게도 그것은 또한 크게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천년이상 사람들은 비잔틴의 기독교 제국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시적 섭리속에 있는 영구적인 요소로 당연히 생각하였다.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에 있는 도시는 무너졌고, 그리스인들은 이교도의 지배아래 있었다.
이것은 쉬운 변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변화는 그들의 기독교 신민을 매우 관대하게 다루었던 터키인들에 의해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15세기의 이슬람교는 서유럽 기독교가 종교개혁기와 17세기에 서로를 향해 했던 것보다 기독교에 대하여 훨씬 관대하였다. 이슬람은 성경을 거룩한 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로 생각하였다. 더우기 이슬람의 눈으로 볼때, 기독교는 몇가지 틀린점이 있었지만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으며, '성서의 백성'인 기독교인들을 단순히 이교도들과 같은 차원에서 다룰수는 없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경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조용히 이슬람의 권력에 복종하는 한에 있어서, 간섭 없이 그들의 신앙의 의식을 계속할수 있었다.
이것이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 슐탄 모하메드 2세를 인도한 원칙들이었다. 도시의 함락전에, 그리스인들은 그를 '적그리스도의 선구자와 제 2의 Sennacherib'로 불렸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그의 통치가 특성상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총대주교좌가 비어있음을 알고, 모하메드는 수도사 겐나디우스를 불려 그에게 총대주교좌를 주었다. 수도사가 되기전에 조지 스콜라리우스(George Scholarios)로 알려진 겐나디우스(Gennadius:1405?-72?)는 당대에 여러 작품들을 기록한 작가였으며 지도적인 그리스 신학자였다. 그는 로마 교회에 단호한 반대자였으며, 총대주교로의 그의 임명은 플로랜스 연합의 최종적 포기를 의미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정치적 이유로, 슐탄은 사려깊게 반라틴적 확신을 지닌 사람을 선택하였다. 총대주교에 겐나디우스를 임명함으로 로마 가톨릭 세력들로부터 비밀한 원조를 구하는 그리스인들은 더이 상 있을수가 없었다.
비잔틴의 독재군주들이 이전에 행한것처럼, 슐탄은 총대주교를 스스로 임명하고, 의식적으로 그에게 그의 목회적 지휘봉을 주었다. 이 행동은 상징적인 것이었다. 이슬람의 전사, 정복자 모하메드는 또한 이전에 기독교 황제들이 행사한 역할을 인계받아 동방정교회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터키의 사회질서속에서 일정한 위치를 보증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곧 깨닫게 되었을때, 허락된것은 열등한 위치였다. 이슬람 지배하에서의 기독교는 두번째 계층의 종교였으며, 그 신자들은 두번째 계층의 신민이었다. 그들은 무거운 세금을 지불하였고 구별되는 옷을 입었고, 군대에서 봉사하는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슬람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교회는 선교사역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슬람인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시키는 것은 범죄였다. 기독교인들을 이슬람교로 변절하도록 하는 만든 모든 동기는 물질적 관점으로 인한 것이었다. 직접적 박해가 종종 교회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했으나, 오토만 제국아래서 그리스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신앙을 단순히 수사학적 방법으로 변호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무자비한 사회적 억압을 받는 대신에 타락한 결과들에 굴복하였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이후, 교회는 콘스탄틴의 회심 전의 상황으로 바뀌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충분히 역설적으로, 이제 가이사의 것들은 그들이 일찍이 전에 했던 것보다 더욱 밀접히 하나님의 것들과 연합되어 갔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도들은 종교와 정치 사이의 구별을 이끌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만약 기독교가 독립적인 종교적 신앙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면, 기독교인들이 독립된 정치적 단위로-제국안에 있는 하나의 제국- 인정되어야 하는것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방정교회는 종교적 기구일 뿐만 아니라 시민적 기구가 되었다. 동방정교회는 'Rum Millet' 즉 '로마국가(Roman nation)'로 변화하였다. 교회적 구조는 세속의 행정기구인 토토(toto) 안으로 인계되었다. 감독들은 행정관료가 되었고, 총대주교는 그리스 동방정교회의 영적 우두머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 국가의 시민적 우두머리- 행정장관(the ethnarch) 혹은 millet-bashi-가 되었다. 이 상황은 1923년까지 터키에서 계속되었고, 키프러스에서는 대주교 마카리오스 2세(1977)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millet 체계는 하나의 매우 귀중한 봉사를 수행하였다. millet 체계는 4세기 동안의 외국의 지배를 통하여 독특한 단위로 그리스 국가의 생존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생활 위에 그것은 침울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우선 동방정교회와 민족주의 사이에 슬픈 혼란을 가져왔다. 교회 주변에 완벽하게 조직된 그들의 시민적, 정치적 삶을 가지고 그리스인들이 교회와 국가를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보편적인 동방정교회의 신앙은 하나의 민족, 문화, 혹은 언어에 제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터키제국의 그리스인들에게 '헬레니즘'과 동방정교회는 그들이 일찌기 비잔틴 제국속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뒤얽혀 있게 되었다. 이 혼란의 결과들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두번째로, 교회의 고위 관직은 부패와 매관매직의 불명예스러운 체계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들은 외적인 사건들과 정치적인 문제들에 연루되자, 감독들은 야망과 재정적 탐욕에 희생이 되었다. 각각의 새로운 총대주교들은 그가 직무에 취임하기 전에 슐탄으로부터 베레트(berat)를 필요로 하였고, 이 문서를 위하여 그는 어쩔수 없이 과중하게 지불하여야 했다. 총대주교는 각 감독들을 그의 교구에 임명하기 전에 사례를 강요함으로, 그의 지출을 감독들로부터 만회하였다. 감독들은 또다시 교구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였고, 성직자들은 그들의 양무리에게 세금을 부과하였다. 한때 교황권에 대하여 이야기 되어진 것은 터키 지배하에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좌에게도 확실히 사실이었다. 모든 것이 팔기 위한 것이었다.
총대주교권좌에 여러 후보가 있을때, 터키는 사실상 그것의 최고의 입찰자에게 판매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베레트(berat)를 판매할 기회를 증가 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자주 총대주교를 바꾸는 것이 그들의 재정에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재빨리 간파하였다. 총대주교들은 제거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신속함으로 복위되었다. '15세기와 20세기 사이에 총대주교좌에 오른 159명중, 터키는 그들의 권좌로부터 105명의 총대주교를 내어 ?았다. 종종 본의 아니게 양위를 한 경우도 27명이나 되었고, 6명의 총대주교들은 목졸리거나, 독살되거나, 익사당하는 무자비한 죽음을 당하였다. 단지 21명만이 그가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자연사 하였다.' 때때로 동일한 인물들이 4개,5개의 다른 직책에서 일을 수행하였고, 일반적으로 추방지에서 권좌로 돌아올 기회를 침착지 못하게 바라보는 몇몇의 국외로 추방된 총대주교들이 있었다. 총대주교의 극단적 불안정성은 자연히 그를 계승하기를 희망하는 거룩한 대회의 메트로폴리탄들 가운데 끊임없는 음모들을 야기시켰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심하게 적대적인 당파로 분리되어 있었다. 17세기 레반트에 거주한 어느 영국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든 훌륭한 기독교인은 한때 영광스럽던 교회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내장을 잡아찢고, 독수리들과 갈가마귀, 그리고 세상의 광폭한 피조물들에게 음식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슬프고 비통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비록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내적으로 쇠퇴를 경험하였으나, 외적으로 그 권세는 이전에 결코 없었던 팽창을 경험하였다. 터키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그들의 영역내에서 모든 동방정교회인들의 머리로 간주하였다. 오토만 제국 안에서 나머지 총대주교들-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또한 이론적으로는 독립적이었으나 사실상 종속되어 있었다. 불가리아와 시리아의 교회들은- 터키의 지배아래서와 마찬가지로- 점차적으로 모든 독립성을 상실하였고, 18세기 중반경 직접적으로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로 넘겨졌다. 그러나 터키의 권력이 쇠퇴하던 19세기에 총대주교의 영역은 축소되었다. 터키로 부터 자유를 얻은 국가들은 교회적으로 터키의 수도에 거주하고 터키의 정치적 체계와 밀접하게 연관된 총대주교에 복종하는 것이 실제적이지 못함을 깨달았다. 총대주교는 그가 할수 있는 한 저항하였으나 각경우에 있어서 그는 결과적으로 피할수 없는 운명에 굴복하였다. 여러 민족교회들이 총대주교 관구로부터 분할되었다. 그리스 교회(1833년 조직되어, 1850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 의해 공인됨): 루마니아 교회(1864년 조직되어 1885년 공인됨) : 불가리아 교회(1871년 재조직되어 1945년 콘스탄티노플에 의해 공인됨) 세르비아 교회(1879년 회복되어 공인됨) 총대주교 관구의 감소는 주로 전쟁의 결과로 현 세기까지 계속되었고 발칸반도에서의 구성원들은 이제 겨우 오토 제국의 번성기에 존재하였던 것의 조그만 파편이다.
터기의 점령은 교회의 지적인 삶 위에 두가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거대한 보수주의의 원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화의 원인이었다. 터키하의 동방정교회는 자신들이 방어적이라고 느꼈다. 다가올 보다 좋은 날이라는 희망 속에서 모든 것이 잘 이루어져 나가리라는 거대한 목적은 살아남았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비잔티움으로부터 전수받은 기독교 문명에 대하여 기적적인 끈기를 지니고 집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명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하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그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규범들을 반복하거나, 그들이 과거로부터 전수받은 입장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견고히 하는데 만족하였다. 그리스는 사람들이 후회할 수 밖에 없는 골화와 경직화를 경험하였다.
어둡고 어려운 시대속에서 그리스인들은 사실상 본질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동방전통을 유지하였다. 이슬람 지배하의 동방정교회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로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말씀을 부여잡았다.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딤전 6,20) 그들이 종국에 좀더 나은 모토를 선택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 전통주의와 나란히 17, 18세기의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또다른 그리고 반대되는 흐름이 있다.-서구의 침투의 흐름. 오토만의 지배 아래 동방정교회인들이 높은 수준의 학문성을 유지할수 있는 것은 불가능 하였다. 높은 교육을 바랬던 그리스인들은 어쩔수 없이 비동방세계, 이태리와 독일, 파리, 그리고 심지어 옥스퍼드까지 여행하였다. 터키시대의 뛰어난 그리스 신학자들 가운데, 소수가 스스로 배웠으나 압도적 다수는 로마 가톨릭 혹은 개신교 대가들 아래에서 서방에서 훈련을 받았다.
불가피하게 이것은 그들이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명백히 서방에서 그리스 학생들은 교부들을 읽었지만, 그들은 단지 그들이 비-동방교수들에 의해 존경하도록 배운 교부들과 친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그의 영적인 가르침 때문에 아토스의 수도사들에 의해서만 읽혀졌고, 터키시대의 대부분의 학식있는 그리스 신학자들에게 그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시대의 가장 유능한 그리스 신학자 유스트라티오스 아르겐티(Eustratios Argenti:1758년 사망)의 작품속에는 팔라마스로부터 단순한 인용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경우는 전형적이다. 팔라마스의 주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거룩한 헤시케스트들에 대한 방어속에서 삼인조'(The Triads in Defence of the Holy Hesychasts)가 대부분 1959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난 4세기 동안에 그리스 동방정교회의 학문의 상태를 상징한다.
충분히 그들 자신의 교회에 의도적으로 충성하였을지라도, 서방에서 공부한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동방정교회의 정신성을 상실하고, 살아있는 전통인 동방정교회로 부터 단절된 것은 사실상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서구의 안경으로 신학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와 관계가 먼 논쟁 방식과 결정론을 사용하였다.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러시아 신학자 플로로브스키(Fr Georgco Florovky:1893-1929)가 적절하게 명명한 위-형태론(Pesudomorphosis)을 경험하였다. 터키시대의 종교사상가들은 대부분 두진영으로 갈라졌다. -라틴주의자(Latinizers)와 개신교주의자(Protestantizers). 그러나 이 서구화의 범위는 과장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서방에서 배운 외적인 형식들을 사용하였으나, 그들의 사상의 본질에 있어서 대다수는 근본적으로 동방적이었다. 전통은 여러번 전혀 맞지 않는 모형으로 강요당함으로 왜곡되었다. 그러나 왜곡되었으나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보수화와 서구화의 이중의 배경을 명심하고,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에 의해 동방세계에 미친 도전들을 생각해보자.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그들의 이중의 영향
종교개혁의 영향들은 그들이 러시아와 터키제국의 국경선에 도달하였을때, 잠시 멈추었고, 그결과 동방정교회는 종교개혁이나 반종교개혁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두 운동이 동방정교회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이다. 무수한 접촉점들이 있었다. 우리가 본것처럼, 동방은 서방에서 공부해갔다. 동방 지중해에서 건너간 예수회와 프란시스칸들은 동방에서 선교사역을 수행하였다. 예수회는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사역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외국대사관-로마가톨릭과 개신교세력-들은 정치적 역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7세기중에 이들의 접촉은 동방정교회의 신학에 있어서 의미있는 발전으로 인도하였다. 동방과 개신교사이의 첫번째 중요한 관점의 변화는 튜빙겐으로부터 온 루터교신학자 대표단이 야콥 안드레아스와 마틴 크루시우스의 안내를 받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고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에게 그리스어로 번역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사본을 준 1573년에 시작되었다.
의심할바없이, 그들은 그리스인들 가운데에 일단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기를 희망하였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생각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우리와 연합하여야 하고, 우리의 가르침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스는 튜빙겐 신학자들에 대한 그의 응답(1576,1579,1581년) 속에서 엄격하게 전통적 동방정교회 입장을 고수하였고, 개신교주의에 경도 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그의 처음 두편지에서 루터파들에게 응답을 보냈다. 그러나 총대주교는 그의 세번째 편지 속에서 문제들이 벽에 부딪쳤음을 느끼면서 서신왕래를 끝냈다. '당신들의 길을 가시오. 더 이상 교리적 문제들을 기록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들이 편지를 쓰기 원한다면, 그때에는 친교를 위해서만 쓰시요.'
이 모든 사건은 동방정교회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을 보여준다. 총대주교의 응답은 동방정교회의 관점으로부터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에 대한 첫번째 명백하고 권위있는 비평으로써 중요하다. 예레미야스에 의해 논의된 주된 문제들은 자유의지, 은혜, 성경, 전통, 성만찬, 죽은자를 위한 기도, 그리고 성자들의 소명이었다.
튜빙겐의 간섭기간중, 루터파와 동방정교회는 서로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보여주었다. 매우 다른 정신이 동방정교회와 반-종교개혁 사이의 첫번째 중요한 접촉을 가져왔다. 이것은 터키제국의 경계선 밖에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다. 타타르에 의해 키예프 권력이 파괴된후, 키예프시를 포함하여 남서 러시아의 대부분의 지역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의해 흡수되었다.
러시아의 남서부는 통상 '작은 러시아' 혹은 우쿠라이나로 알려졌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민들은 1386년까지 한 통치자 아래 연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구의 대다수와 더불어, 연합지역의 군주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들 국민들중 소수만이 러시아인과 동방정교인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들 동방정교인들은 불안정한 주변인이었다.
그들이 속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폴란드에서 매우 효과적인 지배를 행사할 수 없었다. 그들의 감독들은 교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폴란드의 로마 가톨릭 왕에 의해 지명되었고, 종종 영적 자질을 결여한 간신들이었다.
16세기 말경에 로마를 향한 운동이 우쿠라이나의 동부 기독교인들 가운데 발전하였다. 1596년 브레스트-리토브스키(Brest-Litovsk)공의회에서 키예프의 메트로폴리탄, 미카엘 라고자(Ragoza)를 포함하여, 참석한 8명의 감독중 6명이 로마와 연합하는데 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수도사와 교구 대표단들의 중요한 구성원들과 더불어 두명의 감독들이 동방정교회에 남기로 선택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날카로운 분열이 일어났다. 한편에는 동방정교회의 잔류파, 다른 한편 - 이들은 다양하게 유형화 되었다.- '그리스 가톨릭파' '동방제의의 가톨릭파'(Catholic of the Eastern rite) 혹은 'Uniates,'. 그리스 가톨릭파가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선언된 원칙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였으나, 성직자의 결혼과 같은 그들의 전통적 실천사항들은 유지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서구적 요소들이 그들 속으로 들어오는 시간의 과정속에 있었을지라도, 이전처럼 비잔틴의 제의를 계속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외적으로는 '동방 제의의 가톨릭파'를 동방정교회로부터 거의 구별할수 없다. 우리는 교육받지 않은 농부들이 일어난 논쟁이 무엇이었는지 어느정도까지 이해하였는지 궁금하다.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 지속된 동방정교회는 로마 가톨릭 당국으로부터 심한 억압을 받았다. 의심할 바 없이 브레스트 연합은 1596년부터 현재까지 동방정교회와 로마사이에 관계를 한층 더 비참하게 하였다. 그러나 박해는 여러 방면에서 고무적인 결과를 낳았다. 평신도들은 동방정교회를 방어하기 위하여 동맹을 맺었고, 고위 성직자들이 로마에 변절했던 여러 장소에서 형제단(Bratva)으로 알려진 힘있는 평신도 연합에 의해 동방정교회의 전통이 지탱되었다. 예수회의 선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그들은 인쇄기를 가지고 동방정교회를 변호하기 위하여 책들을 발행하였다. 예수회의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의 동방정교회 학교들을 조직하였다. 1650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배우고자 하는 수준은 동방세계의 어느 곳 보다도 높았다. 이당시에 모스코바를 여행하고 키예프로부터 온 학자들은 러시아에서 지적 수준을 상당히 높였다. 배움에 대한 이러한 부흥 속에서, 특별히 찬란한 부분이 1633년부터 1647년까지 키예프의 메트로폴리탄이었던 모길라의 피터에 의해 수행되었다. 우리는 잠시 그에게 눈을 돌려야만 한다.
1596년 브레스트 공의회에 시릴 누카리스(Lukaris:1572-1638)라 불리는 젊은 그리스 사제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대표들 가운데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그의 경험의 결과이든지, 아니면 그가 그후 콘스탄티노플에서 사귄 친구들 때문이었든지, 그는 그 이후의 삶에서 로마 교회에 대한 강력한 적의를 나타냈다. 에큐메니칼 총대주교가 되자마자, 그는 그의 충만한 정력을 터키제국에서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과 싸우는데 헌신하였다. 아마 불가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교회'(그리스인들이 그것을 부른 것처럼)와의 투쟁 속에서 그가 깊게 정치에 관계하게 되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그의 예수회 반대자들이 로마 가톨릭 당국의 외교 대표자들을 이용하는 동안, 그는 자연히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개신교 대사관들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개신교 외교사절단에게 정치적 도움을 호소하는 것 이외에, 시릴은 또한 신학적 문제에 있어서 개신교의 영향력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서 1629년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그의 신앙고백서는 상당부분의 가르침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칼빈주의적이었다.
총대주교로서 시릴의 통치는 격렬한 음모의 오랜 연속이었고, 오토만의 지배아래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좌의 고통받는 상태에 대한 무시무시한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여섯번 지위가 폐위 당하였고 여섯번 다시 지위가 회복 되었던 그는 마침내 터키의 병사들에 의해 교살되어 그의 몸은 보스포로스강으로 던져졌다. 그가 성 포티우스 시대 이래로 총대주교좌를 수행한 가장 명석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의 경력은 매우 비극적인 것이었다. 그가 정치적 음모들로부터 자유한, 오로지 행복한 상태 아래 살았었다면, 그의 비범한 재능들은 좀더 휼륭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시릴의 칼빈주의는 그의 동료 동방정교인들에 의해 실랄하고 재빠르게 평가되었고, 그의 신앙고백서는 1638년에서 1691년까지 6개의 지역 공의회들에 의해 정죄되었다. 시릴에 대한 직접적 반작용 속에서 두명의 다른 동방정교회의 고위 성직자, 모길라의 피터와 예루살렘의 도시테우스는 그들 자신의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다. 1640년 기록된 피터의 동방정교회의 신앙고백서(Orthodox Confession)는 로마 가톨릭의 의식서들에 직접적으로 근거하였다. 그것은 루마니아(1642)의 쟈시 공의회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러나 곧 그것은 메레티우스 시리고스(Meletius syrigos)라는 그리스인에 의해 개정 되었는데 그는 특히 성만찬에서 봉헌(피터는 이것을 오로지 제정의 말씀으로 돌렸다)과 연옥에 관한 조항들을 바꾸었다. 개정판에서 조차도 모길라의 신앙고백서는 여전히 동방정교회의 공식적 공의회에 의해 일찌기 채택된 라틴 문서이다. 1699년부터 1707년까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였던 도시테우스 또한 심하게 라틴 자료에 의존하였다. 예루살렘공의회(또는 베들레헴 공의회 알려짐)의해 1672년 인준된 그의 신앙고백서는 시릴의 신앙고백서에 간단 명료하게 일일이 답하였다. 시릴과 도시테우스가 의견이 갈리는 중요한 문제들은 네가지이다. 자유의지, 은총, 그리고 예정에 관한 문제, 교회론, 성례의 수와 본질, 그리고 성상에 대한 존경. 성만찬에 대한 진술 속에서 도시테우스는 라틴어 화체설(transubstantiation) 뿐만 아니라, 실체(substance) 와 우유성(accidents) 사이의 스콜라적 구별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죽은자를 위한 기도를 변호하면서, 그는 실제적으로는 연옥교리를 사용함 없이, 로마의 연옥교리와 매우 밀접하게 가까와졌다. 그러나 한편 도시테우스의 신앙고백서는 모길라의 것보다는 덜 라틴적이었으며, 확실히 17세기 동방정교회의 신학사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문서로 간주 되어져야 한다. 누카리스의 칼빈주의에 직면한 테오도시우스는 손에 가까운 무기(라틴 무기들)를 사용하였다.(그 상황아래서 그것은 아마도 그가 할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 라틴 무기들을 가지고 방어한 신앙은 로마 가톨릭적이 아니라 동방정교회적이었다.
17세기에 우크라이나 밖에서는 동방과 로마 가톨릭사이의 관계는 종종 친밀하였다. 동부 지중해연안의 많은 지역에서 특별히 베네치아의 지배아래 있는 그리스 섬들 가운데에서, 그리스인과 라틴인들은 서로 예배를 함께 드렸다. 우리는 심지어 축복된 성만찬(Blessed Sacrament)의 로마 가톨릭의 행렬에 동방 성직자들이 제복을 입고 양초와 기를 들고 참석 하였음을 읽는다. 그리스 감독들은 라틴 선교사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양떼들에게 설교하고 신앙고백서를 듣도록 하였다. 그러나 1700년이후 이 친밀한 접촉은 감소하였고, 1750년경에는 그들은 접촉을 대부분 중지하였다. 1724년 안디옥에 있는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좌의 대부분은 로마에 복속하였다. 이후 동방정교회 당국은 동일한 일이 터키제국내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날것을 두려워하면서, 로마 가톨릭을 대하는데 있어서 훨씬 엄격해졌다. 반로마감정의 정점은 콘스탄티노플, 안렉산드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이 라틴의 세례가 전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선언하고 동방정교회로 회심한 모든 자들은 새롭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1755년이었다. 교령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이단의 세례는 거부되고 멸시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이익을 줄수 없는 물이며,....그것을 받을때 그 어떤 성화를 제공하지 못하며, 전혀 죄를 씻는 방식에 이용 될수 없는 물이다.' 이러한 평가는 11세기말까지 그리스 세계에 유효하게 존속되었으나, 그것이 러시아 교회에까지 확장되지는 않았다.러시아인들은 일반적으로 1441년과 1667년 사이 로마 가톨릭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1667년이래로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17세기의 동방정교회는 로마 가톨릭, 루터파, 그리고 칼빈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영국성공회와도 접촉하였다. 시릴 누카리스는 캔터베리의 대주교겸 수도원장과 서신왕래를 시작하였다. 미래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메트로파네스 크리토포로스(Metrophanes Kritopoulos)는 1677년부터 1624년까지 옥스포드에서 공부하였다. 크리토포로스는 음조에 있어서 약간 개신교적이나, 광범위하게 동방정교회에서 사용된 신앙고백서의 저자이다. 1694년경, 심지어 옥스포드(지금은 보르체스터(Worcester) 대학)의 글로체스터 홀(Gloucester Hall)에 '그리스 대학'을 설립할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약 10명의 그리스 학생들이 실제로 옥스포드에 보내졌다. 그러나 이계획은 예산부족으로 실패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음식과 숙박이 너무 열악함을 깨닫고 그들중 대부분은 달아났다. 1716년부터 1725년 가장 흥미있는 교제(일치)가 동방정교회인들과 비-선서자(Jurors:찬탈자 오렌지 윌리엄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보다, 1688년 영국교회의 주된 몸체에서 분리해 나간 일단의 성공회원들) 사이에 유지되었다. 비-선서자들은 동방정교회와의 교제를 확립할 희망 속에서, 4개의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들과 러시아교회 모두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비-선서자들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현현에 관한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동방정교회에 의해 하나님의 어머니, 성자들, 그리고 성상들에게 표현된 존경심에 의해 당황스러웠다. 결과적으로 교제는 어떠한 동의에 도달함 없이 중단되었다.
모길라와 도시테우스의 작품, 쟈시와 예루살렘 공의회, 그리고 비-선서자들과의 교제에로 되돌아가보면, 우리는 이시대에 그리스 신학의 한계성으로 인해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충분하게 동방정교회의 전통을 발견할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공의회들은 동방정교회에 영구적이고 건설적인 기여를 하였다. 종교개혁 논쟁은 에큐메니칼 공의회나 후기 비잔틴 제국의 교회들이 직면하지 못하였던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17세기에 동방정교회는 성례와 교회의 본질과 권위에 대하여 더욱 깊게 생각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동방정교회가 이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서방에서 일어난 새로운 가르침들과 관계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의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17세기 공의회가 성취한 업적이다. 이 공의회들은 지역적이었으나, 그들의 결정의 본질은 전체 동방정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3백년전의 헤시케스트 공의회처럼 17세기 공의회들은 창조적인 신학작업이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의 시대 이후에 동방정교회내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든 동방정교회인들이 그들의 신앙의 통합적 부분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보편 공의회들에 의해 정의되지 않은 중요한 교리들이다.
터키의 통치 내내, 헤시케시즘의 전통들은 특별히 아토스 산에서 살아남았다. 여기에서 18세기 후반기에 그 효과가 아직도 오늘날 느껴질수 있는 중요한 영적 갱신운동이 일어났다. 콜리바데스(Kollyvades)로 알려진 그 구성원들은 너무 많은 다수의 동료 그리스인들이 서구의 계몽주의의 영향아래 떨어지고 있는 방식에 대하여 경고를 하였다. 콜리바데스들은 서방에서 유행하는 세속적 사상을 수용함으로써가 아니라, 동방 기독교의 참된 진리-교부신학과 동방의 제의적 삶의 재발견을 통하여-로 돌아감을 통해서만, 그리스 국가의 부흥이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특별히 그들은 이 당시에 비록 대부분의 동방정교회가 일년에 세번 혹은 네번만 성만찬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다면, 매일 성만찬이 자주 있어야 할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콜리바데스는 거룩한 산과 그 밖의 장소에 의해 맹렬히 공격을 받았으나, 181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공의회가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고, 원칙상 적절히 준비가 된다면, 신자들이 모든 성만찬 의식에서 성만찬을 받을수 있다고 확정하였다.
이 영적 갱신의 가장 유명한 결실들 가운데 하나는 14,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금욕적이고 신비적 본문의 광대한 선집인 필로칼리아(Philokalia)의 출현이었다. 1782년 베니스에서 출판된, 이선집은 2절판으로 약 1,207 페이지의 무거운 책이다. 콜리바데스 운동의 지도적 인물들인 이 편집자들은 고린도 교회의 메트로폴리탄(1731-1805)인 성 마카리우스(노타라스)와 '그의 시대를 배우는 안토니파의 백과사전'으로 명명된 거룩한 산(The Hagiorite'1748-1809)의 성 니코메무스였다. 편집자들에 의해 수도사 뿐만 아니라 세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을 위하여 의도된 필로칼리아는 특별히 내적 기도의 이론과 실천, 특별히 예수의 기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초기에 그리스에서 그것의 충격은 억제되었고 그것이 다시 발행되기까지 한세기 이상이 지나갔다. 그러나 1793년에 모스크바에서 출판된 슬라브 번역이 19세기 러시아 영성의 르네상스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한편 최근에 1950년대부터 더 많은 관심이 그리스인들에 의해 필로칼리아에 주어지고 있다. 번역들은 또한 서방언어로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놀라웁게 광범위한 대중에 어필하였다. 실로 필로칼리아는 영적 시한폭탄으로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필로칼리아의 참 시대는 18세기 후반이 아니라 20세기 후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니코메무스는 수많은 다른 본문들, 가장 주목할만한 새로운 신학자 시메온의 저작들의 편집을 희망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출판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 팔라마스에 대한 편집을 준비하였다. 이 당시 그리스인들의 강한 반-가톨릭 정서의 관점에서 볼 때, 다소 놀랍지만, 그는 또한 로마 가톨릭의 경건한 문학들을 이용하였고, 그리스 동방정교회의 독자들을 위하여 로렌즈 스쿠폴리(Loren Scupoli)와 예수회의 설립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작품들을 채택하였다.
18세기 아토스산의 또다른 수도사, 애톨리안(Aetolian) 성 코스마스(Kosmas)는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교적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 사람들의 부흥에 기여하였다. 그의 사역은 요한 웨슬레의 사역과 비슷하였다. 이당시 터키의 지배아래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문화적 삶이 여러 곳에서 쇠퇴하여 가라앉고 있을때, 그는 그리스 주요지역과 섬들을 관통하는 일련의 사도적 여행을 통하여 수많은 군중들에게 연설하였다. 그는 그리스 정통신앙과 그리스 언어를 통합적으로 관계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 학교들을 세웠다. 결국 그는 오토만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는 터키시대에 그들의 신앙 때문에 고통을 받은 수많은 '새로운 순교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만약 터키의 지배 기간중 동방정교회의 국가내에 많은 안타까움이 있지만, 또한 감탄할 만한 것이 많이 있다고 정당하게 주장되어져 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절망에도 불구하고, 오토만의 지배아래 동방정교회는 결코 중심을 상실하지 않았다. 물론 이슬람에 배교하는 많은 경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유럽에서 기대했던 것만큼 빈번하지는 않았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 가운데 부패는, 그것이 억압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기독교인의 일상적 삶 위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그의 교구 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암흑의 시대에 동방정교회를 살아있도록 한 것은 성만찬(the Holy Liturgy)이였다.
제 6 장
모스코바와 성 피터스버그
나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즉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의식이 다른 서방 국가들의 삶에서 보다 러시아인들의 삶 속에 더욱더 완벽하게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867년 러시아 방문후 H.P Liddon이 쓴 성 바울의 교회법 중에서
제 3의 로마, 모스코바
콘스탄티노플을 1453년에 취득한 후에 동방의 기독교 세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유일한 나라가 있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의 대부분은 벌써 터키에 의해 정복당했고, 나머지는 오래전에 병합 되었다. 키예프의 메트로폴리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로마 가톨릭 통치자들의 관할로 양도되었다. 모스코비(Muscovy)만이 홀로 남겨졌다. 비잔틴제국의 시대가 끝났을 바로 그때에 모스코바인들은 그들 자신이 드디어 타타르(tartar)의 종주권의 잔존하는 증거들로부터 마침내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그들을 바잔틴의 계승자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스코바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모스코바 교회도 계획된 의도라기보다는 우연히 독립을 얻게 되었다. 지금까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러시아 교회의 수장인 메트로폴리탄을 임명했다. 플로랜스 공회의에서 메트로폴리탄은 이시도레(Isidore)라는 그리스인이었다. 로마와의 연합의 주도적 지지자였던 이시도레는 1441년에 모스코바로 되돌아와 플로랜스의 교령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스코바인들에게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는 그랜드 공작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석방이 된후에 이탈리아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이 중요한 교구는 공석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총대주교에게 새로운 메트로폴리탄을 요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공적인 교회(Official Church)는 플로랜스 연합을 계속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조치를 취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이것을 몇년동안 연기하였다. 결국 1448년 모스코바에서 러시아 감독들의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과는 상관없이 메트로폴리탄을 선출하는 일에 착수했다.
1453년 이후 플로렌스 연합이 콘스탄티노플에서 포기되어졌을 때, 총대주교와 러시아 사이의 교제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계속해서 그들의 주요 성직자를 임명했다. 이후로 모스코바교회는 독립교단이 되었다. 그러나 키예프의 메트로폴리아는 1686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관할하에 있다가 모스크바에 양도 되었다. 이 일은 에큐메니칼 총주교의 허락없이 일어났다. 모스코바를 비잔티움의 계승자로서 보는 생각은 한 결혼에 의해 뒷받침 되어진다. 1472년에 이반 3세 대왕(Ivan Ⅲ the great:1462년부터 1505년까지 통치)은 마지막 비잔티움 황제의 질녀인 소피아와 결혼했다. 소피아에게 오빠들이 있어 그녀가 왕위를 이어받을 합법적 계승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혼은 비잔티움과 왕조적 인연을 확립하는데 역할을 했다. 모스코바의 그랜드 공작은은 전제군주 그리고 독재자(Tsar:로마 시이저를 선택)라는 비잔틴제국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의 국가의 상징으로 비잔틴제국의 머리가 둘 달린 독수리를 사용하였다. 사람들은 모스코바를 '제3의 로마'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기를) 첫번째 로마는 야만인들에게 멸망하여 이단으로 전락하였다. 차례로 두번째의 로마 콘스탄티노플은 플로랜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리고 터키에 의해 형벌을 받았다. 그래서 모스코바는 동방정교회 기독교세계의 중심지로 세번째이자 마지막 로마로써 콘스탄티노플을 계승했다.
Pskov의 수도사 필로테우스(Philotheus)는 황제 바질 3세(Basil Ⅲ)에게 1510년에 기록한 한 유명한 편지에서 이와 같은 경향의 주장을 하였다.
나는 우리의 통치자인 현재의 동방정교회 제국의 황제에 관하여 몇마디 덧붙이기를 원한다. 그는 지상에서 기독교인의 유일한 황제이고 로마나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나 축복받은 도시 모스코바에서는 존재하는 사도적 교회의 지도자이다. 모스코바는 홀로 태양보다도 더 밝게 온세계를 비취고 있다. 모든 기독교 황제들은 타락하였고 그들을 대신하여 예언서에 따라 우리 제국의 통치자만이 홀로 남아있다. 두 로마는 타락하였으나 제 3은 서있고 제 4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스코바를 제3의 로마로 보는 생각은 황제에 적용하여 볼 때, 어떤 타당성을 갖게 된다. 비잔티움의 황제는 한때 동방정교회의의 옹호자이며 후원자로서 행동하였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의 전제군주는 같은 임무를 수행하도록 요구되어졌다. 그러나 종교적 영역에 있어서 이러한 적용은 더욱더 제한적이 된다. 왜냐하면 러시아교회의 우두머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결코 대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동방정교회의 지도자들 중에서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다음인 다섯 번째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성 세르기우스가 이루려 노력했던 꿈-타타르(Tartar)로부터의 러시아 독립-이 현실이 되자, 그의 영적 후계자들 사이에는 슬프게도 분파가 나누어졌다. 세르기우스는 수도원생활의 신비로운 측면과 사회를 연결시켰다. 그러나, 그의 계승자에 와서는 이 두가지 측면들이 분리 되었다. 그 첫 번째 분리는 1503년에 있은 교회공의회에서 드러났다. 이 공의회의가 끝나가려 할 때, 볼가강 너머 숲 속의 먼 은신처에서 온 수도사인 소라(Sora)의 성 닐루스(Nilus: Nil Sorsky, ? 1433-1508)가 일어나 수도원들의 토지소유권에 관하여 공격했다. (이 당시 수도원들에 소유된 땅은 러시아에서 약 1/3이었다.)
볼로칼람스크의 수도원장 성 죠셉(St. Joseph, Abbot of Volokalamsk:1439-1515)은 수도원의 토지보유에 관하여 변호의 답변을 했다. 공의회의 대다수는 죠셉을 지지했다. 그러나 러시아교회에 닐누스(Nilus)에 동의하는 사람들-주로 볼가강 너머 그와 같이 살던 은둔자들-도 있었다. 죠셉의 지지자들은 토지소유자들로, 닐누스(Nilus)와 볼가강 넘어의 은둔자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자들로 알려졌다. 그 후 20년동안 두 그룹 사이에는 상당한 긴장이 감돌았었다. 마침내 1525-6년에 땅을 소유하지 않은자들이 황제 바질 3세(Basil Ⅲ)가 그의 아내와 불공정하게 이혼한 것에 대해 공격을 했다. (동방정교회는 타당한 이유일 때는 이혼을 허락한다.) 그때 황제는 비토지소유자들 중 주동자를 투옥시키고 볼가강 넘어의 은둔지들을 폐쇄했다. 성 닐누스의 전통은 비밀히 ?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러시아교회에서 그것의 영향은 매우 제한되어졌다. 무엇보다도 소유자들의 전망이 대단히 지배적이었다.
수도원의 재산에 관한 질문의 배후에는 수도원의 삶에 대한 두가지 상이한 생각과 그리고 궁극적으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관한 두가지 다른 견해가 놓여져 있다. 토지소유자들은 수도원 제도의 사회적 의무를 강조했다. 병든자,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 친절하게 대하고 가르치는 것은 수도사들의 임무중 일부분이다. 효과적으로 이와 같은 일들을 행하기 위해 수도원들은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토지를 소유해야만 한다. 수도사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재산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보관하는 것이다. 죠셉의 추종자들 사이에 격언이 하나 있었다. '교회의 부는 가난한 자의 부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토지소유자들은 자선행위를 신자의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수도사의 주된 임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모범을 보임으로써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철저히 위와 같은 것을 행하기 위해서 수도사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가난을 타파하겠다고 서약한 사람만이 진정한 분리를 이룰 수 있다. 토지소유자들인 수도사들은 세속적 욕망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세속적 관심사에 몰두하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세속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한다. 닐누스의 제자인 수도사 바시안(Vassian:파트리키예프의 왕자)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복음서, 사도들 그리고 교부들의 전통 어느 곳에 수도사들이 인구가 많은 마을을 얻도록 지시되었으며 농부들을 노동단체의 노예로 만들어도 된다고 되어 있나? ...우리는 부자들의 소유를 주의 깊게 살피고 비굴하게 아첨을 한다. 그들을 치켜 세워 그들에게서 조그마한 몇 개의 마을을 얻어낸다. 우리의 형제, 기독교인들을 학대하고 약탈하고 그들을 판다. 우리는 야생동물처럼 천벌, 징벌, 원한으로 그들을 고문한다.
고문과 징벌에 대한 바시안(Vassian)의 이의 제기는 우리에게 양측이 일치를 보지 못한, 이단자 취급에 관한 두 번째 문제를 상기시킨다. 죠셉은 그당시 기독교세계의 보편적인 관점을 지지했다. 이단자들이 반항을 한다면, 교회는 시민의 힘을 빌려야 하고 감옥에 그리고 고문에 호소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화형까지도. 반면에 닐누스는 이단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어떤 형태든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종교 개혁기 동안 서부 유럽에서 개신교도와 로마가톨릭교회가 서로를 어떻게 여겼는지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닐누스가 어느정도 예외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용인하고 존중하는지를 깨달아야한다. 역으로 이단자에 관한 문제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라는 좀더 광범위한 문제와 연루되어져 있다. 닐누스는 이단을 정신적인 문제로 간주하고 국가의 간섭 없이 교회가 처리해야 한다고 여겼다. 죠셉은 세속권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일반적으로 닐누스는 가이사의 일과 하나님의 일 사이에 조셉 보다 더 명백한 입장을 가졌다. 토지소유자들은 모스코바를 제3의 로마로 여기는 생각에 큰 지지자들이었다. 교회와 국가 사이에 긴밀한 협조를 믿기 때문에 그들은 세르기우스가 했었던 것처럼 정치에 적극적인 참여를 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교회가 국가의 종이 되는 것을 막는데 있어서 세르기우스보다 주의를 적게 기울였다. 비토지소유자들로서는 수도원에 관한 예언자적이고 내세의 증거에 대해 좀더 예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죠셉파는 하나님의 나라와 현세의 왕국을 동일시하는 위험에 처했다. 닐누스는 지상의 교회는 늘 순례길의 교회와 같아야만 한다고 여겼다. 죠셉과 그의 파벌은 위대한 애국자와 민족주의자들인 반면에 비토지소유자들은 교회의 보편성과 공교회성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다.
양측 사이의 의견 불일치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경건과 기도에 대해서도 상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죠셉은 규칙들과 훈련의 역할을 강조했고 닐누스는 영혼과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관계에 역점을 두었다. 죠셉은 예배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였고 닐누스는 아름다움이 우상이 될지도 모른다며 우려했다. (닐누스가 주장한것처럼) 수도사는 외부의 가난 뿐만 아니라 완전히 자신을 비우는데 전념해야 한다. 그리고 수도사는 아름다운 성상이나 교회음악에 대한 헌신이 그와 하나님 사이에 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름다운에 대한 이와같은 의심속에서 닐누스는 러시아 영성에서 가장 이례적인 청교도주의-성상파괴주의-를 보여준다. 죠셉은 공동예배와 예배기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누구든 자신의 방에서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찬양의 목소리가 화합하여 하나님께 향하여 올라가고,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일치 속에서 하나의 생각과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방에서는 기도할 수 없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세라핌은 트리사기온(the Trisagion)을 외치고, 여기 낮은 곳에서는 인간들이 동일한 찬송을 올린다. 하늘과 땅은 함께 잔치를 벌릴 것이고 감사와 행복과 기쁨으로 하나가 될 것이다.
한편, 닐누스는 주로 예배식의 기도가 아니라 신비적 기도에 흥미가 있었다: 그가 소라(Sora)에 정착하기 전에 그는 아토스 산에서 수도사로 살았었다. 그리고 그는 비잔티움의 헤시케스트의 전통을 직접 배웠다. 러시아 정교회는 죠셉과 닐누스 양쪽의 가르침에 있어서 좋은 점을 정확하게 발견했다. 그리고 그 둘 모두를 인정했다. 각각은 성 세르기우스의 전통의 일부를 이어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는 죠셉파와 볼가강 넘어의 수도원체제 형태를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각각은 서로를 보충해 주기 때문이었다. 양쪽이 서로 대립 되었다는 것과 닐누스의 전통이 크게 억압되어졌다는 것이 실로 슬픈 일이다. 비토지 소유자 없는 러시아교회의 영적인 삶은 일방적이며 불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죠셉파들이 지지했던 교회와 국가 사이의 밀접한 통합, 그들의 러시아 국가주의, 예배의 외면적인 형식에 대한 그들의 헌신, 이런 것들이 다음세기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토지소유자와 비토지소유자의 논의에 있어서 가장 흥미있는 참가자중의 하나는 그리스인 성 막시무스(Maximus:?1470∼1556)이다. 교량적 인사(bridge figure)인 그의 기나긴 삶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아토스산 그리고 러시아라는 세개의 세계에 걸쳐 있다. 태생이 그리스인인 그는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와 같은 휴머니스트 학자들의 친구로서 플로랜스와 베니스에서 초기 성년의 몇 년을 보냈다. 그는 또한 사보나롤라의 영향아래 있었고 2년동안 도미니크파의 수도사였다. 1504년 그리스로 되돌아온 후 그는 아토스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1517년 러시아 황제는 그리스작품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수많은 잘못으로 훼손 되어진 러시아 예배모범책들을 바로잡기 위해 그를 러시아에 초청하였다. 러시아에 도착하자 마자 비토지소유자와 운명을 함께 했다. 그는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받았고 1525년부터 1551년까지 26년동안 투옥 되었었다. 그가 예배모범책들에서 제안했던 변화들에 대하여 지독하게 공격을 받았으며 개정판의 작업은 중단되었으며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러시아인들이 이익을 볼 수 있었던 그의 뛰어난 학문의 재능이 그가 투옥됨으로 크게 낭비되었다. 그는 자아를 드러내는 것과 영적빈곤에 관한 그의 요구에 있어서 닐누스만큼 완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국적도 없으며 이름도 없는 알려지지 않은 이방인이 되어라. 당신의 친족과 아는 사람들 그리고 친구들 앞에서 침묵해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세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당신의 오랜 습관들과 당신 자신의 의지 모두를 희생시켜라'
토지소유자의 승리가 교회와 국가상에 긴밀한 동맹이 생긴 것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교회는 모든 독립을 빼앗지 않았다. 가공할만한 권력자 이반의 권력이 그 정점에 있을때, 모스코바의 메트로폴리탄 성 필립(St. Philip:1569년에 사망)은 감히 황제의 유혈 참사와 부정에 공공연히 항의 하였으며 공적인 예배의식에서 황제를 면전에서 비난했다. 이반은 그를 투옥시키고 후에 목졸라 죽였다. 이반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또 다른 사람이 "예수 안에서의 바보"였던 복자(the Blessed) 성 바질(1552년에 사망)이다. 비잔티움에서 발견된 거룩함의 한 형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스러워지는 것이다. 중세적인 러시아에서는 특히 현저했다. '바보(Fool)'는 자기비하(self-stripping)와 겸손에 관한 이상을 모든 지적 재능과 세상적 지혜의 온갖 형색을 부인함으로써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열망을 자발적으로 기도함으로써 가장 광범위하게 전했다. 이와 같은 바보들은 종종 귀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단지 그들이 바보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어떤 누구도 감히 사용하지 못했던 진솔함으로 권력에 있는 자들을 비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살아있는 양심은 바질에게 있었다. 이반은 바보(Fool)의 매서운 비난을 듣고 그를 어느정도 벌한후, 현저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대우했다.
1589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동의로 러시아정교회의 수장은 메트로폴리탄으로부터 총대주교의 위치로 승격되어서 예루살렘이후 5번째 지위를 얻었다. 사태가 드러남에 따라 모스코바의 총대주교직은 1세기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구 신자들의 분열.(The schism of The old Believers)
러시아는 17세기를 혼동과 재앙으로 시작하였으며 영토는 내분으로 나뉘어지고 외부의 적들에게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17세기는 분쟁의 시대로 알려졌다. 그러나 1613년 이후 러시아는 갑작스럽게 회생했으며 다음 40년동안은 국가삶의 여러 부분에 있어서 재건축과 개혁의 시기를 맞이했다. 재건축의 활동 중에서 교회가 크나큰 역할을 하였다. 교회내의 개혁운동은 삼위일체-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의 수도원장 디오니시우스(Dionysius)와 1619년부터 1633년까지 모스코바의 총대주교였던 필라레트(Philaret:그는 황제의 아버지였다)에 의해 처음으로 지도 되었다. 1633년 이후 지도권은 결혼한 교구 성직자의 그룹으로 양도되었으며, 특별히 대사제 존 네로노브(the Archpriests John Neronov)와 아바쿰 페트로비치(Avvakum Petrovitch)에게 양도 되었다. 그리스인 막시무스에 의해 16세기에 시작되었던 예배모범서를 교정하는 작업은 지금 조심스럽게 다시 시작되었다. 당국자들이 너무 많은 격렬한 변경을 하고자 모험을 하지는 않았지만, 총대주교의 인쇄소가 모스코바에 세워졌고 좀 더 정확한 교회의 책들이 출판되었다. 교구 차원에서 개혁가들은 성직자와 평신도간에 양쪽 모두에게 같은 도덕적 기준을 높이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했다. 그들은 술주정뱅이와 싸웠다. 그들은 금식이 지켜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제의(Liturgy)와 다른 예배들은 교구교회들내에서 생략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찬양되어져야만 한다고 요구했다. 그들은 설교를 자주 듣도록 장려했다. 개혁을 추진하는 그룹은 볼로카람스크(Volokalamsk)의 성 죠셉의 전통에 있는 가장 바람직한 것을 잘 나타냈다. 죠셉 같이 그들은 권위와 훈련을 신뢰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을 금욕주의의 규칙들과 예배식 기도의 견지에서 보았다. 그들은 수도사들 뿐만 아니라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남편, 부인, 아이들-들이 금식을 지키고 교회에서 혹은 그들 자신의 가정의 성상 앞에서 매일 기도할 때 오랜 기간동안 기도할 것을 바랬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인간의 나약함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너무도 야심적이어서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50년쯤 모스코바는 '성 러시아(Holy Russia)'라는 명칭을 훨씬 더 정당화시켰다. 동방정교회인들은 모스코바를 방문했던 터키 황제로부터 금식의 준엄성, 예배의 길이와 웅장함을 듣고 놀랬다. (그리고 종종 당황으로 가득 찼었다.) 전체의 국가가 '하나의 거대한 종교적 집'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1654부터 1656년까지 러시아에 머물렀고, 안디옥의 총대주교 출신으로 아랍 정교회교인(Arab Orthodox)인 알렙포(Aleppo)의 대집사 바울(Paul)은 황실 연회때 음악이 아니라 수도원의 식사 때처럼 성자들의 삶이 낭독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시간 혹은 그 이상으로 지속되는 예배는 황제와 모든 황실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 '아이들의 머리를 희게 할 만큼 가혹하고, 황제, 총대주교, 대공, 공주들, 숙녀들에 의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꼿꼿이 서서 너무 엄격하게 준수되었던 이 의무들에 관해서 우리가 지금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이 사막의 독실한 은둔자의 도를 넘어서야만 했다고 누가 믿겠는가?' 아이들도 이와 같은 엄격한 준수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소년들과 어린 아이들이 모자를 쓰지 않고 움직임 없이 서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며 그들은 참을 수 없다는 어떤 조그만 행동도 나타내지 않았다.' 바울은 러시아인의 엄격성이 그의 기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들이 '환희, 웃음, 그리고 농담', 음주, 아편상용, 그리고 '담배를 피우는 특정범죄로 인해 그들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흡연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평했다. 바울과 다른 방문자들이 러시아에 선사한 인상적인 그림이 있다. 그러나 아마도 형식을 너무도 강조했을 것이다. 한 그리스인이 귀국해서 모스크바의 종교는 주로 타종법(bell-ringing)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졌다고 말했다.
1652년-1653년에 개혁 그룹과 새 총대주교 니콘(Nikon:1605-81)사이에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태생이 농부인 니콘은 아마도 러시아 정교회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사람중 가장 똑똑하고 재질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횡포하고 권위주의적인 기질로 고통을 받았다. 니콘은 그리스 문물에 대한 열렬한 숭배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나는 러시아인이고 러시아인의 아들이다. 그러나 나의 신앙과 종교는 그리스적이다.' 그는 러시아적 실천들이모든점에 있어서 고대의 4개 총대주교직의 기준에 완전히 순응하도록 되어져야만 하고, 러시아 예배모범서들은 그리스의 것과 다를 때마다 바뀌어져야만 한다고 요구했다. 특히 그가 주장하기를 러시아인들이 옛날 방식으로 두 손가락을 사용하여 만드는 십자가의 표시는 이제부터는 그리스인들이 지금하는 것처럼 세 손가락으로 만들어야만 한다고 했다.
이 정책은 죠셉의 전통의 계승자들에게 원망을 샀다. 그들은 모스코바를 제3의 로마로 그리고 러시아를 동방정교회의 거점과 기준으로 여겼다. 그들은 비잔티움의 모교회에 대한 기억을 중요시하였으며 러시아는 비잔티움 모교회으로부터 신의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대의 그리스인들에는 같은 경의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들은 플로랜스에서 그리스 성직자들이 어떻게 믿음을 배반했는지를 기억했다. 그리고 그들은 터키의 통치아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내에서의 부패에 관하여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현대의 그리스 관례들을 독창성 없이 모방하는 것을 내키지 않도록 했다. 특히 그들은 러시아의 실천이 사실 더 고대적인 이때에, 러시아인들이 왜 그리스식으로 십자가 표시를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십자가 표시에 관한 문제가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적으로 동방정교회의에서 얼마나 큰 중요성을 갖는지 기억되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특별히 러시아인들은 그리스인의 내적 믿음이 표현되는 곳에 상징적 행동들, 예전적인 행동들을 덧붙였었다. 다수의 견지에서 볼 때 상징에서의 변화는 믿음에서의 변화를 조성했다. 십자가 표시에 관한 계속된 불일치는 그리스정교회와 러시아의 모든 논쟁을 특별한 방법으로 구체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니콘이 서서히 그리고 재치있게 계속 진행했다면, 모든 것은 잘되고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재치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네로노브(Neronov)와 아바쿰(Avvakum:1620-82)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구 성직자, 수도사들 그리고 평신도들과 함께 그의 개혁적 프로그램을 밀어 붙였다. 니콘식 개혁의 반대자들은 가혹하게 박해 받았으며, 추방과 투옥 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죽기까지 하였다. 네로노브가 마침내 굴복했고, 아바쿰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추방당한지 10년, 그리고 투옥된지 22년 -22년중 12년은 형무소 지하독방에서 보냈다- 후에 그는 마침내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믿음의 순교자로서 여겼다. 그의 생생하고 특별한 자서전에서 그의 모든 고통들에 관하여 상세하게 이야기를 남겼다. 그의 자서전은 러시아 종교문학의 고전중의 하나가 되었다.
니콘과 개혁의 반대자 사이의 논쟁은 결국 영구적인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니콘식 예배모범서를 거부한 사람들은 그들을 구 예전파(Old Ritualists)의 사람들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지만, 바스콜니키(Baskolniki:분파주의자) 또는 구 신자들(Old believers)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17세기에 국교반대자들의 운동이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만약 같은 기간에 일어난 영국국교회로부터의 분리운동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두가지 큰 차이점을 알게 된다. 첫 번째로, 구신자들(Old Believers)-러시아 비국교도들-은 공적인 교회들과 교리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주로 예배에 있어서 달랐다. 둘째로, 반면에 영국국교회로부터의 분리는 급진적이었다. -개혁을 충분히 실행에 옮기지 못한 공적교회들에 대한 항의- 그러나 러시아 국교반대자들은 그들의 눈에 개혁을 실행에 옮겼던 공적교회에 대항하는 보수주의자들의 항의하였다. 구신도들(Old believers)의 분파는 오늘날까지 계속되었다. 1917년 이전에 그들의 수는 공식적으로 2백만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수는 5배를 훨씬 넘었을 것이다. 그들은 중요한 두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포포비치(Popovtsy), 이들은 성직자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1846년이후에는 감독들에 대한 그들 자신들의 상속권 또한 가지게 되었다. 베츠포포비치(Bezpopovtsy)는 성직자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중세적 러시아인의 경건의 전통속에서 훌륭한 많은 요소들을 구체화시킨 구신자들(Old believers)에게 감탄할만한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의 한 면만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 전통의 귀중함을 모두 포함하지 못했다. -토지 소유자의 견해. 구신자들의 단점들은 죠셉파에서 두드러졌었던 결점들이다. 너무도 편협한 국수주의, 예배형식에 관한 지나친 강조. 그의 헬레니즘에도 불구하고, 니콘 역시 결국에는 죠셉의 계승자였다. 그는 예배의 외적형식에 있어서 완벽한 통일을 요구했으며 토지소유자들처럼 그는 모든 종교적 반대자를 제압하기 위해서 자유로이 국가의 군대의 도움을 간청했다. 박해의 힘을 빌린 것은 분열을 결정적으로 만들게 된 도화선이 되었다. 만약 1550년과 1650년 사이에 러시아 교회의 삶의 발전이 편파적이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영구적인 분리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박해 대신에 관용과 자유에 관하여 좀 더 생각했더라면 (닐누스가 했던 것처럼), 화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영적기도에 좀 더 주의를 기울였었다면, 그들이 예배에 관하여 지독하게 논쟁하지 않았을 것이다.
17세의 분열의 뒤에는 16세기의 논쟁이 놓여 있다.
니콘은 러시아에서 그리스적 실천들을 정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가 국가를 관장하도록 하는 두 번째 목표를 추구했다. 과거에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이론은 비잔티움에서처럼 러시아에서도 같았었다. 즉 각각의 영역에서 최고인 사제주의(Sacerdotium)와 제국주의(Imperium)이 두 개의 동등한 힘인 양두정치 혹은 조화였다. 사실상 교회는 키예프와 몽골의 기간에 독립과 그 영향의 커다란 가치를 향유하였다.
두 동등한 힘에 관한 이론이 똑같이 남아있었을지라도, 모스코바 황제의 지위 아래서는 사실상 시민의 힘이 점점 더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죠셉파의 정책은 자연적으로 이런 경향을 조성하게 되었다. 니콘은 그 상황을 바꾸려 시도하였다. 그는 총대주교의 권한이 종교적인 문제에서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를 중재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요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황제에게만 유일하게 보유되었던 대군주(Great Lord) 칭호를 주장하였다. 황제 알렉시스(Alexis)는 니콘을 깊이 존경하였고, 처음에는 그의 지배에 복종하였다. 1654년에 모스코바를 방문했었던 Oleavius는 다음과 같이 썼다. '총대주교의 권위가 너무도 커서 어느정도 통치권을 그랜드 공작과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알렉시스 시대가 끝난 후에, 니콘이 세속적인 일에 간섭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희망에서 1658년 니콘은 특이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半-은퇴의 상태로 들어갔으나, 총대주교직은 사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제의 요청으로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총대주교들이 의장을 맡아던 대공의회가 1666-7년 모스코바에서 열렸을때까지, 8년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영향력 있는 우두머리 없이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회의는 니콘의 개혁에 찬성하는 결정을 하였으나, 그의 인품에는 반대하였다. 예배모범서들에서 니콘의 교정과 무엇보다도 십자가 표시에 관한 그의 지배가 인증 되었다. 그러나 니콘 자신은 면직되고 추방당했고, 새로운 총대주교가 그의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래서 공의회는 러시아 정교회에 그리스적 실천을 강요한 니콘의 정책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총대주교를 황제보다 높은 위치에 두려는 그의 시도에 대해서는 실패하였다. 그 공의회는 상호의존하는 두가지 힘의 조화에 관한 비잔티움의 이론을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모스코바 공의회의 결정들은 오래 유효하지 못했다. 니콘이 너무나 한 방향으로 밀고 나갔던 여론의 동향은 곧 강화되어 난폭하게 다른 쪽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니콘이 너무도 열심히 강화 확대하려 노력했던 총대주교의 직무는 피터 대제(1682-1725년 즉위)에 의해 억압되었다.
대회의 기간(The Synodical period:1700-1917)
피터는 더 이상 니콘과 같은 일은 없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총대주교 아드리안(Adrian)이 죽었을 때인 1700년에, 피터는 후계자 임명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721년에 그는 총대주교직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유명한 영적규범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총대주교직의 자리에 영적대학 혹은 거룩한 대회(Holy Synod)등으로 불리는 하나의 위원회를 세웠다. 이것은 12명의 구성원으로 되어져 있는데 3명의 감독들과 나머지는 수도원의 우두머리들 혹은 결혼한 성직자들로 유치하였다. 대회의 구성은 동방정교회의 법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독일의 개신교 교회대회(the Protestant ecclesiastical synods)로부터 모방하였다. 대회의 구성원은 교회에 의해서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황제에 의해 지명된다. 그리고 또한 지명했던 황제는 자신의 뜻대로 그들을 해임시킬 수 있다. 평생 직무에 종사하면서 총대주교는 아마도 황제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반면에, 거룩한 대회의 구성원은 영웅이 될 만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간소하게 퇴임했다. 황제가 교회의 수장으로 불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영적 대학의 최고의 심판관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대회의 모임들은 황제가 직접 참석하지 않았고 최고 행정장교(Chief Procurator)라는 관리가 참석했다. 최고행정장교가 다른 테이블에 앉아 토론에 참가하지 않을지라도, 그는 사실상 교회의 사건들에 상당한 힘을 휘둘렀다. 그리고 이름은 종교 장관이 아니었지, 실질적으로는 그러했다. 영적 규범은 교회를 신적 기관으로 본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주로 세속적 가정에 근거하여, 그것은 영국의 종교개혁시에 '구속자의 왕적 권리들'(the Crown rights of the Redeemer)로 명명된 것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회의 더 높은 통치 뿐만 아니라, 교회의 다른 많은 지배를 위한 준비이다. 신앙고백을 듣는 동안 정부가 반란으로 생각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제는 성례전의 비밀을 어기고 경찰에게 이름과 상세한 것을 알려주도록 명령 되어진다. 수도원주의는 솔직히 수많은 무질서와 혼란의 근거지로 불려진다. 그리고 많은 제한 안에 놓여졌다. 새 수도원들은 특별허가 없이는 설립될 수 없다. 수도사들이 은둔자로 사는 것은 금지되었다. 50세 미만의 여자들이 수녀로써 서약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시대까지 러시아에서 사회적 일의 주된 중심이었던 수도원에 가한 이런 제약 뒤에는 심사숙고한 목적이 있었다. 총대주교직의 폐지는 더 넓은 과정중의 일부분이다. 피터는 교회의 지도권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사회적 일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피터의 후계자들도 더욱더 철저히 수도원들의 일을 규제하였다. 엘리자베스(1746-62년 재위)는 수도원의 재산 대부분을 몰수했으며, 캐더린 2세는(CatherinⅡ:1762-96 재위)는 수도원의 반이상을 폐지했다. 반면 그녀는 자신이 수도사들의 숫자를 엄격히 제한한 수도원은 폐지하지 않았다. 수도원의 폐쇄는 러시아의 먼 지방에서는 재앙에 가까웠다. 러시아에서는 수도원은 사실상 유일한 문화와 자선의 중심지를 형성했었다. 그러나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 대단히 제한을 받았을지라도, 결코 완전히 멈춘건 아니었다.
피터의 종교적 개혁은 러시아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무자비하게 가라앉혀졌다. 존경할만한 도시테우스가 강력하게 러시아의 밖에서 항의했다. 그러나 터키 지배하에 있던 동방정교회들은 효과적으로 간섭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1723년 고대의 4개의 총대주교직은 모스코바의 총대주교직 폐지를 받아들였고 거룩한 대회의 설립을 인정했다.
피터대제가 설립한 교회의 통치체계는 1917년까지 실시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중 대회의 기간(Synodical period)은 대개 쇠퇴의 시기로 그리고 국가에 전적으로 종속하는 교회로 상징되어진다. 틀림없이 18세기를 피상적으로 훑어 보는 것도 이 의견을 확인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교회의 미술, 교회음악과 신학에 있어서 무분별한 서구화의 시대였다. 신학대학들의 건조한 스콜라주의에 대항하여 거역했던 사람들은 비잔티움과 고대 러시아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동시대 서양에서 일고 있던 종교적 혹은 위-종교적 운동(pseudo-religious)쪽으로 향하였다. 신교도의 신비주의, 독일의 경건주의, 프리메이슨리(Freemasonry)와 기타 등등. 모스코바와 칼루가(Kaluga)의 대주교 암브로시우스(Zertiss-Kamensky)와 같은 궁중 고위 성직자들은 고위 성직자중에서도 뛰어났다. 암브로시우스는 1771년에 죽었을 때(많은 다른 토지소유자들 사이에서) 252개의 훌륭한 린넨 셔츠들과 금으로 만들어진 9개의 안경을 남겼다.
그러나 이것은 18세기 정세의 한 측면일 뿐이다. 그러나 거룩한 대회의 이론적 구성에 대한 반대가 나올 듯 하였으나, 사실상 유효하게 통치하였다. 사려깊은 성직자들은 피터의 개혁의 단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반드시 부합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에 복종했다. 신학이 서구화 되었으나 학문의 수준은 높았다. 서구화의 외관 뒤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진정한 삶이 중단없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암브로시우스 제르티스-카멘스키는 러시아 감독의 전형을 나타냈다. 그러나 보로네츠(Voronezh)의 감독이며 자돈스크(Zadonsk)의 성 티콘(1724-83)와 같은 매우 다른 성격의 다른 감독들, 진정한 수도사들, 그리고 목사들이 있었다.
위대한 설교자이며 글 재주가 있는 작가 티콘은 특히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처럼 서양에서 많이 차용하였으나, 동시에 동방정교회의 고전적 영성의 전통에 굳게 뿌리를 내린 사람의 표본으로 흥미를 끌고 있다. 독일과 영국국교의 헌신에 관한 책을 썼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에 관한 그의 상세한 명상은 동방정교회보다 로마 가톨릭의 형태이다. 기도생활중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와 같은 서양신비론자에 의해 묘사되었던 영혼의 어두운 밤과 유사한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티콘은 전망에 있어서 테오도시우스와 세르기우스, 닐누스와 비토지소유자들의 견지에 가깝다. 다수의 러시아 성자들-평신도와 수도사-처럼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특별히 기뻐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람들-농부, 거지, 심지어 범죄자 조차도-과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행복해 했다.
대회기간의 두 번째 부분인 19 세기는 러시아 교회에서 쇠퇴의 시기이기는 커녕 위대한 부흥이 일어난 시기였다. 사람들은 동시대 서양에서 일었던 종교적 그리고 위-종교적 운동에 불찬성을 나타냈다. 그리고 동방정교회의 진정한 영적 힘에 다시 한 번 의존했다. 영적 삶에서 일어난 이 부흥과 더불어 선교사역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일어났다. 그리고 동방정교회는 영성에서처럼 신학에서 서양에 대한 독창성 없는 모방에서 벗어났다.
성 페이씨 벨리치코브스키(Paissy Velichkovsky:1722-94)의 업적과 증거들을 통해서 보면, 종교적 부흥을 가져왔던 기원지는 아토스산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키예프의 신학대학에서 연구하는 동안 그는 세속적 경향의 가르침에 의해 ?겨나, 그가 수도사가 되었던 아토스 산으로 피난갔다. 1763년에 그는 루마니아로 건너가서 니아메츠(Niamets)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을 500명 이상의 형제들이 모이는 커다란 영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인도아래, 공동체는 특별히 그리스 교부들을 슬라비아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아토스에서 페이시(Paissy)는 처음으로 헤시케스트 전통에 대해서 배웠고, 그와 동시대인인 니코데무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필로칼리아를 슬라브말로 번역했고 1793년 모스크바에서 출판했다. 페이씨는 계속적인 기도-무엇보다도 예수기도-의 실행과 장로나 starets에 대한 복종의 필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그는 닐누스와 비토지소유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죠셉파의 수도생활 형태의 좋은 요소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닐누스가 예배기도와 사회적인 일들에 했던 것보다 더 많은 면을 허용했고, 세르기우스와 같이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수도원 생활의 공동체적이고 사회적 측면을 신비주의적인 것과 결합하고자 시도했다.
페이씨 자신은 러시아로 결코 돌아가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중 많은 수가 루마니아로 부터 그쪽으로 여행했다. 그리고 그들의 감화아래 수도원의 부흥이 러시아 전역으로 번졌다. 존재하던 건물들이 되살려졌고 많은 새로운 기초가 만들어졌다. 1810년에 러시아에서 수도원이 452개 였던 것에 반해 1914년에는 1025개가 되었다. 이 수도원 운동이 밖을 주시하고 세상에 봉사하고자 관심을 갖는 동안, 16세기 이래로 광범위하게 억압받던 무소유자들의 전통적 삶이 교회의 삶의 중심으로 역시 재건되었다. 이것은 특별히 영적 방향의 실행에 있어서 큰 발전을 보여주었다. 장로가 동방정교회 역사의 많은 시점에서 개성적 형태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러시아는 starets들의 탁월한 시대였다.
19세기의 가장 처음이자 가장 위대한 Startsy는 아마도 비-동방정교회인에게 가장 즉각적으로 관심을 끄는 러시아의 성자들 중의 한사람이던 사로브(Sarov)의 성 세라핌 이였다. 19세에 사로브의 수도원에 들어간 세라핌은 처음 16년동안 공동체에서 평범한 삶을 보냈다. 그후 그는 다음 20년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숲 속 오두막에서 생활했고 다음에 그의 발이 부어서 더 이상 쉽게 걸어다니지 못할 때, 수도원의 독방에서 생활하였다. 이것은 장로의 직무를 위한 훈련이었다. 마침내 1815년에 그는 그의 방문을 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그는 도움을 청한 사람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고, 병자를 고치고, 충고를 해주고 가끔씩 전에 어떤 질문이라도 했던 방문자들에게 적절한 대답을 해주었다. 가끔씩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이 그를 만나기 위해 오기도 했다. 세라핌의 외견상 생활은 15세기 전 이집트의 안토니를 상기시킨다. 이것은 안토니처럼 돌아가기 위한 은둔이다. 세라핌은 개성이 있는 러시아 성인으로 정당하게 간주되었으나, 또한 러시아 동방정교회의 나머지가 비잔티움과 여러시대를 거친 보편적 동방정교회의 전통과 얼마나 공통점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본보기였다.
세라핌은 자신에게는 유독 엄격했다.(그의 생애의 한 시점에서,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천일 밤을 성공적으로 보냈다. 긴 시간 동안을 어두움 속에서 바위에 움직임 없이 선채로 보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온화했다. 그렇다고 감상적이거나 너무 관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금욕주의는 그를 우울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성인의 삶이 영원히 기쁨으로 빛난다면, 그것은 세라핌의 삶인 것이다. 그의 경우에 있어서 타볼산의 신적 빛의 비전은 그의 몸을 외적으로 변형시키는 가시적 형태였다. 세라핌의 '영적인 아들중의 하나인 니콜라스 모토빌로프(Nicolas Motovilov)는 어느 겨울 날 그들 둘이 함께 숲 속을 거닐면서 이야기한 것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세라핌은 성령을 받을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고, 모토빌로프는 어떻게 해야 확실히 '하나님의 영속에 존재' 할수 있는지 물었다.
그때 교부 세라핌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우리는 지금 성경 안에 있다. 나를 보지 않겠니 ?'
"전 볼 수 없어요 아버지, 아버지 눈이 번개처럼 빛나고 있고요, 얼굴은 태양보다 더 밝아요. 아버지를 보았다간 제 눈이 다칠 것만 같아요'
'두려워 말아라, 바로 이 순간에 너 자신도 나처럼 밝아질 수 있단다. 넌 지금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날 볼수도 없었을 거야' 그리고 나서 나에게 그의 머리를 갖다 대며, 내 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하나님께 감사해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을···. 그런데 아들아, 넌 왜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니? 쳐다보기만 해라. 두려워 말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말이 끝났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힐금 쳐다보았다. 그러자 훨씬 더 위대한 경외심이 나를 엄습했다. 태양의 중심에서 그리고 광명의 눈부신 빛 가운데서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그 입술의 움직임과 그 눈의 변화를 볼 것이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당신의 어깨를 잡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의 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당신 자신이나 그의 몸조차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깔아 놓은 양탄자와 같은 빛이 숲 속을 뒤덮고, 눈 조각들이 끊임없이 떨어지는 듯한 그러한 빛이 수십 야드까지 뻗쳐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떠니?' 교부 세라핌이 물었다.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좋은데요' 나는 말했다.
'하지만 뭐가 좋으냐? 너의 느낌을 좀더 정확히 말해 보렴?'
'평온함, 영혼의 평안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기분 말이에요'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평화니라: 평화를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나는 너에게 주노라(요14:27) 이 평화는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한다.(빌 4:7) ···그밖에 무엇을 느끼느냐?' '가슴속에서 무한한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나서 세라핌이 계속 말했다.'성령이 인간에게 내려올 때와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으로 그를 보호할 때에 그가 만지는 모든 것에 성령이 기쁨으로 채워 주시기에 그 사람의 영혼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게 된다.
이렇게 대화는 계속 되어진다. 이 전체의 구절은 신성화, 하나님과 연합에 관한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엄청난 중요함을 가진다. 이것은 동방정교회의 신성화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육체를 포함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은 세라핌의(혹은 Motovilos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육체 전체이다. 우리는 세라핌, 모토빌로프 둘다 황홀경의 상태에 있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둘다 일관성있는 방법으로 말할 수 있었고, 밖의 세상을 계속 의식한다. 그러나 둘다 성령이 충만했고 앞으로 올 세대의 빛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세라핌은 지도해주는 선생님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후계자도 없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연구는 다른 옵티노의 은둔자 집단에 의해 이어졌다. 1829년부터 1923년 볼셰비키에 의해 수도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Startsy의 후계자들은 여기에서 봉사했으며, 그들의 영향으로 세라핌과 같은 것을 러시아 전역으로 확장시켰다. 가장 알려진 옵티노의 장로는 레오니드(Leonid: 1768-1841), 마카리우스(Macarius:1788-1860), 암브로즈(Ambrose:1821-91)등이다. 이들 장로들이 모두 페이씨 학파에 속해 예수의 기도에 전념해 있는 동안, 그들 각자는 모두 자신의 강한 특성을 가졌다. 예를 들면 레오니드는 단순하고 힘차고 직접적으로 특별히 농부와 상인에게 호소하였다. 반면에 마카리우스는 교부학자로 학식이 높았고, 그 시대의 지식인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옵티노는 고골(Gogol), 콤미아코프, 토스트예프스키, 솔로비예프(Soloviev) 그리고 톨스토이와 같은 수많은 작가에 영향을 끼쳤다. 토스트예프스키가 쟈돈스크의 성 티콘 의 삶에 의해 기본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말할지라도, 토스트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네 형제들'에서 장로 죠시마(Zosima)의 두드러진 모습은 부분적으로 옵티노의 교부 마카리우스나 암브로즈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Savophil Ivan Kireyevsky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모든 가능한 책들과 사상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당신의 생각을 내놓기 전에, 당신 자신의 의견을 듣지 않고, 거룩한 교부들의 판단을 들을 수 있게 해주는 동방정교회의 startsy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Startsy가 러시아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신다.'
Startsy를 통한 수도원의 부활은 많은 평신도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 그 시대의 영적 분위기는 작자 불명의 책인 '순례자의 길'에서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이곳 저곳을 다니며 예수의 기도를 실천하는 러시아 농부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거의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거룩한 이름의 초대만을 강조한 다소 편향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의 단순성이 가장 흥미를 주는 작은 작품이다. 이러한 책의 목적은 예수의 기도가 수도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형태의 삶에 있어서, 모든이들에 의해 사용되어 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그들이 여행할 때, 페이시에 의해 슬라브어로 번역된 것으로 생각되는 필로칼리아 사본을 가지고 다녔다. 성 테오판 (St Theophan Recluse:1815-94)은 1876부터 1890년까지 5권으로 슬라브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로 크게 확장된 필로칼리아 번역본을 발행했다.
우리는 주로 수도원 운동의 중심은 지금부터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19세기에 러시아 교회의 위대한 인물들 중에서 또한 크론스타트의 성 요한(1829-1908)같이 결혼한 교구 성직자들이 있었다. 그는 성 피터스버그의 외곽 해군기지인 크론스타트에서 모든 그의 사역을 보냈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병든 자를 방문하고, 자선 봉사를 조직하고, 그의 교구의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계속적으로 설교하고, 무엇보다 그의 양무리를 위해 기도하는 교구의 일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그는 기도의 힘을 강하게 인식했고, 성만찬 예배(Liturgy)를 드릴 때, 그는 완전하게 수행하였다. '그는 미리 기록된 성만찬예배(Liturgy)의 음조를 지킬 수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불렀다. 소리쳤다. 골고다와 부활의 형상이 갑자기 파편을 맞듯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눈물을 흘렸다.' 이와 같은 체험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의 삶'이라는 그의 영적 자서전의 매장마다 느낄 수 있다. 그는 세라핌과 같이 병고침과 통찰력, 그리고 영적분별의 은사를 소유했다.
성 요한은 그 당시 러시아의 평신도들이 일년에 3, 4번 이상 모이는 것이 일상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친교 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교제를 위해 오는 모든 사람들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들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동시에 그들의 죄를 고백하는 공적인 회개 형식을 만들었다. 그는 낮은 칸막이 안에 성상을 넣고, 예배를 통해 제단과 집례자가 보이도록 했다. 빈번한 교제와 교회당 칸막이의 좀 더 고대적인 형태로의 복귀를 강조함으로, 그는 오늘날 시대에 동방정교회의 예배의식의 발전을 예기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충격적인 선교 사역의 부흥이 있었다. 사라이(Sarai)의 미트로판과 페린의 스테판 시대 이래로 러시아인들은 활동적인 선교사들 이었고 모스코바의 힘이 동쪽으로 진보해가자, 대평원이 원주민들과 이슬람교도들인 몽골인들 사이에서 복음 전도를 위해 개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이방인들을 위해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결코 중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와 18세기 선교 결과는 특히 러시아 여제 캐더린에 의해 수도원들이 문을 닫은 후에 다소 시들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선교적 도전은 신선한 힘과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카잔(Kazan)의 학원이 1842년에 문을 열었고, 특별히 선교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현지 수도사를 훈련시켰고 성경과 성만찬예배(Liturgy)가 폭넓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카잔 지역에서만 예배 의식이 22가지의 다른 언어나 방언으로 거행되었다. 선교 부흥의 선두 주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르키만드리트 마카리우스(Archimandirite Macarius:Clukharev, 1792-1847)는 헤시케즘의 제자였고 페이씨 벨리쵸코브스키(Paissy Velichkovsky)의 제자들을 알았는데 이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선교 부흥은 영적 삶의 부흥에 그 뿌리를 지녔다. 19세기 선교사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은 오늘날 수백만의 미국 동방정교회인들에게 그들의 중심 지도자로 존경받는 알라스카의 감독 성 이노센트였다. (John Veniaminov, 1797-1879)
19세기 러시아는 신학면에서 서구에 의존하던 것에서 크게 이탈하였다. 이것은 슬라브계의 지도자이자 러시아 교회사 중 첫 번째 신학자였던 알렉시스 콤미아코프의 노력 때문이었다. 지주이자 퇴역한 기병대의 대장이었던 콤미아코프는 동방정교회에서 늘 존재했던 전통적인 평신도 신학자에 속했다. 콤미아코프는 모든 서구 기독교세계-구교이든 신교이든-가 동일한 전제들을 공유하고 동일한 근본적 관점을 나타낸다는 것을 주장했다. 반면에 동방정교회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콤미아코프는 계속해서, 그들이 비록 16세기 이래로 해왔지만, 동방정교회가 서방으로부터 그들의 신학을 빌리는 것은 불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구교에 대항한 신교의 주장, 신교에 대항한 구교의 주장을 사용하는 대신에, 동방정교회는 그들 자신의 믿을만한 원천에로 돌아가야 하며, 기본적인 전제들에 있어서 로마적이거나 개혁교회적이 아닌 독특한 참된 동방정교회의 전통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의 친구였던 사마린(G. Samarin)이 이렇게 지적했다. '콤미아코프 이전에 우리 동방정교회 신학 수업은 라틴이즘이나 프로테스탄티즘을 정의하는 입장에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방정교회는 동방정교회 자신의 입장과 동떨어진 상태에서, 견해 차이로 둘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들 반쪽은 각자 실로 그들의 반대자들(동방정교회내의 반쪽)에 반대되는 입장 즉 라틴 혹은 개신교의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더우기 서방을 위에 있지 않았다. 교회의 관점으로 더우기 고도의 입장으로 라틴이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을 처음으로 직시한 사람은 콤미아코프였다. 그리고 이 고도의 입장이 그가 그들(서방)을 정의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콤미아코프는 교회론, 즉 교회의 단일성과 권위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이점에서 그는 동방정교회 신학에 영속하는 공헌을 했다. 콤미아코프는 그의 일생 동안 학회나 신학교들에서 신학적인 어떤 훈련이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는데, 바로 여기에 서방으로부터 독립이 있었던 것이다. 1900년까지 러시아의 학문적 신학은 최고도에 이르렀고, 서방에서 학문적 훈련을 받은 다수의 신학자, 역사가, 예배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동방정교회를 왜곡하는 서양의 영향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1900년을 지나면서 또한 신학교 밖에서 중요한 지적 부흥이 있었다. 피터대제 이래로 러시아인들의 '지식인들' 가운데 무신론이 보편적이었으나, 지금은 다수의 사상가들이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교회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했다. 세르기우스 불가코프(1872-1944:후에 사제로 임명된)와 니콜라스 베르쟈예프(1874-1948)같은 일부의 사람은 이전에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 둘다 후에 파리로 이주한 러시아인들의 삶에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티콘과 세라핌의 삶, 옵티노의 Startsy와 크론스타트의 존, 19세기 러시아 신학과 선교를 곰곰히 생각해 볼 때, 대회 기간을 단순히 쇠퇴기로 간주되는 것이 얼마나 불공정한가를 보여준다. 러시아 교회사 학자의 대가중 한사람인 카르타셔(Kartasher:1875-196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종은 기독교인의 겸손에.... 의해서 품위가 높아졌다. 러시아 교회는 정치제도의 짐 아래 고통받았으나,그것을 기독교적 겸손으로 극복했다. 교회는 성장했고 전파되었고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번창했다. 그래서 거룩한 대회 기간은 러시아 교회의 역사상 가장 밝고 영광스러운 시기로 불려 질 수 있다.
1917년 8월 15일 니콜라스 2세가 퇴위 되고 6개월이 지나, 임시정부가 권력을 잡았을 때, 모든 러시아 교회 공의회는 모스코바에서 회집하였다. 이 공의회는 마침내 다음해 9월까지 산회하지 않았다. 대표자들의 반이상이 평신도였다.- 참석한 감독들과 성직자들은 250명, 평신도 314명- 그러나 (교회법이 요구하는 것처럼) 특별한 종교적 문제에 관한 최종적 결정은 감독들에게만 유보되어져 있었다. 공의회는 개혁의 광범위한 제안을 통하여, 피터대제에 의해 설립된 대회적 통치 형태(the Synodical form of government)를 폐기하고 총대주교직을 회복하는 주요한 행동을 수행하였다. 총대주교의 선출은 1917년 11월 5일 일어났으며, 모스크바의 메트로폴리탄 성 티콘이 선출되었다.
외부의 사건들이 공의회의 숙고들에 긴박한 주의를 제공하였다. 첫회기에 회원들은 볼셰비키의 대포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총대주교의 선출 이뜰전에, 레닌과 그의 추종자들이 모스크바의 주권을 완전하게 얻었다. 교회는 개혁의 작업을 공공히 할 시간이 없었다. 공의회가 1918년 여름에 폐회되기 전에, 회원들은 볼셰비키들에 의해 키예프의 메트로폴리탄, 성 브라디미르가 잔인하게 살해 당하는 것을 두렵게 목도하였다. 박해는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