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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과 기도
역대하 20:1-7
20:1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20:2 혹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고하여 가로되 큰 무리가 바다 저편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20:3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20:4 유다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20:5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20:6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20:7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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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자가 되었으면
기도도 할 줄 알고,
금식도 할 줄 알고,
기도도 열심히 해야 된다고
그렇게 편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고정관념은
기도도, 금식도 습관적으로 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 할수 없습니다.
내가 신자다워야 하기 때문에
기도는 마음에서 나오는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가
순수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게 되고,
그렇게되면 본인도 괴롭고
주위 사람도 괴로워집니다.
기도하는 자신은
점점 더 완고해지고
교만해 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금식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일으켜 줄 때에만
진실한 기도와 금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기도를 하라고 하면
흉내를 잘 냅니다.
처음에는 다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흉내내기란 곧 습관으로 자리잡기에
틀로 고정될 염려를 가집니다.
여러 종교에서도 기도는 많이 하지요.
그런데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기도할 수밖에 없는
다급한 위기의 순간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성도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또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순간 순간 위태롭게 여겨지는
위기의 순간을
우리에게 초래시킵니다.
세상적인 위태로움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비 확신으로 인해 오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분명히 확인시켜주십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위기가 아닌데
우리에게는 위기라고 느껴지는 거지요.
평소에 관심사가
자기 가진 것과
자기 신앙이라고 따로 챙겨놓은 것과
자기 사업에 몰두하다 보니까
그게 잘 안 될 때는
그만 가슴이 덜렁 내려앉아서
위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위기가 아닙니다.
아직 자기 백성이
자기가 가진 것에 집착하며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니까
큰 위기처럼 느껴지면서
그 순간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본문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위기를 주시고 기도를 하게 하신다는
그것을 통해서
진짜 실제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암몬 자손이
여호사밧이라는 유다 나라를 치려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사밧이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여호와께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고 공포하여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게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시간에
기도가 뭔지
정리를 한번 해봅시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이것은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나의 일은 없고
순전히 하나님의 일만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한평생 나의 일이란
손톱만큼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나의 일 같으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됩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설교는 목사님이 담당이니까
내 일이 아니고,
농사짓는 일은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설교하는 목사님에 대해서
기도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내 일이 아니고
목사의 일이니까
기도할 마음이 안 나겠지요.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 일은
자기가 처리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 일이
하나님 일이라고 여기시면
그 순간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셔야됩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는
기도라는 것이 출발이 됩니다.
"하나님 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제가 어찌 감히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관심은 하나님께 있는데
그 하나님의 일을 할 능력은
저한테 없습니다,
내가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고 할 때
옳은 기도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내 일이라고 할 경우에는
기도도 되지 않을 뿐더러
기도해봤자 욕심만 챙기는 기도 밖에 안됩니다.
그렇게되면 기도하는 본인도 부끄럽고
주위 사람들도 눈치채게 되며
하나님은 더더구나
그 가증 된 기도를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어
교인들이 "하나님 우리교회 잘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찝찝한 거예요.
교회 목회는 나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내가 기도로 도움을 구해서
내가 하는 일이 잘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자세가 순박한 것이 못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복음전파를 위한다고
남 앞에 허세를 떨어 보지만
본인은 기도해도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내 일이라고 생각해서
기도도 해보고
금식도 열심히 해봤는데
내가 목표하고 기대했던 것만큼
되지를 않더라는 말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위기를 느끼고 절망을 느끼게 되죠.
기도를 충분히 했다고
자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갑자기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갑자기 큰일났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평소에 하나님을 그만큼 의지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자기가 위기를 느낀다는 말은
평소에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두렵고 무섭다는 것 자체가
현재 정신을 엉뚱한 데 팔고 있고
엉뚱한 것을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이 있는데
자기가 왜 겁을 냅니까?
목회자가 교회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늘 설교하면서
왜 교회 일이 되느니 안 되느니
목사가 걱정합니까.
성경 말씀에 모든 것이 잘 된다고 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는데
자기가 왜 걱정을 해요.
여호사밧이 적군이 쳐들어오니까
걱정을 한다든지 두려워한다는 것은
위기를 느낀다는 말입니다.
여호사밧의 마음속에
이방나라의 적들은
여호사밧이 알아서 처리를 해야 될텐데
자기가 처리를 하려니까
감당이 불감당이라,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다급해지고
그래서 금식을 공포하고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늘 상
우리에게 자기의 일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잘 안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가는데
우리 욕망의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에
잘 안 되어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만약 고3학생이 의대를 가고 싶은데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의대의 커트라인은
거의 3개정도 틀려야 된다고 예상하고 있는데
자기 딸의 수능성적은 300점 나왔습니다.
이 순간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위기를 느끼겠지요.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게 고민거리도 아니고
위기도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 속으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자연발생적으로
"하나님이여 큰일났습니다 두렵습니다
이 점수로 어떻게 의대를 들어갑니까"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는
"네 딸 대학가는 것이
네 일이냐 하나님의 일이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우주 전체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사는 것이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기에 사는 겁니까?
하나님의 예정된 뜻이 있어서
우리의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왜 걱정을 하느냐 말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기도로써 다급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평생 하나님이 시키는 기도와 금식은 성도라면
한번도 우리 곁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늘 우리에게 기도와 금식을 유발시키는
그런 쪽으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네가 사는 것은
너의 일이 아니고
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심어주고 계시지만
우리는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주특기고
그런 우리를 다시 기도를 시켜서
기도 가운데 응답으로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늘 우리에게 반복이 됩니다.
기도와 금식을 언제 했는지,
성경의 예를 찾아보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모릅니다.
적들은 무지무지하게 강하고,
자기는 너무나 초라하고,
블레셋 사람이 자진해서 되돌려줘서
빼앗긴 언약 궤를 찾는,
그런 심정에서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물을 길러다가 제단에 붓고 금식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미스바 회개운동입니다.
금식을 선포하는데
3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지금 블레셋 사람에게서 건져내고 싶은 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소망입니까,
하나님의 소망입니까?
지금 사무엘이 금식을 선포한 것이 뭐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한테서 구원받고는 싶은데
그러면서도 그것이 내 일이고 싶어하는
그런 생각을 품고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을 선포한다는 말은
식사를 그만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금식이나 기도를 한다는 것은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블레셋에게 구원받는 것도
내 능력으로 내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찾아들어야 할 문제라고 인식하며,
이제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모든 시도를 중지하고
금식하며
전적으로 여호와를 향하여
마음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향하여 마음을 돌린다는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당사자는 내 자신이며,
기도라는 노동을 하면
기도한 만큼 채워준다고
잘못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도해 버리면
기도하고 난 뒤에도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니까요.
잠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능력을 이용했을 뿐이지,
여전히 자기 일이 된 이상,
그 사람은 순전히 하나님께 마음이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 아까 예를 다시 들겠습니다.
고3학생이 대학에 들어가려합니다.
이 일을 두고 두 가지의 마음이 생깁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 내 딸이 대학에 들어가는데
점수가 많이 모자랍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의대에 들어가게 해 주옵소서
내 딸 잘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합격되고 난 뒤에도
누구의 일입니까?
역시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만
내 기도에 응답되어서 내 기도 효과로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겠죠.
그러면 이 기도는 여전히 내 일로 남지요.
그런데 "하나님! 의대 포기하겠습니다.
이 아이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친히 역사 해주옵소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고 말로만 했지 진짜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활동하고 계신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만
나는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만사가 내 힘에 의해서
내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제 이 딸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알아서 해주옵소서."
이 기도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블레셋이 찾아왔을 때
사무엘이 한 금식 선포입니다.
이렇게 금식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실지로 대학에 들어간 것이 기적이 아니고
내 딸의 걸음걸이,
숨쉬고 호흡할 수 있는 것들,
세상 만사 모든 것이 기적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이 기도로 통해서 깨닫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전심으로, 그야말로 전심으로 여호와께,
하나님께 상납이 될 때,
그것을 응답이라고 합니다.
내가 기대한 것이 나타날 때 응답이 아니라,
내 마음자체가
내 속에 있던 "나"라는 우상이 깨어지고,
"나"라는 바로 그 신이 깨어지고,
"나"라는 바알 신이 깨어지고,
내 마음이 순수하게
여호와만 쳐다볼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된 자체를
응답이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일을 이루시는 분이고,
나는 그 하나님의 일의 결과며
대상일 뿐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사밧이 두렵고 걱정이 되어서
금식과 기도를 공포합니다.
막상 기도를 하게 되면서
적들이 문제가 아니고
내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지 못하고 있는 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이 내 것으로 착각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아쉬울 때는 하나님을 찾고
안 아쉬울 때는 내 인생이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이런 잘못된 것이
응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 5, 6절에 보면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여기에 진작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는
이런 믿음이 있었으면
애초부터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원래 이스라엘은
저 약속의 땅에서 오기 전까지는
암몬군대나 모압군대는
이스라엘과 게임이 안됩니다.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오기 전,
광야를 지날 때는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 앞에서 얼씬거리지도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사람들은
광야 유랑인이 되어서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매일같이 만나주시는
여호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다른 데 눈 돌릴 사이도 없었습니다.
오직 여호와만 쳐다보고 가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이 쳐들어와도
모두 패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들어가서는
옛날 광야 때 만난 암몬 군대가 오니까
이제 벌벌 겁을 내며 떠는 거예요.
"아이구 이 가진 것,
이 엄청난 것을 지켜야될텐데,
어떻게 지키지"
이렇게 걱정이 늘어진다 말입니다.
우리가 신혼 초에 재산도 없고 가난할 때,
아내와 사는 그 자체가 행복이었고
그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천하에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수억을 벌고 나면
그 수억을 지키기에 걱정이 늘어집니다.
나아가 겸손한 마음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는
오직 여호와께만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만큼 가지고 난 뒤에는
내 가진 것에
나의 마음이 빼앗기게 됩니다.
그 때에 위기가 찾아오고
그 위기를 통해서
다시 한번 내 인생은
하나님의 작품인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자신을 돌이킬 때
그것이 기도의 응답으로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이죠.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입니다만.
바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잘 처리한다는 자체를
느긋하게, 기쁘게 하나의 도구로써
기꺼이 자기를 헌신하는,
그런 상태가 된 사람,
그것을 바로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