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 많은 대원군은 그 점을 조대비를 이용하여 넘기로 계획한다. 조대비가 국혼 얘기를 꺼냈을 때의 일이다. 대원군이 이미 김병학의 딸과 정혼을 맺었다고 하자 조대비의 언성은 이내 높아졌다.
"김병학의 딸이라구요? 대감. 대감께서는 이 나라를 또 다시 안동 김문에 내맡길 작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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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대원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정혼한 상태이므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사옵니다. 일단 김병학의 딸에게도 간택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줘야 합니다. 다만 왕비를 간택하는 일은 왕실에서 담당하는 일이오니 혹 나중에 변경이 된다고 해도 김병학도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옵니다." |
"그렇겠지" 조대비는 조금 안심을 한 듯 그렇게 대답했다. 이어 대원군의 눈치를 살피며 조대비가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로 왕비를 삼는다?" 조대비의 물음에 대원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뢰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번 국혼에 부친의 여읜 규수도 참여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올른지요?"
"부친을 여읜 규수요? 그건 국법에 없는 일이 아닙니까?" 조대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전례에는 없사오나...대왕대비마마. 영의정 조두순 대감 댁에 출중한 규수가 있다는 풍문을 들었사온데..."
대원군의 말에 그제서야 조대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두순의 자신과 가장 가까운 대신이었다. 조두순의 딸이 왕비가 된다면 이득이 됐으면 됐지 자신에게 해로울 것이 없었다. 다만 조두순의 손녀딸은 조실부모하여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따라서 부친의 여읜 규수는 단자를 낼 수 없다는 국법에 따르자면 조두순의 딸도 이번 국혼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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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비는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자신이 승정원에 조실부모한 규수의 단자도 받아들이라는 명을 내리겠다고 약속을 하게 된다.
대원군은 12월 9일 금혼령을 선포한다. 철종의 국상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단자를 내는 기간은 12월 20일까지였다. 승정원은 조실부모한 규수의 단자도 받아들이라는 대왕대비전의 명이 어리둥절했으나 그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자영도 단자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가례도감을 설치하고 정사에 이경재 부사에 대원군의 장인 민치구를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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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고 정월 초닷새, 단자를 낸 지 약 보름 뒤 감고당 민자영의 집에 초간택에 참여하라는 승정원의 기별이 왔다. 상의원에서는 옷감까지 내려왔다.
초간택날 자영은 다른 규수들과 마찬가지로 위에는 송화색(노랑) 명주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덧저고리로 견마기(초록색 당의)를 입었다. |
자영이 탄 가마는 일단 창덕궁 앞에 멎었다. 자영은 가마에서 내려 궁문 턱을 넘을 때 미리 준비해놓은 솥뚜껑의 꼭지를 밟고 넘었다.
궁문을 넘어서 다시 가마를 탔다. 가마는 인정전을 돌아 중희당 앞에 멎었다. 그곳엔 초간택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규수들의 가마가 30여 개나 되었다. 나인들은 차례로 규수들을 중희당의 큰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차비로 불리는 방으로 일종의 대기실이었다.
이윽고 30여 명의 아름다운 규수들이 중희당이 큰 방에 모였다. 자영은 규수들을 둘러보았다. 그 안에는 예상대로 김병학의 딸과 영의정 조두순의 손녀딸도 섞여 있었다. 자영이 보기에도 두 규수는 지극히 아름다웠다. 특히 김병학의 딸은 여자인 자영의 가슴까지 울렁거리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내 간선이 시작되었다. 중희당의 넓은 대청에 발을 치고 규수들이 차례로 나가서 간선자인 왕족들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조대비는 민치록의 딸을 재간택에 넣으라고 했다. 조두순의 딸을 재간택에 뽑기 위한 명분에서였다. 대원군은 마지못해 응하는 척했다. 재간택은 초간택일로부터 보름 후에 실시되었다. 초간택에 뽑힌 7명의 규수들이 다시 중희당에 모였다. 다시 간선이 시작되었다. 중희당의 넓은 방에 대왕대비 조씨가 좌정해 있고 그 옆으로 왕대비 홍씨, 대비 김씨가 앉아 있었다.
대원군은 대청 문쪽에 부대부인 민씨와 함께 서있었다. 재간택의 간선이 모두 끝나자 대왕대비 조씨와 두 대비 그리고 대원군은 삼간택에 올릴 규수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대왕대비 조씨에게 삼간택에 올릴 세 명의 규수를 뽑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왕대비 조씨는 감고당의 민규수, 좌상 김병학의 영애 김규수, 영의정 조두순 대감 댁의 조규수를 뽑았다. 대원군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 그 중에서 중전의 재목을 뽑아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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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 삼간택을 하기는 하나 이미 삼간택에 올리면서 중전이 가려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조대비는 자신의 입으로 조두순 대감의 손녀딸을 택하는 것이 민망하여 일부러 대원군에게 뽑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원군은 "대왕대비마마. 신은 감고당의 민규수를 중전의 재목으로 점지하옵니다" 라고 아뢰었다. 순간 조대비의 눈이 커졌다. | 대원군의 입에서 조두순 대감의 손녀딸이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잘 고르셨소"라고 침통하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두 대비들 앞에서 대원군이 선택을 하면 무조건 따르겠다고 했으니 거부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완전히 속은 것을 뒤늦게 안 조대비는 칭병을 하고 며칠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자리에 누운 조대비는 이 일을 다시 되돌릴 궁리를 생각하다 고종과 대원군을 불러 수렴청정을 거두겠다는 뜻을 밝힌다. 자신이 수렴청정을 거두겠다고 하면 대원군이 만류를 할 것이고, 그러면 그 기회를 노려 중전 간택문제를 새롭게 거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원군의 입에서는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황송하옵니다. 삼가 대왕대비마마의 분부를 받들겠사옵니다."
한번의 만류도 없었다. 이번에도 완전히 조대비의 패배였다. 결국 조대비는 음력 2월 13일 중희당에서 대신들을 불러놓고 공식적으로 수렴청정 철폐를 선포했다. 혹 대신들의 만류가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보았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다만 영중추부사 정원용이 대왕대비 조씨의 업적을 형식적으로 치하할 뿐 거의 모든 대신들이 수렴청정의 철폐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왕비로 간택이 정해진 상태에서 형식적인 삼간택만을 남겨둔 민자영은 운현궁의 별궁에 머물고 있었다. 별궁은 국혼 때 간택에 뽑힌 규수가 거처하는 일종의 안가였으나 대원군은 자신의 운현궁을 안동 별궁이라 칭하고 자영을 그곳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이후 운현궁은 대궐에서 나온 근장군사들이 삼엄하게 지켰고 중문은 별감이, 건넌방은 궁중법도를 가르치기 위해 나와 있는 상궁들이 썼다. 자영의 몸종 간난이도 특별상궁에 임명되어 궁중법도를 익혔다. 삼간택은 3월 6일에 실시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간택을 앞둔 하루 전날 밤 불길한 사건이 터지고 만다. 경복궁에 불이 난 것이었다. 불길은 삽시간에 경복궁의 가건물과 목재에 옮겨붙어 시뻘겋게 타올랐다.
경복궁은 이미 8백여 간이 가가 형태로 골조가 세워져 이었다. 모두 목재로 세워진 전각이었기 때문에 불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전각에 옮겨 붙었다. 대원군은 '하늘은 모질기도 하지. 어찌하여 이런 재앙을 나에게 내리는가?'라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비통해했다. 그러나 삼간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경복궁이 불에 타 폐허만 남은 탓에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된 삼간택이었다.
3월 7일, 마침내 민치록의 딸 민자영을 조선조 제26대 국왕 고종의 왕비로 맞아들인다는 조칙이 승정원을 통해 반포되었다. 대혼은 납채례(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혼인을 청하는 의식)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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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채례는 3월 9일, 납징례(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예물을 보내는 의식)은 3월 11일, 고기례는 3월 17일, 대혼과 책비례는 3월 20일, 친영례(신랑이 신부를 맞아들이는 예식)은 안동 별궁에서 3월 21일, 상견례(신랑과 신부가 마주보고 절을 하는 예식)은 3월 22일 인정전에서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으며 거행되었다. 이로써 한말 풍운의 주인공이 될 명성황후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 고종의 나이는 15세, 명성황후의 나이는 16세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