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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밑줄] 장 코르미에,『체 게바라 평전』, 실천문학사, 2000(1997).
* 서문
덥수룩한 수염에 비쩍 마른 체(Che)의 모습은 그 옛날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한 또 다른 ‘Ch’, 즉 그리스도(Christ)와 끔찍하리만치 닮은 모습이었다. 둘 다 평등을 위해 투쟁한 박애주의자들이었지만, 체 게바라가 선택했던 길은 팔레스티나의 유태인 예수가 걸었던 평화로운 노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기 전인 1956년 말, 멕시코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겁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때 체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35
제1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덜컹거리는 트럭 안에서도 에르네스토는 토지개혁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땅은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 지주의 것이어서는 안 되며 모름지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그런데 그가 열변을 마쳤을 때, 그 농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게 아닌가.
“그래야 한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주리라고는 기대도 안 해요.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가 일한 만큼의 삯이라도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거죠. 그리고 그건 이바녜스 델 캄포 장군님께서 해결해주실 거예요.” 76
“(···) 여기는 제공한 한 최소한의 경비로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주거만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으니 지옥이나 다름없어. 그들은 하수구조차 갖춰지지 않은 저 외딴 곳에 마치 가축처럼 노동자들을 몰아넣고 있잖아.”(···)
“이 광산의 하루 생산량이 9만 톤이라 했을 때 어림잡아 수백만 달러의 이익이 남는다는 계산이 되지. 그러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쉽게 끝날 리는 만무하다는게 이해가 가고도 남아.”
칠레 구리광산에 대한 연구서에서 오캄포는 이곳의 생산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최초의 투자액을 단 나흘 만에 회수할 수 있을 정도라고 분석했다.(···)
새로운 힘으로 무장한 에르네스토는 다시금 대지로 내려왔다. 정의로운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되겠다던 젊은 이상주의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신념을 굳히고 있었다. 아직 그에게는 중대한 계기, 일종의 사닥다리가 필요했지만 머지않아 찾게 될 터였다.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중대한 결심의 계기가 찾아왔다. 굴뚝에서 내려온 그들이 십자가로 뒤덮이다시피 한 공동묘지 앞을 지날 때였다.
“도대체 몇 명이나 묻혀 있죠?” 에르네스토는 안내인에게 물었다.
“글쎄요, 확실치는 않지만······ 대략 만 명 정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안내인은 대답했다.
에르네스토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략이라구요?”
“자세히 세어보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그 미망인들과 자식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나요?”
그러자 사내는 아무런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88~89
얼마 안 가 그들은 우연히 한 농부를 만나 그의 슬픈 경험담을 듣게 되었다.
“10년 전에 나는 결혼을 하기 위해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나무를 베어내고 그루터기도 태워 없애고 땅을 골라 농사짓기 알맞은 땅으로 다듬어놨죠. 그렇게 하는 데만 꼬박 3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에 땅 소유권이 문제되지도 않았구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침내 수확을 거둬들일 때가 되니까 땅 임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경찰을 불렀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아내와 아들 둘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 좀더 높은 지역으로 올라갔습니다. 4년 정도 되니까 그럭저럭 수확을 기대해볼 수가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도 기다렸다는 듯 땅 임자가 다시 경찰을 불러와 우리가 가진 것을 몽땅 뺏어가버렸습니다. 이제까지 뼈 빠지게 일한 대가를 단 한 푼도 건지지 못한 거죠.”
(···)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불행이 그 농부에게 심어준 운명론적 체념이었다. 99~100
아마존과 보고타를 갈라놓은 그 몇 세기는 라틴아메리카 각국에 국토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상의 발전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연과의 진정한 교감을 잊게 만드는 퇴보를 가져온 시간이기도 했다. 124
흑인 노예의 후손들이 백인 ‘형제들’과 같은 권리를 누리는 건 여전히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서부 영화에서는 늘 선한 카우보이가 야만적인 인디언들을 혼내주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 ‘미국인’들에 대해 증오만을 보이는 이분법적인 눈으로 미국을 바라본 것은 아니다. 그는 이들이 달러를 숭배하면서 실제적인 정치의식이라곤 거의 갖고 있지 않은 그저 유쾌하기만 한 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는 보통의 미국 사람들을 증오하진 않았다. 그가 증오했던 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눈 하나 깜짝 않고 라틴아메리카에 멍에를 지우는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기업가들이었다. 130
제2부 일다 가데아와 피델 카스트로
7월 26일, 아르벤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투항을 선언했다.(···) 대사관들은 반란군에게 접수됐다. CIA의 사주를 받은 카스티요 아르마스 대령을 따르는 군대가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시킨 것이다. 이즈음 베아트리스 이모는 이런 편지를 받았다. “루즈벨트가 씌워준 ‘선한’ 얼굴의 가면을 쓴 양키들이 마침내 그 가면을 벗었습니다. 공군력과 현대적인 장비로 무장한 그들의 군대와 재래의 방식으로라도 싸워야 한다면 우리는 그럴 것입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미국이 파견한 군사 고문단이 아르벤스 대통령을 만나 만일 하야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쑥밭이 될 때까지 폭격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에 동조하는 온두라스와 니카라과의 선전포고까지 가세하였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과테말라 군부는 결코 대통령에게 사임 압력을 가했구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저는 머지않아 발발할 무장혁명에 뛰어들 것입니다.” 158~159
아르벤스 대통령의 목을 죄기 위해 과테말라에 퍼부어지는 폭격 아래에서 의협심 강한 의사 에르네스토는 ‘체’로 다시 태어났다.(···) 1954년 6월 말에 가서야 어머니의 손에 전해질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온두라스에서 날아온 것이 분명한, 해적 같은 비행기 한 대가 수도 위를 선회하다 가는 일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돈으로 고용된 용병들이 포격을 개시했습니다. 그 와중에 두 살 먹은 여자아이가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59
제3부 그란마호에 탄 여든두 사람
“게릴라란 흔히 여겨지듯 소규모 전투를 벌이는, 강력한 군대에 대항하는 소수 과격파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게릴라전이란 압제자에 대항하는 전체 민중의 싸움이다. 게릴라는 민중 군대의 전위에 지나지 않는다. 작게는 어느 한 지역, 크게는 어느 한 나라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형성한 군대의 주력이 게릴라이다. 아무리 심한 탄압 아래에도 소멸되지 않고 언젠가는 이기게 되어 있는 게릴라의 힘도 여기서 나온다. 일반 민중이야말로 게릴라전의 바탕이자 본질이다.”
실패한 파업(참여율이 30퍼센트 미만이었던)은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거의 1백여 명에 이르는 지지자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카스트로는 사태의 발전을 위해서는 결국 무기를 손에 쥘 수밖에 없는 현실을 깨달았다. 334
제4부 서쪽으로
체가 비록 게릴라전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는 하나 전투란 역시 압제를 해방시키기 위해 특별히 요청된 과정일 뿐이었다. 422~423
“시민들이 우리와 함께 오는 걸 보기만 해도 정부군은 자기네가 졌다고 판단하는 거죠. 이 덕분에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도 정부군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지요.” 424
제5부 전쟁은 끝나고
“다들 그렇게 얘기해요. 그런데 대장님은 해방자가 아니던가요?”
“나는 해방자가 아니다. ‘해방자들’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민중을 해방시키는 건 그들 자신이란다.” 434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는, 기층민중을 헐벗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지 몰라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제물로 삼는다. 한편 공산국가는 자유에 관한 한 전체주의적인 개념 때문에 인간의 권리를 희생시킨다. 우리가 그 어느 것도 일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혁명은 쿠바만의 주체적인 혁명이어야 한다”라고 카스트로는 썼다. 441
유고슬라비아에서 얻은 경험은 값진 것이었다. 도시민과 농민의 협동관계, 기업주의라는 자본주의적 원칙을 근간으로 이윤을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자발적 노동이야말로 체 게바라에게는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게다가 그가 보기에는 유고슬라비아인들이야말로 진정한 판단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유일한 공산주의자들 같았다. 450
당면했던 특별한 상황과, 또 내 기질 탓도 있겠지만, 일단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나는 아이티와 산토도밍고를 제외한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학생으로, 나중에는 의사로서, 나는 빈곤과 기아, 질병을 목격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일이 우리 아메리카의 기층민중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현실임을 바라봐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유명한 학자가 되거나 의학상의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민중을 직접 돕는 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456
쿠바혁명의 궤적에 지적인 호기심을 버릴 수 없었던 베틀랭은 아바나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좀더 깊숙이 경제문제에 파고들면서 체에게도 적극적으로 충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기업의 자율성과 재정능력이라는 두 가지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야만 쿠바의 통화를 위협하는 재정적인 문제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또한 생산량의 증가와 품질제고에 따른 임금인상 체계도 정착시킬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건의에 체는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당치도 않다며 펄쩍 뛰었다. 설사 노동의 질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는 임금체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더라도, 임금을 노동의 생산성과 상품의 질을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자극제이다. 이 자극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할 수 있도록 하는 윤리적 자극제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베틀랭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경험을 통하여 내가 깨달은 사실은 도덕적인 자극에만 의지하여서는 생산에 도움이 되는 어떠한 효력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480~481
체는 그 작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어했다. 혁명이 다만 단순한 경제 사회적 변혁에만 한정된다면 그건 엄밀한 의미에서 혁명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인간’을 생성시키기 위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였다. 494
젊은 공산주의자의 의무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인간형의 완성입니다. 새로운 인간형의 완성이라는 말은 최고의 인간에 접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최고의 인간은 노동과 학문, 이 세계 모든 민중과의 부단한 연대를 통하여 정제된 인간입니다. 이 지구상 어디선가 무고한 목숨이 꺼져갈 때 함께 고통을 느낄 수 있으리만치 감성이 계발되어 있으며, 자유라는 깃발 아래 분연히 일어설 줄 아는 인간입니다. 510
그가 얘기하는 새로운 인간이란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체는 자기의 바람대로 다른 이들이 행동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 자신은 그런 행동이 그들의 행복을 증진시켜준다고 믿고 있었으니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요. 사람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그리고 시간을 남겨 놓았어야 했어요. 우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했습니다. 대화는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가 꿈꾸었던 새로운 인간이란 너무도 완벽한 로봇이나 다름없는 존재지요. 따라서 그건 일종의 유토피아적 사고였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22
“······(소련인들은) 전 세계 노동계급의 중요한 목표와는 거리가 먼 기묘하고 이기적인 정책을 이용하여 대중혁명에 대한 지원을 아끼고 있습니다. 그들의 의식에서 인류애의 시각에 입각한 새로운 형제애를 도모하는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의 인민들이 피와 땀이 마르도록 생산한 1차 상품을 국제시장 가격으로 팔고, 최신식으로 자동화된 거대한 공장들이 생산한 기계들을 국제시장 가격으로 사는 일을 과연 호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그런 식의 관계가 서로 수준이 다른 나라들 사이에 성립된다고 한다면 어떤 점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제국주의적 착취에 일조를 하고 있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입니다.”
이 발언이 모스크바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뻔한 일이었다. 541
저는 해방되고자 하는 민중들의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무장투쟁밖에 없다고 믿으며 이 신념을 일관되게 따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무모한 모험가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모험가지요. 바로 자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 있는 그런 모험가 말입니다. 553~554
제6부 볼리비아의 계략
핸더슨은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볼리비아 정글에 ‘공산주의 게릴라들’이 있음을 알렸고, 워싱턴은 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논쟁은 다음과 같았다. 공산주의를 향한 공동의 투쟁과 세계 전복에 체가 완전히 실패했고 전투 중에 죽었다고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감옥에 가두는 식으로 살려두어서는 위험하다. 만약 그를 투옥한다면 ‘광적이고 과격한’ 집단들이 그를 석방시키려 할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고 전 세계의 여론이 쏟아지면 볼리비아 정부는 더는 그 상항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대로 그가 죽으면 쿠바혁명, 특히 피델 카스트로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684~685
피델은 혁명광장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텔레비전을 통해 다시 한 번 게바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을 이야기 한다.
“(···) 체는 바로 이 대륙을 짓누르는 억압 때문에 죽었습니다. 체는 이 땅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다가 죽었습니다. ······ 체야말로 인간다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혁명의 극기, 희생정신, 투쟁정신, 혁명적인 노동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고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민중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주저하지 않고 나서서 숭고한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698~699
체는 내게 소리쳤습니다. ‘총 쏘지 마라! 그들은 위험하지 않아. 우리를 보지 못했어.’ 그는 우리가 총을 쏘려는 것을 여러 번 제지하였습니다.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했던 거지요. 확실히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군인을 없앨 수 있었을 겁니다. 멀리서 보고 그가 우리를 공격할 사람인지, 무고한 사람인지를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700
볼리비아 게릴라 부대에서는 당통이라고 불리던 레지드브레는 상황이 군사혁명이 일어나는 데 유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농민들에게 이미 토지개혁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게릴라 투쟁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볼리비아 정글의 생활 여건은 쿠바의 산악지대보다 훨씬 더 불리하였다. 이것은 농민들이 투쟁에 참가지 않은 큰 이유가 되었다. 704
‘서구 사람들 대부분의 행동을 특징짓는 것은 개인주의다. 그 개인주의에 빠져든다면 거기에는 도덕이 있을 수 없다. 도덕은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런 생각을 통해 게바라 대장은 유대-그리스도교를 절충한 사상의 한복판에 도달한다. 707
그의 휴머니즘은 그로 하여금 지독한 가난과 지나친 부유함을 없애고 삶의 균형을 회복시키기 위해 투쟁하고 목숨을 바치게 만들었다. ‘인간이 권력의 자비에 매달려 사는 사회가 아니라 공적인 생활의 중심에 있게 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그는 맹세했다. 그리고 ‘테러리즘은 어떤 방식으로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결정된 혁명운동에 대해 반감을 품게 할 수 있는 부정적인 형식’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709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빰에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 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