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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종주를 축하드립니다
늙은 이가 주착 없이 분위기에 빠져 들다니.
다향(茶鄕) 특산 녹차삼겹살과 소주, 손민수의 재담, 삼박자에
새벽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그로기(groggy) 되었다.
그럭재 주변의 약간 혼란스런 초입부터 임도를 넘나들며 정맥에
들었으나 한사코 길을 막는 잡목, 가시나무들과 씨름하는 동안
몸이 정상으로 회복됫 듯 했다.
그리고 이런 훼방꾼의 기승은 불과 1시간이었다.
보성사 갈림길 이후의 정맥이 잘 다듬어져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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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사 갈림길/바야흐로 행복한 종주자가 된다.
어제 밤에 나는 손민수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
정맥이 통과하는 지방의 산악회들이 자기네 지역만이라도 다듬는
봉사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호남정맥중 가장 광범위하게 점유하고 있는 보성이 솔선
수범이 되어 달라고.
그러나 이처럼 미끈하게 정비된 정맥을 걸으며 늙은 山나그네는
간 밤의 경솔을 후회하고 있었다.
후회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진한 감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감동은 대간과 정맥 통틀어 유일했다.
"호남정맥 종주를 축하드립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27.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tGgI%26fldid%3D53OC%26dataid%3D93%26fileid%3D2%26regdt%3D%26disk%3D6%26grpcode%3Dtogetherc%26dncnt%3DN%26.jpg)
차도를 방불케 말끔히 정비해 놓은 정맥 위의 이 표지를 보고도
행복하지 않다면 당장 정맥 종주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보성읍사무소 산악회가 걸어놓은 축하 표지다.
그들은 길을 다듬는 수고뿐 아니라 종주자들을 감동시키고 남을
이런 멋장이 아이디어까지 내놓았다.
평범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콜럼부스의 달걀>을 상기해 보라.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대수롭잖게 보려는 사람들과의 시비에서
달걀 세우기 논쟁이 일지 않았던가.
남이 한 일을 평가 절하하려는 이들에게 다시 없는 경종이며
교훈이다.
백두대간과 9정맥이 얼마나 길고 긴 거리인가.
이 자락에 있는 아무도 감히 생각하지 못한 일을 보성읍사무소
산악회 여러 분이 한 것이다.
기발한 이 발상을 그래도 과소 평가할 것인가.
새 천년의 햇살 보성에서 빛나리
말쑥한 정맥은 봉화산으로 이어졌다.
해발 475m 봉화산은 높지는 않아도 이름에 걸맞게 사방으로
막힘이 없다.
보성읍과 득량면 회천면이 발 아래고 남동으로 득량만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뛰어난 산이다.
4월이지만 꽤 더운데도 시원한 봉화산 바람이 더위를 잊게 했다.
봉화대가 복원되고 소공원처럼 예쁘게 정비된 봉화산 정상에는
2000년 새 해 아침의 기원이 우뚝 서있다.
보성군민의 총의가 하승완 군수(당시) 이름으로 봉화산 표주석에
선명하게 새겨 있다.
"새 천년의 햇살 보성에서 빛나리"
보성은 이 염원의 성취를 기대할 만한 곳이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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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30.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tGgI%26fldid%3D53OC%26dataid%3D93%26fileid%3D4%26regdt%3D%26disk%3D25%26grpcode%3Dtogetherc%26dncnt%3DN%26.jpg)
상/복원된 봉화대
하/봉화산 정상석에 새겨진 보성군민의 염원
봉화산 이후의 정맥은 마치 호남정맥 종주를 축하하기 위해 깔아
놓은 파아란 카아핏(carpet)같은 널따란 길이 계속되었다.
빛나는 햇살 조명을 받고 있는 봇재 주변의 광활한 녹차밭에서
봉화산 정상까지 녹차향을 쏘아 올리기라도 하는 듯 그윽한 다향을
느끼며 걷게 했다.
정맥은 남하하다가 2개의 이동통신 중계탑 곁을 지나 18번 국도
상의 봇재를 향해 남서진한다.
중계소 길임이 분명한 도로 위에는 산나물 채취차 올라온 것으로
보이는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나물 찾아 헤메다가 일행을 잃은 듯 호명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등산용품점에 따르면 겨울 장비인 스팻(spat, spatterdash)을
봄 ~ 가을에 찾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단다.
뱀을 대비하려는 약초꾼과 나물꾼들이란다.
산채건 약초건 산에 있는 것들은 그대로 두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나 생업의 일부가 되어 있는 이들을 탓할 생각도 없다.
다만 뿌리채 뽑아다가 자기 밭에 심는 나물꾼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향에 취해버린 늙은 山나그네
녹차의 고장답게 고냉지 채소밭을 연상케 하는 녹차밭들이 정맥
지근 곳곳에 새로 조성되고 있다.
공휴일 한 낮의 봇재 일대는 시장을 방불케 했다.
녹차밭 탐방객들 수송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녹차향의 유혹에 넘어갔나.
활성산으로 오르는 정맥을 포기하고 녹차밭으로 가고 있으니...
그러나 크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인파 속의 차밭을 누비는 것이
보기에도 민망하거니와 행동도 부자유스럽다고 판단되었다.
보성 방향으로 가는 한 승용차에 편승했다.
젊은 운전자는 주말에 종종 이 곳 녹차밭 주차장에서 네 문을 활짝
연 채 밤을 보낸다고 했다.
하룻 밤 녹차향을 쐬고 나면 몸의 싱그러움을 확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보성인이 아니면서도 상당한 거리를 달려오곤 한다는 그다.
그는 나를 위해 자기의 행선지와 다른 방향인 보성읍 버스터미널을
다녀 가는 수고를 했다.
전날 들렸던 터미널식당에서 식사 후 배낭을 맡겼다.
다행히도 보성역에서 주말에만 운행하는 서울행 열차 좌석을 어렵
잖게 구입한 덕에 가볍고 편한 몸과 맘으로 녹차밭에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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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tGgI%26fldid%3D53OC%26dataid%3D93%26fileid%3D6%26regdt%3D%26disk%3D17%26grpcode%3Dtogetherc%26dncnt%3DN%26.jpg)
상.하/광활한 다원농원 녹차밭
봇재 다원농원에서는 상춘인파에 떠밀려 저절로 가는 느낌이었다.
추억 담기 작업에는 노소 남녀가 따로 없다.
전진에 브레이크가 자꾸 걸렸다.
탐방객을 유혹하는 상술도 가지가지.
곡우 직전에 거둔 것이 최고라 해서 인가.
값이 월등히 비싼데도 우전(雨前)집은 최고급 녹차향에 취해 보려는
탐방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찾는 이가 가장 많은 인기 품목인 것 같다.
그러나 분위기에 휩쓸리고 호기심에 참여는 했으나 값의 문제보다
다도(茶道)가 까다로워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런데 내 후각은 미개인인가.
너무 취해버려서 인가.
봉화산 이후의 정맥에서는 바람결에 스쳐가는 다향이 느껴지는
듯 했으나 정작 다해(茶海)에 빠져서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으니.
대간 정맥에서 독특하기 그지 없는 송이버섯향과 묵직한 더덕향을
더러 느끼며 지나가곤 하건만.
내 코는 정녕 너무 쉽게 마비되어버리나 보다.
향수를 비롯한 각종 화장품의 향 감별사(표현이 맞는지?)의 코와
무수한 주종을 정확하게 가려내는 이들의 혀는 참으로 신령하고
위대하다고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