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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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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가을(?)
비가 내리더니 날이 시원해졌습니다. 가을산은 이미 단풍으로 물들었습니다. 단풍이 드는 것은 기온이 낮아서가 아니라, 일조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라지요? 이제 얼마 후면 나무들은 졸가리만 남긴 채 헐벗은 모습으로 겨울을 나야 할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이 맘 때를 읊은 시에서 “밤은 등불 빛으로 나를 유혹하며/추위를 피해 어서 귀가하라고 한다.”고 노래합니다. 가을은 어쩌면 귀가의 계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귀가는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요. 헤세는 계속해서 “머지않아 나무는 헐벗고/정원은 텅 비겠지”라고 탄식한 후에 “늘 여름일 수는 없으니!”라는 구절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여름이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게 마련입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도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80년대까지만 해도 기독교인들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증가세가 멈추더니, 급기야는 감소 추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랴부랴 한국교회 침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진단하느라 분주합니다. 종교사회학자들은 물질적인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사람들의 관심은 종교에서 레저로 넘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의 감소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요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존경은커녕 조롱의 대상으로 변해버린 우리의 모습이 처량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이고 편협한 신앙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초월성의 빛으로 세상을 조명해야 할 교회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투항해버렸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보다는 안정적 물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소리를 대변한다는 말일 겁니다. 교권을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모습도 가관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자원인 도덕적인, 영적인 자산을 다 까먹은 후에 남는 것은 세상의 비난입니다. 이런 비난은 아프지만 달게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영이 혼돈된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영적 분별력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표징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을 홀리려 할 것이다”(마가복음서 13:22).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대개 가시적인 결과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평가도 그렇습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고 경상비가 늘어나면 그는 능력 있는 목사로 인정을 받습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런 시선이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강박관념처럼 교회 성장이라는 목표에 전념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굳게 붙잡기보다는 방법에 집착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돌봄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교회의 진정한 성장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교우들 속에 자라나는 것입니다.
• 하늘에 속한 사람
예수님은 양의 탈을 쓰고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인 거짓 예언자들을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거짓 예언자들과 참 예언자들이 겉보기에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식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는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다 들국화 종류니까요. 양지꽃과 노랑제비꽃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참과 거짓을 옳게 식별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어쩌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이 처신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열심이나 종교적 진지성도 매우 견실합니다. 그들의 얼굴은 매우 부드럽고 약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말씨는 사근사근하기까지 합니다. 야곱이 눈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챈 이야기를 아시지요? 성서는 이삭의 반응을 이렇게 전합니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로구나.”(창세기 27:22b) ‘소리’와 ‘정체’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별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옳은 말입니다. 한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는 그의 자기 진술을 통해서 파악될 수 없습니다. 은근한 목소리로 “오빠, 못 믿어?” 하는 사람이 대개 위험하다면서요. 세상 사람은 다 도둑놈이니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면서 ‘나만 믿으라.’고 말하는 이들도 대개 가짜들이 많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그가 주위에 일으키는 파장을 통해 드러납니다. 꽃이 피면 벌이나 나비는 저절로 모여듭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우리 정신이 공명을 일으키고,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타오르고, 선하고 순수한 마음이 흘러나온다면 그는 참 사람입니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지만 주위에 행복과 순수와 불멸의 아우라를 드러냅니다. 그는 사람들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경계를 넘어 타자들의 삶을 향해 흘러가도록 우리 가슴에 길을 냅니다. 그는 진리의 일부를 전부인양 호도하는 법이 없습니다.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자기와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진 사람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면서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가 있는 곳에서 불화는 사라집니다. 그의 곁에 서 있기만 해도 타오르던 욕망이 잦아들고, 거룩한 생의 열망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누군가의 가슴속에 빛의 알갱이를 흩뿌려 삶을 축제로 바꿉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 거짓 예언자
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의 가슴에 거짓 평안을 안겨줍니다. 그들은 다정한 위로자처럼 보입니다. 경고의 나팔을 울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기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예레미야 5:31)
불신앙의 삼위일체인 셈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뜻을 기준 삼아 자기 삶을 조율해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꾸짖는 일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지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듣고 싶은 말만 듣다 보면 우리 삶은 성숙에 이르지 못합니다. 듣기 싫지만 들어야 할 말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가하면 극단적인 죄의식을 심어주는 이들도 있습니다. 마치 거미가 거미줄로 먹이를 칭칭 동여매는 것처럼 그들은 죄의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포박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듭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하고 책임지는 주체로서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우리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감시 카메라/빅 브라더와 같습니다. 그들은 늘 죄책과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죄의식에 깊이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에 대해 너그럽지 못합니다. 자기 속의 그림자가 짙은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에게 가혹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또한 사람들의 욕망을 한없이 부풀립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성공은 가시적인 결과로 가늠될 뿐입니다. 많이 누리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안락하게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더 이익에 집착하고 편협하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그들에게 생태학적 발자국을 적게 남기는 삶이 복음적인 삶이 아닌가 물으면, 하느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는 반문이 돌아옵니다.
• 프로테스탄트
신앙이란 죄의식을 부풀려 부자유하게 하거나, 욕망을 부풀려 돈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은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는 엄숙한 행위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비움이고, 자기 비움은 하느님을 모심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교회는 이런 믿음의 근본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어쩌면 이런 근본이 무너졌기에 기독교가 이 지경이 된 것 아닐까요?
루터의 종교개혁이 중세기의 가톨릭의 교권에 대한 항거였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종교개혁은 욕망의 지배에 대한 항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Sallie McFague는 최근의 저서 《기후 변화와 신학의 재구성》(한국기독교연구소)이라는 책에서 자기 비움이란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삶을 완성시키는 길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자아와 물질적 필요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이웃 사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대저택이 아니라 작은 아파트에 사는 것, 대형 레저용 자동차가 아니라 작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타는 것, 세계를 반 바퀴나 돌아서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 아니라 지역에서 생산되는 음식을 먹는 것이 신앙적 실천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자기 비움이란 “구입하고 싶은 상품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며, 이미 ‘충분하다’라고 말하는 것”(222쪽)입니다. 이것은 자기 욕망에 대한 저항이고, 우리 시대가 씌워준 성공의 신화에 대한 저항입니다. 사람들은 개신교도改新敎徒들을 가리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했습니다. ‘항거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릇된 교권을 향해서는 ‘아니요.’라고 말했지만,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는 ‘예’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욕망과 성공 강박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고, ‘나눔, 섬김, 돌봄, 기쁨’에 대해 ‘예’라고 말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라는 나무는 고사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지치기가 필요합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풍요에 대한 환상을 주입하는 가지를 쳐내야 합니다. 환경에 부담을 주는 생활방식을 청산해야 합니다. 지구의 자원을 거덜 내는 삶의 방식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을이 되어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처럼 우리는 부푼 욕망을 덜어내고 소박한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쳐내야 할 또 다른 가지는 권력에 대한 집착입니다. 부자가 되고 다수가 된 교회는 어느 새 권력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이제 압력단체가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은 이제 정치인들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되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빛과 소금’으로서이지, 다수의 힘을 바탕으로 한 압력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도덕성이 아닌 다른 영향력에 기대는 순간 교회는 변질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몸이 느끼는 추위는 어쩌면 내면이 부실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을은 우리에게 허장성세를 벗고 알몸으로 주님 앞에 서라고 말합니다. 어떤 책망이든 달게 받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나무는 ‘本’이고 열매는 ‘末’입니다. 뿌리가 든든해야 나무가 건강하고,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돈과 권력과 허명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릴 때 생의 열매는 절로 맺히게 됩니다. 이 스산한 가을, 우리 삶에 햇살과도 같은 주님의 은혜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