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인
누가복음 24:44-53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빈다.
부활절 일곱 주간의 마지막 주일이다. 부활절 40일째 되는 날은 승천일이다.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이 50일째를 맞는 오순절, 곧 성령강림주일을 맞는다. 새로운 절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지난 주에 우리 교회를 방문해 함께 예배드린 후배 집사님이 그 소감을 이렇게 말하더라. “오랜 만에 사도신경을 외워봤어요!” 뜻밖이다. 사도신경이 아주 감동스러웠다고 하였다.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는 열린 예배를 드린다면서, 복음성가 몇 곡 연속해 부르다가 바로 설교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예배를 단순화하다보니 전통적으로 암송해 오던 사도신경이니, 주기도문이 모두 거추장스러운 순서 취급을 받게 되었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쩌다 한번만 해도 되려니 생각할 수도 있겠다.
처음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들은 신약성경에 단편적으로 나온다. 이것이 4세기에는 전 세계교회 공통의 니케아 신조로 발전하였고, 오늘 우리가 드리는 사도신경으로 이어졌다. 세계 모든 그리스도교회는 예외 없이 같은 고백을 한다. 이러한 공통된 고백이 없다면 그리스도교회가 아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오늘 승천주일 본문은 바로 사도신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 승천하신 예수, 다시 오실 예수’. 복음서의 결론은 이 모든 사실을 증거 하면서 마무리 짓고 있다. 특히 같은 기록자인 누가복음 24장과 사도신경 1장은 이 부분을 결론과 서론으로 겹치기 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증인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증인은 누구인가? 목격자이다. 목격자는 본대로 증언하는 사람이다. 증인은 주변의 환심을 사려고 있는 사실을 자기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율법에서도 두 사람이 같은 증거를 하면 법적 효력을 갖는다. 증인의 헬라어 의미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목격자와 순교자’.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을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뜻이다.
유대인 부모가 학교에서 돌아 온 아이에게 물었다.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니? 출애굽에 대해서 배웠어요. 이스라엘이 어떻게 홍해를 건넜지? “미군 공병부대가 바다 위에 엄청난 부교를 만들어 밤새 모두 건넌 후에, 애굽 군대가 쫒아 오자 다시 폭파해 버렸습니다.” 정말 그렇게 가르쳤니? “아니요. 성경에 있는 대로 말하면 아버지가 안 믿을까봐..”
출애굽을 배운 아이는 오히려 아버지의 불신앙을 염려한다. 평소 아버지 사는 모습을 보면 못 믿을 것 같거든.. 오늘 현대인들의 부활신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사도신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튼튼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다시 오시리라!’사람은 누구나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오시는 심판자 앞에 설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말씀이 아니다.
1) 말씀의 증인(44-48)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44).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에 아직 상황파악을 못한 제자들을 향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일깨우신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 곧 그들이 지켜 본 주님의 생애, 십자가, 부활이 이미 성경에 예언되었던 말씀임을 알아야 했다.
처음에 제자들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셨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초대 교회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의 빛 안에서, 부활하신 분 자신을 통해, 그리고 그의 성령을 통해 다시 볼 수 있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46-47).
일찍이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곧 이루어질 일들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 사건은 이미 이루어진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로써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모든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될 때 비로소 종결되는 것이다.
옛 말씀이 자기들을 향하신 약속임을 제자들은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 이 내용들이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 설교의 핵심이 되었다.
이제 너희가 증인이다. 너희는 성경에 나타난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생생한 목격자가 아닌가? 증인의 사명을 다하라!
증인이 된 제자들의 모습을 보라! 십자가와 부활을 겪으면서, 또 주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의 삶은 크게 변하였다. 전에는 부인하고, 비겁하게 숨고, 도망가고, 의심하던 그들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이젠 당당히 증언하고, 목숨을 걸고 맞서고, 믿음으로 기적을 행하고, 끝까지 사랑하였으며,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산헤드린에 붙잡혀 간 베드로와 요한은 이젠 증언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용기있게 말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이제 예수님은 증인인 너희야말로 여기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나라와 족속과 열방에 이르기까지, 그 복음을 전파할 사람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지금도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선교사로 결단하는 것이다.
2) 성령의 증인(49)
그런데 아무리 자기가 보고 들었다고 하더라도 용기가 없으면 증인이 되기 어렵다. 그래서 양심에 따른 선서도 하고, 법적으로 보호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증언을 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그런데 남들이 믿기 어려운 부활, 승천, 재림에 대해 증거 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까? 그것은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제자들은 아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야를 세상에 전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모든 민족들이 그들을 우호적으로 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유대인인 그들은 이방인을 부정한 사람으로 선입관을 가지고 있으니 극복해야할 걸림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제자들은 정직한 목격자로서, 용기있는 증인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 능력을 받아야 한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은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강림을 다시 확인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49).
여기에서 “위로부터 오는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다.
구약 시대에는 사사와 예언자와 같이 특별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허락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 특별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새로운 시대가 온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되는 시대이다. 선지자 요엘은 장래에 하나님의 영을 온 백성에게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였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이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자기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기로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보혜사는 라틴어(fortis)로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다.
이제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든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인정하고 믿는다면, 그 고백은 내 입술을 통해 했지만, 이미 성령이 활동하신 결과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성령의 힘으로, 그 성령의 능력으로 증인의 사명을 다하라고 말씀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3) 승천의 증인(50-53)
그리고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50-51).
예수님의 떠나심은 축복과 승천으로 이루어진다. 승천 직전 제자들을 떠나기 전에 하신 축복을 교회전통에서는 특별히 ‘장엄축복’이라고 부른다.
신심이 많은 사람들은 저 마다 이 ‘축복과 승천’ 장면을 눈으로 보기를 원할 것이다. 자기 시대에, 자신을 향해 축복하신 모습으로 재현하기를 희망하였다.
브라질 사람들이 그랬다. 그래서 리오데자네이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코르코바도산 정상에 그렇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도록 만든 것은 보다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리오데자네이로 예수상이다. 해변에 우뚝 선 산의 높이가 700미터, 그 위에 예수상이 38미터, 조각상의 무게가 무려 700톤에 달한다. 이것을 세계7대 건축불가사의로 올리려고 룰라 대통령까지 나서서 인터넷 투표를 독려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믿기 어려운 이야기여서 그랬을 것이다.
마치 출애굽을 믿음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에게 전쟁영화처럼 설명한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일 것이다.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만날 수 없다. 주님은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공간으로 떠나셨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직접 우리에게 찾아오신 공간을 떠나시고, 더 이상 이 공간에 육적인 모습으로 머물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은총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승천은 한 시대의 끝이며,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 된 사건이다. 제자들은 더 이상 낙심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는다. 이젠 갈릴리나 엠마오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를 경배하고, 기뻐하며, 찬양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약속을 기다리면서 늘 성전에 머물렀다. 성전은 이제 제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가 되었다.
독일 가톨릭 풀라 교구에 요한네스 디바 대주교가 있었다. 그의 별명은 ‘중세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는 도무지 현대적인 구석이 없는 사람이었다. TV 토크쇼에 나온 그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고집할 때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분위기 파악도 안했고, 외교적인 언술도 쓰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 한 신문(<프랑크푸르터 노이에 프레세>)이 이렇게 논평하였다.
“점차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지나치게 시대정신의 환심을 사려 노력할 위험에 처해있는 교회는, 아마도 디바와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가 한 설교 중에 ‘길을 가리키는 어떤 사람’이란 말씀이 있다. 그렇다 증인은 목격을 바탕으로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다시 오시리라!’
진리는 말만 하지 않고, 설득력 있는 삶을 통해 지킬 수 있다. 신앙의 진리를 품기 위해, 사도적 전통 안에 머물기 위해 우리는 소수자로 남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도신경의 고백으로 든든하게 하시길 빈다. 그리하여 오늘 진리의 토대가 흔들리는 세상에서 참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