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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척거리느라 잠못이룬 함양의 밤
수동면사무소에 들렀다.
15개역을 거느렸다는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터를 물으려 한 것.
면사무소 유수상님은 사근역과 사근산성(사적제152호)의 복원계획
문서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함양군대형지도와 자료들을 챙겨주었다.
마치 브리핑하듯 정중하고 친절하게.
수동면사무소(1)와 사근역터(2:수동초등학교앞/뒷산은 사근산성)
사근역이 있다 해서 역촌으로도 불리던 마을의 옛 이름은 '안곳삿'.
한자화 될 때 '내동'(花山里內洞)마을로 바뀌었단다.
찰방터(수동초교앞)를 확인한 후 15리 함양읍(咸陽)길을 재촉했다.
사근교를 건너면 바로 함양읍 땅이다.
월명총(月明塚) 전설에서 유래됐다는 월명산, 월명마을이다.
부득이한 일로 고향에 간 낭군을 기다리다 지쳐서 죽은 사근역역녀
(驛女) 월명을 마을인들이 남편의 고향쪽을 향해 산 정상에 묻었다.
오매불망 끝에 돌아온 남편도 아내무덤 곁에서 애통하다가 죽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부부의 애절한 순애(純愛)에 감동해 합장(?)했다.
월명총의 전설이다.
요새 기준으로 보면 신기한 바보짓에 다름 아니겠지.
어둡기 전에 도착한 함양읍 찜질방 중앙레스파(龍坪里)에서는 묘한
흥분으로 뒤척거리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통영별로는 경도발 990리, 삼례에서 분기하여 520리길이다.
통영에서 270리길 함양에 도착했으므로 반환점을 돌아섰다.
경유 지방고을 수(數)로도 이미 반을 넘었다.
내일 팔량치를 넘으면 영남에서 호남으로 바뀐다.
게다가, 1959년 초여름에 십리나 되는 상.하림(上.下林)에서 하루를
보낸 이래 반세기 만에 함양읍내에서 보내는 밤이다.(함양땅을 무수
히 밟았지만 지리산 들.날머리인 마천면에 한정됐으므로)
이 정도면 아무리 프로 나그네라도 잠 설치는 것이 당연하리라.
50년전, 폐결핵과의 싸움에서 전세가 극히 불리해진 나는 결전지(決
戰地)로 낮선 지리산 자락을 택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미봉으로 나마 마지막으로 종결되었으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던 지리산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절박한 코너에 몰린 나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듯 음험하고 인적
없는 지리산에서 2년간 사생결단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총알이 하도 많이 박혀서 톱날이 상한다는 이유로 제재소들이
기피하던 우람한 숲과 바위들, 해발500m가 넘는 고원지대의 이웃들
등 지리산의 온 가족이 내게 한없이 어질고 다정한 벗이 돼주었기에
나는 승자가 되었다.
내가 지리산을 잊지 못하는 이유다.
최치원은 아주 특별한 구름
먼동이 트기도 전에 상림숲으로 갔다.
1100여년 전 태수 최치원(太守崔致遠)이 만든 인공숲인데 밤사이에
내린 봄비에 촉촉이 젖어 있었다.
천령현 중앙을 흐르는 위천(渭川)이 자주 범람하므로 물길을 돌리고
둑을 쌓은 뒤 둑 따라 조성한 대관림(大館林:당시 이름)이다.
4대강사업 때문에 온나라가 소란한데 학식이 높고 사려 깊은 태수는
그 때도 친환경적이었던가 보다.
상림(1)내의 연리목(2), 함화루(3), 사운정(4), 문창후신도비(5),
이은리석불(6), 척화비(7)
하림은 아예 사라졌고 남아있는 상림도 전혀 다른 숲이다.
격세지감이라는 표현으로는 느낌이 와닿지 않을 만큼 변했다.
20세기 100년의 변화는 이전 1900년 동안의 변화를 능가한단다.
더구나 20세기 후반부는 더욱 가속이 붙어 상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몰라보게 된 것이 당연하지만 변찮은 것도 있는 듯 하다.
최치원 없는 함양은 충무공과 통영의 관계처럼 팟소 없는 찐빵 또는
알맹이 없는 쭉정이에 불과하겠다는 느낌 말이다.
하늘재(天嶺)로 풀이되는 천령군(신라 때는 速含, 天嶺이었다) 태수
였던 최치원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
상림은 물론 학사루(學士樓)를 비롯하여 고운의 숨이 담긴 유적들이
함양인들에 의해 더욱 더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천령지(天嶺地)' 표석을 비롯해 '천령' 지명이 상존하고 업소(業所),
아파트 이름까지 있다.
함양군청(1)일대의 천령지 표석(2), 사운원(3), 석조여래좌상(4)과
보림사(5)
최치원이 함양에 특별한 애정을 가졌던가 고운(孤雲)에 대한 함양인
의 별난 애정 탓인가.
그는 성골(聖骨) 진골(眞骨)이 아닌 평민의 자제로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함으로서 우리나라 조기유학 1호다.
약관에 첫 벼슬을 당(唐)에서 했다.
귀국해서는 평민 최고품인 6두 아찬(阿湌)까지 올랐으나 오래잖아
난맥상인 조정을 떠나 외직(태수)에 나섰다.
그는 천령군 태수였을 뿐 아니라 태산군(太山: 全北 井邑市 泰仁面),
부성군(富城郡: 忠南 瑞山郡) 등의 태수도 역임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는 상당한 온도차를 느끼게 된다.
이즈음 들어서는 지자체들이 경쟁적이지만.
당(唐)의 최고의 학문을 닦아 '글로서 중원(中原)천지를 흔들었다'는
당대(當代) 최고의 학자요 문장가인 최치원은 비운의 사나이였나.
그래서, 고독한 구름같이 왔다가 구름처럼 쓸쓸히 가는 인생이라 해
서 스스로 고운(孤雲)이라 했나.
그래도, 구름으로 그치지 않고 만물을 살리는 비가 되었나.
그가 조성한 상림의 거목숲을 거닐 때 그는 이 거목들 보다 엄청 큰
거목으로 내게 다가왔다.
익을 수록 머리를 숙이는 이치가 어찌 곡식에 한하는가.
사람도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곡식과 다를 것 없다.
계림국(鷄林國: 신라)의 유학생 최치원은 18세에 당(唐)의 과거에서
장원급제했고 '황소격문(黃巢檄文)'이라는 당대의 명문을 썼다.
얼마나 명문이었기에 전투중 말 위에서 이 격문을 읽던 황소가 간담
이 서늘하여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을까.
연마한 최고의 학문과 경륜 펴기를 단념하고 외로운 구름처럼 시골
태수로 떠돌며 심어놓은 씨앗들이 장구한 세월과 더불어 더욱 거목
으로 성장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孤雲'은 외로운 뜬 구름이 아니다.
아주 특별한 구름이다.
미국 텍사스주기(州旗)는 연방기와 달리 별 하나만 달랑 있는'Lone
Star'(외로운 별/孤星)다.
그러나, 현지에서 들었는데 '고독한 별'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별',
'유일한 별'이라는 뜻이라고 텍사스인들은 힘주어 말한다.
Lone Cloud(孤雲) 역시 그렇게 보아야 바른 이해가 되겠다.
김종직을 논단하고 유자광을 변호한다
이에 비해 상림 역사인물공원을 점유하고 있는 함양의 다른 인물들
면면(frofile)은?
함양현감 재임중 좋은 이미지(善政)를 남겼다는 점필재 김종직(佔畢
齋金宗直)은 어떤가.
길재,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한
사림파 사조(士林派師祖)인 그는 훈구파와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다.
유자광을 피해 관아를 비웠다는 이은대(吏隱臺)사건, 유자광이 지은
시현판을 철거했다는 학사루(學士樓) 사건 등의 주인공인 그.
유자광을 아무리 증오해도 자기가 섬기는 왕이 중용한 신하인데 꼭
그래야만 했는가.
상림내의 역사인물공원기(1), 학사루(2)와 느티나무(3)
영남의 문인들을 요직에 포진케 해 훈구파(勳舊)를 제압하려 했다는
점에서 상대파와 다르지 않으면서 숯이 검정 나무라고 있었지 않나.
유자광이 서출(庶出)이며 학문이 없는 문신이라는 점 외에는 자기와
다를 것이 뭐 있는가.
게다가, 유자광이 서출(庶出)인 것이 어찌 본인 탓인가.
그가 만일 영조때 벼슬을 했다면 왕도 괄시했을 것 아닌가.
영조는 천한 무수리 소생이니까.
또한 훈구파가 유자광 뿐인가.
유자광 혼자 그 큰 일들을 꾸미고 벌일 수 있는가.
그를 간신(奸臣), 또는 간신의 아이콘으로 치부하지만 5대(代) 왕에
걸친 신하라면 능신(能臣)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바다가 물을 가려서 받아들이는가.
사림파의 배경인 유가(儒家)의 금과옥조(金科玉條)가 군자불기(君
子不器:論語爲政10), 대인불기(大人不己)아닌가.
그러니까, 그는 단지 영남학파의 파두(派頭)였을 뿐 군자도 대인도
못되는 편협한 학자였다.
학사루 현판사건이 없었다 해도 사화는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굳이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빌미를 만들 게 뭐람.
물고 물리는 판국에 은유법(隱喩法)을 써서 선왕(世祖)을 비판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그도 문제지만 그 글을 버젓이 사초에
실은, 상황판단도 못하는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은 어떤가.
꼭 그렇게 티를 내야 직성이 풀렸는가.
역시, 편협하기는 스승과 다를 것 없어 화를 자초한 것이다.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라는 그는 당위 여부를 떠나서 결국 부관참시
(剖棺斬屍)의 수모를 겪고 그 계파의 몰락을 가져오지 않았던가.
이중환은 "옛부터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이 도(영남) 안에서 장상(將
相)과 공경(公卿)..... 선도(仙道) 불도(佛道) 도교(道敎)에 통한 사람
등이 많이 나와서 이 도를 인재의 광이라 한다"........ "이후로는 영남
사람으로서 정경(正卿:정2품) 둘, 아경(亞卿:종2품) 네다섯이고 정승
된 사람은 없다"(擇里志)고 비판했다.
유자광은 어떤가.
종2품인 부윤 유규(府尹柳規)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멸시와 천대를
받아 꼬일 대로 꼬인 파락호(破落戶)였다.
그러나, 그는 이시해(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세조(世
祖)에 의해 특별 등용되었다.
예종때에는 남이(南怡)장군을 무고하여 죽게도 했다.
연산군(燕山君)때에는 무오사화(武午士禍)를 일으키는데 주동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 무령부원군(武靈
府院君)에 봉해졌다.
끝내는 훈작을 모두 박탈당하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유자광의 일대기는 어찌보면 ‘시대의 업보’라는 표현으로 그에 대한
나의 변론은 시작된다.
여자라면 귀천 가리지 않고 농락한 권력자와 양반들의 업보다.
사대부, 지배층들이 서출, 천출이라고 멸시하고 천대하나 자기네가
뿌린 씨를 거두어들여야 하는 업보 말이다.
또한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민첩함이 비상하여 무신(武臣)이 적격인
그를 세조가 예외를 적용하여 문신으로 편법 등용한 결과 아닐까.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을 쓰며 전장을 누볐다면 멸시당하던 울분이
진정되고 포악한 성격도 누그러졌을 것이라 생각되니까.
설마, 무장이 되면 자기 증조부의 위화도회군 같은 쿠데타 일으킬까
겁이 나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
이씨의 쿠데타왕조는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숭유(崇儒)는 구호일 뿐이고 왕조의 시작과 함께 거듭된 왕자의 난,
숙질간의 왕위 찬탈 등 참극이 벌어졌다.
왕다운 왕, 신하다운 신하가 탄생할 토양이 형성되겠는가.
연산군이 애당초부터 폭군이었는가.
생모를 쫓아내고 후환이 두려워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은 자들을 알
고 돌지 않을 자식이 있겠는가.
하물며, 그 자들이 매일같이 조아리는 자기의 신하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태연자약할 왕이 과연 있겠는가.
간음죄로 잡혀온 여인이 돌에 맞아 죽을 운명에 처해 있을 때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했다.
그 시대에 유자광에게 돌을 던질 수 있었던 자가 누구인가.
그 시대뿐 아니라 이 시대에도 그에게 자신있게 돌을 던질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함양인물 유감
인물공원의 으뜸은 단연코 고운이지만 고려말 두문동72현중 하나인
덕곡(德谷趙承肅)을 비롯하여 이 지역 출신 또는 이 곳 현감(군수)을
역임했거나 관련이 깊은, 훗날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들 중 상반되는 두 인물이 늙은 나그네를 혼란스럽게 했다.
열하일기와 허생전, 양반전 등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燕巖朴趾源)과
동학혁명 발발의 원인 제공자인 조병갑(趙秉甲)이다.
박지원은 실학자, 문장가이며 소설을 통해서 사회와 백성의 의식을
변혁시키려 한 사상가다.
안의현감 재임시에는 물레방아를 비롯해 여러 생산기구를 제작하여
사용하게 하고 기민구휼에 진력해 고을민의 존경을 받았단다.
한데, 탐관오리의 전형인 조병갑(趙秉甲)은 왜?.
부친 조규순(趙奎淳:1849년)과 아들(병갑:1886 -1887년)이 37년의
인터벌을 두고 함양군수를 역임했나 본데 그 때는 선정을 베풀었나?
아버지의 '永世不忘碑'(영세불망비)와 아들의'淸德善政碑'(청덕선정
비)가 한 장소에 서있으니 말이다.
그 후 김해군수를 거쳐 고부군수로 부임한 것은 1892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탐관오리의 화신으로 만들었을까.
함양군당국의 역사의식을 비판하며 철거를 주장하는 여론이 비등할
뿐 아니라 한 열혈지사(?)는 해머로 비(碑)를 훼손했단다.
경찰은 강력범죄수사팀을 가동해 그를 검거했고 유공 경찰관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고 격려했단다.
함양군청홈피 '역대군수'에는 "동학 농민봉기를 유발하게 한 장본인
으로서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봉급을 털어 관청을 수리하며 세금을
감면하고 사심없는 선정을 하였다 하여 1887년 군민이 청덕 선정비
를 세웠으나 사실 유무에 대하여는 확인이 어렵고 비는 상림역사인
물공원에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문화관광 사이트의 '함양인물' 리스트에는 그들 부자
(父子) 가 아예 없다.
조선시대의 48명을 열거하였는데 인물공원에 들어설 만큼 비중있는
그들이 왜 없는가.
없는 것이 라기 보다는 여론에 밀려 삭제한 것 아닐까
.
그런데 왜 자꾸만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을까.
당시, 권력의 중심라인에 있던 조모가 그의 증손이라는 점 때문?
함양군청이 지탄의 대상을 철거는 커녕 얼버무르고 있고, 경찰 역시
그 정도의 범인 검거에 그토록 적극적이었던 것이 어떤 역학관계가
있지 않나 싶은 의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양군청 홈피의 '자유발언대'에는 이영래님의 "함양군은 역사와 군
민 앞에 사죄하라"는 절절한 호소가 올라 있다.
그는, 조병갑은 물론 군에서 흉상까지 제작해 세운 특별한 11분 중 1
인 이병헌(眞菴李炳憲:1870~1940)의 친일 의혹도 제기했다.
광범한 자료에 근거한 그의 주장에 대해 군 당국이 조사중이라는데
세월만 죽이고 있는지 반응이 없단다.
2000년 밀레니엄(millennium) 기념사업의 일환이라는 인물공원의
함양인물 선정은 부실 투성이 인가.
내 조부께서는 고부 농민군 봉기에 가담하셨던 이야기를 어린 손자
를 포함한 가족에게 들려 주셨다.
6척 거구이신 당신이 전봉준장군 휘하에 있었는데 전장군의 체구가
하도 왜소하여 난쟁이로 불렸단다.
때로는 진두 지휘하는 장군이 보이지 않아 애먹었다 하시며 조병갑
의 죄상을 낱낱이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또렷이 기억되고 있다.
읍 외곽(校山里)의 함양향교(도유형문화재 제225호)를 비롯해 여러
곳에 더 들르느라 오전이 다 가버렸다.
전라북도 경계인 팔량치(八良峙)까지는 30리길이지만 넘어야 하는
재가 해발513m로 만만치 않은데다 인월면 소재지까지는 최소한 10
리를 더 걸어야 하기 때문에 여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함양향교(1. 2), 세종 왕자 한남군묘(2)
위천(인당교)을 건너 이은대(현재는충혼탑)가 있는 마을 인당(仁堂)
의 중앙을 통과하는 24번국도를 타고 걸음을 재촉했다.
전북 전주, 남원과 경남 진주, 마산, 부산을 연결하는 중요도로지만
예전에는 차가 어렵살이 교행할 정도의 좁은 비포장 자갈길이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 쓰며 자전거 패달을 밟던
반백년 전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기도 했다.
아득한 팔량치 말고도 고개가 왜 그리도 많았던지.
지금은 이처럼 편한데 왜 그렇게 험하고 힘겹게 느껴졌을까.
지리산으로 가는 첫 관문인 '오도재'(悟道峙) 길이 분기되는 삼거리
갈은치(葛隱峙) 저 아랫마을은 조동마을이다.
대추나무가 많아 '대추지', 즉 조동(棗洞)인데 사근도찰방에 소속된
제한역(蹄閒驛)이 있어 역촌이라고도 했다는 마을이다.
오도치는 어찌나 험했던지 한 고승이 이 고개를 오르내리는 동안에
득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지금은 그 길이 1023번지방도
로 승격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아름다운길100선'에 든단다.
함양인들이 이 험한 길 따라서 해발1.650m 지리산까지 올라가 하동
인들과 장거래를 해서 그 곳이 장터목이지 않은가.
70년도 못되는 전의 일인데 왜 아득한 옛날의 일처럼 느껴질까.
오도재 분기점(1. 2), 팔량치(3)
고도를 높여가기 때문이었을까.
봄비 끝이라 맑아 주리라 믿었건만 돌연 몰아치는 사나운 비바람이
시야를 뺏어가 맘놓고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기온까지 뚝뚝 떨어뜨려 난감한 지경이 된 내 앞에 한 트럭이 경음을
울리며 멎었다.
선한 사마리아인!
구룡무술학교 앞에서 단숨에 팔량치 코앞인 상죽마을 앞에 도착했다.
곧 팔량치 고개를 넘어 전북 남원시 인월 땅에 들어섰다. <계속>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돌아와서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