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코끼리 생포 작전
이 옥 현
<상림교 부근 도로가에서 바라본 불태산 정경>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광산구 첨단 월계동에서 매일 마주 보는 산이 있다. 거의 매일 무의식적으로 눈에 익혀 온 산이다. 병풍산 옆에 있는 어떤 산 정도로 분별하고 판단하여 알고 있는 낯익은 산이다. 자동차의 시동을 끄고 눈 앞에 다가온 산의 전체적인 형세를 보니 예사로운 산의 모습과 다르다. 일반적인 산의 모습은 작은 봉우리와 큰 봉우리가 이어진 곡선의 프래프를 연상한다. 지금 우리가 상림교 바로 윗쪽 도로가 공터에서 마주하고 있는 산의 모습은 큰 코끼리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다. 육중한 몸집의 코끼리 녀석 같다. 수치의 변화가 거의 없는 그래프이다. 오늘 저 녀석을 조심스럽게 생포하려고 한다.
불태산(佛台山 710m)은 우리 광주 시민이 무등산 다음으로 많이 찾는 병풍산을 모산으로하는 산이다. 병풍산은 여려 차례 등반의 경험을 갖고 있지만 바로 이웃에 있는 불태산은 이름조차 오늘 처음 들어 본다. 지난 날 진원면 불태산 비탈진 아랫부분에 육군 탱크 부대 훈련소가 주둔하여 코끼리 심장을 향해 포화를 뿜었던 관계로 민간인 출입 제한 지역으로 묶여 있어, 출입이 허용된 지금도 등반객이 그리 흔하지 않는 산이다. 우리가 등반한 오늘도 단 두 명의 등반객과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의 가벼운 목례를 던질뿐이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불과 몇 년 전에까지 이 곳 비아중학교까지 포탄의 굉음이 소름 끼치게 들려 학교 건물이 흔들리고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이 깜짝 깜짝 놀란 기억들이 되살아 난다. 저녁이면 야간 포 사격 훈련으로 내가 사는 아파트 유리창이 흔들거리고 "쿵웅" "쾅앙" 굉음으로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공포감을 조성했던 소리의 진원이 바로 이 곳임을 확인한다. 아하 바로 이 곳이구나! 국방의 의무에 젊음을 깃털처럼 조국에 바친 그들에게 아낌 없는 마음의 응원도 보내지만, 이 곳이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 올 수 있어 더 많은 사람이 산행할 수 있고, 사랑 받는 대한민국의 산하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느긋하고 만족하기만 한다.
불태산은 크게 세 갈래 등반로가 있다. 여름철이면 광주 시민 또는 장성,담양 군민이 더위를 피해 자주 찾는 한재골 계곡에서 시작하는 등반 길과 한재골을 따라 위쪽으로 15분 정도 도보하면 대산농원 입구에서 시작한 등반길이 있다. 그리고 장성 진원면 동사무소 쪽에서 오르는 등반로이다. 그래서 한재에서 등반을 시작하여 장성 진원면 쪽으로 하산하면 불태산 종주가 되는 것이다. 또는 그 반대로 등반로를 선택할 수 있다. 오늘 등반로 선택에 우리는 갈팡질팡한다. 우리들 몸과 가까이 있게 할 자동차 때문이다. 종주를 하게 되면 다시 그 놈을 되찾으러 가야 한다. 진원면 어느 마을 어귀에 불태산 등반 안내도가 우리 일행을 마중하고 있다. 우리는 세 갈래 등반로가 전혀 아닌 상림터널 위쪽 도로가 공터에 녀석을 맡기고 코끼리 등을 올라 타기로 한다. 이 곳에서 시작하여 대산농원을 종착점으로 종주할 생각이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다시 이 곳으로 돌아와 도로가 밭길에 덩그러니 남겨둔 놈과 접선하기로 한다.
< 끙끙거린 나상희 선생님>
안내판과 이정표가 전혀 없는 이 곳 숲길은 마른 소나무 가지잎과 이름 모른 여러 가지 낙엽, 잔나무 가지로 파삭파삭 부스럭부스럭 청각의 소리와 발을 바닥에 대고 디디면 쿠션 좋은 카페트 길의 촉각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뽀송뽀송한 마사토 지역은 흙 냄새가 그윽한 향기로 후각의 여운이 깊게 남는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낙엽과 잔나무 가지와 흙과 너덩겅을 도드밟고, 지르밟고, 즈려밟고, 내밟아 본다. 우리 모두 발걸음이 가볍고 멋들이진다. 한 쪽 발만으로 도레미파하며 개울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깡충깡충 뛰어 본다. 아이들이 토끼를 흉내내며 뛰놀고 있는 기분이다.
코끼리 다리 부분에서 골반뼈가 있는 두두룩한 자리에 올라갈수록 지금까지 평탄했던 케페트길이 심난해진다. 더부룩하게 쌓인 낙엽들로 등산로가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은 산이라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다. 산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아 둔 리본도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도 우리들 시야 속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애당초부터 이정표가 없는 산이다. 불친절한 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연생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상태의 산이라 여겨진다. 겨울이 아닌 한창 봄 또는 여름이나 가을의 이 곳에 모습은 이름 모를 수많은 야생초, 온갖 열매, 꽃과 곤충들로, 계곡에는 가재며 산천어, 버들치 등의 물고기들이 득실거린 원시림의 세계라 확신한다. 꽃피는 봄이 오면 우리집 애들과 함께 맛 있는 도시락을 배낭에 넣고 카메라를 들고 이 산의 주인공들을 꼭 만나고 싶다.
눈 덮인 산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일을 '러셀'이라고 한다. 이는 미국 사람이 고안한 제설 차량 러셀차에서 유래된 등산 용어이다. 깊은 눈을 헤치고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인간의 때가 보이지 않은 낙엽과 가시덩굴을 헤치며 새로운 길을 만들며 등산로를 찾고 있다. 마치 전쟁터에서 몸을 낮추어 적군을 찾아 헤메는 수색 대원처럼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방을 둘러 본다. 우리는 주저 없이 오던 길로 약간 후퇴하여 적군을 찾기로 한다. 반대 방향인 좌측으로 틀어 길을 만들어 나가기로 한다. 저 만치 온몸을 낙엽과 나뭇가지 속으로 숨기고 있는 적군의 엉덩이를 발견한다. 우리들은 신중한 판단과 재빠른 행동으로 적군의 약점을 찾아 정면 공격으로 능선에 붙기로 한다.
산행에서 길을 잃었을 때 신중한 판단과 재빠른 행동의 실천이 중요하다. 우왕좌왕하여 결론을 내지 못한다면 큰 위험이 바싹바싹 가까이 다가 올 수 있다. 또한 신중한 생각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더욱 큰 위험의 구렁속에서 헤메일 수 있다. 러시아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는 〈햄릿과 돈키호테〉라는 에세이에서 사색과 회의에 몰두하는 우유부단한 사색형 인간 햄릿과, 자신의 이상을 향해 무모하지만 용기 있게 나아가는 행동형 인간 돈키호테로 인간의 대표적 성향을 이분했다. 햄릿의 신중한 사색과 회의, 돈키호테의 헤아림이 없이 어리석고 부질 없지만 굳쎄고 씩씩한 기운으로 전진하는 두 인간형의 장점을 겸비한 인간형은 어떤 인간형일까? 아마 일백여대의 판옥선과 일천여대의 왜선의 대결에서 23전 23승 무패 신화를 창조한 성웅이 아닐까?
<주변 지형 설명하는 차상훈 선생님>
상쾌한 카페트길의 첫걸음과 달리 가파른 경사면에서 흙이 물러 스르르 후퇴한다. 덤불숲과 마른 가시덩굴, 너덜바위지대를 1시간 반 정도 숨을 가쁘고 거칠게 쉬어 드디어 산등성이와 만나니 지구상에서 가장 큰 코끼리 꼬리뼈이다. 이정표와 안내 표지판이 없어 이 봉우리의 이름은 알 수 없다. 꼬리뼈의 봉우리에서 확 트린 조망으로 봄의 예고편을 감상한다. 산봉우리 아래로 보인는 것은 경지 정리가 정연하게 되어 바둑판같은 논밭,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염집 그리고 논밭을 태우는지 아니면 농가에서 점심을 짓는지 흰 연기가 모락모락 아름답게 피어 오른다. 진원면의 이름 모를 저수지는 따뜻한 하늘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불태산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천애지각의 산이 당당하게 우뚝 솟아 있다. 바로 무등산이다. 지금 내 육안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첨단지구 아파트의 모습도 희미하게 보인다. 성능 좋은 망원렌즈 카메라로 이 모습 그대로 담아 두고 싶다.
<불태산에서 바라본 진원면 평야>
이 산의 묘미는 지금부터 시작된 것이다. 천길 낭떠러지 절벽으로 주 능선이 연결되어 있다. 암릉코스와 평범한 흙길 그리고 양쪽으로 깊은 계곡을 갖춘 다양한 산행길이다. 춘천에 있는 삼악산처럼 뾰쪽뾰쪽한 삼각자 꼭지점의 암릉코스는 아니지만 낭떠러지 절벽길이 자주 나타나 산 아래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기가 어지렵다. 이정표가 없기에 우리 육안으로 바투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임에 확신하고 한 발 한 발 내민다. 정상으로 가는 길 도중 도중에 덩치 큰 여러 그루 소나무가 접는 나이프처럼 허리가 굽혀져 있다. 아마 전차부대 포화가 아닌 작년 대설의 버거움을 이기지 못한 것 같아 보기에 딱하여 애타고 갑갑하기만 하다. 또 낭떠러지 절벽 옆 암릉에 매달아 놓은 낡은 로프길을 대여섯 번 끙끙거리며 올라야만 한다. 전체적인 산등성이 등반길은 침엽수가 무성해서 싱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망이 탁 트여 사방이 자유롭게 시야에 들어오지만 곳곳에 절벽이라는 위험지역이 도사리고 있어, 바투 보이는 정상의 고지는 수색 대원들에게 호락호락 내주지 않고 있다. 코끼리 꼬리뼈에서 시작한 등성이길 등반이 한 시간 정도 탄환이 소비되었을 무렵 녀석의 등뼈가 굼틀거린다. 우리가 이 곳에서 쓰러지는가 아니면 두두룩한 녀석의 고지를 허락하는가 사투를 벌인다. 스틱도 부러진 상태의 각개전투로 맞닥뜨리어 서로 치고 받는 싸움에서 녀석이 미동이 없다.
<폭설로 쓰러진 소나무>
드디어 정상의 고지에 입성한 것이다. 나상희 선생님의 무릎 상처 흔적과 著者의 실전 포복으로 인한 왼쪽팔 부상의 치열한 전투의 흔적으로 유혈 입성한 고지이다. 전투에 승리한 대원들에게 보상의 대가는 달콤한 휴식과 배불리 먹는 음식이다. 불태산의 정상은 깊숙한 낭떠러지의 절벽길이 연이어지고 있다. 정상 절벽길에서 본 정취는 한 폭의 그림이다. 영산강 물줄기가 시원하게 보이며 빛고을 전체가 흐릿하게 보인다. 1시간 전 산등성이에서 보았던 하늘금 무등산은 안개로 인하여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가까이 한재골의 저수지가 주위의 푸른 산과 조화를 이루며, 불태산 정상 오른쪽으로는 병풍산 정상의 깃대봉이 늘씬하게 서 있다. 병풍산 아래쪽으로 거대한 피라미드 같은 날렵한 산 삼인산이 우뚝 솟아 있다. 정상 뒷쪽으로는 병장산, 내장산 백양산, 산줄기들이 내가 고교생이었던 70년대 말 80년대 초 어느 여고생의 교복 치맛자락처럼 곱게곱게 겹쳐져 있다. 지형과 지리에 해박한 차상훈 선생님이 이 모든 지형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곳의 바람은 잔잔하다. 아니 따스하다 이미 봄이라는 아군이 겨울이라는 적군을 산 기슭부터 조용하게 소탕하고 있다. 유황과 사포의 마찰열에 의한 성냥개비의 소멸은 검은 재와 흰 연기로 소리없이 고개를 숙이고 시나브로 사라진 것처럼 겨울은 산 끝자락으로부터 인해전술로 서서히 밀려오는 대군에게 조심스럽게 고개 숙이고 있다. 인위적인 것을 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법칙을 순응하듯......
경이로운 자연의 섭리를 정상에서 지켜보며 암호명 코끼리 생포 작전은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머릿속에,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개 속 추억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 대원 앞에 떡국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지금 시각은 아름다운 봄날을 예고한 2006년 01월 25일 14시이다.
<불태산에서 바라본 장성 백양사와 방장산>
<불태산에서 바라본 거대한 피라미드 삼인산>
<정상에서 한 컷>
2006.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