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데펜디엔테(Independiente)와 우라칸(Huraca n)의 경기는 1993년 아르헨티나 리그 시즌 첫 시합이었다. 화려한 불꽃이 일제히 솟아오르는 가운데 선수들이 입장했다. 선수들을 향해 직접 폭죽을 쏘는 사람도 있었다. 인데펜디엔테 스타디움(Independiente stadium)은 규모가 작았고, 팬들은 술에 취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고 소득 없이 무의미한 공방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8분경 인데펜디엔테의 우고 페레스(Hugo Perez)가 35야드 프리킥을 골로 성공시키자 더 많은 폭죽이 솟아올랐다. 잠시 후 우라칸 레프트-해프의 오른발 아웃사이드킥 패스를 연결받은 센터포워드가 인데펜디엔테 골키퍼의 키를 넘기는 로빙슛을 성공시켰다. 정말 멋진 골이었고 규칙에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나, 주심이 골을 득점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도 선수들이 전혀 항의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몇 분 후 이번에는 선심이 어이없는 오프사이드 반칙을 선언하자 선수의 절반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항의를 퍼부었다.
인데펜디엔테가 2대0으로 앞서나가고 있었는데도 팬들이 자기 편 골키퍼 루이스 이슬라스(Luis Islas)에게 이런저런 물건들을 던지는 바람에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몇 분 후 주심이 이슬라스를 다시 위치시키고 경기를 속개했다. 팬들의 이물질 투척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때 우라칸의 크루스(Cruz)가 인데펜디엔테의 기예르모 로페스(Guillermo Lopez)에게 파울을 했다. 아예 내놓고 그의 배를 후려갈긴 것이었다. 난투극이 벌어졌고, 그 결과 크루스와 인데펜디엔테의 모아스(Moas)가 퇴장당했다. 인데펜디엔테가 3대1로 승리했다.
나는 크루스에게 가격당한 로페스에게 시합이 왜 그렇게 폭력으로 치달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라칸 선수들을 형편없는 패배자들이라고 말했다. "전반전에만 위협적인 태클이 다섯 차례나 내게 들어왔습니다. 두 번은 발목을, 세 번은 왼쪽 무릎을 겨냥한 것이었죠. 또, 이 다섯 차례의 태클 중 두 번은 2대0 스코어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후반전에도 두 번이나 더 거친 태클을 당했습니다." 그는 심판이 크루스와 모아스를 퇴장시킬 필요까지는 없었다고도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원에서 아르헨티나 축구 백주년을 기념하는 동상 제막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신문들이 그 행사를 사전에 공지했지만 구경꾼들은 노인 2명과 소녀 2명, 그리고 나 자신과 동행한 2명의 영국인 친구들뿐이었다. 7시가 되자 양복을 차려입은 20~30명가량의 노인들이 아르헨티나축구연맹 건물에서 행사장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오면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매일 만나는데도 포옹하고 키스하는 걸 좋아한다니까요." 소녀 중에 한 명이 얘기해주었다. 천에 싸인 조상(彫像) 앞에서 노인들이 포옹하는 모습을 보고 흥미를 느꼈던지 구경꾼이 세 사람 더 늘었다. 아르헨티나인들은 기념식 치르기를 예사로 한다. 옆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앞에도 나무를 칭송하는 기념 명판이 서 있었다.
잠시 후 보보[bobo, 루트 훌리트(Ruud Gullit)가 처음 사용한 말을 쓰는 것 같았다. 2장을 참조하라]들이 직접 장막을 제거하자 기념조형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 크기의 단순한 금속재질 축구공이 대좌 위에 놓여 있었다. "내 아들이 만들었지!" 한 보보(bobo)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들은 한 20분간 서로 기념촬영을 했다. 나는 소녀에게 저들 중에 과거 유명 선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소녀는 없다고 대답했다.
나이가 지긋한 구경꾼 한 명이 우리를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자네들이 우리에게 1893년에 처음으로 축구를 가르쳐줬지!" 영국이 그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영국에 의한 축구 도입은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있어 사실이지만, 아르헨티나인들은 이 사실을 특히 더 잘 알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스페인어를 사용해서 그렇지 오스트레일리아나 인도 같다는 말이다. 아르헨티나가 1953년에 처음으로 잉글랜드를 3대1로 격파했을 때 한 정치가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철도를 국유화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축구마저 국유화했다!"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하기 오래 전부터 영국은 아르헨티나인들이 가장 이기고 싶어하는 나라였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장군들은 대중의 이런 감정을 바탕으로 손쉽게 전시 동원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분쟁 기간 중에 제작된 한 자동차 스티커를 보면, 1978년 월드컵 대회 마스코트인 가우치토[Gauchito, 가우초(Gaucho)는 남미의 초원지대 팜파스(pampas)에 사는 메스티소 목동을 일컫는다. -ito는 스페인어 지소사(指小詞)]가 가엾은 '영국 사자(British lion)'를 발로 제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1986년 월드컵에서 대다수 아르헨티나인들은 '신의 손'이 넣은 골은 영국놈들이 당연히 받아야할 응보(應報)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식민지적 영국 숭배가 존재한다. 나는 1970년대에 릭먼스워스[Rickmansworth, 런던 외곽 허트퍼드셔주의 한 지역]에서 잠시 살았다는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영국 생활을 추억하면서 여러 해를 보냈다고 한다. 가장 그리운 것은 친절한 사람들과 온화한 날씨였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에게 영국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을까?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 볼 수가 없어요. 다시 가면 결코 여기 돌아와 살 수 없을 거예요."
한때 이곳 아르헨티나에는 수만 명의 영국인이 살고 있었다. 태어나거나 귀화해 영국계 아르헨티나인이 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과거의 모습이 호세-루이스 브라운(Jose -Luis Brown), 그리고 어쩌면 대니얼 킬러(Daniel Killer)와 같은 축구 선수들 이름 속에 남아 있다. 한편 나는 아르헨티노 후니오스(Argentinos Juniors)에서 카를로스 파트리시오 매칼리스터(Carlos Patricio McAllister)라는 이름을 가진 선수도 보았다. 이 빨간 머리의 형편없는 측면 공격수는 에이레인 후손이었다.
영국계 아르헨티나인이 사회적 지위의 한 쪽 끝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쪽 끝에는 에드워드 시대의 영국[Edwardian Britain, 벨 에포크(Belle Epoque, 1880~1914)를 대변하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치세기를 말한다. 경제와 문화의 유례없는 번영기였다]이 스모그가 가득한 남루한 이 대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세련된 클럽은 기수(騎手) 클럽인 자키 클럽(Jockey Club)이다. 플로리다가(街, Calle Florida)에 있는 찻집 이름은 리치먼드(Richmond)다. 반면 잉글레스 클럽(Club Ingle s)에 가면 영국계 아르헨티나인들을 볼 수 있고 그들의 촌스런 억양도 들을 수 있다. 그들은 헐링엄[Hurlingham,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도시] 교외에서 폴로 럭비 크리켓 잔디 테니스(남아메리카 유일의 잔디 코트에서)를 즐긴다.
영국 대사관저는 영국계 아르헨티나인 거주 지역에 있다. 2월도 한창으로 찜통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현관홀은 아주 크고 대기좌석 하나 없는 영국식 방이었다. 나는 영국 외교관 한 명과 함께 15분 동안 거기 서서 기다렸다. 내게서 좀 떨어진 곳에 홀의 유일한 물건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는데 몹시 거슬렸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대사관 방문 예정자 목록이었는데, 마지막 기재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찰튼, 바비와 노르마, 맨체스터(Charlton, Bobby and Norma, Manchester)." 우리는 바비 찰튼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찰튼은 맨체스터시의 올림픽 대회 유치 신청을 홍보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에 와 있었다. 전날 밤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한 별장(country house)에서는 바비 찰튼이 주축이 되어 구성된 팀이 "맨체스터 2000[Manchester 2000, 결국 2000년 올림픽 대회는 시드니에서 열렸다]" T-셔츠를 입고 메넴 대통령이 주장이 되어 이끄는 팀과 시합을 벌였다. 요크셔 방송국(YTV)의 TV 시리즈 위대한 경기 The Greatest Game 을 보면, YTV 제작진이 에세이사(Ezeiza) 공항에서 이스라엘 대통령을 환영하는 메넴 대통령의 모습을 촬영한 화면이 등장한다. 비행기가 도착하자 그가 YTV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축구는 나를 육체적으로 단련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강인한 정신력도 심어주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해서 뛰어보겠다는 꿈을 꾸지는 않았었느냐고 질문을 받는다. "아르헨티나 어린이라면 모두 똑같죠. 나도 어렸을 때 대표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습니다." 대통령이 되고서야 그는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한 자선 경기에서 그가 아르헨티나팀 주장을 맡아 5,5000명 축구팬 앞에 섰던 것이다.
나와 함께 기다리던 그 외교관도 찰튼과 한 편이 되어 메넴 팀과 겨루었다. 그가 즐겁게 그 이야기를 내게 했다. 절대로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대통령은 은퇴한 프로선수들을 몇 명 끌어들였다. "반면에 우리는 몇 년 동안 축구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맥주를 한 잔씩 걸친 오합지졸에 불과했죠!" 나는 기다리는 동안 시합 얘기를 들으면서 팀내 포지션에 따른 역할과 비중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전반전에는 메넴 팀이 찰튼 팀을 완전 유린했다. 그러나, 후반 들어 메넴 팀이 영국팀에 건네준 출중한 선수가 만회골을 넣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대사 업무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고, 영어를 한 마디 못했어요." 그 외교관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점수를 따라잡기 시작하자 메넴은 걱정이 되었던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는 시합을 아주 진지한 그 무엇으로 여기는 듯했습니다." 누가 이겼을까? "그들이 이겼죠. 14대7이었든가요." 선수로서 메넴은 어땠을까? "형편없었죠. 솔직히 말해 예순두 살이나 먹었으니 꼭 그렇게 나빴다고 할 수도 없기는 해요. 그는 한 발짝도 안 움직입니다. 그냥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으면 다른 선수들이 그에게 공을 갖다 바치고 그러면 또 그가 옆 선수에게 다시 엉성한 패스를 연결하는 식이죠."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찰튼은 시내에서 인터뷰를 하고 메넴을 다시 접견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외교관이 불평을 쏟아냈다. "미친 짓이에요. 외교부 비서 더글라스 허드(Douglas Hurd)가 벌써 몇 주 전에 도착해 메넴과 40분이나 조율을 했어요. 그런데 바비 찰튼이 나타나니까, 축구 시합을 하고, 이후 만찬, 그리고 또 오늘 아침의 면담까지 새 일정이 추가된 겁니다. 이걸 보면 이 도시에서 일 처리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당신도 알 겁니다." 영국은 찰튼이나 가자(Gazza)를 외교부 비서로 임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축구 기자들도 찰튼을 접견한 대통령만큼이나 열심이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경기가 벌어진 다음날 찰튼은 기자 회견을 가졌다. 거기서 그는 선수들이 심판에게 항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비난했다. "나는 마라도나가 태어나기 전부터 축구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항의 때문에 심판이 판정을 번복하는 일은 본 적이 없습니다." 신문들은 그의 비난은 무시해버렸지만 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선수로 찰튼이 지명한 인물에는 관심을 보였다. 그는 디 스테파노가 마라도나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 무의미한 논쟁이었다.
마침내 찰튼이 도착했다. 그는 바쁜 일정으로 몹시 지쳐있었지만 베란다에 나가 잡담할 기운은 남아 있었다. 그가 스포츠 재킷과 운동 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터벅터벅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작고 단단한 체구로 그렇게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았다. 급사 한 명이 우리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먼저 찰튼에게 맨체스터시의 올림픽 대회 유치 활동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지치고 넌더리마저 났던지 말을 제대로 못했다. 몇 마디 짧은 구절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뿐이다. "내 집은 40년 동안 여름에는 날씨가 아주 좋죠 공항 철도의 중심지, 컴퓨터."
내가 메넴에 관해 묻자 그는 생기가 좀 도는 듯했다. "그는 아주 영리한 축구 선수라고 할 수 있어요. 실력이 안 되는 선수와 게임을 해보면 아시겠지만 그런 선수들은 능력 밖의 무모한 플레이를 많이 시도하죠. 메넴은 그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는 공을 보유하는 일에 결코 집착하지 않았어요. 그는 필요하면 공을 다시 패스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가 축구 외에도 수행해야 할 임무가 아주 많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말이 외교적 언사가 아니라고 부언했다. 나도 그의 말을 믿는다. 찰튼은 축구를 무언가 심오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가 축구를 애호하는 다른 국가 원수들도 만나보았을까?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 원수들이 축구를 사랑합니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축구야말로 이들 국가에서 유일하게 지속되는 스포츠죠. 가나 대통령도 좋아했고, 케냐 대통령 북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국가 원수들 그리고 교황도 ." 내가 끼어들었다. "형님 되시는 잭(Jack)이 교황을 친견하셨다죠. 그리고 생각보다 교황의 키가 작았다고 말했었죠." 찰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그렇다고 했다. 내가 의표를 찔렀던 것이다.
나는 인종분리정책 시절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가졌던 경기에 관해서도 물었다. "소웨토에서 카이저 치프(Kaizer Chiefs)와 시합을 했죠. 그렇게 화창한 날씨는 내 평생 처음이었어요. 그들이 우리를 2대1로 눌렀죠. 사실 막상막하의 접전이었고 무승부를 이룰 수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굉장한 환영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러니까 그날 소웨토에는 백인이 한 20명 정도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아주 반가워했습니다. 나중에는 우리를 무등 태워서 자기들 동네로 유괴하려고까지 했었답니다. 한참이나 승강이를 벌이고 나서야 겨우 버스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죠."
그와 메넴이 그날 아침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 걸까? "주로 스포츠 얘기였죠. 그런데 그가 내게 묻더군요. 마라도나와 디 스테파노 중에서 누가 더 우수한 선수인지를요." 신께서 보신다면 대통령이라도 한 명의 축구팬에 불과할 뿐이다. 찰튼이 디 스테파노를 꼽았을까? "그의 두뇌 때문이죠. 내가 본 중에서 그가 가장 명석한 선수였습니다." 메넴은 영국 스포츠 상황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뽐냈고, 찰튼도 그를 맨체스터로 초청했다. "골프도 치고 다른 것들도 해보도록 하기 위해서죠. 시간이 아주 빨리 지나갔습니다. 접견에 할애된 시간을 넘긴 것 같더라구요." 화이트홀[Whitehall, 아르헨티나 대통령궁]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몹시 샘을 냈던 것 같다. 메넴은 축구팬이지만 동시에 정치인이기도 하다. 스포츠에 있어서 그는 마오쩌뚱 주석의 지침을 따르고 있다.
1966년 어느날, 신화통신은 마오 주석이 "7월 16일 9마일에 이르는 강폭의 양쯔강을 수영으로 횡단하고도 전혀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너끈했다"고 보도했다. 이 정치쇼를 통해 마오는 자신이 반신불수가 되었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항간의 소문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또, 작성된 기록을 보면 그가 75세의 나이로 같은 거리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기록을 깬 것은 물론 마오는 중국 인민을 돕기까지 했다. 통신사의 보도에 따르면, "마오 주석께서는 물결을 헤치고 나가면서 주위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시기도 했으며, 옆에서 수영하던 젊은 여성이 한 가지 영법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아시고서는 그 여성에게 배영을 가르쳐주시기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스포츠맨의 모습을 보여준 지배자의 사례다. 지배자들이 대중 앞에서 스포츠 행위를 하는 모습을 비추는 것은 보통은 다른 이유에서다. 그들이 대중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게 중요한 목표인 것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에 빌 클린턴(Bill Clinton)과 앨 고어(Al Gore)는 자신들이 미식축구를 하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었다. 브라질에서는 정치가들이 유명 축구 클럽의 셔츠를 입고 선거 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 수상 존 메이저(John Major)도 스탬퍼드 브리지[Stamford Bridge, 첼시의 홈구장]에서 경기를 관전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떤 주장에 의하면 그가 단지 첼시(Chelsea)를 응원하는 것으로 위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사실은 아스날(Arsenal) 팬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는 아스날을 응원해야 맞다. 메이저는 하층 중간계급 출신이고, 허트퍼드셔[Hertfordshire, 잉글랜드 남동부의 주]에 살며, 따분하고 활기 없는 상황을 즐기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정치인도 아스날을 응원하는 것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 영국에서는 응원하는 축구 클럽이 있는 사람을 변화를 원하는 긍정적인 젊은 세대로 간주한다. 단 그는 아스날을 응원해서는 안 된다. 이 이론에 따라 메이저의 조언자들이 그에게 다른 클럽을 찾아보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첼시야말로 그에게는 좋고도 분명한 선택이었다. 데이빗 멜러[David Mellor, 토리당 정치인]가 이미 팬으로 있었고(첼시 유니폼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던 때를 상기해보라), 그는 메이저를 시합에 기꺼이 데려갈 용의가 있었던 것이다.
브리지에 내비친 메이저의 모습이 안 한 것보다는 그를 더 인기 있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스처가 1992년 선거 승리를 그에게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영국 유권자들은 다른 이슈, 말하자면 소득세 문제 따위를 기준으로 투표를 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 가면 축구가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비델라 장군이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의 정치 능력 부재를 드러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정치인들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해 민중의 마초로 군림한다. 이런 전통에 속한 유명한 인물로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또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다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낸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 n)을 들 수 있다. 페론주의(Peronism)라는 정치 운동을 주도한 인물 말이다.
거구인데다 튼튼한 몸집의 페론은 군대에서 펜싱 챔피언이었으며, 유명한 복싱 선수에다 스키도 즐기는 사람이었다. 대통령이 된 페론은 자유를 억압하고 동시에 빈민을 돕는 정책을 실시했다. 사실 페론주의는 일련의 정치 계획, 다시 말해 이즘(-ism)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정치 스타일일 뿐이다. 극좌파 몬토네로도 새처주의자 메넴도 자기들을 페론주의자라고 불렀다. 페론주의는 그 초점이 지도자에게 있는 대중 영합적인 남성 중심의 정치 스타일이다. 페론은 그저 지도자(El Li der)로 유명했다. 바이에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페론은 "축구를 악용한 선동 정치가"였으며, 직접 경기장을 찾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특별히 응원하는 팀이라는 게 없었다. 스스로를 전국민의 지도자로 여긴 그는 모든 축구팀을 똑같이 응원한다고 말했다.
메넴은 우익 페론주의자다. 그도 페론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모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바비 찰튼 접견 일정은 전율 그 자체였을 것이다. 동시에 그 행사는 그에게 안정된 정치 감각도 부여해주었다. 내가 잉글레스 클럽(물론 이 클럽이 대표성이 없는 집단인 것은 분명하다) 문지기에게 메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들떠서 대답했다. "대통령께서는 테니스도 하시고, 축구도 하시죠." 63세나 된 메넴은 최근에 복싱과 자동차 경주를 그만두어야 했다. "메넴은 사바티니[Sabatini, 테니스 선수]나 유명한 세계 복싱 챔피언을 접견합니다." 페레스 에스키벨이 푸념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을 접견할 뿐만 아니라 함께 식사도 하고 즐깁니다. 반면 나는 메넴의 접견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페론과는 달리 메넴에게는 응원하는 팀이 있다. 리버 플레이트[River Plate, 아르헨티나인들은 '레베르(Reeber)'라고 부른다]는 소위 부유한 자들의 클럽으로, 그에게는 위험한 선택이다. 대중은 보카 후니오스(Boca Juniors)를 응원한다. 전국민의 50% 이상이 보카 팬이라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말한다. 한편 메노티는 그 클럽 팬들은 "반쯤은 범죄자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보카 팬들 역시 그를 싫어한다. (내가 원고를 고치고 있는 현재 메노티가 보카의 감독으로 막 다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리버에 대한 메넴의 공개적 지지는 그의 계급 기원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라고 바이에르도 인정하고 있다. 사실 바이에르는 "그것이 메넴이 선동 정치가이기를 그만 둔 유일한 사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메넴이 딸에게는 보카의 팬임을 천명할 것을 지시했다고 바이에르는 전하기도 했다. 정말 모두가 그녀는 보카를 응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축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사회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마르셀로 하우스먼(Marcelo Houseman)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요하네스버그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대저택에, 자기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가정부까지 두고 있다.
축구 선수로서 마르셀로는 짐가방 하나만을 가지고 전세계를 떠돌아다닌 풍운아였다. 이 점에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난한 성장기를 보낸 후 그는 아우구스토 팔라시오스(Augusto Palacios)와 함께 전세계를 여행했다. 마르셀로는 평범한 선수였지만 그의 형 레네(Rene )는 특별했다. 레네 '통뼈' 하우스먼(Rene 'Hueso' Houseman)은 큼직한 콧수염에다 발목까지만 양말을 신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아르헨티나의 측면 공격수다. 그는 197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후보 선수로 출전해 경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현재 두 형제는 축구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다. 그들은 근사한 이름의 월드 스포츠 인터내셔날(World Sports International)이란 회사를 운영하며, 남아메리카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축구 선수들을 유럽 클럽에 팔고 있다.
마르셀로는 자신의 대저택 여기저기로 나를 안내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보물은 카를로스 메넴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큰 거실에 액자를 해 걸어두고 있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한 파티에서 메넴의 아들과 만났고, 이를 통해 메넴가(家)와 친해질 수 있었다. 요즘 그는 메넴의 딸과 함께 경기장을 찾곤 한다.
그런데 마르셀로는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요하네스버그에 있을 때, 한 달 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갈 거라고 그에게 말했더니 그때쯤이면 자기도 아르헨티나에 가 있을 거라며 한 번 만나자고 했다. 그가 내게 해준 말이 기억난다. "아르헨티나에 가면 도둑맞지 않는 물건이 없죠. 하지만 우리가 다 돌려줄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문제도 아니죠. 도둑놈들을 모두 아니까요. 우린 그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도착했을 때 그가 여전히 남아프리카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오려고 했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가 가난하고 불우한 성장기를 거쳤다는 게 중요하다. 가난한 소년이 대부호인 메넴가 사람을 정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인으로 취직하는 것뿐이다. 마르셀로는 축구 덕택에 메넴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도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가 말했다. "축구 덕택에 나는 정치인들 백만장자들 대중 가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믹 재거[Mick Jagger, 가수]도 만났습니다. 라드 스튜어트[Rod Stewart, 가수]가 월드컵을 맞아 아르헨티나에 왔을 때는 내가 직접 그를 안내하기도 했습니다."
마르셀로가 팔라시오스의 메르세데스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시속 100마일의 속도로 다른 차들을 모두 추월해버렸다. 나는 그가 이룩한 부에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가 진실을 말해주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우리가 아르헨티나 정부와 많은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메넴 대통령이 1989년 남아프리카를 방문한 이후로 우리는 아주 잘 해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아르헨티나와 같은 나라--그리고 사실은 대부분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성공하는 방법은 정치인이나 대기업가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친구가 되는 방법에는 직접 정치인이나 대기업가가 되기, 아니면 그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다른 부류의 사람 예를 들어 위대한 축구 선수가 되기, 그도 아니라면 위대한 축구 선수의 형제라도 되기가 있겠다. 내가 이 말을 꺼내자 바이에르도 수긍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메넴의 친인척 경제라는 것이죠."
메넴과 같은 후원자를 만나면서 유망한 축구 스타들은 이제 사회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일이 없어졌다. 게다가 보너스까지 뒤따른다. 내가 아르헨티나를 떠나던 날 엑토르 '새끼곰' 베이라(Hector 'Bambino' Veira)라는 이름의 한 남성이 얽힌 작은 스캔들이 터졌다. 그는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어 있었는데, 갑작기 기소가 취하되고 석방되었던 것이다. 베이라가 리버 플레이트 감독을 지냈고 과거 산 로렌소(San Lorenzo)의 유명 선수였다는 게 알려지면서 메넴이 최고 법원 판사들에게 사건을 다시 심리해줄 것을 요구했다. 대통령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그와 함께 우리는 모든 것을 쟁취했습니다."
아밀카르 로메로(Ami lcar Romero)-- 경기장에서 죽는다는 것 Muerte en la Cancha 도 그의 저술이다--는 아르헨티나 축구계에 만연한 살인 사건 전문가이다. 작은 키에 쾌활한 이 남자는 그가 다루는 험악한 주제와는 정말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로메로는 나와의 약속에 딸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의 딸이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가 아르헨티나 축구계의 폭력적 현실을 내게 들려주었다.
아르헨티나에는 두 종류의 축구 범죄가 있다고 한다. "첫째로, 이건 정말 굉장한 볼거리이기도 한데, 일요일마다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집단 패싸움이죠. 깃발이 난무하고, 깡패 집단도 동원되고, 또 칼도 등장하죠." 범죄의 두 번째 유형은 아르헨티나에 고유한 것으로 주중에 발생한다. 클럽 관리자들이 지시하고 폭력단이 실행에 옮기는 폭력과 갈취가 그것이다. 이 두 번째 유형의 희생자들은 대개가 선수들이다.
클럽 관리자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면 폭력단(barras bravas)이 돈을 받고 이 문제를 해결해준다. 클럽 대표는 상대팀 골키퍼가 승부를 포기하기를 바라기도 하고, 자기팀 감독을 사임시켜야겠거나, 유럽 클럽들의 유혹을 받는 간판 선수를 팀에 잔류시키고 싶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단이 동원되고 선수는 공갈 협박을 받는다. 사태가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로메로가 세 요소를 열거했다. "폭력과 정보, 그리고 돈이죠. 폭력단에게는 폭력과 정보가 있습니다. 돈을 쥐고 있는 건 클럽 관리자들이구요."
폭력단은 일종의 아르헨티나판 KGB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선수들의 삶을 통제하는 것이다. 폭력과 갈취는 일상사다. 그들은 어떤 선수가 마약을 하는지 알고 있으며 심지어 직접 마약을 공급하기도 한다. 그들은 선수들의 여자도 파악하고 있다. 로메로는 인상된 재계약을 원했던, 산 로렌소의 한 선수 얘기를 들려주었다.
클럽은 액수가 너무 많다고 느꼈던지 이 건을 폭력단에 의뢰했다. 그 선수에게는 여자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가 술집 여자들과 놀아났던 모양이다. 폭력단이 이 사실을 여자친구에게 알렸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산 로렌소는 그와의 어떤 계약도 거부해버렸다. "계약 조건과 몸값에 대해 입씨름하지 말라"는 것이 다른 선수들에게 보내는 클럽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폭력단은 때때로 경기장 내에서 선수를 위협하기도 한다. 평범한 관객으로 가장해 골문 뒤에 서 있다가 지목한 선수가 공을 잡으면 호각을 불고 경적을 울리며 집중력을 떨어뜨려 플레이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는 혹사당해 몸값까지 떨어뜨릴 게 뻔한 새 계약서에 서명해야 하거나, 클럽이 이미 충분히 이용해 먹은 퇴물 선수라면 클럽을 떠나야 할 처지에 있는 게 보통이다. 아르헨티나에서 경기 중에 등장하는 구호는 실제 경기 내용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훌리간이 필요할 경우 많은 클럽들이 원정경기일 경우는 직접 실어 나르고 홈경기일 경우는 공짜 표를 나누어준다. 폭력단이 이 표를 판매하는 것이다. 그들은 출입구로 쇄도해 난장판을 만들며 경기장으로 들어간다. 경기장 안전요원과 입장 통제원은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만다.
이 깡패 집단은 폭력을 동원해 선수들을 직접 위협하기도 한다. 또 밉보인 선수들을 그냥 흠씬 두들겨패는 일도 다반사다. 내가 아르헨티나에 오기 며칠 전에 1978년 월드컵 팀 주장이자 현 리버 플레이트 감독인 다니엘 파사레야(Daniel Passarella)가 마르델플라타[Mar del Plata, 아르헨티나 중동부에 있는 해안 도시]에서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리버 경영진 내에 존재하는 복잡한 갈등, 곧 친(親)파사레야파와 반(反)파사레야파 사이의 암투가 그 원인이었다고 한다. "술집에서 벌어지는 전쟁(guerre de boutique)을 전체 사업의 일부로 생각하는 겁니다." 로메로가 설명했다.
이런 일이 항상 일어난다. 그런데 파사레야가 전례를 깨고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폭행에 가담한 훌리간 두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판사가 그들의 석방을 결정했다. "그러나," 한 기자가 내게 전해준 것처럼 "그들은 마르델플라타에 강직한 판사가 한 명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만 했다. 이 판사가 그들의 체포를 다시 명령했던 것이다." 청부 폭력배를 동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마르델플라타에 그들이 상주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들은 체포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경찰은 폭력단을 좀처럼 건드리지 않으며, 일부 집단은 경찰이 직접 관리하기까지 하는 게 실상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보카 후니오스가 경기 막판에 페널티킥을 얻자, 다름 아닌 경찰이 상대팀 팬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하도록 직접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1부리그의 한 클럽 대표는 선수와 계약을 하는 방에 경관들을 불러들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선수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인뿐이라는 걸 곧 알아차립니다." 로메로가 씩 웃으며 말했다. 클럽의 셔츠를 입고 폭력단 한가운데 서서 클럽 깃발을 흔들고 있는 시 경찰국장의 사진은 유명하다. "리버풀팀 셔츠를 입은 경관처럼 말이죠!" 로메로가 말했다.
폭력단은 클럽 관리자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직접 수익 사업을 하기도 한다. "이 자들에게 돈을 상납하지 않는 축구 선수는 아르헨티나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로메로의 말이다. "마라도나가 모든 면에서 단연 선두죠. 그는 세계적 선수고 그래서 상납 금액도 제일 많습니다. 메히코 월드컵이 끝나고 그는 그들에게 3,0000달러 수표를 써줬습니다. 그가 페루 항공(Air Peru)을 이용해 몰래 도망친 게 그들에게 거슬렸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거였죠. 선수들에게 암흑가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자 고역인 것입니다."
이 패거리는 유용하기도 하다. 폭력단은 쓰임새가 아주 많아서 축구 이외의 다른 분야, 예를 들면 정치인들에게 봉사하기도 한다. 한 유명한
의회 의원이 보카 후니오스 폭력단을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패거리도 비전속으로 다른 일을 맡아 처리한다. 어떤 정치인이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면 폭력단이 투입돼 시위대의 혼란을 야기시킨다. 그리고는 "시위대가 한 짓을 보세요" 하는 식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심지어는 폭력단에 의해 암살이 자행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의 제도화된 폭력은 축구에서 사회의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죠." 로메로의 말이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나라의 부유한 축구 클럽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대규모 축구 클럽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ICIs[임피리얼케미컬인더스트리스, 영국의 거대 화학공업회사]나 포드(Fords)와 맞먹는다. 우크라이나의 디나모 키예프(Dynamo Kiev) 마피아가 후진국 명문 축구 클럽이 사악하게 변질된 또다른 예를 보여준다[이 점에 관해서는 6장을 보라]. 오스발도 아르딜레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리버 플레이트 구단주가 웬만한 지방 지사보다 더 유력하다."
로메로가 힘주어 말했다. "올해로 난 50살입니다. 그러니까 1943년, 쿠데타가 일어난 해에 태어난 거죠. 아르헨티나의 축구 제도가, 우리가 가졌던 위원회들(juntas)보다도 더 내 삶에서 끊임없이 정치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정치는 가버리지만, 축구는 남습니다.'" 그가 한 아르헨티나 현인의 말을 인용했다. "축구는 무장한 군대, 그리고 교회 제도만큼이나 영원할 겁니다."
축구는 권력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대규모 축구 클럽들은 수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이 회원들이 매일 온갖 종류의 활동을 위해 클럽을 찾는다. 예를 들면 클럽들은 유치원과 초 중등학교를 운영하며, 여기에는 늘 긴 대기자 목록이 있다. 리버 플레이트는 대학까지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 나는 옥스퍼드 유나이티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 United)을 상상해보았다. "레베르 대학(University of Reeber)이라!" 로메로가 코웃음을 쳤다. "국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축구가 국가 내에 존재하는 또다른 국가란 말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그 축구 국가는 다루기도 더 좋고 더 노골적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민주주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할 것이다.
전쟁 상황실은 소란스러웠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는데 그 틈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를 질주하는 낡은 고물차들의 소음이 밀려와 산체스(Sanchez) 장군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 기간 중에도 창문이 닫혀 있지 않아 장군들이 서로의 얘기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나는 아르헨티나 최고 군사 기관인 아르헨티나방위군최고위원회(Supreme Council of the Argentine Armed Forces) 건물에 와 있었다. 전형적인 남아메리카식 건물이었다. 콧수염을 기른 군인들이 기관총을 들고 경비하던 이 최고위원회 건물은 종려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바로 위에는 커다란 광고판이 설치되어 있다. 나는 내 영국 여권을 접수계에 제출했다.
부관이 최고위원회 위원인 산체스에게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는 긴장된 속에서 악수를 나누었다. 산체스는 그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최근에 그에게서 자신과 최고위원회를 내 책에서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그의 요구의 반은 들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산체스는 큰 키에 비쩍 마르기까지 한 인물로 군인 콧수염--아르헨티나에서는 놀라운 모습이 전혀 아니다--을 하고 있어 에노크 포웰[Enoch Powell, 토리당 정치인. 흑인 이민자 문제 및 인종 통합을 공개적으로 반대해 말썽을 일으켰다]과도 닮았다. 그는 많은 준비를 하고 나를 맞이했다. 그는 파일을 두 개 가지고 나왔는데, 하나는 축구에 관해 그가 생각날 때마다 가끔 쓴 글을 모은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축구 전술을 다룬 그의 저술이었다. 1951년에 완성된 이 원고는 출판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파일 형태로 보관해 온, 이제는 바래서 누런 종이에 타자로 친 원고가 유일한 원본이었던 셈이다. 그는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는 이 먼지 싸인 파일에 담긴 아이디어를 40년 동안이나 다각적으로 검토해 왔을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듣고자 하는 누군가가 와 있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나와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자기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최강의 팀(Superteam)'에 관해 내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 팀은 토탈 사커를 구사합니다. 네덜란드가 토탈 사커를 추구했다는 걸 아시죠. 요한 크레위프(Johan Cruyff) 말입니다. 공격을 할 때는 전원이 공격에 가담하고 수비시에는 전원이 수비를 하는 거죠. 모두 함께 하기 때문에 임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게 더 쉬워지는 겁니다." 그는 자신이 구상한 최강의 팀이 4-4-2가 아니라 4-3-3 대형을 사용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고안한 시스템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고도 말했다. 자신의 전술 견해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무튼 그는 지금 권력자가 되어 축구와는 먼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아마추어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를 듣는 걸 좋아하는 축구 감독은 없다. 예를 들어 브라이언 클루프(Brian Clough)는 사업 얘기나 하는 클럽 대표를 결코 참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전장 경험이 풍부한 장군의 견해를 단순히 아마추어적이라고 어떤 감독이 그냥 무시해버릴 수 있겠는가? 아르헨티나에서 그런 식으로 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까? 나는 아르헨티나 감독들과 전술 토론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산체스에게 물었다. 그는 그런 적은 없다고 하면서 1982년 메노티에게 자신이 써보낸 편지의 사본을 파일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스페인 월드컵 대회를 맞아 장군은 이렇게 적고 있었다. "축구는 한 국가를 정신적으로 지지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게 바로 축구의 진정한 가치죠. 우리는 당신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처음부터 대화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산체스 장군은 전술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고, 나는 축구와 정치 축구와 민족의 문화 축구와 군사 전략에 관해 얘기하고자 했다. "만약 우리 팀은 이 작은 종이 조각 위에 집결하는데 상대팀은 저 큼직한 파일처럼 오와 열을 벌려 산개한다면 나는 결정적 지역에서 수적 우위를 점하게 될 겁니다." 산체스가 손짓을 섞어가며 말했다. "당신은 소규모의 잘 조직된 신속하게 전진하는 타격 부대가 필요할 겁니다." 축구에 관한 그의 생각이 다소 군사적으로 들린다고 말했더니, "천만에요. 전혀 군사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이렇게 덧붙였다. "전쟁의 원리는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죠." 나는 그가 사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가 군사 전략을 자신의 축구 이론에 적용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축구 이론을 군사 전략에 적용했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던 것이다. 전세계의 노(老)대가들께서 자신의 지도교범에서 설익은 지식을 상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설익은 전술 지침을 실제 전장에 적용할지도 모르는 군인이 내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소름이 끼쳤다.
나는 장군께서 그토록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축구에는 민족의 저력이 담겨 있습니다. 럭비도 단체 운동이긴 하지만 대중에 대한 침투력은 축구만 못 하죠. 축구는 아르헨티나 국민이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모든 정열을 다 쏟아부으며 미식축구를 좋아하듯이 말입니다." 이 말을 들어보면 그가 미국에 대해 불완전한 이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미식축구 경기에서 어떤 뛰어난 기술이나 흥미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야만적인 스포츠로 보일 따름이죠."
한 나라가 위대한 축구팀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을까? "국민 정서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르헨티나 얘기는 그만하겠습니다. 아프리카 민족을 보세요. 세계무대에 이렇다할 문화를 선보이지 못하는 민족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엔시소 장군의 말을 인용했다. "아르헨티나는 양질의 육류와 수준급의 축구,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포뮬러 1 레이서들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폴로와 축구가 특히 더 유명하죠." "우리 아르헨티나인들은 단지 축구만으로 거론되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산체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르헨티나는 고유의 독자적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단지 축구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는 용기와 근대성, 과학기술과 의료 혜택을 꼽았다. 우리는 논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산체스 장군이 영국의 선술집에 들어가 아무 손님이나 붙들고 '아르헨티나'와 제휴하자고 말한다면 그들이 '디에고 마라도나'를 얘기했으면 했지 '의료 서비스' 제휴를 하자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산체스 역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포클랜드 전쟁 얘기를 꺼냈다. 1978년 월드컵 당시의 전국민적 열정이 말비나스 전쟁기의 애국적 열정과 아주 흡사했다는 엔시소 장군의 견해에 산체스 장군이 동의했을까? 그는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나는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고서야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도 동의하기는 했지만 사태를 다소나마 다르게 보는 듯했다. 그 문제는 그가 전에는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였다. 산체스 장군은 정치 문화에는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게임 그 자체보다는 사회적 측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군요?" 그는 기분이 상한 듯했다.
대화가 잦아들었다. 산체스가 건물 내부를 간단히 안내해주었다. 수 세기 전에 스페인 상인이 지은 건물이라고 그가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주위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리하여 마침 둘러보던 방에서 전화벨 소리가 나자 장군이 직접 전화를 받아야 했다. 정문에서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당신의 질문에 충분히 답변하지 못한 것 같아 유감입니다. 당신이 잘 정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