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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세 전 고신대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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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터져 창원으로 귀향 / 방위군이 일방적으로 교회 들이닥쳤으나 하나님 도움으로 곧 철수
고려신학교 졸업반에 재학하던 1950년 6월25일 전쟁이 일어나 시무하던 경남 창원군 대산면 일동교회로 돌아갔다.전쟁이 심해지자 교
회 청년들은 지원 또는 징집돼 가고 교회에는 기도의 비상이 걸렸다.
미군의 폭격으로 창녕과 남지 쪽이 불탈때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을 연상하며 말세라는 생각이 들었다.어느 한여름 밤,낙동강 수산
나룻가에서 총성이 들려와 잠을 깼다.후에 들으니 진영 한얼중학교 교장 강승갑목사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진영경찰지서장의 지휘로
재판없이 총살당한 것이었다.강목사는 분명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희생을 당한 것이다.무법천지였다.정말 무시무시했
다.
그런 와중의 어느 토요일 밤.교회 사택에서 자고 있는데 방위군 대위가 부하와 함께 와서 “군 작정상 필요하니 예배당을 비워달라”
고 요구했다.예배당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어서 곤란하다고 말했으나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군인들은 가버렸다.
주일 오전 예배를 마치고 여전도회 회의를 하고 있는데 방위군이 트럭에 짐을 가득 싣고 교회로 들이닥쳤다.그들은 군화를 신고 예배
당으로 들어와 기물을 밖으로 들어내고 부대본부로 만들었다.설명이나 항의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군 정보기관장과 방위부대장을 만나 ‘3인 담판회의’를 가졌다.우리교회 사택을 비워 줄테니 우리사택과 이웃교
회 사택을 쓰고 예배당을 비워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내 제의를 수락했다.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몰랐다.총각 전도사인 나는 책과 가재도구를 예배당 준비실로 옮기고 금식
기도를 시작했다.몇날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당면한 문제와 국가의 장래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오래가지 않아 방위군이 사택에서 철수하고 인천상륙으로 전세가 호전돼 더 큰 어려움은 없었다.어려울 때 기도했더니 ‘새벽에 도우
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것이다.
서문로교회 목사로 부임해 동분서주. 그리고 해리스박사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미국 유학 떠나. 1951년 8월26일 대구 서문로교회가 이 지역 고신교단의 첫 교회로 문을 열었다.이 교회에서 나를 교역자로 초빙했다.당시 25세의 총 각전도사였던 나는 어린 나이에 서둘러 목사가 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교단 지도자들이 선교전략상 목사가 되어서 대구에 가야한다며 안수받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해서 거절하지 못했다.늦게나마 시험준비를 해 경남(법통)노회에서 9월7일 목사안수를 받고,그달 12일 서문로교회에 부임했다. 지역 최초의 고신교회였고,전쟁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교회문을 연지 얼마 되지않아 주일예배에 청장년만 4백여명이 참석했다.당회에 는 장로 네사람이 봉사하였고 남녀 전도사들이 16구로 나누어진 구역들을 돌보며 전도에 총력을 기울였다. 나는 주일과 수요일 예배,새벽기도회 인도뿐만 아니라 대구 고려고등성경학교까지 관리하며,지방에서 우후죽순같이 일어나는 고신교 회들을 돌보는 일에 동분서주해야 했다.당시 외국 유학의 꿈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길이 점차 막혀갔다. 어려움 중에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허락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됐으며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유학의 길도 열어주셨다.1953년 여름 미국 훼이트신학교 교수 해리스박사가 대구를 방문해 박윤선 교장과 함께 주일에 서문로교회에서 설교했다.그때 미국유학을 타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학의 길이 열렸다. 한국전쟁으로 여의도 비행장이 파괴되어 국내 유일의 국제공항인 부산 수영공항에서 꿈에 그리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아내와 14개 월 된 딸을 처가에 맡겨놓고 홀로 미국으로 향했다.1954년 10월 초였다.첫 외국여행이라 어설픈 게 많았다.필라델피아에 도착하니 이 미 학기가 시작되어 있었다.한국학생이,그것도 지각한 처지여서 미국 학생들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미국친구들이 주말에 놀러가도 나는 공부에만 전념했다
고통으로 삶의 희망 잃었으나 성경말씀으로 위안 얻어.해리스박사의 지도에 따라 헬라어와 히브리어가 들어있는 과목에 주력했더니 그 분야에서는 실력을 인정받게 됐다.한국 목사의 습관을 따라 미국에 가서도 주일아침은 금식하고 미국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또 주일 오후 3시에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한국학생들과 예배를 드린 뒤 한국학생들을 심방했다.당시 필라델피아에는 한국교회가 없 어 우리 모임이 유일한 것이었다.미국으로 떠난 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아들을 허락하셨다.유학생활이 힘들 때마다 아들 사진을 보며 위로를 받고 용기를 냈다. 그러나 1955년 여름방학 동안 사경회장에서 일을 하고 학교에 돌아와서 아내의 편지를 받고 방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생후 9개월 된 아들이 하나님 앞으로 먼저 가버렸기 때문이었다.도서관 뒤쪽에 가서 식음을 전폐하고 엎드려 있으니 친구들과 해리스박사가 와서 위 로해 주었다.그러나 나의 슬픔과 괴로움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공부가 인생의 전부일까’ 당시의 사정으로 전화 한번 못하고 가족을 떠나있는 나 자신이 너무 왜소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그런데 고린도후서 1장3절의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말에 새로운 빛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모든 위로에서 빠질 위로는 없으니 나의 슬픔도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는 것을 체험했다.그 후에 나는 자녀를 잃어버린 가 정에서 이 말씀으로 위로하곤 했다. 7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할 때 여러번 중도에 돌아올 뻔 했다.홍반식목사와 이근삼목사,그리고 나는 1946년 고려신학교 개교시 같이 입학해 같이 졸업하고 1954년 같이 유학길에 올랐다.모교에서는 장래 교수요원으로 생각하여 기도로 후원해 주었다. 그런데 고려신학교 박윤선교장이 학교를 떠나자 이사회에서는 우리 세 사람이 귀국해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했다.그러나 도미한지 3년 밖에 되지않아 자격이 안되니 더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해 계속 공부를 했다.
후원자와 가족 도움으로 마침내 신학교 졸업. 성지순례하면서 견문 넓히고 신앙동지들과 교류. 카바난트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박사과정에 진학해야 하는데 어느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지,그리고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학생처장이 나를 찾아왔다. “열심히 공부하게.자네 후원자가 나타났어” 하면서 수표 한장을 건네주었다.수표를 펴보고 깜짝 놀랐다.여름방학 내내 일해도 벌기 힘든 큰 액수였다. 장학금을 준 분이 누구냐고 물어도 학생처장은 “본인이 알리기를 원치 않으니 ‘알지 못하는 친구’에게 감사편지를 쓰면 전달하겠 다”고 말했다.나는 이런 숨은 성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공부를 마치게 된 것에 대해 늘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61년 5월31일 마침내 신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다.가족들이 잘 참아주었고 많은 성도들이 기도로 후원해 준 덕분이었다.특히 미국 의 여러 교회와 기관,기독인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서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귀국하는 중에 유럽과 성지를 돌아보기로 마음먹고 7월20일 저녁 뉴욕공항을 떠났다.가족을 만난다는 설렘도 있었으나 그동안 정든 미국을 떠난다는 생각이 들자 서운했다. 유럽를 여행하면서 도서관을 찾아 견문을 넓히고 많은 사람을 만나 얘기도 나누었다.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모인 개혁주의 신행협 회 세계대회에도 참가했다.평소 책을 통해 알았던 저명 인사들과 교제하며 개회예배 때 설교하는 영광도 누렸다. 스위스 로잔 부근의 라브리 ‘지성인 전도본부’의 설립자 프란시스 쉐이퍼박사를 찾아가 담화한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6주 동안의 여행 중 자주 민박했다.미국에서 사귄 친구와 소개받은 선교사 가정의 초대를 받아 귀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많은 신앙동 지들이 한국에 돌아가서 사역할 나를 후대해준 것이다. 예루살렘을 답사할 때에는 베들레헴 남쪽 바라카의 램비선교사 집에 오래동안 머물렀다.숙식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교통비도 마련해 준 램비선교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모교인 고려신학교 교수로 임명1961년 8월31일 7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공항에는 가족과 교우들이 마중나와 있었다.출국할 때 14개월이었던 딸이 초등학교 3학년생으로 내 앞에 섰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유학할 동안 친정살이를 해온 아내는 장남을 잃어버린 고통을 속으로 삭이느라 많이 수척해 있었다. 아내는 당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다고 한다.1950년대 한국 가정에서는 특별한 집에만 전화가 있 었다.그래서 7년동안 가족과 전화 한통화 못하고 지냈다.편지는 매주 한번 혹은 두번 써서 4백여통의 편지를 서로 주고 받았다. 장인은 목사사위를 보았으나 유교의 영향으로 교회는 나가시지 않았다.장인은 남편을 미국에 보내고 5년이고 6년이고 묵묵히 기도하 며 기다리는 딸이 그렇게 대견스러웠다고 말씀하셨다.유교적 덕목으로 보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인은 당시 사위가 딸을 버리고 미국에 정착해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도 하셨다고 한다.그런 가운데 사위가 돌아오자 장인은 너무나 기뻐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예배당에 가겠다.너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 내가 돌아온 다음주부터 장인은 교회에 나가게 됐고 기쁘게 지내시다 79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1961년 9월 학기부터 모교인 고려신 학교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강의를 한 학기 마친 뒤에는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의 합동교수회가 서울에서 모여 총회 결정에 따라 학교를 하나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서울 총회신학교를 본교로 하고 고려신학교를 총회신학교 부산분교로 만들었다. 나는 안용준 교수와 함께 서울에서 근무하게 됐다.가르치는 일 외에 학생처장의 보직을 맡아 학생들을 지도하며 5개의 기숙사 감독도 책임졌다.
총회의 분리로 고려신학교 복교. 그후 평생을 모교와 경북노회에서 봉사한 것에 보람 한국교회는 분열이 심했다.이런 가운데 승동측과 고신총회가 합동해 하나의 교회가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그러나 곧바로 불협 화음이 일기 시작했다.급기야 1962년 9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인사문제 등에 대한 견해차가 노골화됐다.이런 와중에 고 려신학교 설립자이며 전 이사장인 한상동목사가 전고려신학교 이사들의 동의를 얻어 그 해 10월17일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였다. 이는 폭탄선언이었으며 혁명적 사건이었다.나는 입장이 난처했으나 학기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책임을 감당하려고 노력했다.나는 고 려신학교 개교 때 입학해 고신에서 잔뼈가 굵었다.학교로부터 재정적 후원은 받지 못했으나 정신적 후원으로 미국 유학을 했고 고신 교회로부터 많은 기도의 빚을 지고 살아 왔다. 그래서 복교된 모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12월12일 총회신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박형룡교장에게 사표를 전달하고 부산으로 내 려왔다.12월17일부터 다른 두 분과 함께 고려신학교 교수로 재취임해 정년퇴임 때까지 모교에서 작은 봉사를 하게 된 것을 보람이라 고 생각한다. 사도시대에 안디옥교회가 선교의 중심지가 된 것처럼 대구 서문로교회가 경북지역의 첫 고신교회인 만큼 여러 면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서문로교회의 초대목사가 된 나에게 여러가지 책임이 돌아왔다.노회가 설립되기 전 경북지방회 때부터 나 에게 주어진 심부름을 감당해야 했다. 53년 5월 경북노회가 조직돼 나는 노회 서기로 봉사하게 됐다.당시 10명의 목사가 노회에 가입했는데 지금 경북노회 회원은 나 혼자 만 남아 있다.대구에 있을 때뿐 아니라 미국에 있을 때나,서울에 살 때나,그 후 부산에 살면서도 경북노회원으로 남았다. 나는 경북노회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경북노회원으로 생애를 마치기를 원한다.노회가 나를 공로목사로 추대해 준 것에 깊 이 감사드린다.
학생지도와 연구외에 교회의 여러 활동에 봉사. 그리고 96년 35년에 걸친 교단생활 마감. 장로교법을 따르면 목사의 교적은 개체교회가 아닌 노회에 있다.그러므로 노회는 목사의 교회다.또한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다. 신학교육을 하고 있는 나는 그래서 노회의 여러 일을 맡아 섬겼다.특히 67년 3월부터 3년,88년 10월부터 1년,모두 네차례 노회장을 역임했다.총회의 일도 맡게 됐다.52년 9월 고신총회의 전신인 총노회가 조직될 때 뜻밖에 회록서기에 피선됐다. 신학은 교회봉사를 위한 학문이란 뜻에서 틈나는대로 봉사했다.총회의 교육과정 심의위원장을 맡아 계단공과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섭 외위원장으로 외국교회와의 유대를 한층 강화했다. 여기에다 역사편찬위원장과 교단발전연구위원장으로 연이어 추대돼 교단역사를 정리해 출판하고 총회의 기구운영 및 규칙을 정비했다 .헌법개정위원장직도 맡아 헌법을 교리표준과 관리표준으로 정비하는데 일조했다. 69년 9월에는 43세의 나이로 부족한 내가 뜻하지 않게 총회장에 피선되어 심부름을 했다.신학교수가 연구에만 몰두해야 하나 직접목 회가 아닌 간접목회의 일환으로 봉사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됐다.나는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도구로 쓰심같이 사용해주 신 것을 황송하게 생각한다. 61년 9월 고려신학교 교수로 출발해 이 학교의 후신인 고려신학대학,고신대학,고신대학교에 계속 남아 학생들을 가르쳤다.세월은 유 수같이 빨리 흘렀다.교단에 몸담은지 35년만인 96년 8월말에 정년퇴임했다. 나의 전공이 성경신학이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 아람어를 토대로 구약과 신약의 여러 과목을 강의하고 학생들을 지도했다.교수를 시 작할 때 선배들의 그늘에서 조용히 연구하고 가르치고 글 쓰는 일에 주력하려 했으나 고려신학교 출신 첫 교수라는 것과 논문 쓴 박 사라는 희소가치 때문에 여러가지 일을 맡게 됐다. 그러나 학교 일이나 교회 일에 ‘내가 하겠다’고 나선 기억은 별로 없다.단지 맡기는 일에 순종했을 따름이다.
94년 총장으로 취임해 다시 봉사할 기회주신 주님께 감사.
64년 12월부터 1년간 윤번제 고려신학교 교장과 75년 4월부터 4년간 고려신학대학 학장을 역임했다.82년 5월에는 개명된 고신대학 학
장으로 임명됐으며 학교발전을 위해 2년 뒤 부산 사상구에 있는 국유지 35만평을 불하받았다.
이를 두고 이사회에 불협화음이 생긴데다 의학부장 영입 등의 인사문제까지 겹쳐 학교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나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학장직에서 물러나 눈물을 머금고 미국으로 떠났다.
5개월동안 학교를 떠나 있었던 것이 나의 교수생활 24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려학원 이사회는 91년 5월말에 다시 나를 고신대
학 학장으로 선출했다.명예회복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연구와 강의에 전념하기 위해 끝까지 학장직을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나 이사회의 강력한 권유로 94년 3월 총장에 취임해 학교에 마지막 봉사를 했다.교수생활 35년을 되돌아 볼때 능력이 모자라고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끝까지 붙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때 하나님께서 그 대신 양을 준비하셨다.이곳은 ‘여호와이레’라고 불리고 있다.나도 그같은 체험을 했다.
아내는 내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장남을 잃은 고통에서 헤어나기 힘들었으나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더 허락해 아내를 위로하셨다.그 아들이 이제는 내과 전문의가 되어 며느리와 함께 휴가 때마다 해외 의료선교 봉사를 하고 있다.얼
마나 감사한 일인가.
고신대 총장직을 퇴임하고 보니 부산 송도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 ‘어디로 거처를 옮길까’하고 찾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미리
부산 다대포에 아파트를 준비해 놓으셨다.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조급할 때가 많았으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이레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때마다 나를 놀라게 하신 하나님은 또 나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 놓았을까.몸은 늙어가지만 하나님 앞에선 더욱더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