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파문을 거둬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었던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만나줄 때까지 내복바람에 금식을 하며 3일을 버텼다. 이 카노사의 굴욕을 당하면서 하인리히 4세는 이날의 치욕을 훗날 반드시 갚겠다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의 파문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는 더 이상 훗날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참고 또 참았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이미 하인리히 4세에 대해 마음이 돌아선 그를 설득한 것은 성주 마틸데 백작부인과 클뤼니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후고였다. 황제의 신분을 떠나 성문 밖에서 추위에 떠는 신자를 자비의 교황이 내팽개쳤다는 오명을 덮어쓸 수 없었던 그레고리오 7세는 하는 수 없이 성문을 열게 하고 하인리히 4세를 만났다. 하인리히 4세는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구걸했으며 그레고리오 7세는 자신이 집전하는 미사에 하인리히 4세를 참석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파문을 거둬들였다.
이 ‘카노사의 굴욕’ 에 대한 후세 사가들의 평가는 분분하다. 카노사의 굴욕을 하인히리 4세의 패배로 보지 않고 승리로 보는 의견도 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아우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하여 하인리히 4세를 단번에 매장시켜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이없이 그의 파문을 취소함으로써 권력을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의견이 있기도 한 것이다. 한 순간의 치욕을 참아내고 훗날을 도모한 하인리히 4세의 인내와 정치적 판단에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실제로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이 취소된 후 독일로 돌아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보복할 힘을 길렀으며 끝내 그를 교황자리에서 몰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교황을 만나기 위해 추위 속에서 3일을 기다려 무릎을 꿇었다는 에피소드는 강력한 교황권의 상징으로서 충분히 빛을 발한다. 그것은 그레고리오 7세가 강직하고 청렴하여 황제의 권력에 대해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대장장이의 아들에서 로마교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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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7세의 출신이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북 이탈리아 소아나 출신으로 본명은 힐데브란트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 로마로 가서 친척 아저씨가 원장으로 있던 성 마리아 수도원 들어갔다. 추측해보건대, 유럽 중세 시기 귀족이 아닌 계급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성직자가 되는 길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길이 아니었나 한다. 그는 수도원의 수사가 되어, 라테란 궁에 있는 음악학교 스콜라 칸토룸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스콜라 칸토름에서 그는 첫 번째 성공의 동아줄을 쥐게 된다. 그를 가르치고 아끼던 스승 조반니 그라지아노가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되어 그를 보좌관으로 삼은 것이다. 그레고리오 6세는 중세 독일의 최강의 지배자로 불리며 로마교황의 자리를 쥐락펴락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교황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때 힐데브란트는 폐위되어 독일로 유배되어 가는 그레고리오 6세를 따라갔다.
힐데브란트의 두 번째 성공의 열쇠는 클뤼니 수도원의 일원으로 교회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은 프랑스 부르고뉴주 손에루아르 데파르트망의 클뤼니 지방에 있는 수도원이었다. 910년 아키텐공 기욤이 성베드로와 성바울로를 수호성인으로 하고 로마교황 이외의 다른 세속의 봉건 제후가 간섭하지 않는 독립한 수도원을 세운 데서 시작하였다. 세속 제후들의 입김에서 자유로웠던 클뤼니 수도원은 ‘클뤼니의 개혁’으로 불리는 수도원 개혁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이 운동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클뤼니 개혁의 중심은 봉건제후 등 세속적 간섭을 물리친 독립적인 수도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세속적 지역영주와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성직의 매매와 처자식을 거느린 수도사 등은 개혁의 대상이었다. 청빈한 수도회 운동은 많은 제후들에게 동의를 얻었으며 특히 로마 교황을 완전히 장악했던 하인리히 3세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하인리히 3세는 힐데브란트의 적극적인 개혁운동을 눈여겨보았으며 그의 손에 의해 교황자리에 오른 레오 9세는 힐데브란트를 로마로 불러들여 교회개혁운동을 맡겼다.
강직하고 완고한 성격의 힐데브란트에게 교회개혁운동은 안성맞춤이었다. 로마 개혁단체의 주요 구성원이 된 힐데브란트는 교황 알렉산드르 2세의 재임기간 중에 막후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횡포를 부리는 하급귀족들을 통제하여 로마지역 민중들에게 인기를 끌었으며 성 바로오 수도원을 개혁하고 교황을 대신하여 교회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힐데브란트의 눈부신 활약은 곧이어 그에게 교황의 자리를 약속했다. 힐데브란트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알렉산드르 2세에 이어 그레고리오 7세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회의 대개혁과 서임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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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레고리오 7세는 곧이어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신의 대리인 교황이 세속권력인 황제나 왕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선포하였으며 분열된 교회를 통일하고, 이를 위해서 성직자의 규율을 확립하여 세속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그는 개혁의 의지를 담은 27개조의 교황령을 내렸는데 그 주요 내용은 성직매매 금지, 사제의 결혼금지. 속인의 주교 서임권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속인의 주교 서임권이었다.
속인이라 함은 교회조직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일반신도인데, 황제도 교회조직 밖의 사람으로 신자 신분으로 따지자면 평신도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왕과 황제의 권력에 의탁하여 세력을 확장해온 교회는 각국의 교회를 주관하는 주교의 서임권을 해당국가의 왕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서임권이란 주교를 임명하거나 사임시킬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서임권이 왕에게 있다 보니 주교후보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은 교황보다는 왕에게 더 의지 했으며 왕의 권력 하에 있었다. 이것은 로마 교황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왕보다 미미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교황의 휘하에 주교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이는 일이 어려움을 뜻했다. 주교들은 교황의 말보다는 왕들의 구미에 맞게 행동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이것이 교회의 타락과 혼란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서임권을 교황이 가져옴으로써 유럽 전지역 교회를 개혁하고 교황권을 확립시키려는 그레고리오 7세의 의도는 왕들의 교회에 대한 권력을 축소내지는 박탈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하인리히 3세 시절 교황을 완전히 장악했던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교황의 이런 선언은 황제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전시대의 강력한 황제권에 대한 동경이 있던 하인리히 4세에게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은 있을 수 없는 반역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황제와 교황의 서임권을 둔 분쟁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이 이긴 것으로 일단락 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인리히 4세는 끝내 그레고리오 7세에게 굴복할 수 없었고 분쟁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하인히리4세의 역습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09%2F12%2F11%2F15%2F17.jpg) 교황의 파문 취소 조치로 위기를 모면한 하인리히 4세는 독일로 돌아가 지지세력을 다시금 확보하고 반역을 꾀했던 귀족들을 응징했다. 그레고리오 7세의 너무 강력한 개혁 조치에 반감을 품은 성직자들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 맞설 든든한 세력을 모아 카노사의 굴욕 3년 후 군사를 거느리고 로마로 쳐들어왔다. 원래 로마 교황청은 강력한 군대를 가진 기관이 아니다. 교황이 다스리는 영토는 왕들의 호의에 의해서 헌납된 것이었고 교황 보호는 왕들의 의무였다. 그런데 그 의무를 지켜야 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공격은 교황을 당황하게 했다.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과 하인리히 4세의 지지 세력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