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이 관객수 1600만명을 돌파, 이 분야 신기록을 수립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흥행 이유로 세월호 사건 이후 올바른 리더십에 대한 국민들의 갈증을 들고 있다. 세월호 사건 이후 대통령, 정부,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에 실망한 국민들이 ‘완벽한 리더십’의 표상인 이순신에게 열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1600만 명이 보았다는 <명량>은 아직 안 보았다. 하지만 새삼 이순신에 대해 살펴보고 싶어서 <난중일기>(송찬섭 편역, 서해문집 펴냄)를 손에 잡았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노산 이은상 선생의 <성웅 이순신>을 읽은 적이 있었고, 나이 들어서도 몇 번 아산 현충사를 찾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오랫동안 잊고 지낸 존재였다. 그 불후의 업적, 그 애국애민의 정신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성웅(聖雄)’이라는 타이틀이 나를 이순신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성웅’이라니....‘성인’이자 ‘영웅’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다가 오래간만에 다시 이순신과 만나고 싶어진 것이다.
<난중일기>는 참 드라이(dry)한 기록이다. 하드보일드라고나 할까. 공무를 보았다, 활쏘기를 하였다, 근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휘하 장수의 볼기를 쳤다, 부하 장수들과 술을 마셨다, 아무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몸이 아팠다......책 대부분이 이런 얘기의 연속이다. 한산대첩이나 명량대첩 같이 역사에 큰 글씨로 기록된 날의 이야기도 드라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뜨거웠다. 그것은 이 책이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이 노심초사했던 기록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는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라는 휘호를 남긴 바 있거니와, <난중일기>의 내용을 여덟 자로 줄인다면 ‘국가안위 노심초사’가 될 것이다.
<밤에 달빛이 배에 가득한데 혼자 앉아 뒤척뒤척하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쳐서 자리에 들었으나 잘 수 없었다. 닭이 울 즈음에야 얕은 잠이 들었다.>(1593.5.13.)
<밤기운이 매우 서늘하여 자리에 누웠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잠시도 풀리지 않았다. 혼자 배를 덮는 뜸 밑에 앉으니 가슴 속의 생각이 만 가래나 되었다.> (1593.7.1.)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에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 하였다.> (1594.5.9.)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1595.7.1.)
<밤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 한 점 없는데, 혼자 뱃전에 앉으니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뒤척거리며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다.>(1597.10.13.)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1597.8.12.)
<난중일기>에는 이런 우국(憂國)의 기록이 끝없이 되풀이 된다. 요즘 같아서는 그 마음의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이나마 이해가 간다. 나 같은 범부(凡夫)도 자다가 깨어난 후 나라 돌아가는 데 생각이 미치면 뜬 눈으로 밤을 새는데, 휘하 장병과 백성들의 안녕, 더 나아가 이 나라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이로써 어찌 마음이 편했을까?
이순신은 일기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고 했지만, 결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전쟁을 준비했고, 전쟁 중에도 군사와 백성들을 먹여 살릴 궁리를 했다. 전투가 없을 때에는 휘하 장수들을 불러 들여 함께 술을 마시고, 활쏘기를 했으며, 군사에 관한 일을 논의했다. 이순신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그를 기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라 걱정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에 ‘이순신’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휘하 장수들과 술을 마신 기록은 무척이나 많이 나온다. 어느 때는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술을 마신 적도 있다. 낮술을 마신 적도 많고, ‘크게 취했다’고 기록한 날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전쟁 중에, 요새로 치면 해군작전사령관쯤 되는 분이 이렇게 술에 절어서 살아도 되나?’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이순신이 함께 술을 마신 상대는 휘하 장수들이었고, 술 마신 기록 앞뒤로는 활쏘기를 했다거나 군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들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술’은 휘하 장수들과의 ‘소통’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규율을 위반한 휘하 장수를 처벌한 다음날, 그를 위로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데리고 있던 종이 병에 걸리거나 목수가 목재더미에 깔려 부상을 당했다고 걱정하는 모습도 나온다. 반면에 군율을 어기거나, 탈영하거나, 백성들에게 해를 입힌 자들을 가차 없이 목을 베도록 하는 장면도 적지 않게 나온다.
불패의 이순신 함대에서도 불미스러운 일들은 많았다. 휘하의 충청수사가 부임 첫 날 군함에 불이 나는 바람에 배를 태워먹고 140여명의 사망자를 낸 후 자살하는가 하면, 무기고나 관아에 화재가 발생해 화포 등 군기(軍器)와 건물이 소실되기도 한다. 격군(노잡이)들이 무더기로 탈영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만일 말단 소총부대에서 일어난 일로 참모총장이나 장관에게 책임을 묻는 요새 풍조대로라면, 천하의 이순신도 벼텨 낼 재간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난중일기>에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 그대로 나온다. 잠 못 이루고, 식은땀을 흘려대고, 토사곽란으로 죽다 살아나고, 숙취 다음날 하루 종일 힘들어하는 모습은 참 남의 얘기 같지 않다. 피난 온 어머니가 평안하다는 소식에 기뻐하고, 어머니에 관한 소식이 조금만 끊기면 걱정하는 모습 또한 가슴에 와 닿았다. 통제사 자리에서 쫓겨나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통곡하는 대목, 그리고 아들 면이 고향 아산을 침범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오열하는 대목은 읽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난중일기>가 전반적으로 무미건조하기 때문에 이 대목들은 더욱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자신과 뜻이 안 맞는 원균을 욕한다. 반면에 자기를 지지해주는 영의정 유성룡를 높이 평가하고, 그와 꿈속에서 만나 나랏일을 걱정했던 일도 기록해 놓는다. 이런 대목들 역시 무척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난중일기>에는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는 대목들도 곧잘 있다. 제사에 대한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역대 임금이나 왕비의 제삿날에는 공무를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또 이순신은 아버지나 조부모, 외할머니 등의 제삿날에도 공무를 보지 않았다. 휘하 장수(수령)들이 집안 제사를 이유로 휴가를 냈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나온다. ‘이렇게 나라 제삿날이라고 쉬고, 집안 제삿날이라고 쉬면, 도대체 일은 언제하고, 전쟁은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것이 효(孝)이고, 공무나 국사보다 우선하는 사회가 조선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이순신은 추앙의 대상이었지만, 박정희 정권 시대에 이르러 이순신은 ‘성웅’으로 거의 신격화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순신을 그렇게 추앙했던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의도’를 비판한다. 이 책의 편역자 역시 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선양을 ‘정권 강화와 유지에 이용’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의 ‘절대고독’에 마음에서부터 공감했을 것이다. 이순신이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오자 좋아하는 모습은, 1960년대 중반 오랜 가뭄에 애태우던 박정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거의 혼자의 힘으로 전쟁에 대비해야 했던 이순신의 모습에서 박정희는 외로이 조국근대화 혁명에 나선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을 것이다. 아마 박정희는 진심으로 이순신을 친애했을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난중일기> 번역본 중에서 비교적 읽기 쉽고, 현대적으로 편집되어 있는 책이다. 등장인물이나 벼슬 이름, 지리 등에 대해 책 옆에 친절하게 각주를 달아놓았다. <난중일기>에는 주요 전투 등과 관련해서 비어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그런 부분들은 이순신이 올린 장계(보고서) 등을 통해 보충해 놓은 것도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