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에 젖은 호반길에도 꽃은 피어나는데
--옥천 추소리의 부소담악
잠깐 햇살이 비치는 산천은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근 한 달 동안 계속되는 장마에 날씨마저 후덥지근한데 이런 날 햇살 깔린 길을 따라 충북 옥천의 추소리로 향한다. 그러나 막상 추소리에 도착하니 대청호의 풍광이 많이 훼손되었다. 근 한 달 동안 계속되는 장맛비가 대청호의 비경을 한꺼번에 앗아가 버린 탓이다.
화사한 꽃이 한들거릴 호반에는 홍수에 떠밀려온 쓰레기가 몰려있고 뿌연 수면위로는 부유물들이 자유자재로 떠다닌다.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병풍바위는 수면에서 몇 미터 높이로 물이 찬 흔적이 선명하게 보이고 길섶의 풀들은 황톳물에 부대낀 흔적이 역력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2DEF394E2E60BC04)
옥천 추소리 대청호의 풍경
![](https://t1.daumcdn.net/cfile/cafe/1326FD364E2E614907)
모터보트를 탄채 한가함을 달래고 있는 사람들
추소리의 비경에 반해 소금강이라고 예찬가를 불렀던 우암 송시열이 다시 살아나 이 광경을 본다면 얼마나 실망할까. 조선시대 학자 율곡의 “청학산기”에서 빼어난 산세가 마치 금강산의 축소판 같다고 하여 불렀던 소금강, 지금 이대로의 광경은 소금강은 고사하고 난지도처럼 쓰레기 더미에 묻혀 신음하는 호수로 묘사되기 십상이다. 어찌 이 대청호만 그럴까,
전국의 강이라면 지금쯤 상류에서 떠밀려온 쓰레기 더미로 몸살을 앓아 통곡을 하며 흘러내려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그러나 계속된 장마에도 부소담악은 그 형체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추소 8경중의 하나인 부소담악은 '부소무니 앞 물 위에 떠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대청호반 위로 수백 미터 정도 용꼬리처럼 길게 펼쳐진 산 능선을 말한다. 수몰되기 직전의 추소리는 무소무니, 추동, 절골 등 세 개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자연마을이었다. 그 가운데서 부소무니는 고리산(환산)밑에 “연화부소형” 명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능선 아래에는 기암절벽인 병풍바위가 늘어서 있고 병풍바위를 따라 느릿느릿 굽이치는 S자형 물길이 부소담악을 더 빼어난 풍광으로 받쳐주었다. 부소담악에는 추소정이라고 이름 붙은 산뜻한 정자 한 채가 서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4A45354E2E612E2D)
부소담악 입구에 산뜻하게 지어놓은 식당
![](https://t1.daumcdn.net/cfile/cafe/144E7D354E2E612F24)
물살을 가르며 쏜살같이 달아나는 모터보트들
폭이 좁은 부소담악의 산 능선 길은 산행을 하기에 위험하다. 날카롭게 허공을 찌르는 칼바위들과 그 바위에 용트림하듯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의 위용이 호수를 가려주지만 어쩌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깎아지른 천 길 벼랑이 가슴을 움찔하게 만든다. 벼랑에는 노란빛으로 물든 산나리꽃과 유연한 줄기로 허공을 휘저으며 보라색 꽃망울을 터뜨린 메꽃이 하늘거리고 있다. 호수를 배경삼아 화사한 꽃물을 들인 꽃들이 가슴이 시릴 만큼 곱고 청초하다. 벼랑아래 호수에는 모터보트 한척이 한가롭게 떠 있다. 마치 달빛을 벗 삼아 호수를 유랑하는 배처럼 유유자적함이 묻어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6DEA374E2E617736)
다발로 핀 국화 속에서 문득 가을냄새가 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0213374E2E61780E)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세 여인네들
잠시 추소정에 올라 호수를 내려다본다. 바람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대청호반이 눈속을 시원하게 하고 멀리 아른거리는 산자락에는 울긋불긋한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그림 같은 모습을 자랑한다.
풍랑이 이는 호수를 내려다보니 문득 흘러간 세월이 꿈처럼 다가온다. 수몰되기 직전의 호수 밑바닥에는 추동과 부소무니 마을이 평화로운 들을 품에 않고 햇살에 졸고 있었을 게다. 낮과 밤이면 뻐꾸기와 소쩍새가 번갈아 울던 마을, 총각이 소를 몰고 한가롭게 들길을 오가던 마을, 처녀들이 시집을 가면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풍악을 울리며 한나절을 보냈을 마을, 그런데 수몰되면서 마을의 꿈과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4F2D354E2E62FC25)
질주하는 모터보트
그 바람에 추소8경중의 하나인 제 5경의 “안양한종”과 제6경의 “문필야적”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절골의 안양사에서 청승맞게 울려 퍼지던 저녁 종소리는 어디로 갔는가. 초동들이 문필봉에 올라 구슬프게 불던 피리소리는 어디로 갔는가. 수몰의 이면에는 이처럼 가슴 아픈 사연들이 숨 쉬고 있다. 개발은 생활을 편리하게 하지만 대신 아름답고 순박한 옛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산 능선길을 조금 타고 돌아와 추소정 밑에서 도시락을 풀어 놓는다. 일행이 점심을 먹는 동안 2층 마루 바닥위로 사람들이 쿵쾅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성가시게 들려오고 흙빛 구름장이 떠돌던 하늘은 기어코 한바탕 소나기를 내려 쏟는다. 알밤 같은 빗줄기들이 내리꽂히는 수면은 금세 뿌연 물안개가 일어난다. 마음자락마저 소나기에 젖으며 점심을 먹는 이 시간이 안온하다.
점심 후에 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대청호의 수면이 맑고 깨끗하게 변해있었다. 수면위로 떠돌던 부유물들이 물결을 따라 가장자리로 밀려 온 탓이다. 맑은 수면 위를 모터보트 두 척이 사이좋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미끄러지듯 달려간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11C3334E2E61B332)
수정가든 앞 정원에 피어있는 산나리꽃
![](https://t1.daumcdn.net/cfile/cafe/1819D9334E2E61B335)
호수를 배경으로 서있는 길가의 등이 꽃들과 어울려 풍경을 만든다
시간을 보니 2시경, 헤어질 시간이 너무 이른 탓에 세심원 앞길을 따라 대청호를 끼고 도는 호반길을 천천히 걸었다.
호반길에서 바라다보는 대청호의 풍광이 아름답다. 호수 한가운데에 길게 목을 뽑고 두런거리는 황새들과 낚시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 강태공들, 햇살에 반짝이는 물살을 헤치며 쏜살같이 내빼는 모터보트들, 이 모든 것들이 대청호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소품들이다.
호반길을 따라 가면 이평리가 나오고 꽃향기에 묻힌 수정가든이 나타난다. 수정가든 못 미쳐 “고리산 보현사”라고 이름을 새긴 화강암 표지석과 만난다. 맑은 계곡물이 세차게 흐르는 계곡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비탈에 위험스레 발을 걸친 대웅전과 산신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뜻하게 단청을 한 보현사는 절 같지 않는 분위기다. 작은 폭포를 배경으로 아기자기 깎아 만든 불상이 단조롭게 서있고 아직도 마무리 되지 않는 공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절은 보현사의 주지인 보광스님이 혼자 불사를 했지요, 보광스님은 아주 신통한 능력을 가졌어요, 뇌졸중이나 암 환자들을 많이 고쳐 주었지요”
봉고차를 끌고 온 수정가든 주인이 자랑삼아 내뱉은 말이다. 수정가든 주인은 보나마나 보현사의 불자가 틀림없다. 뇌졸중과 암환자를 신통하게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보광스님을 치켜세우는 것을 보면 말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323F384E2E61E134)
수정가든 주인의 안내로 텃밭에서 방울토마토를 수확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39F5384E2E61E220)
낚시질을 하고 있는 청춘 남녀
그러나 그 말이 도리어 왜 나에게는 사기성이 농후한 말로 들릴까. 그런 능력이 있다는 핑계로 성직의 탈을 쓰고 불쌍한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거나 한 가정을 풍비박산내는 사기꾼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와의 인연으로 일행은 수정가든에서 간식을 먹었다. 호반길가에 위치한 수정가든은 각양각색의 꽃들이 하늘거리는 곱고 단출한 식당이다. 감자를 굽는 연기가 허공을 휘젖는 모습이 정겹고 비늘처럼 반짝이는 호수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 평상이 시원해서 좋다.
준비한 간식이 나올 시간 일행은 수정가든 주인의 안내로 인근에 있는 텃밭에서 방울토마토를 따 먹었다. 텃밭은 길길이 날뛰는 잡풀에 치여 묵정밭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방울토마토는 탱탱하게 물이 올라 반질반질한 윤기를 내뿜고 있다. 그 지겨운 장마통에도 토마토는 오롯이 단물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아직도 수정가든의 뒷곁에서는 감자 굽는 연기가 하늘을 휘감아 오르고 있다. 맘 좋은 주인이 일행에게 특별히 대접할 음식이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4F37354E2E62B627)
포즈를 취한 일행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5A4E354E2E62B712)
보현사 산자락에 놓여있는 단지들
동동주와 지짐을 먹으며 오순도순 대화에 파묻히는 중에도 호반길로 소방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달려간다. 호수에서 낚시질 하던 사람이 물에 빠진 것 같다며 수정가든 주인이 알려준다. 장마가 끝났어도 한시도 맘 놓을 수 없는 계절이 바로 이 피서철이다.
수정가든을 지나 길모퉁이를 돌아가면 수생식물원이 있는 방아실마을이 나타난다. 방아실이란 “꽃처럼 예쁜 언덕위의 마을”이란 뜻이다. 그 이름에서 풍기는 어감만치 방아실마을은 상상만 해도 그 풍광이 꽤나 수려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전 둘레길 11구간으로 이 길이 지정된 것만 해도 그 빼어난 풍광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수수가 익어 고개 숙이고 꽁지에 빨간 불을 매단 고추잠자리가 폭죽을 터뜨리는 가을에 이 길을 타고 가면 얼마나 멋들어질까. 푸른물빛이 휘감아 도는 호수의 깊은 가슴속에 화첩처럼 숨은 산자락을 끼고 도는 산길, 어쩌다가 게으름을 피워내는 산꿩의 구성진 울음을 듣거나 숨어서 곡식의 낟알을 까고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허공으로 후루룩 날개를 터는 산새들의 놀란 가슴이 얼마나 우리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가.